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8 14:34:06

가스통 4세 드 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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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가스통 4세 드 푸아.jpg
성명 가스통 4세 드 푸아
Gaston IV de Foix
출생 1423년 2월 26일
플란데런 백국 페테젬안드셸데
사망 1472년 7월 25일 (향년 49세)
나바라 왕국 론세스바에스
아버지 장 1세 드 푸아
어머니 알브레의 잔
형제자매 피에르
배우자 레오노르 1세
자녀 마리, 가스통, 피에르, 장, 레오노르, 마르그리트, 이자벨, 안, 자크
직위 푸아 백작, 비고르 백작, 베아른 자작, 마르샹 자작, 카스텔봉 자작, 안도라 공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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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푸아 백작, 비고르 백작, 베아른 자작, 마르상 자작, 카스텔봉 자작, 안도라 공동 공( 프린스).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 왕국의 가스코뉴 재정복 전쟁에 참여했다.

2. 생애

1423년 2월 26일 플란데런 백국의 페테젬안드셸데에서 푸아 백작, 비고르 백작, 베아른 자작, 마르상 자작, 카스텔봉 자작, 안도라 공동 공( 프린스)인 장 1세 드 푸아와 알브레 영주 샤를 1세 달브레의 딸 잔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로트렉과 빌뮈르 자작인 피에르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카스텔봉 자작 칭호를 받았고, 1434년 12월 22일 아라곤 국왕 페란도 1세의 차남인 추안 왕자와 나바라 여왕 수리아 1세의 딸인 레오노르와 약혼했으며, 1436년 7월 30일 결혼 약속이 확인되었다. 이때 레오노르의 지참금으로 50,000 아라곤 플로린이 푸아 가문에 넘겨졌고, 미란다 아르가, 라레가 및 팔체스 마을이 담보로 맡겨졌다. 공식적인 결혼은 수리아 1세가 사망한 지 1년이 지난 1442년에 이뤄졌다.

1436년 8월 4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모든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삼촌인 마티외 드 푸아코밍주의 후견을 받았다. 1439년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가 기옌을 침공할 준비를 한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그를 기옌의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하지만 존 홀랜드가 공격 작전을 취소했기 때문에, 그는 싸울 필요가 없었다. 1439년, 샤를 7세는 아내 마르그리트 드 코밍주를 20년간 가둔 마티외 드 푸아코밍주에게 마르그리트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마티외는 이를 거부하고 마르그리트를 푸아로 옮겼다. 1441년, 샤를 7세는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 다르마냐크에게 왕명을 어긴 푸아 백국을 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그는 삼촌 마티외와 함께 항전했지만, 곧 왕실에 척지는 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상을 맺자고 요청했다.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급했기에 마르그리트를 석방하고 기옌에 대한 군사 작전에 동참하는 조건으로 푸아 백국과의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1443년 7월 9일, 가스통 4세는 기옌과 가스코뉴의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1447년 12월 26일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휴전이 끝나자 군사 작전을 재개해 기슈를 포위 공격한 끝에 1449년 12월 15일에 함락했다. 뒤이어 1451년 5월 닥스를 공략했으며, 1452년 보르도와 바욘 공략에 참여했다. 1455년 12월 3일, 아라곤 국왕 추안 2세는 아들이자 후계자이지만 자신에게 반기를 든 카를로스 4세를 나바라 왕국의 후계 자리에서 배제하기로 마음먹고, 그와 레오노르 부부를 나바라 왕국의 상속자로 지명하는 조약을 바르셀로나에서 체결했다. 이후 가스통 4세는 추안 2세에게 군대를 지원해, 나바라 왕국에서 카를로스 4세를 몰아내는 데 일조한 뒤 나바라 왕국의 보안관이 되었다.

1458년 8월 샤를 7세의 고문이 되었으며, 차기 프랑스 국왕인 루이 11세의 여동생인 마들렌과 자기 장남인 가스통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루이 11세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한 대귀족들이 공익 연맹을 결성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루이 11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으며, 오베르뉴에서 부르봉 공작 장 2세 드 부르봉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루이 11세가 그를 자기 아들인 샤를 왕자의 후견인으로 삼기를 거부하자, 그는 기옌 공작이자 루이 11세의 형제이며, 루이 11세와 권력 분쟁을 벌이고 있던 샤를에 접근했으며, 자기 딸 마르그리트를 브르타뉴 공작이자 루이 11세의 정적이었던 프랑수아 2세와 결혼시켰다. 다만 루이 11세에게 대놓고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1471년부터 병을 앓기 시작했고, 1472년 7월 25일 론세스바예스에서 사망했다. 사후 장남 가스통의 아들이며 그의 손자인 프란치스코 페부스가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으며, 할머니 레오노르 1세가 1479년에 사망한 뒤 나바라 국왕이 되었다.

3. 가족

  • 레오노르 1세(1425 ~ 1479): 나바라 왕국의 여왕.
    • 마리(1443 ~ 1467): 몬페라토 후작 기욤 8세의 부인.
    • 비아나 공 가스통(1445 ~ 1470): 나바라 왕국 왕위 계승자. 나바라 국왕 프란치스코 페부스의 아버지.
    • 피에르(14449 ~ 1490): 아를의 주교.
    • 장(1450 ~ 1500): 나르본 자작. 그의 딸 제르멘은 페란도 2세의 두번째 왕비였다.
    • 레오노르(1457 ~ 1480): 기옌 공작 샤를과 첫번째 약혼, 메다니첼리 공작과 두번째 약혼했지만 결혼 전에 사망했다.
    • 마르그리트(1458 ~ 1487):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부인. 그들의 딸 안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왕비였고, 나중에는 루이 12세와 재혼했다.
    • 이자벨(1462 ~ ?): 튀렌 자작 기의 부인.
    • 안(1464): 요절
    • 자크(1463 ~ 1508): 몽포르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