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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윤준희(尹駿熙, 尹儁熙) |
출생 | 1892년 12월 26일 |
함경북도 회령군 보을면 남산동 | |
사망 | 1921년 8월 25일 |
서대문형무소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서훈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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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윤준희는 1892년 12월 26일 함경북도 회령군 보을면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것을 지켜본 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가서 이상설이 설립, 경영하던 서전서숙(瑞甸書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용정에 있던 영신학교(永新學校) 교원으로 봉직하였으며, 한상호, 임국정, 최이붕 등 동지들과 함께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하고 북로군정서에 가입했다.이후 북로군정서의 특파대장에 임명된 그는 동지들과 함께 간도 와룡동에 소재한 김하석(金河錫)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을 방법을 논의했다. 이때 김하석이 조선은행 화령지점에서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로 수시 송금하고 있다며, 이를 습격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윤준희 등은 송금하는 일시를 알아낸 뒤 이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충당하기로 결의하고, 조선은행 회령 지점원인 전홍섭을 포섭하여 동지로 가입시키고 박웅세, 김준(金俊) 등을 새 동지로 포섭했다.
얼마 후, 전홍섭이 1920년 1월 4~5일에 조선은행이 15만원을 용정으로 송금하려 한다고 알렸다. 이에 윤준희는 1월 4일 김준, 박웅세와 함께 1조가 되어 각기 권총과 마승(麻繩)·철봉 등을 갖고 먼저 떠났다. 그리고 한상호, 최이붕, 임국정 등은 2조가 되어 역시 무기를 휴대하고 용정촌 쪽으로 2리 쯤 떨어진 화룡현 동양리 버드나무 숲에서 매복했다.
윤준희 등은 회령에서 은행 돈 수송대가 오는지를 정찰하던 중 무장한 일본 경찰 3명이 2필의 말 잔등에 현금을 싣고 마부를 재촉하면서 오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윤준희는 박웅세, 김준과 함께 그들을 향해 권총을 10여 발 발사하여 일본인 순사 장우가상차(長友嘉相次)와 진길풍(陳吉豊)을 사살하고, 그들이 지니고 가던 현금을 탈취했다. 그 돈은 5원권 10만원과 10원과 5만원으로 합계 15만원에 달했다.
이후 윤준희는 1월 5일 최이붕과 함께 의란구 유락구로 이동해 김사헉과 만났다. 그리고 1월 10일 그 돈을 가지고 각처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들어가서 체코슬로바카이 제 총기류들을 다량 구입하여 북로군정서에 제공했다. 그 결과 북로군정서는 상당히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일본군에 대항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할 수 있었다.
용정의 일본 영사경찰은 중국 경찰과 합동으로 이 사건을 수사했다. 윤준희는 동지들과 함께 이를 피해 각저를 피신했다. 그러나 1920년 12월 밀정 엄인섭[1]의 밀고로 인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상호, 임국정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후 윤준희는 일본헌병대에서 악형을 당하고 청진으로 압송된 뒤 청진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잇달아 사형판결을 받고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윤준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6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