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9 15:55:25

전창곤

<colcolor=#fff><colbgcolor=#831> 제9대 전라남도 여수시의회의장
전창곤
田昌坤 | Jun Changgon
파일:전창곤12-1.png
출생 1967년 1월 9일 ([age(1967-01-09)]세)
전남 여수시 덕충동(본적지는 전남 고흥)
학력 여수고등학교 (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 석사)
소속 정당
현직 전라남도 여수시의회 의장
경력 제5,6,7대 여수시의회 의원
여수시의회 여순사건특별위원장
1. 생애2. 맨발의 사나이3.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4. 선거이력5. 둘러보기

[clearfix]

1. 생애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본관은 담양. 당적은 더불어민주당이다. 1966년 여수시 덕충동에서 태어나 덕충동 언덕에서 자랐다. 호적에는 1년 늦게 실렸다.

전창곤 의장의 본적은 전남 고흥이다. 아버지는 고흥군 남양면 출신이고, 어머니는 풍양면 출신이다. 외삼촌이 고흥종합병원 원장이고, 판사출신 외삼촌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사돈을 맺었다. 다시말해 반기문 총장의 아들이 전창곤 의장의 사촌 처남이다.

그의 아버지는 철도노동자였다. 그래서 노동자에 대한 생각과 철학이 남다르다. 태어난 곳은 여수 오동도가 한눈에 보이는 덕충동 언덕배기였다. 그곳에서 성장한 전창곤은 어려서 축구를 좋아했고, 지금도 여전히 축구를 즐기는 축구맨이기도 하다.

여수 종고초등학교(10회), 여수중학교(32회), 여수고등학교(34회)를 나온 여수 사람이다. 재수를 해서 건국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 10.28 건국대학교 항쟁’ 당시 1학년으로 선배들과 짱돌 들고 최루탄가스를 마시며 열심히 학내투쟁에 참가했다.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해 전북 부안군 계화도에서 해안경비병으로 근무하다 병장으로 제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지방자치행정학을 전공하며 석사로 졸업하였다. 대학졸업 후 연세세브란스병원에 입사해 3년을 근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했다. 에 앞서,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자, 휴가를 내고 내려와 직접 선거를 체험했다.

재수까지 포함해서 대학생활과 군대 복무, 직장생활 등 14년을 제외하고 쭉 여수를 지키며 살아왔다. 그의 여수사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다. 2002년 시의원 선거에 처음으로 뛰어들면서 유권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맨발로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2006년 시의원 선거에도 맨발로 선거운동을 시작해 ‘맨발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두 번의 실패를 거쳐 2010년 드디어 국민참여당으로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고, 지역 토배기들의 복마전인 생활쓰레기 민간대행업체 문제에 적극 나서 도시공사로 흡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협박과 회유를 받으면서 우직하게 밀어붙여 시의원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2014년 더불어민주당으로 입당하여 2018년 시의원 선거까지 내리 3선에 당선되었을 정도로 시민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자가용 없이 시내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며 무엇보다 시민들과 소통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전창곤 의원을 통하면 민원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된다는 칭찬을 듣고 있다.

하지만 통합청사를 두고 현 여수시장과 갈등이 있었고 이후 시민들에게도 많은 실망을 주었다
또한 음반,비디오및게임물에 관한 법률 위반의 전과가 있어 꺼림칙하다 그러나 오해라고 해명을 했으나 많은 시민들은 전과가 있는데 여수시장 자격이 있는지 의심을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하신다

그는 2022년 시장선거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고 열심히 표밭을 갈고 있다.

2. 맨발의 사나이

전창곤의 별명은 '맨발의 사나이'이다. 그의 자서전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에는 그가 왜 맨발의 사나이 인지 설명해주고 있다.

“어이! 맨발!”
오늘도 나는 언제나처럼 저녁 모임을 마치고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방자치에 뛰어들면서 이렇게 술잔이 도는 저녁 식사 자리가 있으면 난 시내버스를 탄다. 시민들 속에서 다양한 표정과 살아가는 모습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날에는 택시를 탈 때도 있다. 택시 기사들을 통해 시정에 대한 다양한 비평(?)도 들을 수 있다. 그날도 약간 취해 졸고 있는데, 60대 작업복 차림의 중년이 버스에 오르자, 나를 불렀다.
나에게 ’맨발’이라고 부르는 시민들은 만덕동이나 미평동에 사는 시민들이 많다. 그렇다. 내 별명은 ‘맨발’이었다. 1998년 서울에서 짧은 직장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와 2002년 처음 기초의원 선거에 뛰어들면서 붙여진 별명이다.
1995년 본격적인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2002년 민선 3기부터 선거에 뛰어들었으니 어느덧 20년이 되었다. 그 영광의 별명이 바로 ‘맨발’이다.
2002년 처음 출마한 만덕동 시의원 선거에서 처음 뛰어든 나를 효과적으로 알릴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였다. 당시에는 예비선거운동 등록도 없이 오직 13일만 주어졌다. 이 기간에 정치초년병인 나를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까 며칠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맨발의 선거운동이었다.
요즘처럼 다양한 홍보 수단이 허락되지 않던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명함과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돈도 없어 법정 선거운동원마저도 확보할 수 없으니 가족들이 유일한 선거운동원들이었다. 돌이켜보니 나의 무모한(?) 욕망을 위해 우리 가족을 참 많이도 부려 먹었다. 아내는 물론이고, 형제들과 친척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죽을 때까지도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3.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파일:전창곤-표지3.png
전창곤은 여수에서 태어나 대학과 군대생활, 짧은 직장생활을 제외하고 여수를 떠난 적이 없다. 시민들과 부대끼며 살아왔다. 그 누구보다 여수를 속속 잘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여수시장을 꿈꾸는 전창곤의 장점이다. 시민 위에 군림하지 않고 시민 속에 나란히 걸으며 소통할 수 있는 정치인이다. 그의 자선전에는 그런 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2010년 처음 시의원에 당선되자, 50만 원을 주고 쏘나타 중고차량을 처음 샀다. 현장을 둘러보고 하려면 아무래도 차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차를 혹사(?)시킨 덕분에 2년 만에 폐차를 시켜야 했다. 그 무렵 하늘 높이 치솟은 고철값 덕분에 폐차 보상비로 40만 원을 받았다. 오히려 폐차비를 내야 할 거로 생각했는데 돈을 준다고 하니 나도 깜짝 놀랐다. 하여튼 2년을 잘 부려 먹었는데 겨우 10만 원 밑진 셈이었다.
그 후로는 자가용 없이 5년 넘게 시내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또 자연스럽게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어 좋았다. 미평동 집에서 시의회까지 오는 시내버스는 777번 버스이다. 어찌 보면 버스 번호부터 행운의 숫자인 것 같기도 하다.
해양경찰서 앞 정류장에서 걸어서 시의회까지 오면 10여 분 걸린다. 그렇게 5년 넘게 행운의 시내버스 777번을 이용하고 있다. 술 한잔 마셔도 늦은 시간이 아니면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시민들 입장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진정 시민들의 불편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시의원이 되고 나서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하다 보니 개선할 점이 눈에 잘 보였다. 그중에서도 중점적으로 했던 것이 바로 2008년 생활폐기물 처리업체를 흡수해 도시공사를 설립하여 전환한 일이었다. 당시 생활폐기물을 4개 민간업체가 대행하고 있었는데, 시정질의를 통해 처음 문제를 제기했다.
시와 대행업체의 계약조건을 들여다보니 혈세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조건이었다. 8%의 이윤을 보장받는 조건이었는데, 부대비용이 늘어날수록 이윤이 높아지는 조건이다 보니 비용 부풀리기가 만연되어 있었다. 거기에 친인척 채용과 시도의원의 개입으로 특혜 등 폐단이 많았다.
이런 불합리한 조건으로 특혜를 누리다 보니 한마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고 복마전이었다. 이 카르텔(Kartell)을 깨뜨리려다 보니 무언의 압력이 들어왔다. 그 사업에 관련된 모 도의원부터 제지도 받았고, 담당 공무원들도 밤늦게까지 집 앞에서 진을 치고 나를 만나 설득시키려고 했다.
이러다 보니 나 스스로 항상 뒤를 한 번 더 돌아보는 등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조심하게 되고 음주를 하게 되면 꼭 아내를 불러서 함께 귀가했다.
더 깊이 들여보니 무엇보다 미화원들의 복지가 엉망이었다. 컨테이너 휴게실은 그냥 흙바닥에서 쉴 정도로 엉망이었다. 결국 도시공사로 전환되면서 미화원들은 한 명도 해고되지 않았고 민간인에서 준공무원으로 신분 상승이 된 것은 물론이고 전원 승계되면서 복지도 크게 향상되어 미화원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4.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여수시의원 만덕동)

[[무소속(정치)|
무소속
]]
638 (13.54%) 낙선 (5위)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여수시의원 마선거구) 1,533 (11.23%) 낙선 (5위)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여수시의원 자선거구)

[[국민참여당|
파일:국민참여당 로고타입.svg
]]
3,157 (13.92%) 당선 (2위) 초선
2014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여수시의원 자선거구)

[[새정치민주연합|
파일:새정치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4,430 (17.22%) 당선 (3위) 재선
2018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여수시의원 다선거구)
4,910 (17.42%) 당선 (2위) 3선

5. 둘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