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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지아 제8대 총리 이언 스미스 Ian Smi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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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언 더글라스 스미스 Ian Douglas Smith |
국적 |
[[영국령 남로디지아| ]][[틀:국기| ]][[틀:국기| ]] (1919~1965) [[로디지아| ]][[틀:국기| ]][[틀:국기| ]] (1965~1979) [[짐바브웨| ]][[틀:국기| ]][[틀:국기| ]] (1979~2007) |
출생 | 1919년 4월 8일 |
영국령 남로디지아 셀루케 | |
사망 | 2007년 11월 20일 (향년 88세) |
[[남아프리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케이프타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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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로디지아 총리 |
1964년 4월 13일 – 1979년 6월 1일 | |
가족 |
아내 자넷 스미스 (1948~1979) 아들 알렉 스미스[1], 제퍼슨 스미스 |
소속 정당 | |
주요 약력 |
로디지아 국회의원 남로디지아 부총리 채신부 장관 재무부 장관 외무국방부 장관 국방부 장관 무임소 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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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디지아 독립을 선포할 때의 모습[2] | 1965년 11월 5일자 타임 지에 나온 이안 스미스[3][4] |
2. 생애
2.1. 정치계 입문 이전
1919년 4월 8일에 남로디지아의 셀루케에서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아버지 조크 스미스와 어머니 애그니스 스미스
아버지 조크 스미스는 평생 광부, 목장 주인, 정육점 주인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고 지역사회에서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언 스미스 역시 정계 입문 전까지 아버지처럼 여러 직업에 종사하며 세상을 배웠다.
영국 공군 복무 시절의 이언 스미스.
남아프리카 연방 로즈 대학교를 다니다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영국군으로 복무했다. 당시 로디지아는 영국 식민지여서 영국과 함께 2차 대전에 참전한 상태였지만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황이었다.[5] 그럼에도 이언 스미스는 애국심과 스핏파이어를 몰고 싶어서(...) 공군에 지원했다. 유럽에 파병되기를 원했으나 처음에는 중동으로 파견되었다. 공군에서 스핏파이어를 처음부터 몰지는 못하고 허리케인을 몰다가 이집트에서 비행기 고장으로 추락하는데 턱과 다리와 어깨에 큰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얼굴 성형수술을 받고 재활을 거친 후에야 다시 참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상은 그를 평생 동안 괴롭혔는데 이 얼굴 부상 때문에 그는 일그러진 웃음을 갖게 되었고 오랫동안 앉아 있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1944년 5월부터 드디어 스핏파이어를 몰고 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하였다. 그러나 전쟁에 복귀한지 한 달만에 추락했으나 살아남았고 이탈리아 반군에 합류하여 독일군을 세 달 동안 공격했다. 독일군이 점령지역에서 패퇴하자 다른 군인 3명과 함께 알프스 산맥을 도보로 여행해 결국 미군에게 발견되었다. 구출 후 다시 전장에 복귀하여 독일 서부에 배치되었다가 제대하고 대학교에 복학한다.
2.2. 정치활동과 독재의 길
그 후 영국이 독립 준비 단계로 구성한 1953년 로디지아-니아살랜드 연방의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당선 당시 역사상 최연소 의원이었다. 1962년 백인 인종주의 우익 정당 로디지아전선(Rhodesian Front)을 창당했다. 연방을 구성하는 다른 식민지 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가 각각 흑인 정권의 잠비아와 말라위로 독립하자 그의 정당 로디지아전선(Rhodesian Front)도 남로디지아의 독립을 추진했다. 흑인 참여를 거의 봉쇄하는, 불공정한 선거제도와 선거에 참여한 백인 다수의 지지에 힘입어 로디지아전선은 의회에서 여당이 될 수 있었다. 1964년 이언 스미스는 남로디지아의 총리에 선출되어 독립을 준비했다. 그는 당시 로디지아 최초의 현지 태생 백인 총리였다.당시 로디지아는 공식적으로 흑인들의 참정권을 허락했지만 자격 요건이 높아서 극소수의 흑인만이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백인만 참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한편 영국에서 노동당이 총선에 승리하여 집권하자 새 영국 노동당 내각은 다수 흑인 지배 하의 독립을 제시했다. 이는 당시 전세계적으로 활발한 반(反)식민지 운동과 반(反)인종차별 운동을 의식하여 취해진 제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로디지아 정부는 본국 정부 제안을 흑인 지배 하의 독립은 콩고 내전과 같은 사회적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 제안을 거부했다. 1965년 이언 스미스 총리는 해럴드 윌슨 영국 총리의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는 경고를 뒤로 한 채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국제사회의 대다수 국가는 로디지아의 백인이 전체 인구 대비 5%로 극소수에 불과한 점을 지적하면서 승인을 거부했으며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는 경제제재를 부과했다. 그러나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백인 정부는 비슷하게 백인 지배 하에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의 지원이 있는 한 정권 유지가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무시했다.
1969년 로디지아는 백인 팀으로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에 나갔는데 원래 아프리카 팀으로 나갔어야 하는데 아프리카 축구연맹의 반대로 제3대륙으로 분류되어 아시아 팀과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1차 예선 상대는 한국,일본,호주인데 3개국 전부 로디지아 선수들의 비자 발급과 로디지아 원정을 거부하여 우선 서울 동대문에서 1차 예선을 하고 우승을 차지한 팀이 로디지아와 제3국에서 2차 예선을 치르는 것으로 했다. 당시 한국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주동이 되어서 결성한 양지 축구단이 국대의 주축이었다. 양지팀은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당시로서는 최신식 잔디구장과 소위 계급 봉급, 군복무 경력 인정 등의 특혜를 받았고 예선 직전에는 서유럽 등으로 수개월간 전지 훈련도 하는 등 온갖 정성에도 불구 호주전에서 임국찬 선수의 패널티킥 실축으로 무승부가 되어 결국 탈락했다. 한국을 이기고 올라간 호주는 마푸토에서 로디지아와 대결해 이겨 이스라엘과의 최종 예선에 진출했으나 이스라엘에게 패해 본선 출전권을 내주었다. 이 사건 이후 피파는 로디지아의 회원 권리를 정지하기로 하였다.
스미스는 훗날 정권이 교체되고 나서 "나는 흑인 정권 수립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정권의 수립에 반대했다"고 변호하였다. 그러나 이언 스미스는 총리 재임 시기 "로디지아를 만든 것은 백인이고 로디지아의 주인은 백인이며 백인이 계속해서 로디지아를 지배해야 한다"고 표명하였으며 1966년 영국의 다수 통치(흑인 통치) 시행을 세기 말까지 연기하는 첫 번째 양보안을 제시하자 이를 거부하고 1971년 영국의 다수 통치(흑인 통치) 시행을 무려 2031년까지 연기하는 두 번째 양보안도 무산시킨[6] 바 있다. 1976년 이언 스미스는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붕괴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강한 타협 권고 등 정권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도 백인 정권 유지를 재천명했다. "나는 절대로 다수 지배(흑인 지배)에 동의하지 않는다. 천년이 지나도." 저 발언이 있은 뒤에 그가 "우리는 로디지아가 흑인과 백인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흑인과 백인이 대립하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 "이언 스미스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백인과 흑인의 공존을 꿈꾸었을 뿐이다."라고 변호하는 주장도 있는데 발언 이전의 스미스의 행보는 그러한 주장과 잘 들어맞지 않았으며 흑인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7]
스미스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막기 위해서 백인 특권을 유지하려 했다고 했지만 그의 백인 우월주의 국가 수립은 내전을 유발하고 흑인들을 공산주의 세력에 기울게 했다. 1965년 영국 노동당 내각도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이언 스미스의 독립 선언에 반대하여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고 발언한 것이다.[8] 스미스 총리의 생각과 달리 내전은 정치적 양극화를 불러와 양대 게릴라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온건한 흑인 세력의 입지를 약화시켜 나중에 온건파 흑인 세력이 수립한 ' 짐바브웨 로디지아' 정부가 취약하며 불신받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2.3. 몰락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전선 정권은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과 흑인 저항 세력의 저항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온건파 흑인 세력과 협상했는데 1978년 3월, 흑인 세력 중 감리교 목사 아벨 무조레와(Abel Muzorewa)가 대표하는 온건파 흑인 세력과 협정에 서명했다. 1979년 1월, 협상 결과 도출된 새로운 헌법이 (전의 선거처럼) 거의 백인만 참가한 국민투표에서 85% 찬성으로 통과되었으며 1979년 4월 10일(백인 선거)과 21일(흑인 선거)에 치러진 총선에서 아벨 무조레와가 대표하는 온건파 흑인 세력이 급조한 정당 '연합아프리카민족회의'(United African National Council, UANC)가 전체 의석 100석 중 51석 과반수를 획득하여 승리했다. 1979년 6월 1일,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어 '로디지아'의 국명이 '짐바브웨 로디지아'로 변경되었으며 아벨 무조레와를 총리로 하는 신정부가 수립되었다.사실 이 협상과 새로 출범한 정부에는 문제가 적잖았다. 인구 5%밖에 안 되는 백인이 무려 의회 전체 의석의 28%(28석)를 보장받을 수 있었으며, 로디지아 총리였던 (무임소 장관으로 남은) 이안 스미스와 그의 로디지아전선은 여전히 군부를 장악한 채 정부를 배후 조종하다시피할 수 있었고 '짐바브웨 로디지아' 정부가 표방하는 정치·사회 개혁 정책은 너무 미진하여 흑인 대다수의 원의에 부합하지 않았다. 물론 양대 저항 세력이 협상에 불참했다는 것만으로 이 협상은 절름발이 신세에 머물 수 밖에 없었으며 근본적으로 백인 기득권을 최대한 유지하고자 마련된 ' 눈 가리고 아웅'식 협상에 불과했다.
1978년 협상에 응한 세력은 흑인 세력 중 상대적으로 소수파에 불과하였으며, 흑인 저항 운동을 주도하던 양대 세력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 - 애국전선'(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Patriotic Front, ZANU - PF)과 '짐바브웨아프리카민중동맹'(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은 이 합의를 인정하지 않고 항쟁을 지속했고 국제사회, 특히 미국 카터 민주당 정부가 이 협상 결과를 인정하지 않아서 고립 해소와 평화 정착에 실패했다. 결국 백인 기득권을 최대한 온존한 채로 정부 대표만 흑인으로 바꾸려던 이안 스미스의 구상은 실패한 것이다. 결국 영국 정부 중재 하에 양대 주요 흑인 저항 세력인 'ZANU - PF'와 'ZAPU'를 참여시킨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1979년 10월 18일 신헌법에 관해 협상에 참여한 세력 간 의견 접근을 이루었으며 1979년 12월 12일 '로디지아 짐바브웨' 정부가 해산하고 (총선과 신정부 출범 때까지) 임시로 환원된 '영국령 남로디지아'의 행정을 맡을 마지막 총독으로 영국인 소암스가 하라레에 도착했고 1979년 12월 21일 공식적으로 랭카스터 하우스 협정이라고 부르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1980년 신헌법과 랭카스터 협정에 근거한 총선을 실시하여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 - 애국전선'이 과반수 최다 정당이 되었으며 국명을 ' 짐바브웨'로 하는 신생 독립국이 4월 18일 탄생했다. 이안 스미스와 그의 정당은 여전히 남아 있는 백인 배당 의석을 통하여 20석의 의석을 획득했지만 전과 같은 영향력을 유지할 순 없었다. 1979년 12월에 짐바브웨의 무장독립운동을 총괄하던 로버트 무가베와 이안 스미스는 만나 서로를 정중하게 대하고 칭찬했지만 짐바브웨 독립 후 이안 스미스와 로디지아전선(RF) 영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군부에서도 영향력을 잃어 단지 백인 농장주들의 이해관계를 지키는 데 급급하게 되었다.
2000년 5월 하라레 자택에서. 81세의 모습이다.
이안 스미스는 로디지아전선(RF, 후에 '짐바브웨보수연맹'으로 당명 변경) 소속으로 7년 동안 의회 의원을 지냈지만 1987년 무가베 정권 비판을 구실로 의원직을 잃고 정계에서 완전히 퇴출되었으며 같은 해에 로디지아전선도 와해된다. 훗날 토지점거 사태 때와는 달리 영국과 미국은 크게 항의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때까지만 해도 무가베 정권이 비교적 시장 논리에 따라서 충실하게 경제를 운용하는 등 실정이 크지 않은 데다 경제 외 부문에서도 영국과 미국의 이해관계를 별로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언 스미스는 정계 퇴출 후 자신의 농장에서 칩거하며 지냈다. 1999~2001년 토지점거 사태로 인하여 그의 지지 기반이었던 짐바브웨 백인의 대다수가 짐바브웨를 떠났지만 자신의 농장은 (자신이 머물러 있던 동안에는) 점거되진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2005년 신병 치료를 명분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하였으며 짐바브웨로 돌아가지 않고 2007년 11월 20일에 케이프타운에서 뇌졸중으로 향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스미스를 몰아내고 집권한 무가베가 저지른 기괴한 독재가 많이 주목받지만 이언 스미스 역시 그와 별 다를 바 없는 독재자였다. 그리고 식민 지배를 당했던 흑인들에게는 무가베보다도 평가가 나쁘다. 집요한 반대파 탄압도, 특히 농촌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된 재판 없는 구금과 살해도, 다수 흑인의 빈곤 방치도 이언 스미스가 저지른 일이었다. 무가베가 권좌에서 쫓겨난 이후로도 격하당하지 않고 비교적 편히 죽은 것이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진 이유도 새 독재자의 보호와 더불어 권력에 미쳐 타락하기 전 흑인들을 억압하던 로디지아 정부와 백인 농장주들을 몰아낸 공적 또한 있기 때문이다.로디지아 자체가 그 당시 반인종주의와 탈식민주의라는 시대 흐름을 거슬러 블랙 아프리카의 백인 식민지 정착민 특권과 지배권 방어를 위하여 수립된 국가인 만큼 그 수반인 이언 스미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박하며 짐바브웨 흑인 국민 대다수에게는 더욱 그렇다. 로버트 무가베가 독재를 휘둘렀다지만 이언 스미스 역시 15%도 아닌 5% 백인의 이해를 위한 독재자였으며 로버트 무가베가 많은 사람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하지만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정부도 흑인 게릴라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많은 사람을 죽게 한 데 책임이 있고, 로버트 무가베가 짐바브웨를 가난하게 만들었다지만 이안 스미스 치하에서도 흑인 주민은 가난에 시달리며 사회복지에 있어서도 차별받았다.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독립 당시(1965년) 경제 지표가 좋았다지만, 이는 영국 본토의 지원과 그 당시 전세계적 경기 호조로부터 기인한 면이 적지 않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내전이 유발되어 경제 발전과 민생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내전으로 인한 경제 타격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포르투갈 및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원이 끊기거나 감소하면서 더욱 심해져 이언 스미스 정부가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서게 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서유럽과 미국 그리고 남아공의 백인 극우 사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당장 로디지아 전쟁 기간에 미국과 서유럽의 극우주의자 일부가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방어를 위해서 의용병이 되어 직접 현지에 가 참전한 경우도 있었으니만큼 이언 스미스와 로디지아의 패배는 이들에게 쓰라린 패배의 기억이다. 몰락한 처지[9]가 된 로디지아 백인을 대표했던 이언 스미스에 대한 동정이나 옹호 여론도 상당하다. 로디지아 붕괴 후 무가베의 실정은 이언 스미스를 두둔하거나 옹호하는 이들에게 딱 알맞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짐바브웨의 흑인들이 무가베의 기괴한 독재에 시달렸어도 대다수는 이언 스미스에 대한 재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10] 1990년대 말부터 무가베 정권의 실책이 두드러진 것을 계기로 영미권의 특히 일부 영국 보수 우익 평론가와 언론( 데일리 텔레그래프, 데일리 미러[11] 등)에서 '짐바브웨 흑인도 스미스와 백인 농장주들을 긍정 평가한다.'는 식의 주장을 유포해 왔으나 실제 현지 흑인 여론은 그렇지 않다는 반박도 있다. 영미권에서 실책으로 흔히 지적하는 토지몰수 문제만 해도, 서구와 적극적으로 화해하려는 에머슨 음낭가과 현 짐바브웨 대통령조차 여론을 무시하지 못하여 금전 보상만 약속하고 토지 반환에 반대하고 있다.
2022년 9월 18일 짐바브웨의 유명 저널리스트 호프웰 친오노(Hopewell Rugoho-Chin'ono)가 트위터 투표를 올린 바에 따르면 투표 참여자 중 무려 74%가 이안 스미스를 짐바브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뽑았다. 무가베는 21%, 음낭가과는 5%에 그쳤다. 친오노는 이에 대해 "식민지 지배의 고통을 겪은 우리들은 ZANU-PF가 이안 스미스보다 더 나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슬프다."고 평했다. #
[1]
200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진이다.
[3]
남로디지아 국기와 함께 블랙 아프리카의 백인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4]
사하라 이북 아프리카의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은 백인이라서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북쪽은 화이트 아프리카, 남쪽은 블랙 아프리카라고 부른다.
[5]
당시 로디지아는 영국
식민지 사이에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6]
"그러나 이 제안(영국의 두 번째 양보안)에 대한 여론조사 임무를 맡은 영국인 판무관은 다수 흑인 주민들이 이 제안을 결코 용인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합의안은 무산되었다. 반대 여론을 주도한 감리교 감독 아벨 무조레와 목사(훗날 잠시 '짐바브웨 로디지아'의 총리로 재임한 인물.)는 흑인 주민들 사이에 '억눌린 공포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침묵, 강요된 인내와 감춰진 증오' 등의 깊은 원한이 서서히 커져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저항에 주의를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보복 조치로 응수했다. 그는 흑인 주민들에게 합의를 무산시킨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더욱 가혹한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
[7]
오래 지나지 않아 이언 스미스는 우선 온건파 흑인 세력과 협상이라는 '내부' 해결책에 들어갔다. 하지만 협상 대상자 아벨 무조레와 감독조차도 "그러나 아벨 무조레와 감독은 스미스의 시도를 비웃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런 상황을 환영하는 듯이 꾸미게 하지 마라. 안타깝게도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권력을 넘기겠다는 약속을 내놓지 않으면 전 세계에 있는 우리 친구들(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로디지아를 버리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
[8]
영국 노동당은
소련에 부정적이었으며 공산주의의 파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반식민주의 세력에 양보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흑인 저항 세력 중 더 급진적인 세력이 부각될 것임을 우려하고 있었다.
[9]
1999-2001년 토지점거 사태에 짐바브웨 백인 농장주는 물론 백인 주민 대부분이 짐바브웨를 떠났다.
[10]
무가베가 실정을 저질렀다지만 이언 스미스의 정계 퇴출 한참 뒤인 1990년대 중후반까지도 비교적 충실하게 시장 논리를 거스르지 않고 경제를 운용했으며 영국 및 미국과의 관계도 그렇게 나쁘지 않는 등 상당기간 실정과 거리가 있는 국정 운영을 해왔다.
[11]
다만 이쪽은 진보 성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