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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영천 이씨(永川 李氏)[1] |
출생 | 1924년 2월 29일[2] |
경상북도 의성군 산운면 산운리 150번지 | |
사망 | 1992년 3월 23일[3]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36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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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았다.2. 생애
1924년 2월 29일 경상북도 의성군 산운면(現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150번지에서 아버지 이장복(李章福, 1870. 9. 5 ~ 1931. 3. 6)과 어머니 월성 박씨(月城 朴氏, 1885. 8. 15 ~ 1948. 2. 17)[4]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43년 10월 일제에 강제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파견되었고, 곧 호남성 형양시(衡陽市)에 주둔하던 일본제국 육군 6844부대에 배속되었다. 그 뒤 우연히 어느 일본군 병사[5]로부터 중경시(重慶市)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이 있다는 정보를 전해 듣게 되었다. 이에 한국광복군에 입대할 것을 결심해 권오복(權五福)· 배선두(裵善斗)·조일주·구칠성 등 전우들과 함께 소총과 식량을 마련했고, 1944년 3월 마침내 일본군 부대를 탈출했다.
이후 탈영병을 찾던 수색조의 감시를 피해 민가로 숨어 들었다가 일행이었던 권오복이 한문을 할 줄 알았기에 필담을 통해 현지 중국인들과 소통할 수 있었고 곧 국민혁명군 소속 지역 방위대원의 인도를 받아 국민혁명군 유격대에 편입되었다. 유격대 활동 중에 송태진 대좌가 이끄는 중국군사위원회 별동대 대원 300여명이 인근의 일본군 부대에 포로로 잡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한밤중에 일본군 점령지에 침투해 초병 2명을 대검으로 죽이고 포로를 구출하려다가 일본군에 발각되었다. 이에 교전 끝에 피신하다가 어느 성에서는 인질로 붙잡혀 군벌들에게 노예로 팔렸고, 강제노역에 투입되었다가 며칠 뒤에 풀려나는 등 갖은 고초를 겪고 마침내 1945년 4월 중경시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고, 총사령부 토교대(土橋隊)에 편입되었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光復軍總司令部 警衛隊)에 배속되어 4개월간 복무하면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던 중 1945년 8.15 광복을 맞았다.
그 뒤 1946년 6월 귀국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1992년 3월 23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92년 3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