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colcolor=#000> 유원준 兪元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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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9년 10월 19일 |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 |
사망 | 1998년 6월 30일(향년 78세) |
평양시 | |
전직 |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 |
주요 서훈 | 공훈배우, 인민배우, 김일성훈장, 로력영웅, 국기훈장 1급 |
학력 | 조선로동당 중앙간부학교 |
활동 | 1949년 ~ 19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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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영화배우.로력영웅을 받은 몇 안되는 영화배우이며 김룡린, 엄길선, 최창수와 함께 가장 위상 높은 북한의 남성 배우이다.
2. 생애
1919년 함흥 태생이다.다른 월북 예술인들[1]과는 달리 국민학교 교원을 하다가 광복 후에 조선로동당 중앙간부학교에서 공부하고 극장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북한에 영화촬영소가 세워지고 첫 극영화 '내 고향'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영화배우로는 거창한 시작을 하게 된다.
월북 예술인으로서 우여곡절도 많았지만[2]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정치적 생명'은 깨끗했고 90년대 말까지 쭉 활동했다. 북한 영화 중 명작들에도 다수 출연했다.
또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배려도 많이 받은 편으로, 김일성은 유원준이 북한의 첫 영화에서 주인공을 한 배우이니만큼 외국 수반이 오거나 하면 자신이 아는 배우라고 자주 칭찬했다고 하며 김정일은 1966년 1월 19일에, 만난 기념으로 서로의 사진을 교환하고 사진 뒷면에 친필을 새겨주었다.[3] 또한 유원준이 죽었을때도 칭찬의 교시를 내렸다고 하는데, 북한의 특성 상 이들의 한마디 칭찬이 아무에게나 돌아가는게 아닌 만큼 북한 기준으론 상당히 성공한 인생이다.[4]
이렇듯 열심히 활동해서 1977년 인민배우 칭호를, 1987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이것만 해도 북한에서야 대단한 배우가 된것이지만 말년에 민족과 운명 로동계급편에 주인공으로 출연한것이 대박을 치게 되면서 유원준의 평가도 급상승 하게 되어 로력영웅이 되었다.
이미 민족과 운명을 찍을 때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던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아 1998년 6월 30일 사망했다.
3. 출연작
- 내 고향(1949) - 관필 역
- 신혼부부(1955)
- 대지의 아들(1963~1964)
- 최학신의 일가(1966) - 최학신 역
- 밝은 태양 아래에서(1969)
- 산정의 수리개들(1975)
- 대지에 뿌리내린다(1976) - 인국 아버지 역
- 춘향전(1980)
- 열네번째 겨울(1980) - 리당비서 역
- 불타는 마음(1983) - 박성재 역
- 평범한 사람(1985)
- 공장의 주인들(1985) - 간부 역
- 위대한 품(1986) - 김구 역
-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1987) - 차로인 역
- 북산땅의 주인들(1987) - 용섭 역
- 자신에게 물어보라(1988) - 당비서 역
- 림꺽정 3부~5부(1988) - 윤원형 역
- 잊을수 없는 추억(1989) - 득범 역
- 심장에 남는 사람(1989) - 고덕준 역
- 님을 위한 교향시(1991) - 문주교 역
- 하랑과 진장군(1992) - 견원도사 역
- 민족과 운명 로동계급편(1995~1998) - 강태관 역
- 나의 교훈(1998) - 우기석 역
[1]
해방 전에 사회 생활 또는 예술 활동을 하다가 북한으로 넘어간 이들
[2]
물론 유원준은 숙청된적은 없다.
김세영,
유경애,
김선영, 박학 등과 함께 끝까지 살아남은 영화인 중 하나이고
문예봉도 촬영소에서 나갔을 뿐 출당이나 수용소에 끌려가지는 않았으니 살아남은 영화인으로 볼 수 있다.
[3]
당연히 북한에서 김정일의 친필은 가보 중의 가보이고 유원준이 죽었을때 아마 사적관 같은 곳으로 옮겨 전시했을것이다.
[4]
김정일이 영화 촬영소에 뻔질나게 드나들어서 영화배우는 직접 김정일을 만나본 사람이 많은 직종이기는 하다. 일반 사회에선 그들을 만나본것 자체가 대단한 자랑거리이고 기록이지만. 이런 우상화의 지경이니 김정일의 지시로 가구가 들어온다거나, 생일상을 준다거나 하는게 아닌, 김정일의 손으로직접 준걸 받았다는건 우상화의 극치인 북한에서 아무나 받는게 아닌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