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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갑

파일:임재갑.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1년 4월 18일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現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신리 324번지[1])[2]
사망 1960년 10월 13일[3]
전라남도 완도군
본관 장흥 임씨(長興 任氏)[4]
자 / 호 문회(文晦) / 상산(象山)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10호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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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1년 4월 18일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現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신리 324번지)에서 아버지 수와(睡窩) 임영환(任永煥, 1853. 7. 22 ~ 1923. 3. 17)과 어머니 김해 김씨(1851 ~ 1900. 8. 15)[5] 사이에서 3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안창호의 주도하에 조직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와 구국청년계몽회(救國靑年啓蒙會)에 가입해 연락요원이 되어 경기도 경성부 청나라 북간도[6], 러시아령 연해주 등을 왕래하면서 항일운동에 종사했다.[7] 그 뒤 고향으로 돌아와 1912년부터 1914년까지 고향 완도군 신지면에 명신서원(明信書院)을 설립하고 동지들을 모아 농촌청년계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고문을 받은 뒤 풀려났다.

1914년에는 송내호(宋乃浩)가 고향 완도군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의 신지면 계원으로 선발되어 중화민국 길림성 연길현 육도구 용정촌에 있던 대성학원(大成學院)[8] 교원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1923년까지 교민 2세의 교육을 담당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수 차례에 걸쳐 국내를 오갔다. 또한 김좌진 휘하에서 무장전투요원으로도 활동해 '백호장군'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귀국 후 모종의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3년 12월 2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1924년 3월 6일 무죄를 선고받았고, 검사 측에서 상고했으나 1924년 4월 30일 상고가 기각되었다. 당시 공범들은 기소유예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되었고, 임재갑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나 곧 풀려난 듯 보인다.

1924년 3월 17일 완도군 신지면 대곡리에 사립 신지학술강습소[9]를 개교하고 교원 및 경영인에 취임했다. 그해 5월 신지면 대곡리와 신리 주민들 사이에서 해초 채취권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주민들이 당초 해초 채취로 벌어들인 수익에서 그 일부를 학술강습소의 유지비용으로 쓰겠다던 약속을 무시하고 분쟁에 몰두해 학교의 경영에 소홀하기 시작했다. 이후 여름방학이 되자 3학년들만 우선 통학시키고 나머지는 휴학하도록 조치할 만큼 학술강습소의 재정이 궁해졌고, 임재갑 자신도 지병으로 오전 2시간의 수업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다. 이에 유한단원(流汗團員) 김정상(金正祥)을 초빙해 오전 1시간의 수업을 부탁했고, 그와 함께 대곡리와 신리 주민들의 분쟁을 중재해 화해시킬 겸 면학을 장려하고 실업을 권면할 목적으로 각 마을에 순회 강연을 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이야기했다.

그 결과 송기호(宋琪浩)·김창선(金昌鮮) 등 50여 명의 학술강습소 학생 및 유한단원 6명과 함께 소년강연단(少年講演團)을 조직했다. 강연단을 조직한 목적은 표면상으로는 조선의 역사를 주민들에게 강연한다는 것이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대곡리와 신리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해초 채취권 분쟁에 대한 중재 연설을 위함도 있었고, 학부형들 앞에서 학술강습소의 재정 상태를 직, 간접적으로 드러내 구제를 요청하는 것도 있었다. 어쨌든 이후 김정상이 강연의 초고를 작성해 강연단원들에게 제시하여 이를 습득하도록 했고, 임시 악대를 조직해 음악 연주를 연습시켰다.

강연단원들을 인솔해 8월 11일부터 8월 16일까지 신상리·월양리·동고리·송곡리·신리·대곡리 등 신지면 관내 6개 마을을 차례로 순회하며 각 마을의 야외에서 마을 주민 100여 명을 소집하고 김정상이 미리 쓴 초고를 강연단원 6명에게 강연하도록 해 마을 주민들에게 한민족의 우수성과 조선은 자주 독립해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조선의 민족성은 관대, 박애, 예의, 염결(廉潔), 자존(自尊)으로 이뤄진 관대함이 있기 때문에, 조선 민족은 자기에게 모욕을 가하더라도 가가대소(呵呵大笑)하고 굳이 보복하려 함이 없고, 일본 민족처럼 보복하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사유(思惟)하지 않는다. 박애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박(薄)하게 하고 손님을 후(厚)하게 대접한다. 예의를 중히 여기기 때문에 의관대검(衣冠帶劍)을 호양(好讓)하여 다투지 않는다. 염결하여 금전을 탐하지 않는다. 자존은 자주 독립의 관념이 항상 따라다닌다. 역사를 보건대, 삼한 시대에 무수한 소국(小國)이 있었으나 모두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대국으로부터 멸망을 당하는 일은 있어도 그 부속이 된 일은 없었다. 당(唐)과 신라의 관계와 같이 신라가 당의 지배를 받은 일이 없고, 이조 조선시대에도 명의상 명, 청의 정삭(正朔)을 받은 일이 있다하나, 이는 명의상의 일편의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그 실질상으로는 지배를 받은 일이 없다. 자주 독립을 호상(好尙)하는 기풍은 조선 생활의 각 방면에서 현저하다.
당시 강연단원들이 읽었다는 발표문의 초고. 김정상이 썼다고 한다.
또한 신지면 경찰관주재소와 가까이 있는 대곡리와 신리를 제외한 나머지 신상리·월양리·동고리·송곡리에서 강연을 시작하기 전후로 강연단원들과 함께 혁명가를 불러 주민들로 하여금 항일투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1. 우리들은 언제까지 굽힐 것인가, 자유를 무시하는 폭정에 6대주의 피는 끓어올라 여기에 봉기한다. 혁명당.
2. 폭력은 폭력으로써 되돌려야 한다. 양손에 폭탄을 쥐고 일제히 변란 소동을 일으켜 자웅(雌雄)을 결정해야 한다.
3. 승리를 기하는 민중은 훤효(喧囂)의 소리는 산과 들에, 남극과 북극에 자유의 깃발을 세워 용맹하게 축하하자. 혁명당.
당시 임재갑·김정상이 강연단원들과 함께 불렀다는 혁명가의 가사.
그러나 1924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5년 2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류갱신이 이뤄졌다. 그리고 3월 2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공소 이유 없음으로 재판 미결 구류일수 중 6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이어 상고하였으나 9월 14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미결기간을 합산해 총 11개월 25일간 복역한 뒤 출옥했고, 1927년 8월 28일 오후 4시 30분에 완도면 읍내 중학원(中學院)에서 신간회 중앙본회 상무간사 송내호의 입회하에 신간회 완도지회(支會)를 설립하고 완도지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완도군 완도면 내리로 이주했고, 1931년 8월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을 관리하는 충무공유적보존회에 유지성금 1원을 기부했다. 1934년 4월 5일에는 기독교회 이해영(李海榮)·전라남도의원 김용안(金容安)·삼세의원(三世醫院)장 김석홍(金錫洪) 등과 완도군에 유치원을 신설할 방법을 의논해 설립자에 김용안, 원장에 김석홍을 선임하고 완도면 읍내동사무소에서 개원하도록 협의하기도 했다. 1936년 5월 10일 완도고등보통학교 기성회 창립총회에서 재무부장에 선임되었고, 이어 800원을 의연금으로 기부했다.

1957년 2월 21일 진보당 전남도당 결당대회에서 통제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60년 10월 13일 완도군에서 별세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 11월 20일 완도군 신지면 대곡리에 '신지항일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와 동아일보사의 주도로 임재갑과 장석천의 항일운동 공적을 기리는 신지항일운동기념탑이 건립되었다. 임재갑의 유해는 당초 완도군 신지면 신리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11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1912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은 당시 임재갑의 아버지 수와(睡窩) 임영환(任永煥, 1853. 7. 22 ~ 1923. 3. 17)의 소유였다. [2] 1993년 11월 22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임재갑이 완도군 신지면 신리 임촌마을 출신인 것으로 기재했다. [3] 장흥임씨대동보 권2 351쪽에는 10월 14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 [4] 문헌공파-백담공파-예도공파 23세 재(在) 항렬. [5] 김일택(金鎰澤)의 딸이다. [6]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 [7] 1925년 9월 14일 고등법원 형사부 상고심 판결문에 의하면, 임재갑은 정작 연해주에 거주할 당시에는 친일파 또는 반공주의자로 인식되었다고 하며, 연해주와 간도에 거주하면서도 불온분자들과 왕래하지 않았다고 기재돼 있다. [8] 대성중학교(大成中學)의 전신으로 보이며, 1946년 9월 16일, 은진중학교(恩眞中學), 동흥중학교(東興中學), 광명중학교(光明中學), 광명여자중학(光明女子中學), 명신여자중학교(明新女子中學)과 함께 용정중학교(龍井中學)로 통합되었다. [9] 1922년 가을부터 1923년 가을까지 13,000원의 건축비용을 투자했다. 교원은 임재갑을 비롯한 3명이었고, 24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었다. 과정은 보통학교와 동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