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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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종범의 사건사고를 다룬 문서.2. 장나라 시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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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구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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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 촬영한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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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나라 시점 촬영 움짤 |
호..호옹이! 너는?!
2002년 올스타전 당시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장나라의 시구를 받아친 사건이다. 당시 무엇 때문인지[1] 열이 받은 상태였던 이종범의 타구가 장나라의 정면으로 날아가 장나라는 하마터면 얼굴에 공을 맞을 뻔했다. 만약 대한민국 최고의 한류 스타인 장나라가 현역 야구선수의 공에 맞아서 다치기라도 했다면 국제적으로 파문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2] 당시에는 2002 한일 월드컵에만 관심이 집중된데다 장나라도 결과적으론 부상을 입지 않아 유야무야 넘어갔다.
장나라의 안티와 일부 KIA 팬들에 의해 장나라가 1시간 또는 30분(글마다 다르다) 지각해서 열받은 이종범이 타격했다는 헛소문도 나돌았으나, 장나라는 당시 지각을 했다거나 불성실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 2002년 올스타전 경기가 오후 6시 30분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올스타전 경기 전 행사인 퀴즈 게임과 치어리더 경연대회, 그룹 가수 공연 등 식전 행사가 늘어지면서 40분이나 늦은 7시 10분에 경기가 시작된 부분이 와전된 것이다.
게다가 정말 지각했더라도 연예인의 시구를 굳이 타격한 것은 명백한 위협이다. 단순히 기분 나쁜 수준이 아니며 프로 야구선수의 타구에 제대로 맞는다면 당연히 크게 다친다. 프로야구 선수들도 야구공에 맞고 부상당해서 수 개월을 쉬거나 실제로 사망한 사례도 적지 않은데, 작은 체구의 여성이 저렇게 코앞에서 타구를 맞으면 정말 심한 부상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펜싱 선수가 펜싱 검으로 상대를 찌르는 듯한 행동을 하거나, 유도 선수가 상대를 잡아메치려는 듯한 동작을 했다고 생각해 보면 이종범의 타구가 절대 장난으로 넘어갈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3]
이 시구 논란에서 큰 문제는 이종범이 공을 친 후 바로 덕아웃으로 가버려 즉각적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자 장나라의 아버지이자 배우 겸 성우 주호성은 " 이 선수가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고 사고도 없었으니 진정하라"는 글을 올렸다. 이종범은 이후 "팬들에게 깜짝 놀랄 만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싶어 순간적인 충동으로 타격했다. 장나라씨가 놀랐다면 정말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이후 장나라는 공식 홈페이지(나라짱닷컴)에서 "놀라긴 했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시구 직후 곧 안정을 찾았다"는 글을 올렸다.
후에 당시 진행자였던 이창명이 '시구를 받아쳐야 재밌지 않겠냐'고 말해서 카메라가 없는 쪽으로 친다는 것이 장나라 쪽으로 공이 간 것 같다는 변명도 나왔지만, 이 의견은 이종범이 타구를 쳐놓고 전혀 걱정스러운 기색 없이 뚱한 표정으로 덕아웃으로 조명되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 기자들도 열받아 반박 기사를 내기도 했다. 이걸 부추긴 이창명도 문제지만 거기에 넘어가 실행에 옮기고 후속 대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건 이종범이기 때문이다. 설사 식전 행사에 불만이 있었다면 시타를 보이콧하고 다른 선수에게 대신 서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4]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시구를 타격한 사례가 몆 번은 있지만, 그건 관객들에게 재미를 주려고 장난식으로 한 것이고 타구가 시구자 정면을 향한 것도 아니기에 논란은 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오 사다하루의 시구를 냅다 어퍼스윙해서 홈런포를 터뜨리고 오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은 투수 호리우치 츠네오가 있고[5] 시구가 오면 냅다 휘둘러 안타를 만들고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던 신조 츠요시가 있다. 하지만 신조는 의도적으로 당겨치기를 해서 시구자에게 타구가 가지 않도록 하며 선을 지켰다. 사실 프로야구 선수 레벨이면 배팅볼 수준 공은 원하는 대로 당겨치기나 밀어치기가 가능한데, 배팅볼보다 느린 장나라의 공을 이종범 정도의 스타 타자가 실수로 정면으로 타구가 가게 쳤다는 건 설득력이 없다.
2022년 1월 10일에 이종범은 스톡킹에서 다시 이 사건을 거론하며 사과했지만, 살짝 쳤을 뿐이라거나[6] 사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억울하다는 워딩을 쓰고 진지하지 못하게 웃는 모습을 보이는 등 차라리 거론을 안 한 것만 못한 표현을 연발해 반응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3. 전준호와의 도루왕 경쟁 사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1993. 9. 27. 경향신문)93년 신인 시절 73개의 도루로 75개의 롯데의 전준호에 이어 도루 2위를 기록했다. 둘 모두 기존 최다도루 기록이었던 김일권의 62도루를 초월한 훌륭한 기록이긴 했는데 문제는 시즌 막판 도루왕 경쟁이 붙으면서 둘 다 팀 차원에서 기록 밀어주기로 쌓은 도루였다는 점.
시즌 막판 해태는 정규리그 1위, 롯데는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된 상태였다. 그 와중에 둘의 도루왕 경쟁이 불이 붙자 팀 차원에서 기록 밀어주기가 시작되었으며 시즌 끝날 무렵에는 양팀 모두 아래와 같이 지금은 상상도 못할 추태를 보여줬다.
1. 전준호와 이종범은 선발 출전하지 않고 벤치에서 헬멧을 쓰고 대기
2. 처음으로 출루한 타자가 나올 경우 그게 누가 되었든 바로 대주자 교체 → 도루 1개 추가
3. 도루 시도시 타석에 선 타자는 볼은 물론 충분히 칠 수 있는 스트라이크마저 일부러 헛스윙해 포수의 시야를 방해
심지어 타석에서 2루타성 타구를 날리고도 일부러 2루로 가지않고 1루에 멈춰서서, 2루도루 3루도루로 도루 2개를 추가하는 기행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특히 이종범이 이 방법으로 한 경기에서 도루 6개를 쌓기도 했을 정도.
2003-2004 시즌 프로농구에서 벌어졌던 문경은과 우지원의 3점슛 몰아주기와 비슷한 행태임에도 이 당시 언론들은 죄다 둘의 도루왕 경쟁을 아름다운 선의의 경쟁으로 포장하기에 바빴다.당시 스포츠언론의 수준을 볼 수 있었던 사건. 단 한 명의 기자만이 별도의 칼럼에서 직설적으로 추하다는 단어를 써가며 둘을 디스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은 물론이고 미디어의 영향 또한 크지 않던 시절이라 묻힌 감이 있지만, 지금 저런 짓을 했다간 역대급 비난을 받을만한 수준의 추태임은 분명하다.[7] 혹자는 신인왕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었다고도 하나 당시 신인왕은 양준혁으로 거의 굳어졌던 상황이었다.
4. 인터뷰 대가로 금전 요구 논란
이종범이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KBS 한성윤 기자 외 취재진에게 인터뷰의 대가로 2만엔을 요구한 사건. 섭외 후 인터뷰를 하러 취재진이 일본에 갔는데 "정말 중요한 시기이니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가 출장비를 털어 2만엔을 주니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가 바로 바뀌어 인터뷰가 성사되었다고 한다. 사실 공식 기사는 아니었고 기자가 취재후기라며 게시판에 끄적거린 글이며, 실명은 거론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활동, 선수협, 위의 장나라 시구 사건에 대한 내용이 있어 당사자가 이종범임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내용 중 이종범에게 선물하려던 기념품을 그냥 버렸다는 내용에 한성윤 기자의 배신감이 절로 묻어난다.이후 이와 유사한 일이 이병규에게도 발생했다. 기사가 나온 뒤 이 사건은 이종범이 국내 복귀팀으로 친정팀 해태 타이거즈가 아니라 삼성 라이온즈를 원했다는 사실과,[8] 말년에 구단의 은퇴 권유를 계속 거부하고 현역 연장을 고집해온 것과 합쳐져 돈을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비난을 받을 때 사례로 자주 쓰였다.
한편 2013년 임찬규 물벼락 사건이 터지고 한성윤 기자의 소위 "못배운 야구인들"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이 사건도 재조명되었다.
5. 선수협 관련
2차 선수협파동 당시 일본에 있었던 관계로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지만 회장인 송진우가 운영자금이 부족해 해외파에게 손을 벌렸을때 모른척하는등 철저하게 방관자로만 남았다. 덕분에 정민태와 쌍으로 까였다. 도움을 준거라고는 선수 소장품 경매에 주니치시절 물건들을 몇개 내놓은것 뿐이다. 당시 해외파 선수중 박찬호, 김병현, 조성민등 한국프로야구를 거치지 않은 선수들에게 책임은 물을수 없다. 2001시즌 도중 한국으로 복귀하면서 회장직을 맡을거라는 보도가 나왔으나 이종범은 이사회에 불참하고만다. 당시의 이종범은 3년반의 일본생활을 한 후 복귀 1년차인탓에 명성에 비해 선수단 내에서의 입지는 그리 강하다고 보기 힘들었고 구단의 협박이 있었을거라는걸 감안하면[9] 마냥 비난할 일만은 아니지만 이후 나온 변명이 한 팀에서 연속으로 선수협 회장이 나오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였기에 많이 까였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애초에 반대한것도 아니고 의욕이 없었던 것이 잘못이라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2005년 말에 선수협 4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선수들의 권익신장을 위해서 한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활동이 없었다. 외국인 엔트리 확대 저지, 동대문야구장 철거 반대 운동 정도가 업적의 전부였다. 선수협 홈페이지에서 06, 07년 연혁을 보면 기겁을 할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2차 선수협파동 당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애초에 이종범이 구단과의 마찰을 부담스러워했다는것이고 둘째는 재임기간 2년이 야구인생 최악의 성적이었던만큼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빴다는데 있다.[10] 이 당시 이종범이 취한 미온적인 태도는 다음 회장인 손민한이 팬들의 반대까지 나올 정도로 초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된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종범의 선수협 회장 재임 당시 억대의 금전사고가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강병규 트위터에 따르면 이종범회장은 선수회비를 펀드에 투자 결정했고 그걸 모든 선수들에게 공표하지 않았고 결국, 손실처리난 억대의 금액을 쉬쉬하고 넘어갔으며 결국, 이종범은 회장으로서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 때, 손민한이 회장에 취임하며 전임 나진균 선수협 사무총장을 강제해임 하는 걸로 이 일을 마무리 짓고 8개구단 대표선수중 그 어느 누구도 금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선수협은 선수협 공금을 일부 고참 선수들에게 빌려주었던 사실도 문제가 되어 선수협 집행부의 자질 문제도 심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진균 전 사무총장[11]의 말에 따르면 펀드로인한 손실은 계약을 해지하는 과정에서 500만원 가량이라 하며 선수협이 펀드를 투자한것은 각 구단 대표 8인의 통보 빛 승인을 받은 사항이라고 한다. 강병규 역시 이후 인터뷰에서 억대의 손실을 600만원의 손실이라 말을 바꾸었으니 결국 본인도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꼴.
6. 해설 관련
2015년 4월 21일 두산과 넥센의 경기에서 해설을 맡았는데 한명재 캐스터, 정민철 해설과 함께 방송에서 했다는 게 믿을 수 없는, 편파적이다 못해 대놓고 두산을 싫어하나 싶은 발언들과 해설로서 부적격한 언행으로 논란이 되었다.당시 발언 내용이다.
- 2회 말
-
김지수 선수의 스퀴즈 장면 리플레이 때
: 염경엽 감독의 그런 눈빛을 보면 마야의 성격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아요.
조금 흥분시키면 지 혼자 무너지는 선수이기 때문에... (중략) 제가 잠시 언급했지만 이 친구 상당히 흥분을 진짜 빨리 하는 상태기 때문에... -
윤석민 선수에게 투런 허용, 이전에
정민철 해설이 "마야가 목동구장에서 방어율이 너무 높다"고 언급했었음.
정민철: 제 멘트 때문에 점수 준 건 아니죠?
한명재: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이종범: (굉장히 비꼬는 말투) 그런 건 아니에요, 실력이에요. -
윤석민 선수의 투런 리플레이, 빠던에 불편해하는 마야를 보고: 일단 한국에 왔으니까 한국 문화에도 적응을 해야 한다는 거죠.
(당시 한명재: 여기는 미국야구가 아니라, 메이저리그가 아니라 한국 야구잖아요.)
- 4회 말
- 저는 염경엽 감독하고 군대를 같이 나왔고, 여러분이 아는 그 선배의 따까리죠.
- 7회 말
-
두산의
유민상 선수가 데뷔 첫 1군 경기에 출전했는데 수비할 때 껌을 씹는 모습이 중계화면에 잡힘
: "저는 솔직히 저렇게 껌을 씹는다고 생각도 못 했는데.. 저 정도는 하면 안 되는 줄 알고 시합을 뛰었어요."
- 8회 초
-
덕아웃에서 종이접기를 하고 있는 두산 선수의 손이 중계화면에 잡히자 비웃으면서
한명재: 저기요, 오늘 선발투수 아닙니까?
이종범: 마땅히 할 일도 없구요...
한명재: 마야 아닙니까? 마야?
이종범: 네... 그런 좀 위안거리를 하나 삼으려나 봐요.
참고로 종이접기 하고 있던 사람은 마야가 아닌 니퍼트였다.
위의 말들은 이종범이 관련된 말만 쓴 것이고, 다른 중계진들이 한 말들도 많다.[12] 무슨 아프리카TV BJ도 아니고 방송사의 해설위원이라면 당연히 발언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날은 아예 망언대잔치 수준이었고, 경기 후 엠스플 시청자 게시판에는 난리가 났다.
이후 이종범의 아들 이정후가 넥센에 입단해 17시즌부터 주전이 되어 1군 붙박이가 된 뒤로도 죽 해설을 하게 되었는데 넥센전마다 이순철과 달리 칭찬과 잡담으로 일관했고, LG 대 넥센전에서 상대 만루홈런이 나오자 전 넥센 투수코치 손혁과 30초간 침묵하는 등 충분히 편파 논란이 일 해설을 해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정작 본인은 몇 년 뒤에 LG에 2군 감독으로 가게 되었다.
7. 기타
- 정준하가 은퇴파티 사진을 올리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관련 기사 술자리를 만든 취지는 좋으나 이종범의 은퇴과정에서 구단, 코칭진과의 마찰이 드러나고 은퇴식 일정도 불투명해 야구계 전체가 어수선할 때 이런 술자리 사진이 올라왔으니 좋게 볼리는 만무. 다만 이건 이종범의 잘못보단 이런 사진을 올린 정준하의 잘못이 크다. 애초에 논란이 가라앉은 후에 올라왔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만한 사진이다.
[1]
사전 행사가 길어지며 이미 경기 시작 시간이 지연된 상태였던 데다가 당시 행사 진행자였던 이창명이 장나라의 첫 시구가 엉뚱한 곳으로 가자 더 가까운 위치에서 한번 더 시구를 하자고 한 상태였다. 아마 이런 딜레이 때문에 열을 받고 홧김에 공을 쳤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다만 1997년 올스타전에서도 시구를 받아 친적이 있는데 이때는 타석에서 좀 벗어나 친 것을 보면 우발적으로 피하지 않고 쳤을 가능성이 있다.
[2]
당시 장나라는 본격적인 해외진출 전이었으나, 한국에서 발표한 음반과 드라마가 중화권과 동남아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가수로서, 또 배우로서 20대 한류스타로 물이 오를만큼 오른 상태였다. 특히 대만에서는 장나라 주연의 미니시리즈 <내 사랑 팥쥐>가 역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한국에서도 물론 KBS와 MBC를 포함한 각종 가요대상 수상을
보아와 양분하고 드라마까지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며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 장나라가 이런 어이없는 사건으로 부상을 당했다면 한국 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대형파문이었을 것이다.
[3]
전직 천하장사 출신
강호동은 전성기가 한참 지난 상태에도 힘이 범상치 않음을 보여주며,
추성훈이나
김동현 같은 격투기 선수들 역시 일반인보다 힘이 넘사벽으로 세지만 최소한 예능에서 대놓고 힘을 풀파워로 보여주진 않거나 당하는 역할을 자처하는 일이 많다. 왜냐하면 진짜로 힘을 쓰거나 기술을 과시하다 사람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선수의 이미지가 엄청 손상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렇게 했다간 운동선수들의 예능 진출은 힘들어질 것이다.
[4]
당시 서군 선발 라인업 중에 이종범이 최고참이었기 때문이다.
[5]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레전드 투수고, 체격은 상당히 마르고 호리호리했으나 타격 파워가 상당했고 투수로써 타격 실력이 엄청나서 타자로 키웠다면 매년 30홈런 이상은 문제가 없었을 거라는 평가도 많았다. 사실 호리우치가 이런 짓을 한 건 오가 유독 호리우치를 쥐잡듯 잡은 것도 있고, 호리우치가 당대 손꼽이는 돌아이인 탓도 있다. 오 사다하루의 투구를 호리우치 츠네오가 친 건 시구가 아니었다, 오 사다하루가 은퇴 시즌 직후 요미우리에서 팬 감사 이벤트성 홍백전을 코라쿠엔 경기장에서 했을 때다. 이 경기에서 호리우치는 은퇴한 레전드 오 사다하루에게 봐주는 거 없이 삼진을 잡았고, 이후 이닝이 교체되고 오 사다하루는 고등학생까지 투수였는데 이벤트성으로 투수 상대로 삼진 잡으라고 마운드에 올랐는데 호리우치가 냅다 초구에 홈런을 친 거다. 그러니까 경기 시작 직전에 공 던지는 시구를 친 게 아니라 은퇴 직후 이벤트성 경기에서 투타 대결에서 홈런을 친 게 맞다. 물론 레전드가 은퇴 세리머니를 하는 기념 경기였기에 봐주지 않았던 호리우치가 특이한 건 맞다. 그래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6]
그러나 영상의 댓글들을 보면 살짝 친 것이 아니라 풀스윙에 가까운 강력한 스윙이였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7]
당장 2009년
박용택이 타격왕을 하고도 졸렬택이라는 멸칭을 얻은 이유를 생각해보자.
[8]
이종범의 스승이기도 한
김응용 감독이 해태를 떠나 2001년부터 삼성의 감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삼성행을 원한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다만 주니치 임대 당시 해태로부터 임의탈퇴 공시되어 보류권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에 해태가 보류권을 풀어주거나 트레이드하지 않는 한 해태로 복귀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종범의 국내복귀는
기아자동차가 해태를 인수하고
KIA 타이거즈로 출범한 뒤 이루어졌다.
[9]
나이차이는 나지만 김기태 - 이승엽과 비슷한 경우. 그렇긴 한데 막상 이종범이 되돌아 온 시기는 이호성이 선수협 회장으로서 열심히 활동하다가 강제로 은퇴당한 시기였다는 점에서 구단의 압박이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10]
더군다나 이종범이 커리어 로우를 찍던 시기는, 기아가 이강철, 조규제, 마해영, 홍현우 같은 이종범의 선배들이나 동기, 후배들을 쳐내던 시기였다. 이종범 본인이 여기서 성적은 성적대로 안 나오면서 선수협 활동에 열중했다가는 팬들의 여론과는 반대로 리빌딩을 시도하던 구단의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1]
후일 사무국장으로 복귀했다.
[12]
한명재가 마야의 평균자책점이 오른 것을 보고 계속 웃으면서 해설을 한다거나(이 때 해설위원 세 명이 모두 웃었다.),
정민철이 넥센
박동원 선수가 뜬공 타구를 잡아보겠다고 열심히 뛰는 것을 보고 "허슬플레이를 의식하고 하는 것과 자의적으로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