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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노턴 Ken Nort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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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aa9872,#8c7a55> 본명 |
케네스 하워드 노턴 시니어 Kenneth Howard Norton Sr. |
출생 | 1943년 8월 9일 |
미국 일리노이주 잭슨빌 | |
사망 | 2013년 9월 18일 (향년 70세) |
미국 네바다주 헨더슨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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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전적 |
50전 42승(33KO) 7패(4KO) 1무 |
신장/리치 | 191cm / 203cm |
체급 | 헤비급 |
스탠스 | 오서독스 |
링네임 | The Black Hercul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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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와의 트릴로지로도 유명하다.2. 전적
- 무승부: 스캇 르두
3. 커리어
1943년 8월 9일, 일리노이주 잭슨빌에서 태어났다. 잭슨빌 고등학교를 다니며 야구, 농구, 미식축구, 육상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주 챔피언십 풋볼 팀의 일원이었는데, 시니어 때 수비 부문에서 올스테이트 팀에 선정되었다. 노턴의 육상 코치는 정기적으로 그를 8개 종목에 출전시켰는데, 1961년 봄에 디케이터 아이젠하워 선수단과의 경기에서 6개 종목에서 우승하고 다른 두 종목에서 2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상대 코치의 격렬한 항의로 일리노이 고등학교 협회는 선수의 최대 3개 육상 종목 참가를 제한하는 "켄 노턴 규칙"을 채택하게 되었다.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식축구 장학금을 받고 북미주리 주립대학교(현 트루먼 주립대학교)에 진학하여 초등교육과를 전공했다. 1학년 때 어깨 부상으로 미식축구에서 활약하지 못했고, 2학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깨 부상으로 고생하면서 미식축구를 그만두었다. 이후 대학은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판단해 자퇴를 결정했고, 1963년에 미국 해병대에 입대했다.[1]
이 과정에서 복싱을 접했고, 해병대 내의 복싱 리그에서 24승 2패를 기록하며 올마린 헤비급 타이틀을 3차례 석권했다. 이후 1967년 팬아메리칸 게임의 미국 선발전에서 우승했지만, 다른 헤비급 선수가 미국대표로 선발되었다. 이유는 아치 무어를 연상시키는 크로스암 가드를 포함한 노턴의 파이팅 스타일이 "국제적"이지 않아서였다는데, 노턴은 그 말을 듣고 아마추어 경력을 끝내며 1967년 후반에 프로로 전향했다.
데뷔 후 16연승을 거두고 호세 루이스 가르시아에게 8라운드 KO패를 당했으나, 이후 13연승을 거뒀다. 프로 경력 첫 패배를 당한 후 노턴은 최면술사인 마이클 딘 박사를 만나기 시작했고, 딘 박사는 노턴에게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될 책인 나폴레온 힐의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를 선물했다. 이 책은 "모든 동기 부여 문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데, 노턴은 "훈련을 받는 동안 그 책을 100번은 읽었고, 그 덕분에 더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2]
1973년 NABF타이틀을 걸고 무하마드 알리와 맞붙었다. 5:1의 언더독이었던 노턴은 알리의 턱을 부러뜨리며 스플릿 판정승을 거두는 이변을 일으켰지만, 6개월 후 알리와의 2차전에선 스플릿 판정패했다. 1974년 WBA, WBC, The Ring 타이틀을 걸고 조지 포먼과 맞붙었으나 2라운드 TKO패했다.
1975년 베테랑 복서 제리 쿼리를 5라운드 만에 꺾으며 NABF 헤비급 타이틀을 되찾았고, 다음 경기에서 1970년 호세 루이스 가르시아에게 당한 패배를 5라운드 KO승으로 설욕했다.
1976년에 3연승을 거두었는데, 페드로 로벨과 론 스탠더를 모두 5라운드에, 래리 미들턴을 10라운드에 쓰러뜨렸다.
이후 연승을 거두고 알리와 3개의 타이틀을 두고 타이틀전을 치렀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15라운드 만장일치 판정패를 당했다.[3]
1977년 노턴은 무패의 듀안 보빅을 상대로 1라운드 만에 TKO승을 하였고, WBC 타이틀 도전권을 건 시합에서 지미 영을 상대로 15라운드 스플릿 판정승을 하였다. 이 승리로 노턴은 다가올 알리와 레온 스핑크스의 경기의 승자와 맞붙을 의무 도전자가 되었다. 스핑크스가 알리를 물리치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했지만, 스핑크스는 노턴을 상대로 첫 방어전을 치르지 않고 알리와 바로 재경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WBC는 스핑크스의 타이틀을 박탈하고 영을 상대로 한 승리에 힘입어 노턴을 정식 챔피언으로 승격했다.
노턴은 1978년 6월 9일, 래리 홈즈를 상대로 WBC 타이틀 방어전을 치렀지만, 15라운드 스플릿 판정패했다. 이 패배로 노턴은 세계 타이틀전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유일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4]
1979년 노턴은 홈즈를 상대로 WBC 타이틀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어니 셰이버스와 경기를 치렀지만, 무기력하게 1라운드 만에 KO패를 당하였다. 다음 경기 상대로 스콧 르두와 맞붙었지만, 10라운드 무승부를 기록했다. 노턴은 7라운드까지 경기를 주도하고 있었지만, 르두의 엄지 손가락에 눈을 찔린 후 후반에 힘이 빠지고 마지막 라운드에 두 번이나 다운을 당했다.
노턴은 르두와의 경기 이후 은퇴를 발표했지만, 1980년에 복귀하여 당시 무패였던 랜달 콥을 10라운드 스플릿 판정승으로 물리쳤다. 그 다음 해에 WBA, WBC 헤비급 랭킹 1위였던 게리 쿠니와의 경기에서 쿠니에게 무자비하게 KO당하며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노턴은 권투에서 은퇴한 후 배우활동과 더불어 TV 해설자로도 활동했다. 또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스피커스 뷰로의 회원이었으며, Ken Norton Management Co.를 설립해 계약 협상에서 선수들을 대표하였다.
그러나 1986년 2월 23일 밤, 노턴의 차가 로스앤젤레스의 산타모니카 고속도로로 가는 버몬트 진입로에서 추락하였다. 노턴은 두개골, 턱, 다리가 골절되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수사관은 약물이나 알코올이 관련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한동안 다른 차가 그의 진입로에서 밀려났다는 추측도 있었지만, 목격자가 없었고 그에 대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노턴은 사고 이후 말이 어눌해지면서 그전까지 하던 방송활동도 접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의사는 노턴이 다시 걸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노턴은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잃지 않으며 긍정적인 생각을 고집했다.
노턴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수많은 건강 문제를 겪었다. 전립선암, 심장마비, 사중 우회수술을 받았으며, 뇌졸중을 두 번 겪었다.
2013년 9월 18일에 울혈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70세였다.
4. 파이팅 스타일
늦게 복싱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신체능력과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다. 아웃파이팅과 압박 양쪽 모두 잘했고, 긴 리치에서 뻗어나오는 잽 또한 일품이었다. 자신의 앞방향 즉 왼쪽으로 서클하며 잽을 찌르는 데 상당히 능했으며, 아웃파이팅 시에 잽으로 거리를 확보하면 원투, 더킹 이후 후속 훅연타를 날리는 패턴이였다.압박 시에 잽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크로스암 가드로 상대의 공격을 흡수하고 카운터를 날리거나 링 구석으로 압박을 가했다.[5] 상대를 몰아넣는 데 성공하면 강력한 오른손 오버핸드를 상대에게 날려 큰 데미지를 입혔다. 한방도 강하고 스피드도 꽤 빨랐다.
단점은 반댓쪽으로 서클하거나 크로스암 가드로 커버하기 힘든 곳, 즉 상대의 리드훅이 들어오는 궤적에서 방어가 취약한 면이 있어 포먼, 셰이버스, 쿠니와 같은 리드훅이 강한 슬러거들에게 리드훅을 허용하며 패배했다.
5. 여담
노턴은 알리와의 1차전에서 이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로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를 읽은 덕분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동기부여 작가 나폴레온 힐의 저술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는데, 심지어 1973년에는 "나폴레온 힐 재단상"을 수상하기까지 하였다.영화 록키에서 아폴로 크리드 역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ABC의 스포츠 경연 프로그램인 '슈퍼스타즈'에 참여하기 위해 출연을 취소했다.
1985년 ESPN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복싱을 택하지 않았다면 경찰관이나 체육교사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2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998년 링매거진 홀리데이 이슈에서 노턴을 역대 최고의 헤비급 선수 22위로 선정했다.
2000년에 노턴의 자서전인 'Going the Distance: The Ken Norton Story'가 출판되었다. 노턴은 2009년에 또 다른 책인 'Believe: Journey from Jacksonville'을 출판했는데, 이는 자동차 사고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이후의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슬하에 5자녀가 있었다. 장남인 켄 노턴 주니어는 내셔널 풋볼 리그의 스타 라인배커가 되었고, 댈러스 카우보이에서 두 번, 샌프란시스코 49ers에서 한 번 슈퍼볼에서 우승했다. 2014년에는 시애틀 시호크스의 라인배커 코치로서 또 다른 슈퍼볼 링을 차지했다.
로스앤젤레스 센티넬,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및 웨스트 코스트 아버지의 날 위원회로부터 "올해의 아버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
노턴은 "해병대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믿는다"고 말했고, 또한 스포츠가 아니라 학업을 최우선시해야 하며 젊은이들에게 교육을 먼저 받으라는 조언도 하였다.
[2]
노턴은 나폴레온 힐이 제공하는 부와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에 대한 전체 강의를 수강하기도 했다.
[3]
1998년 '복싱 먼슬리' 1월호에서는 알리와 노턴의 3차전을 권투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타이틀전 판정 5위에 선정했다.
[4]
링매거진은 1996년 홀리데이 이슈에서 이 경기를 역대 최고의 타이틀 경기 100선 중 23위로 꼽았고, IBRO의 회원이었던 몬테 D. 콕스는 이 경기를 역대 최고의 헤비급 경기 10위에 선정했다. 링매거진은 1998년 9월에 이 경기의 마지막 라운드를 "역대 최고의 마무리 12선" 중 하나로 꼽았고, 2001년 3월에는 마지막 라운드를 권투 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한 라운드 12선 중 7위로 꼽았다.
[5]
포먼의 크로스암 가드와 차이점은 풋워크와 헤드무브먼트를 섞어줬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