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colcolor=#fff> 자 | 경옥(景玉) |
본관 | 전주 류씨[1] |
출생 | 1857년 5월 8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수곡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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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9년 9월 25일 (향년 62세) |
경상북도
대구부
삼립정 대구형무소 (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2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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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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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유연박(柳淵博)은 그의 이복 형이다.
2. 생애
유연성은 1857년 5월 8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수곡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서 종4품 간성군수를 지낸 아버지 유지호(柳止鎬)와 어머니 달성 서씨 서윤모(徐允模)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3] 조부는 1805년( 순조 5) 증광시 문과에 병과 19위로 급제하여 # 종2품 병조 참판에 오른 정재 유치명(定齋 柳致明)이다. 이후 임하현 전시곡리(현 안동시 예안면 계곡리 찰앞시골마을)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그는 1919년 3월 15일[4] 편항 시장에서 유동수를 만나 전국에서 3.1 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니 우리도 이 틈을 타 독립만세를 부르고 관청을 파괴하면 반드시 조국이 독립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여 그의 찬성을 얻었다.
이후 유동수, 유교희, 박재식, 박진선(朴晋先)·이강욱(李康郁) 등과 함께 편항시장내의 공동타작장에 모여서 그 달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그 진행방법으로서 만일 일본경찰이 제지하면 편항주재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각각 인근지역의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여 동참하도록 하고, 자신은 대곡동과 위동을 담당했다.
3월 21일 오후 2시경, 500여명의 군중이 편항시장에 모이자, 그는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이때 주재소에서 2명의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그를 강제로 체포해 갔다. 그리하여 1919년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건물 손괴·가택침입·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7년형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판결을 받았고, 상고를 준비하던 1919년 9월 25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유연성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