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7AA9C><colcolor=#000000>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 다르마냐크 Jean IV d'Armagnac, Comte d'Armagna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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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 4세 다르마냐크 Jean IV d'Armagna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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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96년
10월 15일 프랑스 왕국 로데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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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
1450년
11월 5일 프랑스 왕국 릴주르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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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브르타뉴의 블랑슈(1407년 결혼/1419년 사망) | |
나바라의 이사벨라(1419년 결혼) | ||
자녀 | 본, 장 5세, 마리, 엘레오노르, 샤를, 이자벨 | |
아버지 |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 | |
어머니 | 베리의 본 | |
형제 | 베르나르 8세, 마리, 본, 안, 잔, 베아트리스 | |
직위 | 아르마냐크 백작, 로데츠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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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 국왕의 신하이면서도 잉글랜드와도 동맹을 맺으려 했다가 샤를 7세에게 응징당했다.2. 행적
1396년 10월 15일 프랑스 왕국 로데츠에서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와 베리 공작 장 드 베리의 딸 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베르나르 8세, 마리[1], 본[2], 안[3], 잔[4], 베아트리스[5]가 있었다.1418년 6월 아버지가 피살당한 후 형제 베르나르 8세와 함께 부르주로 달아난 뒤 도팽 샤를에게 충성을 서약하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싶으니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부르고뉴파와 화해하고 싶었던 도팽 샤를이 속시원한 지원을 해주지 않자, 아르마냐크 백국으로 돌아간 뒤 자기 영지를 지키는 데 골몰했다. 1419년 아버지에게 억류되었던 코밍주 여백작 마르그리트 드 코밍주가 레크투르 성에서 탈출한 뒤 자기보다 20살 어린 마티외 드 푸아코밍주와 재혼하면서 코밍주 백국이 아르마냐크 백작의 손아귀에서 떠났지만, 그는 이에 대해 별다른 제지를 하지 못했다.
1425년, 아르마냐크 백작으로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후안 2세에게 경의를 표해, 비상시 카스티야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도팽 샤를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었기에 이를 문제삼지 않았지만, 이 일을 마음에 담아뒀다. 한편, 그는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한 유일한 프랑스 귀족이었고, 베네딕토 13세 사후에는 '베네딕토 14세'를 칭한 베르나르 가르니에와 장 카리에를 지지했지만, 1430년 교황청의 설득을 받아들여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를 따랐다.
1437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상호 적대 행위를 하지 않기로 했으며, 1440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장 드 뒤누아, 샤를 1세 드 부르봉, 장 2세 달랑송,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도팽 루이와 함께 프라그리에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정부군에게 진압되었지만, 그는 왕에게 용서받았다. 1441년, 샤를 7세는 장 4세에게 왕명을 어긴 푸아 백국을 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에 따라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와 전쟁을 벌였다. 푸아 가문은 곧 왕실에 척지는 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상을 맺자고 요청했다.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급했기에, 20여 년간 성채에 감금되었던 마르그리트 드 코밍주를 석방하고 기옌에 대한 군사 작전에 동참하는 조건으로 푸아 백국과의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1442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와 자신의 딸 이자벨 사이의 결혼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샤를 7세가 자신을 곱게 보지 않는다는 걸 인지하고 강력한 동맹을 원했고, 잉글랜드인들 역시 아르마냐크 백국이 잉글랜드 왕국의 영역인 가스코뉴의 완충지대로서 쓸만하다고 여기고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러나 결혼 협상은 질질 끌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 사이, 그의 행보를 알게 된 샤를 7세는 1443년 아들 루이에게 군대를 맡겨 그와 가족이 살고 있던 릴주르댕으로 파견했다. 장 4세는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고 카르카손 감옥에 수감된 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 사보이아 공작 루도비코,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 메인 백작 샤를 4세, 아르튀르 드 리슈몽, 그리고 도팽 루이가 샤를 7세에게 장 4세를 용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샤를 7세는 이를 묵살하고 파리 의회에 사건을 회부했다. 이후 영주들이 왕에게 용서해줄 것을 끊임없이 요청하자, 샤를 7세는 그를 사면하기로 했다. 단, 로데츠 백국은 왕실의 영지가 되었고 왕실 수비대가 장 4세가 다스리는 거의 모든 요새와 도시에 주둔하여 백작의 행동을 감시했다. 그 후 장 4세는 릴주르댕 성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450년 1월 5일에 사망했다.
3. 가족
- 브르타뉴의 블랑슈(1395 ~ 1419):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딸.
- 본 다르마냐크(1416 ~ 1435): 미혼인 채 사망.
- 나바라의 이사벨라(1395 ~ 1450):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딸.
- 장 5세 다르마냐크(1420 ~ 1473): 로마뉴 자작, 다르마냐크 백작.
- 마리 다르마냐크(1421 ~ 1473):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의 부인.
- 엘레오노르(1423 ~ 1456): 오랑주 공국의 공작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의 부인.
- 샤를 다르마냐크(1425 ~ 1497): 파르디악 백작, 아르마냐크 백작.
- 이자벨 다르마냐크(1430/1433 ~ 1476): 콰트레벨리의 여성 영주. 친오빠 장 5세 다르마냐크와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결혼까지 한 일로 사회의 지탄을 받고 파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