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조사통계국 특무 | ||
정체 | 鄭蘋如 | |
간체 | 郑苹如 | |
한국식 독음 | 정평여 | |
영문 | Zheng Pingru | |
출생 | 1918년 | |
중화민국 절강성 난계시 | ||
사망 | 1940년 2월 (향년 21~22세) | |
중화민국 유신정부 상하이 | ||
국적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상하이 법정학교 중퇴 | |
직업 | 학생, 간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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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간첩.친일 괴뢰 왕징웨이 정권의 첩보 전문가였던 딩모춘을 암살하려 한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이후 그녀의 일대기가 영화 < 색, 계>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졌다.
2. 생애
1918년 중화민국 절강성 난계시에서 정웨의 둘째 딸로 출생했다. 그녀의 아버지 정웨(鄭鉞)는 일본 법정대학(法政大學)을 졸업한 유학파로 일본 유학 시절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여 쑨원과 같이 혁명활동을 했던 중국국민당의 원로였다. 정웨는 일본 명문가의 자제였던 기무라 하나코(木村花子)와 결혼하여 귀국했으며, 중화민국 건국 후 상하이 푸단대학 교수, 강소성 고등법원 검사관, 상하이 고등법원 수석검찰관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어머니가 일본인인 것 때문에 정핑루는 일본어가 유창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인 기무라는 중국 문화에 매료된 인물이었고, 이름도 중국식인 '정화쥔'(鄭華君, 정화군)으로 고치는 등 정핑루의 집안 자체는 민족주의적이었다. 이 때문에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정핑루는 어린 나이에 항일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1933년부터 1934년까지 상하이의 사립중학교인 민광중학교를 다녔다. 정핑루는 어려서부터 미모가 뛰어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이 때문에 19세가 되던 해에 상하이 최고의 인기잡지인 《양우》의 표지 모델로 선정된 적도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중•일 양국의 수십만 대군이 혈전을 벌인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여 장제스 지휘하의 중화민국 주력군이 참패하고, 상하이가 일본군에게 점령되자 정핑루는 일본군 치하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해, 정핑루는 상하이 법정학원에 입학했다가 다이리의 조사통계국에 포섭되었다. 조사통계국은 일본어가 유창하고, 사회적인 관계가 좋았던 정핑루에게 일본인을 상대로 고급 정보를 수집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1937년 7월, 《양우》 120호의 표지모델이 된 정핑루 |
그러던 중 조사통계국은 정핑루에게 중화민국 유신정부[1]의 악명높은 공안기술자인 '도살자' 딩모춘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딩모춘은 원래 국민당의 첩보기술자로 국민당 내부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여 상하이에서의 국민당 첩보활동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는데, 그가 미녀만 보면 환장하는 점을 알고 있었던 국민당은 미녀인 정핑루를 접근시켜 친일 매국노 딩모춘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다. 여기에 정핑루는 과거 딩모춘이 교장으로 재직했던 중학교를 졸업하여 접근할 명분도 좋았다. 정핑루는 성공적으로 딩모춘에게 접근했고, 딩모춘은 그녀를 왕징웨이 정권의 첩보기관인 76호실의 비서로 채용했다.
1939년 봄, 정핑루는 <색, 계>에 나오는 연극부 선배 광위민의 모델이 된 중화민국 공군 장교 왕한쉰과 약혼식을 치르고 승전 이후 결혼식을 가지기로 약속했다. 1939년 12월, 정핑루는 딩모춘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여 살해하려 했으나 딩모춘의 예리함 때문에 실패했다. 12월 21일, 정핑루는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을 일으켜 딩모춘을 다시 한 번 암살하려 했으나 딩모춘이 다시 눈치를 챘고, 총격전 끝에 도주하면서 또 실패했다. 12월 24일, 정핑루는 결국 체포되었다. 딩모춘은 옛 정을 생각하여 정핑루를 석방시켰으나 왕징웨이 정권 내부에서 딩모춘이 국민당 간첩에게 휘말렸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딩모춘의 아내 자오후이민이 남편이 새파랗게 어린 여간첩과 놀아났다는 사실에 격노하면서 정핑루는 다시 체포되었다.
1940년 2월, 정핑루는 상하이 쉬자후이역에서 3발의 총알을 맞고 처형되었다. 정핑루의 아버지 정웨는 일본으로부터 전향하라는 압력을 받다가 1944년에 사망했으며, 약혼자 왕한쉰도 일본군과의 교전 중 1944년 8월, 후난성 헝산에서 전사했다. 일본인 어머니 정화군은 대만으로 이주하여, 딸 정핑루의 복권을 위해 노력하다가 1966년 사망했다.
3. 평가
일본, 왕징웨이, 장제스, 중공 사이를 원활하게 오갔다는 정핑루는 사후 많은 미스터리를 남겼다. 그녀와 중통국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없거니와, 많은 종류의 정보를 통해 그녀의 정치적인 속성을 알 수 없으며, 더욱이 그녀가 인정하고 충성하는 상대를 읽을 수 없다. |
羅久蓉, <歷史敘事與文學再現: 從一個女間諜之死看近代中國的性別與國族論述>,《中國近代婦女史硏》, 第11期, 2012, 신명주의 석사학위 논문에서 재인용. |
전후 정핑루의 어머니 정화군과 남동생이 정핑루의 명예회복을 위한 사법 절차를 요청함에 따라 정핑루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핑루에 대한 부족한 정보 때문에 정핑루가 사실 딩모춘을 일부러 놓아준 한간이라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또한 정핑루를 애국자로 인정하는 쪽에서도 정핑루가 딩모춘을 육체적으로 유혹했던 문제를 굉장히 껄끄럽게 여겼으며, 일부 논자는 여자의 몸도 필요하면 국가를 위해 써야 한다고 옹호했다가 다른 의미로 또 논란이 되었다.
1979년, 장아이링이 《색, 계》를 발표했을 때도 《중국시보》는 《색, 계》를 한간을 찬양하는 문학으로 격렬하게 비난했고, 장아이링의 친일 논란 등과 겹쳐져서 결국 정핑루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외면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안 감독의 영화 <색, 계> 발표 이후 중국에서 정핑루의 생애를 주목한 논저가 대륙과 대만에서 모두 쏟아져나왔고, 현재는 항일전쟁의 애국적인 영웅으로 정핑루가 재평가 및 재조명되었다. 2009년에는 상하이에서 정핑루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건립되었다.
4. 매체에서
왕징웨이 정권의 각료인 후란청의 아내였던 장아이링이 그녀를 소재로 소설 《색, 계》를 발표했다. 이후 이 소설은 대만의 영화감독 이안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여기서 탕웨이가 정핑루를 모델로 한 왕자즈를 맡았다.장아이링은 1988년에 내놓은 속집 《자서》에서 《색, 계》의 모델이 정핑루라는 것을 부정하면서 자신 같은 평범한 백성은 그런 복잡한 투쟁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일축했지만, 이는 장아이링이 남편인 후란청에게 배신당한 것 등이 작용된 변명으로 분석된다.
5. 참고문헌
- <영화 색, 계의 트랜스 아이덴티티 캐릭터 연구>, 신명주, 한국외국어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상하이의 모던걸 장아이링의 초상>, 박진영, 《근대서지》 14집, 근대서지학회.
- <내셔널리스틱한 공간으로서의 '연극무대' - 색/계 론>, 김양수, 《중국현대문학》 54집,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