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6 15:39:06

이극돈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좌리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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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년 3월 2일 성종에 의해 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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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우치 허종 황효원
1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한 제명, 1506년 중종 때 복권
2 1482년 성종의 인신을 위조해 남의 재산을 탈취한 혐의로 인한 제명
3 1504년 조카 이세좌와의 연좌로 인한 제명, 1511년 중종 때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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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克墩
( 1435년 ~ 1503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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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2. 생애

광주 이씨로, 세조때 우의정을 지낸 것으로 유명한 이인손의 넷째 아들. 이극돈의 할아버지는 청백리이자 참의를 지냈던 탄천 이지직, 이극돈의 증조 할아버지는 광주 이씨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둔촌 이집이다. 그의 집안은 위로 이집까지 3대, 아래로 5대를 내리 문과에 합격한 명가. 나머지 형제 넷도 고관 대작이 되었고, 이극돈의 조카와[1] 사촌 형제들도 모두 참판과 참의를 지냈다. 그의 광주 이씨 가문은 조선 전기 때 "팔극"이라 불렸을 정도로 상당한 이름을 날렸다.[2]

좌찬성의 자리에서 연산군을 충동질해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본질을 놓고 보면 상당히 억울한 인물. 심지어는 사화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간신이라는 이미지까지 덧씌워져 있다.[3]

전례에 밝고 사장(=문장)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로서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다 한다. 또한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해,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 한 때 추앙되었다 한다. 정밀함이 월등하여 연산 1년에 죽은 형 이극배도 난처한 일을 만나면 이극돈에게 물었다고 한다. 성종 실록의 사관들은 그가 판서(숭정대부 겸 경상도 관찰사)의 자리에 오르자 이극돈 정도의 인물이 그제야 이 자리에 오르다니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라고 출중한 능력에 비해 출세하지 못한다는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4]

김일손은 검증도 안된 비난성 소문을 너무 많이 실었던 사관으로, 그의 기록은 신빙성이 꽤 떨어지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무오사화 항목 참조. 일의 발단은 이극돈이 김일손의 이조좌랑 추천을 거부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그 이유로 김일손에 대해 평하기를 "사람이 경망스럽다."고 했다. 그러자 훗날 김일손은 이극돈에 대해 ' 정창손에 의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 그 출세한 전라도 관찰사 자리에서 정희왕후의 상중에 장흥군 기생과 놀아났다.' 등의 다분히 감정적인 비아냥거리는 기록을 사초에 남겼는데, 이에 이극돈이 얼굴을 붉히고 수정을 요청했다고 한다.[5] 김일손이 이극돈의 부탁을 워낙 단호하게 거절하자 이극돈이 다시는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김일손은 이극돈이 붕당을 획책한다며 귀양보내야 한다고 탄핵하여 이극돈이 파직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이극돈은 유자광이 사태를 키운 무오 사화에서도 "임금이 사초를 보게 되면 후세에 직필이 어려워진다"면서 세조를 까는 부분만 절취하여 올렸다.[6] 이걸 올린 것도 잘못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김일손의 스캔들성 사초에 대한 소문은 퍼질대로 퍼져있었고, 연산군은 분노해서 사초를 모두 가져오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김일손이 죄를 면할 방법은 전혀 없었으며, 이극돈은 실록청 당상으로서 그나마 희생자 수를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조의제문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무오 사화 이후로 그는 늦게 고한 죄로 파직되었으며, 이후 복권되어 광원군에 봉해졌으나, 정승은 지내지 못하고 연산 7년에 병조 판서만 지냈다. 연산 8년에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반려당했고 다음해 사직했다가 직후 절묘하게 죽었다. 연산군은 이때부터 광주 이씨 집안을 경계하게 되어 이후 갑자 사화 때 트집잡아 집안 자체를 멸문된 것과 다름없게 만들었다.

이 영향은 중종반정까지 미쳐 5대손인 이이첨까지 사림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이렇게 양쪽에서 공격받았고 중종반정 이후엔 더욱 지탄받은 불운한 인물.

조사관으로 부임했을때 "백성들이 흉년이어도 쌀밥만 찾고 곡식은 풍년일때 다 먹어치운다" 면서 개탄한 적이 있다. 그때 그때 즐기며 살기보단 지금 좀 덜 행복하더라도 미래를 생각하며 살자는 뜻이다.[7]

남곤의 경우처럼 그의 서자들이 잡과에 응시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의외로 성종 ~ 중종 조에는 잡과에 대한 대우가 박하지 않았다"라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8] 물론 어디까지나 서자가 문과를 볼 수 없기에 그리 한 것이겠지만. 실제로 당시 서얼의 문과응시는 전면 금지되어 있었고, 잡과는 천민 출신도 볼수 있었다.
[1] 대표적인 것이 예조 판서를 지낸 이세좌인데 공교롭게도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배달한 장본인이다. 이세좌의 손자가 영의정까지 오른 이준경이다. [2] 광해군 시대의 주요 인물이었던 이이첨은 그의 고 손자(5대손)이며, 이덕형 이극균의 오대손이다. 이극균은 이인손의 막내 아들이다. 작은 형인 이극감의 집안에서는 아들 이세좌의 손자로 이준경, 이윤경 형제가 나왔다. 이들은 아이 때 갑자 사화로 죽지는 않고 귀양을 갔다. 훗날 이준경은 명종 말 ~ 선조 초 때에서 대표적인 원로 신하가 된다. [3] 조선 왕조 실록 중종 2년부터 이극돈을 대대적으로 처벌해야한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결국 고신을 뺏기고 만다. [4] 성종 말에 이극돈은 가선대부(종2품)에 있었는데, 조카인 이세좌의 가정대부와 급이 같았다(정확히는 가정대부가 조금 더 높다! 즉 조카보다도 더 낮은 지위에 있던 것이다.). 후에 정승을 내리 지내다 갑자 사화에 죽는 이극균은 네 단계 높은 숭정대부(종1품)였다. [5] 한문을 직역한 거라 그래도 고상하게 쓰여 있지만, 지금 말로 번역하면 선배 관료에게 아첨을 해대서 출세하고,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자마자 그곳에서 국상 중에 개념없이 유흥을 즐겼다는 의미로, 진짜도 아니고 확인도 안된 소문을 적어서 길이길이 역사에 남을 국가 공식 서류에 적었다는 말이다. [6] 사실 그가 찾아낸 사초에는 조의제문은 없었다. 여기서 나오는 "카더라"들만 하더라도 대다수 신빙성이 없는 것들로, 단종의 시체를 한 동자가 찾아냈다는 설화를 그대로 올린 것도 그렇다. 후에 유자광이 찾아낸 것이다. [7] 당대 조선인들의 식사량은 동북아 3국 중에서 제일 많았다. [8] 실제로 성종은 무신이나 잡과 출신자들에게 문관직들을 꽤나 제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