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5 19:00:43

제갈량의 남중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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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Zhuge Liang's Southern Campaign.png

1. 개요2. 배경 및 결말
2.1. 단점
3. 기타 창작물

1. 개요

제갈량의 남중 정벌은 225년 제갈량 유비 사후 익주 남부의 반란을 평정한 사건을 말한다.

2. 배경 및 결말

손권은 자신에게 복종한 교주 사섭을 사주하여 익주 남부의 호족 옹개 등을 포섭하게 했다. 이에 옹개는 장예를 포박해 오나라로 보내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월수군의 이민족 고정도 초황을 살해한 후 옹개에게 동조했고, 장가 태수 주포도 종사 상방을 죽인 뒤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남만의 호족 맹획을 끌어들였다.

이회가 기만책으로 남중에서 옹개를 격파하고, 반란군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고정이 부하를 시켜 옹개를 살해하였다. 장가군을 차지한 주포 역시 마충에게 토벌되었다. 제갈량은 익주益州군을 정벌하고, 맹획을 감화시켜[1] 월수군을 제외한 남만 일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익주군을 건녕建寧군으로 삼고 이회를 태수로 삼았으며, 치소를 미味현으로 이전했다. 건녕, 월수越巂군을 나누어 운남云南군을 설치하고 여개를 태수로 삼았으며, 건녕, 장가牂柯군을 나누어 흥고군을 설치했다. 제갈량은 직접지배를 포기하고 관료를 두지 않았으며 군을 철수시키며 원정이 마무리되었다. 군이 철수한 후 운남군에서 곧바로 반란이 일어나 여개가 사망하였다. 이 반란은 이회에 의해 진압되었다.

제갈량은 남중 정벌을 통해 청강 1만여 가구를 촉으로 이주시켜 무당비군(無當飛軍)이라는 부대로 편성하였으며, 남중의 귀금속과 소, 말등의 자원을 얻어 북벌의 군수물자로 사용하는 등의 단기적 성과를 얻었다.

2.1. 단점

여개를 운남태수(雲南太守)로 임명하고 양천정후(陽遷亭侯)로 봉했다. 마침 여개는 반란을 일으킨 만족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아들 여상(呂祥)이 후사를 잇게 되었다.
『삼국지』 「여개전」
이후에 군대가 돌아오자, 남방의 만족은 또 반란을 일으키고 수비하던 대장을 살해했다. 이회는 직접 토벌에 나서 흉악한 행동을 한 무리들을 근절시키고, 그곳의 유력자들을 성도로 이주시키고, 수(叟)와 복(濮)땅에서 밭가는 소, 군마, 금은, 무소 가죽을 공물로 납입하도록 하여 지속적으로 군용 물자를 충당했으므로 당시 비용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삼국지』 「이회전」
이전에 월수군(越嶲郡)에서는 승상 제갈량이 고정(高定)을 토벌한 뒤 수이(叟夷)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태수 공록(龔祿)과 초황(焦璜)을 죽였다. 이때부터 태수는 감히 군으로 가지 못하고 군으로부터 800여 리(320km) 떨어진 안상현(安上縣)에 머물렀으므로 그 군은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삼국지』 「장억전」
남방은 먼 곳의 만족이 거주하는 땅으로 평상시 조정을 위해 세금을 바친 일이 없고, 오히려 여러 번 모반을 하였는데, 승상 제갈량이 남정하여 군대의 위력으로 그들을 핍박하자, 그들은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귀순했습니다. 이 이후로 그들은 조정에 세금을 납부하였고, 그것을 취해 군사비용으로 제공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원수가 되어 국가를 해롭게 하는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지금 조정이 곤경에 처해 급박한 상황이므로 그곳으로 가서 의지하려고 하는데, 아마 반드시 또 모반할 것입니다.
『삼국지』 「초주전」

이후 제갈량이 남중에서 군대가 회군하자 다시 반란이 빈번히 발생했고, 촉에서 파견한 지방관 다수가 살해당하며 통제력이 저하되었다.

외지 세력인 촉이 남중에 대한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동시기 오에서 계속 이반하려는 교주 등의 지방세력에 계속 군사력을 투입한 것처럼 지역에 군사적 거점을 세우고 일관적인 행정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려는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반란의 주요 거점인 월수군은 주범인 옹개만 처리하고 정복에 시도조차 안하고 정복한 지역에도 안정화가 되기 전 군대를 바로 철수시켰다. 그 결과 현지 협력자 여개가 철수 직후 살해당하고 남중과 촉을 잇는 지역인 월수군은 독립 상태를 유지하여, 제갈량 대에는 남중 정벌이 제대로 이뤄졌다고 보기 힘들다

제갈량은 이후의 익주 출신 남중 내항도독들과 달리 남중 일대의 영역화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 지역에 대한 정책적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사업인 북벌을 위한 물자수탈에만 치중하였으며 세부적인 남중에 대한 통치는 오로지 익주 출신 내항도독들과, 화양국지에도 나오듯이, 현지 유력자들에게 일임하였다. 실제로 남중의 제대로 된 행정구역화는 제갈량의 죽음으로 촉의 북벌 정책이 실패로 끝난 이후 북벌 정책을 중지하고 익주 내부로 눈을 돌린 그의 후임들인 장완, 비의 시절에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익주 출신 지방관들인 이회 → 장익 → 마충으로 이어지는 내항도독 라인의 지속적인 토벌이 있었으며, 233년 유주의 대규모 반란을 마충, 장억 등이 진압하고, 장억이 240년에 월수군을 새롭게 정복하는 등의 장기적인 노력 끝에야 남중 지방은 안정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실제 역사 상 남중에 대한 촉의 지배와 이를 통한 행정 구역을 그나마 어느 정도 확립한 것은 이회, 마충, 장억 이 세 사람의 공로이지 연의에서처럼 제갈량의 공로는 아니다.

또한 촉의 덕정이 펼쳐진것처럼 표현되는 일부 설화나 연의의 묘사와 달리 초주전에서 초주의 술회를 보면 남중 민심이 수탈로 인해 촉 중앙에 적대적 여론은 촉 멸망 당시까지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촉은 제대로 된 개발과 내정 정책을 투자하지 않고 오로지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하는 정책에만 집중한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촉은 직백오수라는 당백전 악화를 정권 존속기간 내내 발행해 시뇨리지로 수탈하여 재정을 확충했으며 촉에 치명적인 피해을 준 이릉대전 이후 익주가 몹시 피폐하다고 제갈량 본인이 출사표에 공식적으로 서술했다. 이런 피폐한 촉 상황에서 남중을 수탈함으로서 제갈량이 수행한 대규모 전쟁에 필요한 군국의 물자가 충당되어 수탈의 강도는 상당히 강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대로 된 지역 개발과 환원이 남중에 없었던 만큼 남중의 불만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운남성 지역은 현대 중국에서도 한족 외의 소수민족들이 많은 지역으로 꼽히고 명청시대까지도 현지 토사들에게 통치를 위임하던 지역이라 촉이 다른 왕조들도 통치를 못한 운남을 완전히 영토화했다고 무리가 있는 지역이었다. 동시기 오가 산월을 완전히 국가에 편입해 산월을 비롯한 월족계 이민족이 오늘날 남중국인에 완전히 동화된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제갈량의 남중 정벌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현대 이전의 근세기 역사학자 중 조선의 실학자인 이익은 제갈량의 남중 정벌에 대해 평가하는 내용을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서술했다.
제갈량이 남방(南方)을 정벌할 때 왜 그렇게 불같이 빨리 서두르고 다른 곳보다 먼저 계획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중원도 회복하지 못하고 대의(大義)도 밝히지 못했는데, 어찌 이런 일은 버려 두고 먼데 것을 구할 수 있겠으며, 더구나 5월 한여름에 열대 지방으로 깊이 쳐들어 갈 수 있겠는가?

장가(牂牁)ㆍ월수(越雟)ㆍ고애뢰(古哀牢)는 지대는 험조하고 동떨어진 먼 곳이다. 이보다 먼저는 남쪽 지방 도적이 침략해 왔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이후에도 맹획(孟獲) 같은 이가 정벌을 도와 공을 세운 일은 없었다. 일곱 번이나 적을 놓아 주었다가 다시 사로잡아 군사를 괴롭히고 위엄을 손상시켰으니, 그가 병에 걸려 죽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었다. 나는 이것은 제갈량의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처음 생각으로는 반드시 남쪽 지방을 정복하고 천하를 크게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옹개를 이미 목베어 죽인 후에는 맹획이 또 배반했으니 이는 한갓 원망만 맺은 셈이다. 그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하고 다만 원망을 맺어 도적을 불러 들이는 것은 또한 지혜가 밝은 자로서는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다.

이러므로 그의 정벌은 조금 물려서 여러 가지 일이 대강 안정된 후에 조용히 했어야 할 것인데 이렇게 불같이 바삐 한 것은 부득이해서였다지만, 가령 금은과 우마(牛馬)를 취해서 군용(軍用)을 넉넉히 만들 수 있었다 할지라도 만약 이런 계획을 갖고 정벌을 일으켰다면, 이것이 바로 잘못된 계책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개 마속의,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다." 는 말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9년 만에 제갈량이 죽었고 또 6년을 지난 후에는 장억으로 태수를 삼았다. 그 밑에 "이전에 월수가 자주 배반하여 태수를 죽였다." 하였으니 이 '이전에'라는 말로 미루어 본다면 (불과) 수년 동안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즉 남쪽 사람이 다시는 배반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군법(軍法)이란, 우선 소문부터 낸 다음에 실행하는 것도 있고, 또는 스스로 다스리면서 시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천촉(川蜀)은 지대가 중국과 아주 동떨어져 있으니, 그 지세로 본다면 한구석에 있으면서 제대로 영웅 노릇을 할 수 있고, 이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오랑캐에게 군림하게 되면 적에게도 위엄을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적에게 위엄을 보이기도 하고 은혜를 베풀어서 오도록 하여 그들이 두려워하여 다스려 주기를 희망하도록 한 다음에 한 번 군사를 일으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양책(良策)일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도 역시 사람이니 어찌 백 번 꾀해서 백 번 다 잘못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성호사설』제20권 「경사문(經史門 )」제갈 남정(諸葛南征) 출처

3. 기타 창작물

3.1. 삼국지연의

연의에서는 이 남중 정벌이 남만 전역에 대한 정벌로 확대되고, 맹획을 7번 잡았다 풀어주는 것을 반복하는 칠종칠금을 통해 맹획을 굴복시킨다.
[1] 역사적 사실인지 명확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