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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폴 고갱 Paul Gaugu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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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외젠 앙리 폴 고갱[1] Eugène Henri Paul Gauguin |
출생 | 1848년 6월 7일 |
프랑스 제2공화국 파리 | |
사망 | 1903년 5월 8일 (향년 54세) |
마르키즈 제도 히바오아 | |
국적 |
프랑스 제2공화국 (1848 ~ 1852) 프랑스 제2제국 (1852 ~ 1870) 프랑스 제3공화국 (1870 ~ 1903) |
직업 | 화가 |
배우자 |
메테소피 가드 (1873년 ~ 1894년, 결별) 테하아마나 (1891년 ~ 1893년, 결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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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요 작품 | |
<rowcolor=#000> 1891년, 타히티의 여인들 | 1892년, 언제 결혼하세요? |
<rowcolor=#000> 1898년,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1902년, 두 여인 |
프랑스의 탈인상주의 화가.
프랑스인이긴 했지만 그의 가계는 거슬러 올라가면 페루를 통치하던 스페인 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연고로 고갱의 어머니는 한때 어린 고갱과 함께 페루에서 산 경험이 있었다. 이때 경험한 페루 고대 문명의 독특한 도자기, 그리고 젊었을 적 견습 도선사로 각 항구를 돌며 보고 들은 문물은 고갱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전업 화가로 뛰어들기 전에는 도선사로 있다가 1871년 모친상을 당한 후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사에 취직, 주식중개인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덴마크 여인 메트 소피 가드(1850~1920)와 결혼한 뒤에는 생활이 한층 안정되어 여유로운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처럼 주말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주말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훗날 인상파로 불린 화가 카미유 피사로 등의 그림을 팔아줬을 만큼 제법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35세에 돌연 처자식 내팽개치고 화가가 되었다.1883년 금융위기로 주식시장이 위축되었던 게 주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요즘은 고갱이 처자식을 팽개친 게 아니라, 부인한테 쫓겨났다고 보는 쪽이 더 많다. 프랑스 주식시장이 불황으로 접어들면서 고갱의 수입이 줄어들자 견디지 못한 메트가 덴마크로 돌아가버렸고,[2] 고갱도 뒤따라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고갱이 제대로 밥벌이를 못하자 메트의 가족들이 나가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프랑스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렇다면 흔히 이야기되는 처자식 팽개쳤다는 말은 고갱 입장에서는 꽤나 억울한 소리인 셈이다. 처자식의 생계를 팽개쳤다면 말이 되겠지만 1891년을 마지막으로 메트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 가서 미술계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고갱의 목적은 인상파가 초기에 줬던 충격처럼 이 인간들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면 나는 미술계의 no.1이 되겠지라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쇼킹한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르주 쇠라가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점묘법으로 미술계에 쇼크를 일으켜서 쇠라에게 이목이 쏠리자 쇠라의 점묘법을 가리켜 저주받은 점이라고 칭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어린 시절 본 페루의 도자기를 사 모으면서 그런 경험을 살려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도 했다. 이를 통해서 고갱은 유럽에서 있어봤자 모두가 놀랄 그림은 안 나오겠다. 유럽에서 떠나자.라고 결심하고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알고 파나마로 떠났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 공사는 개쪽이 나고 있었고[3] 매형은 파산해서 고갱을 챙겨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파나마를 떠나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 간 머물렀다. 이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둔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친구였던 것으로 유명하다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여기에는 고흐의 이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결말은 좋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고갱은 고흐의 초청으로 아를에 있는 고흐의 집, 노란색 벽 때문에 노란 집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그곳에서 9주 동안 고흐와 함께 지내며 작업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만나지는 않았지만 오만한 고갱도 고흐의 사건이 충격이었던지 파리로 돌아간 후 귀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만든 도자기가 남아있다. 근래에 고갱이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설이 돌기도 했지만 고갱의 성향이나 여러 정황으로 봐서는 그냥 설에 불과한 듯하다.
이후 브르타뉴로 돌아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같은 걸작을 만든 후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양의 독특한 문화를 접한 고갱은 다시금 유럽을 탈출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심지어 타히티에 갈 때 고갱은 자신이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파견되었다고 거짓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고갱의 거짓말을 몰랐던 것이 타히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이긴 했어도 머나먼 변방이었기 때문에 그런 데서 사기를 쳐봤자 아무도 따질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이 컸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타히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상상과는 달랐다.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문명화가 진행된 곳이었고, 서양인들도 지배층으로 어느정도 정착했던지라 타히티의 원주민 소녀들은 뚱한 표정으로 고갱을 소 닭 보듯 할 뿐이었다. 고갱이 이후에 유명해졌다지만 당시의 고갱은 유명인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도 아닌 그냥 흔한 서양인 아저씨 1일뿐이라 굳이 아는 체를 할 이유가 없었던것이었다. 고갱의 그림 속 파레오를 입은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시큰둥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로는 타히티 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하술하듯이 정작 그 때쯤에는 타히티를 떠났다.
타히티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한 고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것도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은 이게 그래서 뭐 어쨌다고?라는 반응 정도였다. 게다가 고갱이 그림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찬란하다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면 원초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금테두리로 장식을 하였는데 자신의 그림이 대작이라고 확신한 고갱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당대에는 뭔 허세를 부리냐며 조소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과 뻘짓의 극치였다. 그림을 그려서 프랑스로 보내서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서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부족으로 그렇게 부쳐진 돈은 며칠 안돼서 날리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투견 본능이 충만했는지 타히티의 정치싸움에 끼어들어서 타히티에 건너온 중국인을 비난하는 글을 현지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타히티의 중국인은 고갱을 미워한다고 한다.
이후 타히티보다 좀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가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4] 현지인을 위한답시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 했다. 결국 알코올 의존증과 매독과 유사한 통증으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그곳에 있으며, 덕분에 고갱의 묘는 유명 화가의 묘역 중에서 찾아가기 가장 힘든 축에 속한다. 여담이지만 이런 오지에 고갱 못지않은 유명인이 또 한 명 묻혀있는데 바로 자크 브렐. 이 사람은 고갱을 좋아해 행적을 좇아다니다보니 이렇게 됐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그는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여내서 그려냈다. 이 때문에 한때 고갱과 절친했던 카미유 피사로는 고갱을 격하게 비난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문명을 멀리하고 원시와 자연을 예찬했다는 특징도 있다.
부인과 다섯 명의 아이까지 뒀음에도 여자 관계도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타히티에 간 뒤로 몇 차례 현지 여성과 결혼과 동거를 거듭했고, 개중에는 15세 정도의 미성년자 소녀도 있었다. 첫번째로 타히티 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에 프랑스에서 머물던 시절에도 미성년자들과의 관계가 심각했다. 안나 자바네즈라는 동남아계 미성년자 소녀와 애인으로 동거하기도 했다. 다만 안나 자바네즈는 20대였음에도 고갱이 13살이라고 구라를 쳤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사실 고갱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좀 에누리를 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상당한 허세의 소유자로 그가 적은 글이나 작품에 대한 설명, 심지어는 미성년자 소녀들과의 관계조차도 말이다. 이는 고갱 본인이 상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과시욕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인성 때문에 상당히 까인다. 특히 고흐에게는 악연이나 다름없는지라 고흐 팬들에게는 애증과 비판의 대상이다.
고갱이 화가로서의 인생 중 상당 기간을 보낸 타히티에는 고갱 박물관이 있다. 근데 "Musèe Gaugain"이라고 간판달고 영업하는 주제에 정작 이곳의 콜렉션엔 고갱의 진품 그림은 한 점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은 돈이 필요해서 그림을 그리면 말리자마자 배편으로 프랑스로 보내 팔았기 때문에 당연히도 타히티에 남은 건 없다. 고갱이 직접 만든 것으로 범위를 확대하면 도자기 하나랑 목각 숟가락 세 개가 전부다. 고갱의 그림 말고 고갱이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타히티는 한국에서 공들여 찾아가기에는 매우 힘이 드는 오지다.
오랫동안 매독 환자로 알려졌지만 2018년에 공개된 논문에 따르면 매독이 아닌 다른 질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의 치아를 연구한 결과 수은 성분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의문을 제기한 근거다. 매독은 뼈에 흔적을 남기는 질병이며, 당시에는 치료법으로 다량의 수은을 사용했으므로, 실제로 매독에 걸렸다면 어떤 식으로든 치아에 뚜렷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 기타
- 고갱의 외할머니는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주의자인 플로라 트리스탕(flora tristan, 1803~1844)이다. 그녀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노동조합(L'Union Ouvrière)에서 직업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속할 보편적 노동조합을 제안했고, 그의 글이 모든 프랑스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프랑스 전역을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여행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트리스탄은 병에 걸려 사망했다.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1,5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그녀의 무덤을 봉헌하면서 그녀의 죽음을 기렸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2003년도 소설 천국은 다른 곳에가 플로라 트리스탕과 폴 고갱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4. 대중매체에서
- 2017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고갱(Gauguin)>에서는 배우 뱅상 카셀이 연기했다.
[1]
Eugène은 프랑스어 발음으로는 '외젠(/ø.ʒɛn/)'이라고 읽지만 국내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유진(Eugene)' 쪽으로 읽히는 경우가 더 많다.
[2]
당시 메트는 고갱의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그전부터 애들 키우면서 가정교사 일로 집안을 벌어먹이고 있었는데 이 판국에 고갱이 돈 안 되는 전업화가의 길을 걷자 메트는 말렸지만 고갱이 듣지 않았다.
[3]
나중에
미군 공병대가 프랑스로부터 일을 인계받아 고투 끝에 운하를 개통하는데 성공, 본격
콜롬비아 경제와 내정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운하를 관할하는 파나마 지역이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는 데 도움을 준 것도 미국.
[4]
다만, 현지인들에게 가톨릭 강요하는 게 프랑스에서 일상적인 식민지 처사였기에 반발한 것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