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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목(1890)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수목
李壽穆[1]穆 또는 李穆이라고 표기한 문헌도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수묵(李壽默, 李守默)
응문(應文)
심재(心齋)·우당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2]
출생 1890년 8월 2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상매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3]
사망 1978년 2월 4일[4][5] (향년 87세)
경상북도 칠곡군
가족 장남 이두석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836호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05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90년 8월 2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상매동(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에서 아버지 이태영(李泰榮)과 어머니 전주 이씨[6] 사이에서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5년 음력 1월 15일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위장하여 박상진· 서상일 등이 국권회복운동을 펼칠 목적으로 결성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단원으로 입단해 단군대황조에게 제사를 드리고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기로 맹세했다. 그 뒤 자금모집과 선전활동을 담당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해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6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

1925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수차례 조달했으며, 1932년부터는 장남 이두석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44년 8월 10일 여운형· 조동호· 이상백 등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예지하고, 일본의 패망과 조국건설에 대한 논의를 거쳐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할 때 중앙조직의 재무부 담당자로서 자금조달 및 자금관리 등을 맡았다. 그 뒤 1945년 6월 예비검속으로 경기도경찰부 고등계에 구금되었다가 옥중에서 해방을 맞아 곧 출옥하였다.

이후 1978년 2월 4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별세하였다. 유해는 본래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이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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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첨정공파 21세 수(壽) 항렬. [3] 인근의 석전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달영· 이석· 이수각도 이 마을 출신이다. 매원리 418번지에 마찬가지로 독립유공자인 아들과 2대에 걸친 생가가 남아있다. 이수목·이두석 생가 [4] 음력 1977년 12월 27일. [5]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생가 앞 안내판에는 1948년 2월 2일로 기재되어 있는데, 안내판 자체에 오기가 많아 신뢰성은 다소 떨어진다. [6] 이상우(李相宇)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