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원병오 元炳旿 |
|
출생 | 1929년 5월 19일 |
경기도 개성군 | |
원적 |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면 건인리[1] (現 평안남도 안주시 남천동) |
사망 | 2020년 4월 9일 (향년 90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원산농업대학 (
축산학 /
중퇴)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 생물학 / 학사) 홋카이도대학 ( 이학 / 박사) |
직업 | 생물학자, 조류학자, 교수 |
소속 | 경희대학교 생물학과 교수(1961 ~ 1994)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조류학자.2. 생애
1929년 5월 19일 경기도 개성군(現 개성시)에서 해방 이전 한국 유일의 조류학자였던 원홍구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1947년에 김일성대학 농학부 축산과에 입학하였고, 단과대학으로 분리가 된 원산농업대학을 다니다가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잠시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영해 월남하였다. 전쟁 기간 육군 포병장교로 참전하였으며, 중위 시절 당시 제3군단 포병단장이었던 박정희 대령의 전속부관을 지냈다. 대위로 예편 후에는 경희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해 1959년 졸업했고, 1961년 일본 홋카이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1961년 경희대학교 생물학과 교수에 부임해 1962년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후연구원(Post-doctorate fellow)으로 근무했고, 다시 귀국해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장 및 교육대학원장, 경희대학교 부설 한국조류연구소장을 거쳐 1978년 경희대학교 자연사박물관장을 역임했다. 이후 산림청 임업연구원,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국제조류보호회의 본부 간사 및 한국본부장을 거쳐 1989년 국제조류보호회의 아시아지역 회장, 국제자연보호연맹(IUCN) 종족보존위원회(SSC) 위원(현재) 및 생태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한편, 1980년부터 국제조류학회 선임 이사, 1990년부터 한국조류학회장을 역임했고, 1994년 정년퇴임한 뒤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조수보호협회 회장, 국제환경과학연구소 이사장를 역임했다. 경희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조류학자인 윤무부 교수가 그의 제자이다.
2020년 4월 9일에 타계했다.
3. 조류학자로서의 삶
1994년에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학술논문 150여 편과 학술서 18권을 냈다. 50여 종의 새로운 조류종을 발견했고, 이동실태나 계절적 분포를 새로 밝혀낸 것이 100여 종이나 된다. 부자의 인연을 이어준 철새를 위해 한국과 러시아의 철새보호협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4. 아버지와의 연락
아버지 원홍구 교수[2]와는 한국전쟁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가, 1965년에 자신이 인식표를 달은 북방쇠찌르레기를 북쪽의 아버지가 발견한 것을 계기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 원병오는 폴란드의 조류학자 얀 피노프스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으며, 소련의 조류학자 레오니드 포르텐코(우크라이나어판)의 도움으로 몰래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분단 때문에 둘이 직접 만나는 일은 성사되지 못했고, 2002년에야 그는 개성에 있는 아버지의 묘에 성묘할 수 있었다. 1993년, 이 부자의 이야기는 북일합작영화 「버드」의 소재가 되어 영화화되었다. 북한에서는 림종상 작가가 쓴 쇠찌르레기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이 소설은 남한에서도 출판되었다. 또한 일본의 엔도 키미오라는 작가가 관련 자료를 정리하여 논픽션으로 책을 냈다. 책 제목은 아리랑의 파랑새.5. 박정희와의 인연
전술한대로, 월남 후에 3군단 포병단장이자 훗날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는 박정희 대령의 전속부관을 지냈다. 박정희는 원병오의 도움으로 1953년말에 서울특별시 고사배동(현 신설동)에 위치했던 원병오의 사촌 누이 집에 전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박정희 대령의 준장 진급 후 이듬해인 1954년 1월17일에 미국 오클라호마의 육군포병학교로 5개월 예정의 유학을 떠났을 때, 육영수 여사가 쌀이 떨어져 생활이 곤란해진 적이 있었는데, 원병오가 당시 제20보병사단 부사단장이던 이주일 준장 및 제26보병사단 참모장이던 김재춘 대령을 찾아가 부탁하여 문제를 해결시켰다.원병오는 이후 육군 대위로 예편했으나, 월남 직전 한달동안 조선인민군에 소속되었다는 "사상 전력" 때문에 연구소나 학교 근무 때마다 수많은 신원보증을 받아야 했고, 미수교국에서 열리는 국제학회 참석을 위해서도 수없이 많은 보증서를 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에 그러한 고난은 끝이 났다. 박정희 의장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장충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을 찾아가 인사를 했고, 박정희 의장은 "임자가 바라는 것 한 가지쯤은 꼭 들어주겠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경희대학교 교수로 있던 원병오는 그 말에 의지해 청와대를 찾아갔다. 당시 그는 한국자연보존연구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원 교수가 모임의 취지를 설명하며 지원을 요청하자 박 대통령은 "자연보호는 곧 나라사랑"이라고 화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 두 차례에 걸쳐 2억원을 지원했다. 자연보호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한 한국자연보존협회는 이렇게 탄생했다.
6. 관련 문서
7. 참고 문헌
- 정년퇴임 때 인터뷰
- 철새조사위해 방북 기다리는 원병오 교수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남북학맥 잇고파"
- 기다리는 여심 |「군인아내의 길」육 여사
- 육 여사, 전처소생 장녀 적극 중매 결국 한집 살던 한병기씨와 결혼
- '새 박사' 원병오와 박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