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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선록(鮮綠) |
본관 | 홍천 용씨 |
출생 | 1917년 11월 10일 |
강원도
홍천군
홍천면 희망리 367번지 (현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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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9년 12월 3일 (향년 62세) |
강원도 홍천군 | |
학력 |
홍천공립보통학교 (
졸업) 춘천고등보통학교 ( 졸업) 보성전문학교 ( 졸업)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2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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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일제강점기에 항일 학생 비밀결사인 상록회를 조직하고 회계 및 5학년 대표로 활약하였다. 별동조직인 독서회 회장을 거쳐 상록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던 중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 공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917년 11월 10일 강원도 홍천군 홍천면(현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에서 태어났다. 홍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3년 4월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춘천군 춘천읍 소양통2정목(현 춘천시 소양로2가) 110번지에 거주했다.춘천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7년 3월 9일, 4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이찬우를 비롯하여 같은 학교에 다니던 백흥기· 조규석· 문세현·남궁태(南宮珆) 등과 함께 만나 일본 제국의 민족차별교육에 대해 논의하고, 이에 반대하여 동지를 모아 조선독립을 실현할 목적 아래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3월 14일 오전 11시, 위 5명의 학우 및 성수경(成綏慶)은 강원도 춘천군 춘천읍 전평리(현 춘천시 근화동) 수원지 부근 냇가에서 만나 조선 사람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과 조선독립이 필요한 이유를 강조하고, 같은 날 오후 1시에는 춘천군 춘천읍 소양통2정목에 있던 백흥기의 집에서 여러 가지 협의를 한 뒤 조선을 일본 제국의 굴레로부터 이탈해 독립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항일 학생 비밀결사 상록회(常綠會)를 조직했다.
이때 강령 및 부서를 정하고, 학년별로 조직을 분담했는데, 회계 및 5학년 대표를 맡아 월례회, 토론회, 독후감발표회, 서적 교환, 귀농운동 등 상록회의 주요 활동을 이끌었다. 또한 상록회 산하 별동단체로서 구성된 독서회(讀書會)의 회장 또한 맡아 『 하얼빈역 앞의 총성』 등과 같은 민족주의적 문헌을 탐독하는 독서활동을 통해 민족주의 사상 및 항일의식 고취에 힘썼다.
이후 상록회의 조직이 개편되자 부회장에 취임했고, 상록회의 조직이 더욱 확대되자 춘천공립농업학교의 독서회와도 연락을 통하는 등 춘천군 지역 내 각 학교 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1938년 3월 3일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해 3월 28일 춘천우편국 사무원에 부임한 뒤에도 근무지에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면서 상록회의 활동을 계속했다. 1938년 11월 10일에는 춘천우편국을 그만두었다.
그러던 1938년 가을, 상록회의 조직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었고, 그를 비롯한 회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후 1년여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9년 12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1979년 12월 3일 강원도 홍천군에서 사망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1992년 12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