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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묘 및 신도비 | 성녕대군묘 및 신도비 |
고양시의 향토문화재 제1호 | |
월산대군 묘 및 신도비 月山大君 墓 및 神道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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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호국로 ( 신원동 ,산16-35) |
분류 | 유물 |
수량 / 면적 | 1点 |
지정연도 | 2008년 5월 8일 |
시대 | 조선 시대 |
관리자 (관리단체) |
도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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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 월산대군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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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묘역에 있는 신도비 |
[clearfix]
1. 개요
조선 의경세자의 장남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묘이다.2. 묘
3.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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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 월산대군 신도비 상형문자 제액 |
월산대군이 사망하고 1년 뒤인 1489년(성종 20년)에 성종의 명으로 세웠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신이 있고, 제일 윗 부분에 이무기와 구름 등이 화려하게 장식된 머릿돌이 있다. 비신의 높이는 218cm, 폭은 94cm, 두께는 32cm이며 머릿돌의 높이는 90cm이다.
임사홍이 비문과 전액을 썼는데 전액의 '월산(月山)' 부분을 상형문자처럼 달과 산 모양으로 적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비신에 적힌 본문은 현재 거의 마모되어 읽기 힘들다.
3.1. 신도비명
조선국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월산대군 증시 효문공 신도비명과 서문. 절충장군 행충무위 대호군 임사홍(任士洪)이 왕명을 받아 지음.
전(傳)에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고 했다. 그러나 안회(공자의 제자) 같은 사람은 단명(33세)하고, 도척이 장수한 것을 보면, 오래 산 사람이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고 어진 사람이 반드시 오래 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그 이유를 궁리한 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 월산대군을 보니 더욱 유감스럽고 슬픈 마음 금할 수 없다.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린 훌륭한 성인으로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처럼 준철해서 정성과 효성으로 양궁(兩宮)을 모시고 있다. 또 지극한 인자함으로 일가친척을 친하게 대해 덕은 아랫사람에게 미치고 백성들은 믿음으로 따라 요순시대 같은 태평성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야흐로 천륜의 즐거움을 펴려고 할 때 대군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누가 생각이나 했겠으며 어떻게 슬픔을 멈출 수 있겠는가? 장례가 끝난 지 달포 뒤 전하께서 내게 하교했다. “내게 형 한 분뿐인데 홀연히 구천으로 떠나버리니 창자가 찢기는 듯하나, 겉으로는 억지로 참고 있다. 아무리 부의를 많이 보내고 증직을 해주며 제사를 부지런히 지낸들 내 곡진한 정이 없어지지 않으니 사람들의 이목에 들어온 형의 덕행을 글로 지어 돌에 새겨 신도비를 세워 없어지지 않게 하라.” 그리고는 내게 명(銘)을 지으라고 명했다. 나는 황급히 실상을 가려내 글을 지었다.
대군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정(婷)은 이름이다. 전하의 형으로 경태(景泰) 갑술년(1454년) 12월 18일 갑오일에 출생했다.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게 훌륭하고 총명함이 남달라 세조가 애지중지하여 궁중에 두고 기르면서 사어서수(射御書數)를 직접 가르쳤다. 전하가 성장하면서는 같이 거처하고 같이 놀게 하여 크고 작은 행차에는 뒤를 따르게 했으며, 가끔 궁중에서 놀이가 벌어져 함께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고 웃곤 했다.
천순(天順) 경진년(1460년) 대군의 나이 7살 되던 해에 월산군에 봉해지고 정의대부의 자급이 내려졌으며 임오년(1462년)에는 중의대부로, 성화(成化) 을유년(1465년)에는 흥록대부로, 무자년(1468년)에는 현록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신묘년(1471년)에 월산대군에 봉해졌는데 전하가 등극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같은 해에 조정에서 논열하여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에 책봉되었다.
대군의 고아한 성품은 고요하고 맑아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음악과 사냥 같은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서사(書史)에 파묻혀 지냈다. 이미 대의(大義)를 터득하고 소장하고 있는 백가자집을 두루 섭렵한 것도 부족하여 새로운 책이나 알려지지 않은 글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기어이 사서 구했다. 구한 책은 등불을 켜놓고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었다.
문장은 정치하고 순수하며 맑고 아름다워 율격이 높아 자못 위진(魏晉)의 풍미가 있었으므로 당대의 문인과 시인들이 “우리나라의 왕자와 왕손 중에 일찍이 이렇게 훌륭한 솜씨는 없었다.” 고들 하면서 탄복했다. 여러 사람들의 시를 차운한 한도십영(漢都十詠)은 강한 운을 적절하게 눌렀고 시어는 예스럽고 뜻은 원대하여 풍치가 유달랐다. 이것 하나만 봐도 다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상물사회(狀物寫懷-사물을 묘사함으로써 자기의 생각을 드러냄)에 있어서도 자기만의 기틀이 있어 옛날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를 답습하지 않았으므로 한번 읽으면 잊혀지지 않았다.
저술한 시문 약간은 전하와 주고받은 내용들로 우애의 정이 베어있다. 왕이 자주 대군의 집을 방문했는데 집안사람을 대하는 예로 접대하니 어렸을 때처럼 즐거워하며 수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왕이 대군의 집 서쪽 정원에 있는 정자에 가서 정자 이름을 ‘풍월’이라고 지어주고 친히 오언 율시의 근체시(近體詩)를 지은 다음 측근 신하들에게도 시를 짓게 했다. 이런 일 역시 특별한 은총이었다. 대군은 본래 산수를 좋아하여 고양의 북촌에 별장을 두고 시간 날 때마다 가서 구경하며 시도 읊으면서 흥취를 붙였다. 왕이 그것을 알고 중관에게 술을 들려 보냈다.
병신년(1476년) 사신으로 온 명나라 호부시랑 기순(祁順)이 대군의 거동과 풍모가 매우 한가하면서도 단정하고 예절이 있는 것을 보고 특별히 좋아하고 공경하여 시를 지어주었다. 계묘년(1483년) 봄 정희대왕대비와 인수대비, 인혜왕대비가 함께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대군이 호종하게 되었다. 대군은 이씨의 본향인 전주에 있는 태조의 영정에 참배하라는 왕명을 받았다. 대군의 풍도를 멀리서 바라본 남방의 백성들은 모두들 감탄했다.
조정의 신하들은 길에서 왕자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공수하고 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대군은 사전에 행차를 알려 피해 가게 했다. 전에 문소전과 종부시의 제조를 맡겼으나 기어이 사양한 적도 있어 세상 사람들은 그 겸양하는 미덕을 칭찬했다.
천성이 조심스럽고 근신하여 매일 아침 왕에게 문안을 드렸는데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거르는 일이 없었으며, 간혹 활쏘기를 같이 하거나 조용히 정담을 나눌 때 아무리 만취했더라도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평생 문사들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함부로 사귀지는 않아 집안이 조용하고 수레나 말이 왕래하지 않았다.
홍치(弘治) 원년(1488년) 9월 인수왕대비의 병이 심해져 궁 밖으로 나와 여러 집을 옮겨 다니면서 치료하게 되었다. 대군이 온종일 마음을 졸이며 침식도 잊고 탕약에 힘쓰다가 자기도 병에 걸렸다. 궁액(宮掖)들이 놀라고 문병객이 줄을 잇자 모시는 사람들이 거처를 옮기라고 권했다. 며칠 지난 뒤 대군은 자기 병에 차도가 없는 것을 알고 속히 집으로 돌아와 처방전을 찾아 증세를 알고자 했다. 모시는 사람이 일부러 지체하며 주지 않자 대군은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처방전을 본다고 마음이 달라지겠느냐?” 하고 말했다. 처방전을 본 뒤 부인 박씨에게 말했다. “내가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사별을 해야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는 왕의 얼굴을 뵙지 못하겠구나.”라고 말한 뒤 한참 동안 오열하다 담담하게 서거했다.
왕이 대군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 가보려고 차비를 하고 있던 중 중관이 달려와 때가 이미 늦었다고 보고했다. 왕은 너무 슬퍼 어찌할 바를 몰랐고 신하들로부터 거리의 백성들까지 애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날짜는 1488년 12월 21일 이었다. 조정과 저자를 사흘간 닫았고, 태상시(太常寺-시호를 주관하는 관서)에서는 ‘효문’이라는 시호를 정했으며, 부의는 다른 때보다 두 배를 내렸고 장례를 지내는 도구도 필요한 대로 쓰도록 했다. 또 대신에게 장지를 잡으라고 명하여 고양 별장의 서쪽에 정했다. 이것은 왕이 애도하는 마음에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결과였지만, 대군이 마련한 별장 곁에 자기의 영혼이 쉬게 되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왕과 대비는 길지를 얻었다고 좋아하고 특별히 청성군 한치형(韓致亨)에게 일을 맡겼다.
기유년(1489년) 3월 3일 경신일에 백관이 참여한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부인 박씨는 평양군 중선(仲善)의 딸로 현숙했다.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곡하면서 종신토록 변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작은 부인에게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생각해보니 대군은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지혜가 밝고 총명한 데다가 학문까지 갖추었기 때문에 성취한 것이 남달랐다. 귀하기는 왕의 아들이고 높기로는 왕의 형님으로 왕의 사랑을 받고 삼궁(三宮-정희, 인수, 인혜대비)의 총애를 받았으니 성덕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수명이 길지 못한 것이 애석할 따름으로 내가 하늘의 이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가 전에 양한(兩漢)의 “제왕전(諸王傳)”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중위 상려(常麗)가 하간왕(河間王) 덕(德)에 대해 “몸가짐은 단정하고, 행실은 온화, 인자, 공손, 검소, 독실, 공경하며, 선비를 밝게 보고 깊이 살폈다.” 고 칭찬했다. 대행령(봉상시와 같음)이 시호를 짓는 법에 대해 “총명하고 예지가 있는 것을 헌(獻)이라고 하니 마땅히 헌으로 시호를 정해야 합니다.”고 했다. 반고(班固-한나라 역사가)는 이에 대해 “크게 고아하여 뛰어나게 탁월한 사람으로는 하간 헌왕이 근접할 것이다.”하고 찬(贊)을 썼다.
장제(章帝-후한 3대 황제)가 동평왕 창(東平王蒼)을 책봉하면서 “왕을 도와 예에 벗어난 일이 없었고 전교를 들을 때는 아래 서서 들었다. 하늘이 자애롭지 못해 위로 보답하지 않았다.” 범엽(후한서를 지음)은 이에 대해 논했다. “공자는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자이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것이,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자이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 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동평 헌왕이야말로 예를 좋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소견으로는 대군은 사실 두 가지를 다 겸했으나 자제들만은 많이 부족했다. 재주가 부족한 내가 감히 두 왕의 어진 점을 칭송하면서 대군에게 빗댄 것은 오래오래 그 덕을 드날리게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나 역시 반고와 범엽을 사모하여 삼가 머리 숙여 본떠서 비문을 짓고 명을 붙이기는 했지만, 전하의 돈독한 우애에 들어맞지 못할까 심히 두려울 뿐이다.
명왈(銘曰), 하늘이 조화를 맡아 선악이 갈라지니
덕을 주었으면 수명도 줘야 하는 법
때로 고르지 않아 이치 알기 어렵네
개국한 이래로 성자 신손 계승하고
훌륭한 왕족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누가 대군처럼 재주와 덕 겸했는가?
대군이야말로 세운 뜻 높고 높아
공명을 멀리하고 경서만 탐했네
백가를 섭렵하고 박약으로 귀결하여
문장을 지으면 옥구슬을 꿴 듯하네
크나큰 솜씨도 손이 굳고 한숨이라
뛰어난 묘구 ‘한도십영’에 있다네
임금의 글과 시 공에게만 지어주고
화답하라 명하니 우애 생각함이라
우애는 말이 되고 글로써 즐기니
두터운 은우 힘으로 못 이기네
공경한 마음 교만하지 않는 안색
널리 소문나 온 조정에 퍼졌고
거동은 얼음 항아리 속 옥 같고
봄바람 같은 보살핌 따뜻한 은혜
모두 좋아하여 사신도 감복하네
벼슬은 세상이 영화로 여기는 일
공은 그렇지 않아 굳이 사양하니
겸양의 미덕은 청사에 빛나리라
매일아침 하는 문안 거르지 않고
한 발짝 움직임도 법도를 따랐네
절도 있는 행의는 고금에 드물어
동평왕의 착함과 하간왕의 어짐
그 이름 드높아 뉘 감히 비기랴?
천년 뒤 여기 공이 다시 있어
신성한 우리 임금 효로 다스리고
우애하여 체화(형제간의 우애) 더욱 빛나네
갑작스런 재앙 하늘의 뜻이나
임금의 정 어찌 두고 떠나는가?
구천에 위로삼아 묏자리 잡으니
그곳 어디인가? 고양 북쪽이라
무성한 풀에 나무는 빽빽하고
산과 물 돌고 감아 마땅한 유택이라
어제의 별장이 오늘은 현궁이니
미리 정했다면 하늘과 통함이라
영원히 평안하길! 높다란 무덤
왕명으로 비 세워 빛나는구나
살아서의 영광 죽어서의 슬픔
천년만년 그 아름다움 퍼지리라
부족한 글로 덕을 써 전하노라
홍치(弘治) 2년 기유년(1489년) 월 일
전(傳)에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고 했다. 그러나 안회(공자의 제자) 같은 사람은 단명(33세)하고, 도척이 장수한 것을 보면, 오래 산 사람이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고 어진 사람이 반드시 오래 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그 이유를 궁리한 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 월산대군을 보니 더욱 유감스럽고 슬픈 마음 금할 수 없다.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린 훌륭한 성인으로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처럼 준철해서 정성과 효성으로 양궁(兩宮)을 모시고 있다. 또 지극한 인자함으로 일가친척을 친하게 대해 덕은 아랫사람에게 미치고 백성들은 믿음으로 따라 요순시대 같은 태평성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야흐로 천륜의 즐거움을 펴려고 할 때 대군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누가 생각이나 했겠으며 어떻게 슬픔을 멈출 수 있겠는가? 장례가 끝난 지 달포 뒤 전하께서 내게 하교했다. “내게 형 한 분뿐인데 홀연히 구천으로 떠나버리니 창자가 찢기는 듯하나, 겉으로는 억지로 참고 있다. 아무리 부의를 많이 보내고 증직을 해주며 제사를 부지런히 지낸들 내 곡진한 정이 없어지지 않으니 사람들의 이목에 들어온 형의 덕행을 글로 지어 돌에 새겨 신도비를 세워 없어지지 않게 하라.” 그리고는 내게 명(銘)을 지으라고 명했다. 나는 황급히 실상을 가려내 글을 지었다.
대군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정(婷)은 이름이다. 전하의 형으로 경태(景泰) 갑술년(1454년) 12월 18일 갑오일에 출생했다.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게 훌륭하고 총명함이 남달라 세조가 애지중지하여 궁중에 두고 기르면서 사어서수(射御書數)를 직접 가르쳤다. 전하가 성장하면서는 같이 거처하고 같이 놀게 하여 크고 작은 행차에는 뒤를 따르게 했으며, 가끔 궁중에서 놀이가 벌어져 함께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고 웃곤 했다.
천순(天順) 경진년(1460년) 대군의 나이 7살 되던 해에 월산군에 봉해지고 정의대부의 자급이 내려졌으며 임오년(1462년)에는 중의대부로, 성화(成化) 을유년(1465년)에는 흥록대부로, 무자년(1468년)에는 현록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신묘년(1471년)에 월산대군에 봉해졌는데 전하가 등극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같은 해에 조정에서 논열하여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에 책봉되었다.
대군의 고아한 성품은 고요하고 맑아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음악과 사냥 같은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서사(書史)에 파묻혀 지냈다. 이미 대의(大義)를 터득하고 소장하고 있는 백가자집을 두루 섭렵한 것도 부족하여 새로운 책이나 알려지지 않은 글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기어이 사서 구했다. 구한 책은 등불을 켜놓고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었다.
문장은 정치하고 순수하며 맑고 아름다워 율격이 높아 자못 위진(魏晉)의 풍미가 있었으므로 당대의 문인과 시인들이 “우리나라의 왕자와 왕손 중에 일찍이 이렇게 훌륭한 솜씨는 없었다.” 고들 하면서 탄복했다. 여러 사람들의 시를 차운한 한도십영(漢都十詠)은 강한 운을 적절하게 눌렀고 시어는 예스럽고 뜻은 원대하여 풍치가 유달랐다. 이것 하나만 봐도 다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상물사회(狀物寫懷-사물을 묘사함으로써 자기의 생각을 드러냄)에 있어서도 자기만의 기틀이 있어 옛날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를 답습하지 않았으므로 한번 읽으면 잊혀지지 않았다.
저술한 시문 약간은 전하와 주고받은 내용들로 우애의 정이 베어있다. 왕이 자주 대군의 집을 방문했는데 집안사람을 대하는 예로 접대하니 어렸을 때처럼 즐거워하며 수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왕이 대군의 집 서쪽 정원에 있는 정자에 가서 정자 이름을 ‘풍월’이라고 지어주고 친히 오언 율시의 근체시(近體詩)를 지은 다음 측근 신하들에게도 시를 짓게 했다. 이런 일 역시 특별한 은총이었다. 대군은 본래 산수를 좋아하여 고양의 북촌에 별장을 두고 시간 날 때마다 가서 구경하며 시도 읊으면서 흥취를 붙였다. 왕이 그것을 알고 중관에게 술을 들려 보냈다.
병신년(1476년) 사신으로 온 명나라 호부시랑 기순(祁順)이 대군의 거동과 풍모가 매우 한가하면서도 단정하고 예절이 있는 것을 보고 특별히 좋아하고 공경하여 시를 지어주었다. 계묘년(1483년) 봄 정희대왕대비와 인수대비, 인혜왕대비가 함께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대군이 호종하게 되었다. 대군은 이씨의 본향인 전주에 있는 태조의 영정에 참배하라는 왕명을 받았다. 대군의 풍도를 멀리서 바라본 남방의 백성들은 모두들 감탄했다.
조정의 신하들은 길에서 왕자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공수하고 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대군은 사전에 행차를 알려 피해 가게 했다. 전에 문소전과 종부시의 제조를 맡겼으나 기어이 사양한 적도 있어 세상 사람들은 그 겸양하는 미덕을 칭찬했다.
천성이 조심스럽고 근신하여 매일 아침 왕에게 문안을 드렸는데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거르는 일이 없었으며, 간혹 활쏘기를 같이 하거나 조용히 정담을 나눌 때 아무리 만취했더라도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평생 문사들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함부로 사귀지는 않아 집안이 조용하고 수레나 말이 왕래하지 않았다.
홍치(弘治) 원년(1488년) 9월 인수왕대비의 병이 심해져 궁 밖으로 나와 여러 집을 옮겨 다니면서 치료하게 되었다. 대군이 온종일 마음을 졸이며 침식도 잊고 탕약에 힘쓰다가 자기도 병에 걸렸다. 궁액(宮掖)들이 놀라고 문병객이 줄을 잇자 모시는 사람들이 거처를 옮기라고 권했다. 며칠 지난 뒤 대군은 자기 병에 차도가 없는 것을 알고 속히 집으로 돌아와 처방전을 찾아 증세를 알고자 했다. 모시는 사람이 일부러 지체하며 주지 않자 대군은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처방전을 본다고 마음이 달라지겠느냐?” 하고 말했다. 처방전을 본 뒤 부인 박씨에게 말했다. “내가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사별을 해야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는 왕의 얼굴을 뵙지 못하겠구나.”라고 말한 뒤 한참 동안 오열하다 담담하게 서거했다.
왕이 대군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 가보려고 차비를 하고 있던 중 중관이 달려와 때가 이미 늦었다고 보고했다. 왕은 너무 슬퍼 어찌할 바를 몰랐고 신하들로부터 거리의 백성들까지 애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날짜는 1488년 12월 21일 이었다. 조정과 저자를 사흘간 닫았고, 태상시(太常寺-시호를 주관하는 관서)에서는 ‘효문’이라는 시호를 정했으며, 부의는 다른 때보다 두 배를 내렸고 장례를 지내는 도구도 필요한 대로 쓰도록 했다. 또 대신에게 장지를 잡으라고 명하여 고양 별장의 서쪽에 정했다. 이것은 왕이 애도하는 마음에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결과였지만, 대군이 마련한 별장 곁에 자기의 영혼이 쉬게 되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왕과 대비는 길지를 얻었다고 좋아하고 특별히 청성군 한치형(韓致亨)에게 일을 맡겼다.
기유년(1489년) 3월 3일 경신일에 백관이 참여한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부인 박씨는 평양군 중선(仲善)의 딸로 현숙했다.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곡하면서 종신토록 변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작은 부인에게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생각해보니 대군은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지혜가 밝고 총명한 데다가 학문까지 갖추었기 때문에 성취한 것이 남달랐다. 귀하기는 왕의 아들이고 높기로는 왕의 형님으로 왕의 사랑을 받고 삼궁(三宮-정희, 인수, 인혜대비)의 총애를 받았으니 성덕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수명이 길지 못한 것이 애석할 따름으로 내가 하늘의 이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가 전에 양한(兩漢)의 “제왕전(諸王傳)”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중위 상려(常麗)가 하간왕(河間王) 덕(德)에 대해 “몸가짐은 단정하고, 행실은 온화, 인자, 공손, 검소, 독실, 공경하며, 선비를 밝게 보고 깊이 살폈다.” 고 칭찬했다. 대행령(봉상시와 같음)이 시호를 짓는 법에 대해 “총명하고 예지가 있는 것을 헌(獻)이라고 하니 마땅히 헌으로 시호를 정해야 합니다.”고 했다. 반고(班固-한나라 역사가)는 이에 대해 “크게 고아하여 뛰어나게 탁월한 사람으로는 하간 헌왕이 근접할 것이다.”하고 찬(贊)을 썼다.
장제(章帝-후한 3대 황제)가 동평왕 창(東平王蒼)을 책봉하면서 “왕을 도와 예에 벗어난 일이 없었고 전교를 들을 때는 아래 서서 들었다. 하늘이 자애롭지 못해 위로 보답하지 않았다.” 범엽(후한서를 지음)은 이에 대해 논했다. “공자는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자이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것이,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자이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 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동평 헌왕이야말로 예를 좋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소견으로는 대군은 사실 두 가지를 다 겸했으나 자제들만은 많이 부족했다. 재주가 부족한 내가 감히 두 왕의 어진 점을 칭송하면서 대군에게 빗댄 것은 오래오래 그 덕을 드날리게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나 역시 반고와 범엽을 사모하여 삼가 머리 숙여 본떠서 비문을 짓고 명을 붙이기는 했지만, 전하의 돈독한 우애에 들어맞지 못할까 심히 두려울 뿐이다.
명왈(銘曰), 하늘이 조화를 맡아 선악이 갈라지니
덕을 주었으면 수명도 줘야 하는 법
때로 고르지 않아 이치 알기 어렵네
개국한 이래로 성자 신손 계승하고
훌륭한 왕족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누가 대군처럼 재주와 덕 겸했는가?
대군이야말로 세운 뜻 높고 높아
공명을 멀리하고 경서만 탐했네
백가를 섭렵하고 박약으로 귀결하여
문장을 지으면 옥구슬을 꿴 듯하네
크나큰 솜씨도 손이 굳고 한숨이라
뛰어난 묘구 ‘한도십영’에 있다네
임금의 글과 시 공에게만 지어주고
화답하라 명하니 우애 생각함이라
우애는 말이 되고 글로써 즐기니
두터운 은우 힘으로 못 이기네
공경한 마음 교만하지 않는 안색
널리 소문나 온 조정에 퍼졌고
거동은 얼음 항아리 속 옥 같고
봄바람 같은 보살핌 따뜻한 은혜
모두 좋아하여 사신도 감복하네
벼슬은 세상이 영화로 여기는 일
공은 그렇지 않아 굳이 사양하니
겸양의 미덕은 청사에 빛나리라
매일아침 하는 문안 거르지 않고
한 발짝 움직임도 법도를 따랐네
절도 있는 행의는 고금에 드물어
동평왕의 착함과 하간왕의 어짐
그 이름 드높아 뉘 감히 비기랴?
천년 뒤 여기 공이 다시 있어
신성한 우리 임금 효로 다스리고
우애하여 체화(형제간의 우애) 더욱 빛나네
갑작스런 재앙 하늘의 뜻이나
임금의 정 어찌 두고 떠나는가?
구천에 위로삼아 묏자리 잡으니
그곳 어디인가? 고양 북쪽이라
무성한 풀에 나무는 빽빽하고
산과 물 돌고 감아 마땅한 유택이라
어제의 별장이 오늘은 현궁이니
미리 정했다면 하늘과 통함이라
영원히 평안하길! 높다란 무덤
왕명으로 비 세워 빛나는구나
살아서의 영광 죽어서의 슬픔
천년만년 그 아름다움 퍼지리라
부족한 글로 덕을 써 전하노라
홍치(弘治) 2년 기유년(1489년) 월 일
4. 사당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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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내동가옥(이택구가옥) | 월산대군 사당 | 가운동지석묘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62호 | |
월산대군 사당 禪宗永嘉集(諺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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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호국로 1243-39 ( 신원동) |
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사우 |
수량 / 면적 | 일곽 |
지정연도 | 1989년 12월 29일 |
관리자 (관리단체) |
전주 이씨 월산대군 종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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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 월산대군 사당 |
월산대군 묘의 북쪽 건너편에 월산대군 사당이 있다. 1756년( 영조 32년)에 세웠으며 1875년( 고종 12년)에 중수했다. 대문은 솟을삼문이며 문 안에는 맞배지붕에 가칠단청을 한 사당 건물이 있다. 이름은 석광사(錫光祠)이며, 현재까지도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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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 월산대군 요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