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복잠행. 군주가 민생을 살피기 위해 평상복 차림으로 다니는 일. 옛날에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자기네 왕의 얼굴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는데, 왕이 미복잠행을 할 때는 안전을 위해서 대개 경호원이 동행하였다. ‘ 암행’이 뚜렷한 목적과 목표를 갖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니는 행동임에 비해 ‘잠행’은 특정한 목표없이 민생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왕은 미복잠행을 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며 이를 국정운영에 참고하는 일이 많았고,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해주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의 비방을 하는 등 마음에 들지 않는 백성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일도 있었다.태평성대로 묘사되는 요 임금 시절, 요 임금이 자신의 선정을 확인하고자 미복잠행을 다니며 백성들이 정말 행복한지 살펴보았더니 한 노인이 배불리 먹은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고복격양가를 불렀다는 고사도 있다.[1]
그러나 조선에서 신하들의 미복잠행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고사 속 황제들의 잠행을 논할 때도 부정평가가 더 많은 편이었고, 특히 사적인 목적으로 미복잠행하는 것은 상당히 나쁘게 보았다. 따라서 왕들은 분위기상 대놓고 떳떳하게 미복잠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의 기록들에서 왕의 미복잠행에 관련된 서술이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
2. 실록에 등장하는 잠행
- 태조 이성계는 성을 축조하는 일에 진심이어서 성을 쌓는 동안 남산에 올라 성터를 보기도 하고 내친 김에 미복잠행을 하고 성의 축조 상황을 살펴보기도 했다. 또 팔각전을 수리하는 화원에 몇 차례 방문하여 도료의 비용을 검사하게 하기도 하고, 화초를 심고 나무와 돌을 다듬는 일을 친히 챙기기도 했다. 이 과정에 화원의 예조 전서 이민도라는 자가 정직하게 성 쌓는 일의 걱정거리들을 고하자 의복 한 벌과 쌀, 콩 30석을 내려주기도 했다.
- 2대 정종은 상왕이 된 뒤에 단기 미행도 즐겨하고 이른 새벽에 나가 밤까지 들어오지 않거나, 아예 며칠씩 외박도 즐겨했다. 이때 막 다니는 바람에 사간원에서 제발 어디 갈지 말을 하고, 호위를 데려가게 하라고 상소를 올린 것이 남아있다.
- 왕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잠행이 태종 실록에 남아있다. 태종 18년 실록을 보면 양녕대군은 담장을 넘기도 하고 개구멍으로 나가기도 했다고 [2] 잠행을 하면 강까지 건너 멀리 돌아다니며 불의한 짓을 하였다고 한다. 친한 이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 비파에 맞춰 추는 춤도 보고 옷도 벗어 주고 헤어진 다음 또 2,3일 지나면 또 친한 사람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새벽까지 놀다가 파했다는 내용이 구구절절 써있다. 또한 양녕은 몰래 대궐 담을 넘어 곽선의 양자인 이승의 집으로 가서 곽선이 숨긴 첩 어리를 말에 태우고 궁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악공 이오방을 시켜 일을 도모했고, 이후엔 선물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래도 어리가 거부하자 대놓고 '대궐 담을 넘었다'라고 실록에까지 써있다. 양녕은 사람은 몇만 거느리고 이오방의 집에 도보로(...) 걸어간 다음, 이승의 집에 가서 강요와 협박을 통해 어리를 만났다. 그 다음 어리를 데리고 궐 밖에서 이법화의 집에서 하루를 자고 그 다음에 궁중으로 여자를 납치했다고.
- 성종은 잠행을 자주 나간 편으로 알려진 왕인데 성종의 미행에 관련하여 실록에 있는 기록 중 일영대에 관한 것이 있다. 종묘 앞에 놓아둔 앙부일구가 바로 일영대인데 여기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성종이 미행 중에 일영대의 버드나무에 숨었는데 어떤 노파가 천문을 보고 "세성이 적성에게 쫓기어 유성 밑에 들어갔다"라고 말했다. 성종은 이 할멈을 서운관에서 일하게 하였고, 그 할멈을 위해 혜정교 맞은 편쪽에 일영대를 설치했으며, 또 그 동네 이름도 그때 일영방이라고 지었다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이 일영방은 현재의 서울시 중구 무교동 및 서린동 일대다.
- 연산군의 잠행은 보통 잔치와 사냥을 위한 것이었다고 쓰여있다. 미복으로 잠행하여 잔치를 하거나 환관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던 기록이 많은 편이다. 자주 다니고 또 미행을 좋아하다 보니 번거로워져서 연산군은 나중에는 향교동, 제생원동, 장의사동 세 성문은 아예 터놓고 지키는 군사를 정하지 말라고 했다. 또 미행을 다니면서도 풀숲에서 사람이 나와 자길 해칠까 두려워했는데 하루는 황새가 무엇을 쪼아먹는 것을 보고 사람인가 의심하여 채찍을 쳐 급급히 지나와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황새였다. 이로부터 황새를 싫어하여 각도로 하여금 황새 씨를 말려버리라는 명도 내렸는데, 이것도 미행에서 비롯된 일이었음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3. 미복잠행에 관련된 야사
관변기록인 실록 외에도 민간 서민기록인 야사을 살펴보자면 계서야담, 계압만록 등에 수록된 야사에서 성종을 비롯하여 숙종, 영조, 정조 등 후대의 왕들이 미행에 나선 일화들이 전해져오고 있어 현재까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진지하게 접근하자면, 금지옥엽으로 평생을 산 왕이, 조선은 결코 정복왕조가 아니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까지 전부 같은 한국어를 쓴다 해도, 어휘나 표현의 상당수에 있어서 일반 사회와는 다른 궁중용어를 썼던 데다가, 제스처ㆍ말투까지도 왕인 걸 들키지 않게 고도의 연기력을 발휘해야 되는데...- 하루는 성종 임금이 잠행하다 광통교를 지날 때, 다리 밑에서 묵으려던 한 사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내는 "경상도 흥해[3]에서 올라온 숯장수 김희동입니다. 임금님이 어질다 하여 죽기 전 꼭 뵙고자 어렵게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을 뵈면 해삼과 전복도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고 했다. 이에 흐뭇했던 성종은 자신을 이 첨지라 소개한 뒤 왕을 꼭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따라온 별감에게 귀띔한 뒤 별감의 집으로 김희동을 데려갔다. 다음날 성종은 김희동에게 왕을 만나려면 벼슬이 있어야 하니 원하는 벼슬이 있으면 말해보라 했다. 김희동은 당황했지만 자기 고을에서 제일 잘 나가던 충의라는 벼슬을 이야기했다. 사실 김희동은 이 때 반신반의 했는데 그 다음날 정말로 충의초사(忠義初仕)란 벼슬이 내려져 김희동은 궁으로 들어갔다. 가니 자신이 알고 있던 이 첨지가 바로 그렇게 보고싶던 임금이었다. 김희동은 심하게 놀라 갖고 온 해삼과 전복을 땅에 떨어뜨리기까지 했으나 성종은 마음을 갸륵히 여겨 그것을 수라상에 올리라고 명했다.
- 성종은 정릉 골목에서 과천에서 올라온 나무꾼을 만났는데 나무를 팔지 못해 걱정이라고 하자 가진 나무를 전부 샀다.
- 숙종은 잠행과 관련된 일화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왕이다. 그 중 유명한 것이 푼주의 송편 이야기다. 하루는 숙종이 남산골 잠행을 나갔다가 집안이 몹시도 가난하여 먹을 것도 변변치 못한 선비 내외를 목격하였다. 어느 날 이 부부가 송편을 만들었으나, 마땅히 담을만한 그릇이 없어 주발 뚜껑에 담아 놓은 채 입으로 송편을 주고받으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이 광경을 우연히 보게 된 숙종은 이를 몹시도 부러워하며 왕후에게 송편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커다란 푼주(아가리가 넓고 밑이 좁은 사기그릇의 일종)에 맛깔스런 송편이 산같이 쌓인 수라상이 올라왔다. 이 요란스런 모습을 보니 숙종은 그 선비 내외의 다정스런 모습을 보며 느꼈던 마음은 깨져 버리고 울컥 화가 치밀어 "송편 한 푼주를 먹으라니 내가 돼지야?!" 하면서 송편 그릇을 뒤집어 엎으며 내동댕이 쳤다. 모두 왕의 심정을 알리 없어 의아해 할 뿐이었지만 그 후 내막을 알게 되고 "푼주의 송편이 주발 뚜껑 송편의 맛보다 못하다"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 숙종 임금 때의 일이다. 왕이 미복잠행을 하다가 어떤 초상 집에 이르니 머리를 빡빡 민 비구니가 춤을 추고 노인은 통곡하는 광경을 보고 그 집에 들어가 사정을 묻자 노인이 말하기를, 자기 마누라가 죽고 자기의 생일이 되었는데, 집안이 극빈하여 생일을 차릴 수가 없자 며느리가 머리를 잘라 팔아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며느리의 효행에 감동하여 울자,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드리려고 춤을 추었다고 하였다. 이 사연을 들은 왕은 크게 감동하여 즉시 그 집에 효부정문을 세우고 표창하여 구제하였다고 한다.
- 영조의 잠행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다음 이야기이다. 부왕 숙종의 예를 따르는 데 진심이었던 영조 또한 잠행을 많이 했다. 사도세자 대리청정 이후 13년 간에 50회, 재위 기간 전체에 걸쳐 500회 이상의 잠행을 했다. 한번은 영조가 백성들과 대면해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나무꾼을 만났다. 나무를 어디서 베었냐고 하자, "소령"릉"이 있는 곳 근처에서 베어 왔습니다요."라고 말하였다. 나무꾼이 일자무식해서 원과 릉을 구분하지 못했고, 임금의 어머니 묘이니 릉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그러자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존대해줬다고 크게 기뻐하며 그 나무꾼에게 상금과 소령원 수봉관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판본에선 약간 더 극적인 내용을 추가한다. 평복 차림으로 암행을 나간 영조가 저 대화를 나눈 뒤, "그 나무를 모두 사줄 테니 나를 따라 내 집으로 오게."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무꾼이 영조를 따라가다 보니 그 집이 바로 창덕궁이었고, 그제서야 영조의 정체를 안 나무꾼이 냉큼 엎드린다는 내용이다.
- 영조의 사주는 4갑술생이다.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났다는 소리다. 이 4갑술생이 제왕이 될 운명이라고 하자 영조는 그 말이 참인지 궁금했고 강원도의 한 농부를 찾아낸다. 그 농부에게 왜 그대는 4갑술생이면서 농부냐고 묻자, 농부는 영조에게 본인도 제왕 부럽지 않다며, 자식을 8형제 낳았으니 조선 8도와 같고, 벌통 360통을 키우니 조선 전체 군, 읍 수와 같으며, 키우는 벌이 7백만 마리이니 조선 인구와 같다고 대답하였다. 영조는 크게 웃으며 농부에게 많은 재물을 하사하였다.
- 정조는 신분을 감추고 공부하는 선비가 많은 남산골로 잠행을 나갔다. 그런데 웬 선비가 나무둥지 위에 올라가 까치 울음소리 내는 것을 보았다. 정조가 선비와 대화를 나눠보니 선비의 학식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뒤에 과거 시험을 실시할때, 과거 시제로 '남쪽 까치둥지에 사람이 둥지를 틀었다'를 문제로 내었으며, 과거 시험장에서 이 문제에 접한 선비는 그제서야 자신과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 정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 헌종 시절 허련이라는 뛰어난 화가가 있었다. 잠행 중 허련을 만나본 헌종은 그의 실력에 감탄하여 벼슬을 내리고 궁궐에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금과 서적을 하사하였다. 또한 이 책들을 보관하는 오동나무 상자에 직접 '시법입문'이라고 글을 써서 보내주었는데 이 시법입문 책은 현재 전남 진도의 양천 허씨 문중에서 지금까지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
4.1. 음율의 정규 1집 환상설화 (幻想說話) 수록곡 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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