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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실존 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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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예수의 실존을 부정하는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
2.1. 예수에 대한 동시대의 기록이 없다?2.2. 고대의 작가들이 예수를 언급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사실은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2.3. 사도 바울로는 지상의 역사적 인물 예수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3. 예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
3.1. 복음서
3.1.1. 복음서의 역사적 가치3.1.2. 복음서의 역사적 지표3.1.3. 복음서의 속보성3.1.4. 필사본의 연대
3.2. 요세푸스의 기록
3.2.1. 정리
3.3. 타키투스의 기록3.4. 수에토니우스의 기록3.5. 랍비 자료3.6. 마라 바르 세라피온의 편지3.7. 땅이 어두워진 날3.8. 기타 증거
4. 결론5. 여담

[clearfix]

1. 개요

예수 역사상 실존 여부에 대한 논의와 관련 사료를 정리한 문서이다.

예수에 대한 증거들은 그 시대의 어떤 사람보다 압도적이게 많다
예수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은 진지한 학자라면 아무도 하지 않는 짓이다.
He certainly existed, as virtually every competent scholar of antiquity, Christian or non-Christian, agrees[1]
그는 확실히 존재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실상 모든 권위 있는 학자들이 동의한다.
바트 D. 어만[2] #

진지한 종교 학자라면 예수의 실존을 인정한다.
폴 존슨[3], 'A Historian Looks at Jesus'

나는 예수가 역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실존 인물이라고 확신한다.
존 도미니크 크로산[4]

나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임을 받아들인다. 내가 보기에는 그의 실존을 부정하는 데서 초래되는 문제점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것들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 게저 베르메시[5]

역사를 보면, 제가 어떤 역사학자들이 예수가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걸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건 철회합니다. 예수는 존재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 #[6]

Among New Testament scholars and historians, the theory of Jesus' nonexistence remains effectively dead as a scholarly question[7]
신약 성서학자들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학설은 학문적 차원에서 실질적으로 죽었다.
biblical scholars and classical historians regard theories of non-existence of Jesus as effectively refuted[8]
성서학자들과 고대 그리스·로마 역사학자들은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학설이 사실상 논박되었다고 여긴다.
로버트 E. 밴 부어스트 (Robert E. Van Voorst, 1952 ~ )[9]]

We can then argue about the evidence offered for any particular point. What you can’t do, though, without venturing into the far swamps of extreme crankery, is to argue that Jesus never existed. The “Christ-Myth Hypothesis” is not scholarship, and is not taken seriously in respectable academic debate. The grounds advanced for the “hypothesis” are worthless. The authors proposing such opinions might be competent, decent, honest individuals, but the views they present are demonstrably wrong....Jesus is better documented and recorded than pretty much any non-elite figure of antiquity. ······ Some issues are worth arguing about, others aren’t. Jesus of Nazareth existed.
우리는 어떤 부분적 포인트로 제공되는 증거에 대해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극단적 괴짜의 늪 멀리 모험을 하지 않고는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은,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화 가설'은 비학술적이며 학문적 논쟁에서 진지하게 존중받지 못한다. 그 '가설'을 위한 근거들은 가치가 없다. 각 의견을 제안하는 저자들 개개인은 유능할 수도 있고, 품위 있을 수도 있고, 정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나타내는 그 관점들은 논증으로 볼 때 잘못되었다.... 예수는 고대의 어떤 비(非)엘리트 인물보다도 더 잘 문서화되고 기록되었다. ······ 어떤 이슈들은 논쟁할 가치가 있지만, 다른 것들은 그렇지가 않다. 나자렛 예수는 존재했다.
필립 젠킨스 (Philip Jenkins, 1952 ~)[10] #


'나자렛 예수'라는 유대인이 실존했다는 것은 기독교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며, 관련 학자들이[11] 인정하는 학계의 정설이다.

이 문서에서 다룰 '예수 연구'는, 예수가 그리스도교의 믿음대로 하느님의 한 위격인지, 유대교의 표현대로 거짓 예언자인지, 아니면 이슬람에서 가르치는 대로 위대한 선지자이기는 하나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었는지는 일단 차치하고, 우리에게 '예수'로 알려진 그 종교 운동가가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인물이 역사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 재구성하는 것이다.[12] 불교 석가모니가 경전상의 신화적인 묘사와 별개로 샤카족 왕자 출신의 고행자 '고타마 싯다르타'로서 실존성을 인정받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예수를 바라보고 연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알기 쉽다.

상술했듯 예수가 실존한 인물이라고 예수가 곧 신의 아들이고, 세상이 정말 기독교 창세론대로 만들어졌다는 것까지 증명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 방법론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종교적인 영역이다.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실존했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고 해서 무아(無我)가 사실이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윤회를 거듭한다는 믿음이 증명되지는 않음과 같다. 이 문서에서 다룰 주제는 어디까지나 종교적 신앙 고백이 아닌 역사적 기록과 증거들을 통해 역사 비평적으로 탐구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이 문서에서 '학자들이 예수가 실존했다고 주장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메시아이다', '예수는 부활했다'가 객관적 사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라 불리고, 부활했다고 믿어지는 사람'이 가상 인물이 아닌 구체적인 역사적 실존 인물 '나자렛 사람 예수'를 가리킨다는 의미이다.

2. 예수의 실존을 부정하는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

2.1. 예수에 대한 동시대의 기록이 없다?

1세기 역사 연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제 학자들에게는 약간 우스꽝스러운 주장으로 여겨진다. 예수와 유사한 배경을 지닌 인물들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대부분 매우 빈약하며, 동시대의 기록을 가진 인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즉,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예수의 실존을 의심한다면 우리는 거의 모든 역사적 인물의 실존을 의심해야 한다.[13]

애초에 동시대에 기록이 없다는 것도 틀린게,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담은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가 죽은지 불과 40년 이후에 정리되었다. 위 각주로 언급된 삼국지를 포함해 역사적 기록으로 받아들여지는 기록들 중 당대에 실시간으로 정리된 기록은 적고, 한 세대 정도는 뒤에 정리된 기록들이 오히려 다수인만큼 예수는 당시 기준으론 상당히 빠르게 정리된 축에 속한다. 예수와 마르코의 직접적인 관계는 불명이지만 최소한 그의 어머니는 열성적인 신자였으며 마르코 본인은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르코는 예수가 죽은 지 40년 후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40년 후에 복음서를 완성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가 죽기 전 그가 살아있었을 확률도 있다. 어쨌거나 예수가 죽은 지 불과 40년 뒤에 그의 상세한 행적을 적은 기록이 있는데도 '동시대의 기록이 없다'는 건 억지스런 주장이다.
물론 마르코 복음서는 역사책이 아니지만, 만약 예수가 실존인물이 아니었다면 마르코는 까마득한 옛날도 아니고 고작 자기 아버지 세대에 불과했을 일에 대해 가짜 인물을 지어내 행적을 기록했다는 말이 된다. 당대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자신들이나 한 세대 전에 관해 없는 일을 지어내 논하고 있는데도 이걸 받아들일리가 없다.

특히 동시대 예수의 인지도를 고려하면 증거의 침묵은 부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분명히 예수는 당대에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며[14] 제자 집단을 형성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보도에 의하면 총독 페스투스가 팔레스티나 북부의 임금인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에게 "예수라는 사람"(25장 19절)이라고 말하고 2세기에 수에토니우스가 크레스투스(Crestus)라고 잘못 부를 정도로 인지도는 소위 '아는 사람만 아는' 인물에 가까웠다.

2.2. 고대의 작가들이 예수를 언급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사실은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침묵의 논증’은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까다로운 논증이다. 1909년 미국의 사상가 존 레임 버그는 예수를 언급하지 않은 42명의 동시대 작가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그 모든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예수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의 실존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목록은 인위적이고 공상적인 것으로 널리 비판을 받아 왔다. 가령 목록에 있는 루카누스라는 인물은 예수 사후에 태어나서 몇 개의 시를 남긴 시인에 불과하다. 물론 일부의 경우는 언뜻 보기에 강력해 보일수도 있다. 가령 잘 알려진 철학자 필론은 예수와 동시대를 살면서 철학과 신학을 쓴 유대인이었고, 여러 유대인 사건을 언급하고,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을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언뜻 보기에 의아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필론은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유대인 메시아, 선지자 주장자들 중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즉 필론은 그저 예수와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필론이 아트롱게스, 드다, 힐렐 더 엘더, 호니 하마 에겔, 세례자 요한 등을 언급하고 예수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침묵의 논증은 견고한 논증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진실은 필론은 그중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메시아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게 분명한 작가는 유대인 출신의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 한 명뿐이다. 그는 많은 자칭 메시아, 예언자들에 대한 유일한 근원이다. 예수를 언급해야 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것은 요세푸스이며, 실제로 요세푸스는 유대인 고대사에서 두 차례에 걸쳐 예수를 언급한다. 그중 하나인 요세푸스의 '플라비우스 증언'의 경우는 일부 내용에 기독교인의 가필이 있었다는 것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지만, 가필을 제외한 본래의 진실한 기록이 있었다는 것 또한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기록인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대한 언급은 가필 논란이 없는 진실한 기록으로 받아들여진다.

2.3. 사도 바울로는 지상의 역사적 인물 예수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가장 초기의 예수 신앙은 역사적인 예수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천상의 예수를 숭배했다. 최초의 성서 기록자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인 사도 바울로는, 지상의 역사적 인물 예수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예수 신화론자들은 바울로 서신을 편협한 시선으로 읽기라도 한 건지, 이것이 설득력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단순히 거짓말이다. 바울로는 교리적인 논쟁의 문제로 편지를 쓰고 있었으므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나 예수의 생애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러 곳에서 지상의 예수에 대해 언급한다.

바울로는 예수가 인간으로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유대인이었다고 말하고( 갈라디아서 4장 4절), 다윗의 혈통이며( 로마서 1장 3절), 야고보라는 형제가 있었다고 말한다(갈라디아서 1장 19절). 그는 최후의 만찬을 언급하고(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말한다( 데살로니카전서 2장 15절). 또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여러 번 언급하고, 처형 후 매장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고 증언한다(고린도전서 15장 3절~11절).

그래서 신화론자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은 지상이 아닌 천상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지만, 이 고안된 논증은 너무나 약해서 신화론자들을 제외한 건전한 학자들을 설득하지는 못한다.

3. 예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

예수 본인은 동시대 동 계급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가난했다고 추정되므로 그가 직접 남겼다는 기록이나 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에 가장 정확한 역사 기록을 남긴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변방의 복속국에서 일어난 흔하고 작은 소요 사태[15]는 그다지 기록할 만한 가치도 없었던 듯하다. 더구나 예수의 활동 기간은 복음서를 토대로 유추해 봐도 지나치게 짧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공생애 기간이 '3년'이라고 생각하지만, 3년설은 어디까지나 요한복음[16]만을 근거로 한 주장이다. 실제 예수의 활동 기간은 불과 3~4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이전 시기의 고대의 다른 성인과 비교해도, 예수는 그 생애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제자인 플라톤 크세노폰 외에도 고대 그리스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17] 등 동시대 사람들의 증언과 사료가 남아 있다. 공자도 정사인 사마천 사기에 공자 전기가 있고, 공자가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모은 논어가 현존하며, 여불위와 그의 문인들이 만든 대백과사전 여씨춘추도 남아 있다. 오히려 자료가 너무 방대해서 중간에 분서갱유 등으로 소실되거나 한 문헌들을 재구성하는 훈고학이라는 학파가 발생했을 정도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생전에 그의 시중을 들면서 가르침을 외운 제자 아난다가 있어서 열반한 직후 아라한 5백 명이 모여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록했는데, 그것이 불경이다.

예수는 부처나 소크라테스나 공자처럼 유명한 성인이면서 그들에 비해 남아 있는 기록이 적은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18]

첫째, 석가모니는 80세(기원전 563년~기원전 483년)에 사망했고 공자는 72세(기원전 551~기원전 479)에 소크라테스도 71세(기원전 470~399)에, 20세기 기준으로도 오래 살았고, 당시 그리스인들의 평균 수명이 50세 전후이고,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의 평균 수명은 그보다 낮았던 걸 감안한다면 상당히 장수한 셈. 이에 비해 예수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약 34~37세(기원전 6~4년~기원후 30년)에 사망했다. 짧은 인생을 산 만큼 기록도 적을 수밖에 없다.

둘째,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가 수십 년간 활동한 데 비해, 예수는 짧으면 3개월 길어봐야 고작 3년이다. 역시 공생애에 대한 기록을 남길 시간이 절대적으로든 상대적으로든 부족한 게 당연하다.

셋째, 석가모니는 출가 전에 왕자였고, 생전에 이미 수천 명이 넘는 제자들과 신도를 거느리고 모국을 침공하는 적국의 군대를 세 번이나 막아낼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했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다양한 관직을 거쳤고[19]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기 위해서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니면서 엄청난 명성을 쌓았다. 소크라테스도 참전 용사였으며 당대의 철학자로서 상당히 인지도가 있었다. 반면에 피지배 민족으로서 국가 권력이나 관직은커녕 반역자로 박해받다 처형당한 예수는 공적 기록에서 자료가 적을 수밖에 없다.

넷째, 석가모니의 제자들 중에 아라한이 된 제자만 1천2백 명이나 되었고 그에 도달하지 못한 제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공자는 제자가 총 3천 명에 수제자급만 72명(72현)이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안티스테네스ㆍ아리스티포스ㆍ에우클리데스ㆍ파이돈ㆍ플라톤ㆍ아이스키네스ㆍ크세노폰 등등 당대의 먼치킨들이었다. 이 제자들은 부유하거나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이었고, 여러 나라에서 초빙받아 벼슬을 하는 등 당시 국가와 체제의 안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이에 반해 예수의 제자들은 총 70명, 그중 수제자급은 모두 12명이었으나 신분은 상당히 낮았다. 예컨대 수제자 베드로는 어부였다.[20][21]

이하는 예수의 실존을 증명하는 자료들이다.

3.1. 복음서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경에서 예수의 행적을 다루는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요한 복음서를 말한다.

3.1.1. 복음서의 역사적 가치

이 항목은 반달리즘식 수정이 자주 이루어지므로 해당 주제를 따로 빼내어 설명한다. 먼저 결론부터 적자면 복음서는 사료이며, 전기(傳記) 문학으로서 실존 인물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고 전파하려는 명백한 목적의식을 지녔다.

여기서 사료란 역사 연구에 참고할 만한 문헌이나 유물 문서 기록 건축 조각 따위를 이른다. 복음서가 사료가 아니라는 주장은 사료와 역사서를 혼동했기 때문으로, 사료의 범위는 매우 넓기 때문에 해당 시기의 문화와 시대상을 반영했다면 무엇이든지 역사적 사료가 될 수 있다. 극단적으로 일리아스의 경우, 암흑시대[22] 생활/문화/인식을 충분히 반영한다.

더군다나 기준을 더 깐깐하게 잡더라도 복음서는 고대 지중해의 전기(傳記)적 특성을 지녔고, 여기에 속보성[23] 및 '출전에 대한 존중'을[24] 갖추고 있었으며, 오류에 대한 견제 장치가 있는 환경에서 저술되었다.[25] 그렇기에 학술적으로 역사적 예수의 행적을 추적할 때도 우선 복음서로 윤곽을 잡는다.
전기 창작은 기원전 1세기와 기원후 1세기에 뚜렷한 호경기를 누렸다. ... 사건 진행의 주인공인 예수에 집중하는 서술 방식과 이야기체 구조를 고려하건대, 복음서들(특히 마르코 복음서)은 기원후 1세기에 '전기' 부문에 편입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의 말씀과 행적뿐 아니라 투쟁, 죽음, 영향이 모든 복음서의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의 출신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맨 첫 줄에 아주 빠듯하게 제시되며, 교육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고전적인 전기들에서도 더러 그런 경우가 있다.
반면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신적 기원이 유년 시절 이야기들을 통해 장황하게 다루어진다. 전기에서는 본디 드물게 발견되는 신적 출생이라는 이 주제는, 특히 통치자들 전기에서, 새로운 왕조의 그 시조에게 신적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된다[예컨대 알렉산드로스(Plut., Alex 2)와 아우구스투스(Suet.,Aug 94)]. 바로 이 보충을 통해 마태오와 루카는, 그들이 마르코 복음서를 전기로 읽고 이해했음을 알려 준다. 한편 요한 복음서는 '복음서'라는 양식을 두 번째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니,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전승 소재들의 편성과 형상화를 위해 전기라는 틀을 이용했다.
-Martin Ebner/Stefan Schreiber (Hrsg.), 『신약성경 개론』[26],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13, 171-172쪽

다음은 간단한 문답식 정리이다:

1) '복음서의 내용은 상호 모순되거나 그 당시 역사 기록과 상충되는 내용들이 있다. 초현실적인 기적도 나온다. 그런데 어떻게 역사적 사료가 될 수 있나?'

→ 물론 복음서는 있는 사실을 문자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며, 그런 용도로 작성된 문서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종교적 경전'이니만큼 저자의 의도에 따라 상호 모순적이거나 초현실적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복음서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고대의 역사 기록 방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고대 세계에서 역사를 쓰는 저자들은 (현대의 우리와 달리) '객관적인 사실을 사진 찍듯이 찍어 후대에 전한다.'라는 관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 기록 중 유명한 투트모세 3세의 카르나크 비문에는 아문신이 파라오의 군대의 앞장을 서며 팔을 뻗어 그들을 돕는다는 표현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다른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학계에서 엄연한 고대 사료로 인정받는다. 비문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파라오가 신의 가호를 받는다는 것은 별개이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비문 자체의 내용보다는 정황 근거와 함께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객관적인 역사 서술' 방법론이 발전하는 것은 19세기 일이다.[27]

더군다나 앞의 각주에서 적었듯이 복음서들에 자주 나타나는 어색하고 투박한 문학적 흐름은, 복음서가 특정 저자가 역사 소설이 아닌 '출전들이 발췌되고 배열된 글'임을 반영한다. 오히려 문학적 흐름이 깔끔하고 정밀하며 물 흐르듯이 술술 흘러가면, 저자가 출전들을 강하게 윤문하고 이야기를 창작했을 개연성이 커진다. 연구자 입장에선 설령 종교적 이야기라 하더라도 당연히 저자가 윤문한 것보다 출전을 발췌한 문장에 훨씬 높은 신뢰를 보인다.[28]

2) '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 중 상당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몰두하였고, 이러한 수사학적 역사학은 중세 유럽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사학적 역사학은 주류도 아니었고, 이 시기에도 역사의 본령은 과거의 중요한 사건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데 있다고 보는 역사가들이 여전히 존재하여, 그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예수보다 훨씬 전인) 기원전 484년에 출생한 역사가 헤로도토스만 해도, 그 자신이 기록한 것들 중, 비현실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헤로도토스 자신부터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논평을 해 두었다. 기원전 200년에 출생한 폴리비오스나 기원전 460년에 출생한 투키디데스도 역사적 서술의 객관성을 중시했다. 하다못해 서기 125년에 태어난 루키아노스마저도 그의 저서 《역사에 대하여》에서 역사가는 어떠한 왜곡도 없이 거울같이 현실을 객관적으로 후세에 전달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런데도 객관적인 역사 서술 방법론이 발전하는 것이 19세기 일이라니 말이 되는가? 일부 기독교인의 주장에 불과하다.

헤로도토스 자신부터가 상당히 수사학적 역사가였고, 투키디데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헤로도토스는 신들의 활동을 신화처럼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뿐 신적 섭리는 부정하지 않았고,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여과 없이 반영하였다. 당장 현대 역사가들이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에 대한 쓴 주석서를 찾아보라. 구절 하나하나를 일일이 분석하고 검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29] 특히 그들의 사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화, 연설 등은 거의 창작이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현대와 가까운 개념의 역사학, 사료 비판이 르네상스 시기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체계적인 학문적 방법론으로 정립된 것이 19세기라는 것은 사학사를 공부하는 이라면 상식이다. 믿기 어려우면 《》Our knowledge of the past: a philosophy of historiography》를 참고해 보길 바란다. 영미권 대학에서 사학사 교재로 쓰이는 책이다.

다음의 글은 종교와는 관계없는 고대 로마 군사사 전공자의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많은 고대 역사가들은 책머리에 자신들의 의도가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읽기에 즐겁고 드라마틱한 텍스트를 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역사는 정보보다도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개인적, 정치적 편견으로 인해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했다. 불충분하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사료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수사학적 주제를 동원해서 이루어졌다.
Adrian K. Goldsworthy, In the Name of Rome, p. 19.

이래도 헬레니즘과 로마 역사가들이 객관적인 역사가였고, 수사학적 역사학이 주류가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리스인들의 기록을 제외하면 근동 왕조들의 기록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만약 신적 개입이 나오는 종교적 텍스트를 모두 제외한다면,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숱한 근동 왕조들의 역사는 상당히 부실해질 것이다.

고대 저자들의 서술 기법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정형화된 패턴, 특히 널리 알려진 고전으로부터 이야기를 차용하는 패턴이 있었다. 사례만 간략히 예를 들어보자,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크로이소스의 이야기, 키루스의 출생 비화나 그의 최후, 캄비세스 2세의 죽음 등등은 자세히 살펴보면 대단히 정형화된 패턴을 따랐다. 이것은 헤로도토스가 '인간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 이야기들 중 얼마가 진실이고 얼마가 가공인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패턴은 중세, 르네상스까지 쭉 이어진다. 가령, 헤로도토스가 서술한 테르모필라이 전투 서술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전투 장면과 흡사하다. 이러한 방식은 로마의 역사가들, 그리고 중세의 연대기 저자들도 차용했다. 그랬기 때문에 실제 고대 전투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복원하기가 난항을 겪기도 한다. 복음서의 서술 역시 마찬가지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전 기록(여기서는 구약)의 패턴을 이용해서 예수의 생애를 서술했다. 가령 예수의 탄생, 헤로데의 유아 살해, 이집트로의 탈출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모세 이야기의 변주다. 이를 통해서 예수가 새로운 모세임을 전달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왜곡이 아니라, 고대 세계의 흔한 서술법이었다.

비유컨대 전근대 역사서는 증명사진이라기보다는 초상화에 가까웠으며, 여기엔 화가(저자)의 개성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물론 초상화(전근대 역사서)가 대상의 모습을 묘사하려는 명백한 목적의식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화가(저자)의 개성과 강력하게 얽혀 있다. 그렇기에 복음서라는 '초상화'가 (어떤 화법으로 그렸는지에 대한 논쟁은 있을 수 있겠으나) '예수'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라고는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30]

3) '복음서는 객관적인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게 아니라 종교적 목적으로 쓰여진 책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그걸 가지고 역사 연구를 할 수가 있나?'

→ '종교적 목적'으로 기록되어서 문제라면, 고대 근동 왕조들의 수많은 기록, 비문도 똑같이 문제가 된다. 그 기준이라면 아테네를 비판하려는 목적이 강한 투키디데스의 저작 역시 '정치적 목적'으로 썼으니 문제가 되고, 실제로 많이 왜곡했다. 위 주장은 객관적이지 않은 서술은 사료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애당초 100% 객관적인 사료는 없다.[31] 불완전한 사료를 최대한 검증해서 객관적인 역사를 쓰려는 학자들의 노력이 있을 뿐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알 수 있는 현존하는 사료는 매우 적다. 아리아노스의 기록이 그 몇 안 되는 중요한 사료인데, 여기에는 말하는 뱀이 알렉산드로스를 시와로 인도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위 기준에 따르면 이것도 사료가 못 된다.

일본서기 세계 대전 당시의 각국의 프로파간다 등의 내용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정보들이다. 그러나 사실 관계와는 다르고 왜곡이 심하다고 무시하기에는 다른 역사서에는 없는 기록이 있기도 하고, 당대 정치가들이 어떤 식으로 국민을 통제하려고 했는지 사상의 편린을 보여주기 때문에 왜곡 자체가 또다른 의미를 띈 사료로 인정된다. 사료는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다. 비평적인 접근으로 가공된 후에 역사적인 정보로서 가치가 생기지, 팩트만이 사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4) '그래서, 학자들도 복음서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가?'
...if we apply to the New Testament, as we should, the same sort of criteria as we should apply to other ancient writings containing historical material, we can no more reject Jesus' Existence than We can reject the existence of a mass of pagan personages whose reality as historical figures is never questioned ······ To sum up, modern critical methods fail to support the Christ myth theory. It has 'again and again been answered and annihilated by first rank scholars.' In recent years, 'no serious scholar has ventured to postulate the non historicity of Jesus' or at any rate very few, and they have not succeeded in disposing of the much stronger, indeed very abundant, evidence to the contrary.[32]
그래야 하겠지만, 역사적 자료가 담긴 고대 기록과 동일한 기준을 신약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역사적 존재를 누구도 의심하지 않은 다수의 이교도 인물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더 이상 예수의 존재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 요컨대, 근현대 비평적 방법은 그리스도 신화 학설을 떠받치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최상위 학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대답되었고 붕괴되었고, 최근엔 예수의 비역사성을 상정하는 모험을 하는 진지한 학자가 없다. 또는 어쨌든 거의 없다. 그들은 반대를 위한 더 강하고 참으로 풍부한 증거를 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 Michael Grant(마이클 그랜트)[33]

이를테면 Tacitus와 같은 인물은 중세 필사본 단 하나에만 등장하지만 초기 신약 성서 필사본의 양은 놀라울 정도이다.
― 폴 존슨
예수의 생애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1차 사료는 복음서다. 교회가 그것들을 정경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서가 예수와 그의 첫 제자들의 역사적 환경에 가장 근접한 모습을 담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 피터 J. 톰슨[34]

이외에도 역사적 예수 연구의 거장들 E. P. 샌더스[35], 게자 버마스[36] 등의 쟁쟁한 학자들은 모두 복음서의 사료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학계에서 예수의 생애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복음서를 주요 사료로 활용하고 있다. 복음서를 사료로 인정 못 하겠다 함은 학계의 정설을 무시하는 처사에 불과하다.

복음서가 사료로 가치가 있다 함은 복음서가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그려서가 아니고, 복음서만으로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근거를 뽑아낼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예수의 존재는 명확하게 다른 사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영향력이 막대한 예수란 사람에 대해서, 복음서는 구체적인 행보를 제시하는 거의 유일한 사료이기 때문이다.[37]

학자들은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의 사상이나 기독교의 사상적인 배경을 파악하기를 권하고, 이것이 학계의 또다른 정설이기도 하다. 즉 신화가 신화 자체나 그로 인해 얻어지는 어떤 정당성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당대의 사상을 어느 정도 방증해 주는 것임을 인정하듯, 복음서를 사료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억지 논리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3.1.2. 복음서의 역사적 지표

학자들이 예수 이야기의 기원으로 한 유대인 설교자가 있었다고 받아들이는 주된 이유는, 복음서에 다소 어색하게 여겨지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다가오는 메시아에 대한 당시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잘 들어맞지 않는 많은 징후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저자인 마르코[38]의 입장에서는 세례 사건이 예수가 메시아가 되는 요점이므로 요한의 세례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다른 그리스도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버전에서 예수는 기적을 통해 신적 권능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에 요한을 통한 세례는 다소 어색했다. 그래서 마태오[39]는 마르코 복음서를 출처로 사용하면서도 그에선 찾아볼 수 없는 대화를 추가했다.[40]

가장 나중에 쓰인 복음서인 요한 복음서를 보면 다시 아주 다른 이야기가 발견된다. 요한 복음의 저자는 예수를 처음부터 하늘에 계신 신비롭고 이미 존재했던 메시아로 묘사한다. 따라서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더욱 어색하다. 그는 세례 이야기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이 세 가지 예에서 우리는 같은 이야기의 세 가지 다른 버전을 볼 수 있다. 그들 모두는 세례 이야기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으며 예수에 대한 그들의 개념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 중 두 명은 그렇게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기에 이야기를 바꿔야만 했다. 이러한 모든 혼란은 세례 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이었기에 그 이야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뭔가 있긴 있었기에 그것을 자기 논리에 꿰맞추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는 얘기.

이처럼 후기의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그들의 진화하는 생각에 맞춰야만 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복음서에는 이와 같은 몇 가지 사례가 있다. 마태오 복음서 루가 복음서의 저자는 메시아가 베들레헴 출신이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나자렛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설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두 복음서 저자는 완전히 모순되고 서로 배타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 의문이 생긴다. 그들은 왜 그런 노력을 했을까? 역사적인 예수가 없었다면 나자렛과 같은 무의미한 도시가 왜 이야기에 등장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고 그에 관한 이야기가 메시아에 대한 기대에서 진화하였다면, 그는 무난히 베들레헴 출신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야기에서 중요하지 않은 작은 마을 나자렛이 언급될까? 그리고 왜 예수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는 동시에 나사렛을 고향으로 유지하려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것일까? 이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인 설명은 예수는 실제로 나자렛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무엇보다 역사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는 십자가 처형일 것이다. 죽은 메시아에 대한 생각은 기독교가 시작되기 전의 어떤 유대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 메시아가 죽다니, 그것도 가장 비참한 형벌로 인해서 죽다니,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 개념은 완전히 기괴하고 터무니없었다. 비유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부끄러운 죽음으로 간주되어, 로마인의 특권 중 하나는 로마 시민은 십자가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41] 실제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대한 묘사를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도 바울로 역시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 개념이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릴 것임을 인정한다.[42]

또 기독교인들은 복음서를 입증하는 방법으로 구약성서의 온갖 구절을 끌어오곤 하는데, 이는 예수에게 벌어진 일이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힘을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본문 중 어떤 구절도 기독교 이전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결국 강제적인 해석이 필요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어색한 죽음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적 예수가 존재했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바람에 추종자들에게 어색한 문제를 남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이치에 맞는 설명이다. 역사적 예수가 없었다면 이 기괴하고, 전례가 없고, 불편한 요소가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왜 누군가가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 개념을 발명하고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가장 논리적인 설명은 수많은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이다.

3.1.3. 복음서의 속보성

복음서는 성격이 비슷한 문서 중에선 매우 빨리 작성되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파시교도의 전기가 기원후 1278년에 작성되었고,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석가모니도 첫 전기는 1세기에 기록되었으며, 무함마드의 전기 또한 죽은 지 백 년이 넘은 767년에야 비로소 기록되었다. 이에 비해 예수 사후 40년도 안되어서 기록된 복음서는 이례적으로 빠르다.[43] 더불어 현재 남아 있는 문서 중에선 예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기록 시기는 당연히 중요하다. 특정 사실을 겪은 증인들이 있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이 변형되고 뒤죽박죽 섞여버린다. 하물며 세대를 건너뛴다면 구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신뢰도는 크게 추락한다. 따라서 가까운 시점에 작성된 기록일수록 신뢰성이 높으며, 기술 대상인 시기에 실제 생존한 사람이 아직 살아 있을 시기에 작성된 기록이라면 그 신뢰도는 더욱 높다. 죽은 지 몇십 년밖에 안 된 인물에 대해 집필하는데 거짓으로 내용을 조작했다면,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예수 주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3.1.4. 필사본의 연대

신약 성경의 본문을 확립하는 데 근거로 삼는 필사본들을 소개하자면 파피루스 단편으로 된 것들이 81개로서, 그 연대는 기원후 2세기에서 4세기에 이른다. 그리고 4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대문자 그리스어 필사본들이 270개, 마지막으로 9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소문자 필사본들은 약 2,700개에 이른다. 그 밖에 수많은 번역어 필사본들과 독서용 성경 필사본들이 있음은 더 말할 나위 없으며, 개중에는 매우 오래된 것들도 꽤 많이 있다. 이 정도 자료라면 상당한 양에 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비판학자는 이 자료에 힘입어 신약 성경의 경전 본문의 역사를 다시 써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야심에는 한계가 엄연하다. 그가 확립할 수 있는 본문의 상태는 기원후 2세기 전반기 이전으로 소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의 기초가 든든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른바 최초의 원전 또는 최초의 본문을 지적할 수 있는 확률이 꽤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정은 고문헌과 관련되는 다른 분야와 비교해 볼 때 오히려 매우 다행한 경우라고 보아야 한다. 가령 베르길리우스의 책은 그의 사본들과 무려 4세기라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으며, 유명한 플라톤의 경우는 13세기, 그리고 유리피데스의 경우는 무려 16세기라는 간격이 있다.
-샤를르 페로, 《예수와 역사》, 박상래 옮김(서울: 가톨릭출판사, 2012 개정 1판), 41쪽

3.2. 요세푸스의 기록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c.100)의 저서 『유대인 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기록이 있다.
황제는 베스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알비누스를 유대인 행정관으로 파견하였다. 한편 아그립바왕은 요셉을 대제사장에서 해임시키고 아나누스의 아들인 같은 이름을 가진 아나누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사실 그의 부친인 늙은 아나누스는 많은 행운을 누렸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대제사장에 올랐고, 그 자신도 오랫동안 대제사장의 명예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다른 대제사장들에게는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 아들 아나누스의 성격은 오만하였으며 몹시 무례하였다. 그는 내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모든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엄격한 심판을 내리는 사두가이파를 추종하였다. 아나누스는 베스도가 죽고 알비누스 신임 행정관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권위를 행사할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다른 몇 명을 소환하였다. 그는 율법을 어긴 혐의로 그들을 고발하고 돌로 쳐 죽이도록 보냈다. 그러나 예루살렘 시민들 중 가장 공평하고 율법 위반을 불안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은 아나누스가 행한 일을 싫어했다. 그들은 아나누스가 그런 행동을 못하게 명령하도록 요구하기 위해 왕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었다. 왜냐하면 아나누스가 부당하게 행동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오는 알비누스를 만나러 갔고, 그에게 아나누스가 허락 없이 산헤드린을 소집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렸다. 그들의 말을 듣고 알비누스는 몹시 화가 나서 아나누스에게 문책할 것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아그립바왕은 아나누스를 대제사장에서 3개월 만에 해임시키고 댐네우스의 아들 예수를 후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유대인 고대사』, 20, 199-203

다음은 이 문단에 대한 의혹이다.

1)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역사에 대한 수십 권의 책을 쓰고, 그 속에서 메시아[44]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메시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이 바로 로마를 상대로 한 반란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45] 그렇기에 입장상 로마 제국의 감수성에 불쾌함을 줄 수 있는 모든 표현을 피했던 요세푸스는, 메시아를 언급해야 하는 모든 순간 어떠한 상황에서도 메시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요세푸스가 로마로 투항해서 쓴 모든 기록을 통틀어서 오직 예수에게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는 요세푸스가 썼다고 보기는 어려운 기록이다.

2) 한편, 이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부른다.'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중립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당대에 예수라는 이름은 매우 흔했기 때문에, 해당 표현이 그저 어느 예수를 말하는지 식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이미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인들의 진정한 메시아라고 선언했다.[46] 그러므로 그것은 잘못하면 로마 황제와 갈리리 시골 출신의 한 컬트 지도자가 메시아를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 관계로 비춰질 수 있는 표현이다. 즉 그것은 말할 것 같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반역죄의 가능성마저 존재한다. 요세푸스는 고작 예수가 어느 예수를 말하는지 식별하겠다는 이유로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3) 야고보에 대한 기록은 기독교 교부 오리게네스가 언급하기 전까지 약 150년 동안 마치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기독교인 누구에게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보통 기독교인들은 이런 식의 침묵에 대해 "그것은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하곤 하지만, 요세푸스가 인용되기 전부터 기독교 교부들은 야고보의 죽음이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헤게시푸스). 요세푸스의 기록을 처음으로 언급한 오리게네스 역시 정확히 그것을 말하기 위해 요세푸스의 기록을 언급한 것이며, 오리게네스 이후 에우세비우스, 제롬 역시 같은 주장을 했다. 즉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주장을 좋아한다. 그들은 야고보의 처형을 말하는 비기독교인 역사가의 기록에 관심을 보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4) 기독교 측에서는 오리게네스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언급하기 전까지, 야고보가 AD 62년경 아나누스의 불법 재판으로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대신 전혀 다른 시기에(AD 69년경) 전혀 다른 과정으로 순교한 야고보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존재했을 뿐이다. 헤게시푸스가 기록한 야고보 순교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모든 이로부터 의인이라 불리운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사도들로부터 교회를 전해 받았다. 그는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거룩하였다. 그는 포도주나 발효 음료를 마시지 않았고, 생명이 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얼굴에 면도도 하지 않았고, 기름을 바르지도 않았고, 목욕도 하지 않았다. 오직 야고보만이 성소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다. 그는 홀로 성전에 들어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종종 무릎을 꿇고 백성들을 위해 용서를 간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쉬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에 그의 무릎은 마치 낙타의 발처럼 딱딱해졌다. 그의 위대한 거룩함으로 인해, 그는 예언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의인이요 오블리아라고 불리었다. 오블리아란 그리스어로 '백성의 요새'와 '정의'를 뜻한다. 일곱 분파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이 와서 그에게 예수께 이르는 길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그분이 구세주라는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부활, 그리고 장차 그가 모든 사람들의 공로에 따라 상급을 주러 오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과 통치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그들은 많은 백성이 예수를 메시아로 기대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야고보에게 가서 말하였다. “백성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기대하여 그를 좇음으로써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제지하여 주십시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에 관해 올바르게 권면하여 주시기를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모든 사람들은 당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높은 곳, 당신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음성을 쉽사리 들을 수 있도록 성전의 꼭대기에 서십시오." 그렇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야고보를 성전의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외쳤다. “우리가 신뢰하는 의인이여, 백성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좇아 잘못된 길로 가면서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문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수의 문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야고보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왜 당신들은 나에게 인자이신 예수에 관해 묻는 것이오. 그분은 하늘 위,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동의하며 야고보의 증언을 찬송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그러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서로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예수에 관한 이 증언을 허용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니 올라가서 그를 아래로 던집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를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외치며 말하였다. “오! 오! 의인이 길을 잃었도다.” 이사야서에 기록된 바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들은 올라가서 그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의인 야고보를 돌로 치자.”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야고보가 아래로 떨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았음으로 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야고보는 몸을 돌려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 하느님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돌을 던지고 있을 때 예레미야가 말한 레갑의 자손인 제사장이 소리치며 말했다. "그만두시오. 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의인이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때 어느 축융업자가 피륙을 두드릴 때 사용하는 곤봉으로 의인의 머리를 쳤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순교하였으며 사람들은 성전에 야고보를 매장하였다. 이곳에는 아직도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야고보는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충실히 증거한 증인이 되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장악하였다.
― 헤게시푸스 회고록 제5권

기독교인들은 헤게시푸스와 요세푸스의 기록이 같은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없으며, 이야기는 그 시기와 발생 과정, 전개, 결말까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최소한 같은 사건을 말하고 있다면 야고보 처형의 원흉인 아나누스 정도는 언급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아나누스는커녕 기독교 전설에서 야고보를 죽이는 데 앞장서는 것은 바리새인들인 반면, 아나누스는 바리새인들과 대립 관계였던 사두가이파였다.

5) 보통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라는 비기독교인 입장에서의 표현은 진실함에 대한 근거로 제시되곤 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기독교들이 가장 먼저 사용한 표현이며(마태복음 1장 16절, 27장 17절, 27장 22절, 요한복음 4장 25절)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 입장에서 서술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마태복음 27장 17절, 27장 22절)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은 기독교인들에게서만 발견되는 일종의 관용어이다. 유대인 고대사 외에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라는 문장이 사용된 다른 고대의 비기독교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은 이 문단에 대한 의혹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1) 기록 인용 시기가 늦었던 것은 이유가 있다. 초기 교회와 비기독교도 사이의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있었냐.'가 아니라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3세기 요세푸스의 기록을 인용한 오리게네스가 토론한 주제 역시 예수의 신성 문제이다. 예수의 존재를 두고 논쟁하지 않았기에 이 문단은 인용할 가치가 없다. '그리스도라 불리는'이라는 대목이 예수의 신성과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에우세비우스의 시대에 논쟁이 된 것 또한 예수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가 성부와 동일 실체인가였고, 이는 주류 신학계와 멱살을 잡던 떠오른 신흥 세력 아리우스파에 대한 논란이다.

2) 유대 고대사에 등장하는 예수라는 동명이인은 총 13명이다. 당장 인용문 자체에도, 신임 대제사장의 이름이 예수이다. 당시의 어법은 인물의 이름 앞에 그를 특정할 수 있는 지역이나 가족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야고보를 소개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유명 인사인 예수의 이름으로 수식하는 것이었고, 동명이인의 예수 중 나사렛 예수를 수식하기 가장 보편적인 수식어는 '그리스도'였던 것이다.[47] 따라서 '그리스도라 불리는'이 기독교도가 비기독교인을 위장하고자 쓰는 표현이라는 주장은 너무나 웃긴데, 애초에 그리스도란 호칭에 의미를 두는 것은 유대인밖에 없다. 때문에 유대인이 아닌 비기독교인이 예수를 부를 땐 모두들 거리낌 없이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당장 타키투스가 그의 연대기에서 예수와 그 추종자들을 뭐라고 불렀는지 상기해 보자. 때문에 '그리스도라 불리는'이라고 적은 비기독교 자료를 찾는 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된다.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부분을 가필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형제' 혹은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형태의 문장이어야 한다. 유대교 지식층인 요세푸스는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메시아'라는 의미임을 당연히 알았을 테니, 이 용어를 나자렛 예수에 대한 고유 수식으로 사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리스도라 불리는'이라는 수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생각과는 별개로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불린다는 건조한 사실만을 전달할 뿐이다.

3) '베스파시아누스를 메시아로 인정한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호칭하는 것은 반역의 위험이 있기에 말이 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애초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거라 예언했을 때부터 이미 심각한 반역죄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는 걸 간과한 주장이다. 당시 황제인 네로는 30대 청년이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58세의 늙은이였는데,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반란 조장으로 받아들여져도 무방하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런 말을 한 요세푸스를 오히려 극진히 대접했다. 즉 베스파시아누스가, 또는 로마 사회가 고작 이 정도 가지고 문제 삼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게 요세푸스란 소리다.

4) 요세푸스는 37~100년 무렵 사람으로,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 외부에 있는 사람이 예수의 자세한 행적을 잘 모름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밀라노 칙령 이전까지, 교회 공동체 밖에서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인식은 매우 단편적이고 부정확했다. 이를테면 법률가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미누키우스 펠릭스(Minucius Felix)는 3세기 초에 저술한 저작에서 당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비방을 듣는지 소개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밀 신호와 표시로 서로를 알아봤다. ······ 내가 듣기로 그들은 터무니없이 무지한 자들의 생각에 따라 가장 천한 동물인 당나귀의 머리를 신성시하고 숭배한다. ······ 신참자들의 입교 의식 이야기는 잘 알려진 만큼이나 역겹기도 하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입교자를 속이기 위해서 갓난아기를 반죽에 싸서 성스러운 의식에 임하는 사람의 옆에 놓는다. 새로 입교한 사람은 반죽 표면을 세게 내려치도록 부추겨진다. 죄 없는 행위로 보이지만, 이렇게 해서 갓난아기는 살해되고 만다. 이런 잔학 행위를! 그들은 그 피를 덥석 받아 마시고 사지를 찢어발긴다.
― Christopher Kelly, 『The Roman Empire』에서 간접 인용.

즉 당대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당나귀 머리를 숭배한다고 여기고 성체 성사를 영아 살해로 오인했다. 이런 것이 교회 공동체 밖에서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였다. 이 정도로 당대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보는 (교회 밖에서는) 부정확했던 것이다. 1세기 사람인 요세푸스가 간결하게 정보를 기술했음은 이상할 게 없다.

5) 기독교 전승과 해당 기록의 불일치는 오히려 해당 기록을 요세푸스가 썼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야고보에 대한 기독교만의 전승을 언급한 대표적 인물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헤게시푸스를 들고 있는데, 그중 클레멘스는 요세푸스의 기록을 처음 언급한 오리게네스의 스승이기도 하다. 만약 오리게네스가 요세푸스의 야고보 기록을 창작해 낸 거라면 자신의 스승이 언급한 기독교 전승을 기록했어야지 기독교도들이 생판 처음 듣는 소리를 창작해서 기록할 이유가 없다.
"...few have doubted the genuineness of this passage [20:200] on James"
"야고보에 대한 이 구절 [20:200]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자는 거의 없다"
Louis H. Feldman,[48] tr., Josephus, IX [xambridge, mass.:havard university press, 1965], 496

다음은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플라비우스 증언이다.
이때에,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현자라고 말해야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고, 수많은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다. 본시오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고소 때문에 이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신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부족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 『유대인 고대사』, Bk.16, Ch.3, 63~64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글을 신뢰하고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사실적인 증거라고 보았으나, 시간이 흐른 후 이 글 속에는 가필과 의도적 변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기록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근거는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바리사이적 유대주의에 충실했던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였다고 말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

둘째, 오리게네스가 그의 글에서 요세푸스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한 점.[49]

셋째, 예수에 대한 이 기록은 선행하는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 이전 구절에서 그는 유대인들에게 닥친 재앙에 관해 말하고 있었고, 거기서 플라비우스 증언이 나오더니 그다음 구절에서 "이때 또 다른 재앙이 유대인들에게 닥쳤다."라는 말과 함께 플라비우스 증언을 완전히 건너뛰어 버린다.

넷째, 초대 교부들과 그리스도교 변증가들이 이 기록을 인용하지 않았고, 324년이 되어서야 에우세비우스 추기경이 처음으로 인용했다는 점.[50]
그리고 그 에우세비우스는 저서 《복음적 증명》에서
Their evidence then may be considered sufficient about our Saviour. And here it will not be inappropriate for me to make use of the evidence of the Hebrew Josephus as well
그들의 증거들은 우리 구세주에 대하여 충분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히브리인 요세푸스를 또한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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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했다는 점.

하나 전체가 가필되었다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첫째, 문맥, 즉 글쓴이의 입장이 일관되지 않는다. '현자', '놀라운 일', '부족' 등은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썼다고 보이는 객관적 표현이나, '그리스도였다', '그의 진리를...' 및 '부활에 관한 확언' 등은 그리스도교 입장이다. 즉, 두 사람 이상이(요세푸스 + 기독교인) 글에 손대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둘째,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빌라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의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랍비 자료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죽음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지운다.

셋째, 오리게네스는 그의 책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요세푸스가 믿지 않았다고 했다. '예수의 기록을 찾지 못했다'라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내용이다. 초기교회 내에서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있었냐.'가 아니라 '예수가 어떠한 신인가.'라는 것이었고, 예수가 정말로 신인가 하는 논쟁은 주로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에서 벌어졌다. 오리게네스 역시 예수의 '실존'보다는 예수의 '신격'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리게네스가 본 요세푸스의 책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었을까? 요세푸스와 예수를 연관 지었으므로 오리게네스가 본 요세푸스의 책에는 틀림없이 예수를 언급한 구절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요세푸스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외부자의 시선에서 서술했을 테니, 오리게네스는 요세푸스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밝혔을 것이다.

오리게네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삼위일체 정립에 크게 기여한 그리스도교 호교론자였다. 예수의 신성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알렸던 그가 그리스도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요세푸스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았다.'라는 내용을 남겼음은, 반대로 누군가가 '요세푸스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었다.'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더라도, 당시에 요세푸스의 비그리스도교적인 기록을 두고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짓는 사소한 논쟁이 오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적은 원본에 예수가 언급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기록 인용 시기가 늦었던 것은 이유가 있다. 초기 교회와 비기독교도 사이의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있었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존재를 가지고 논쟁하지 않았으므로 요세푸스가 당초에 적었을 예수에 대한 비그리스도교적 구절은 인용할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의 신격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그를 사람으로 부른다면', '그는 그리스도였다.' 및 '다시 살아났다.'라는 구절을 가필함으로써 주장자의 논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우세비우스의 발언 또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증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당시에도 역사서를 가필하는 것은 비판받을 만한 행동이었으니, 이러한 내용을 순순히 떠벌릴 리가 없으므로.

다섯째, 기록이 왜 이리 간략한가? 먼저 당시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관심 밖에 있는 인물은 과감히 기록에서 제외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세푸스가 언급하는 세례자 요한은 필론과 사도 바울로, 랍비 문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의의 스승[51]은 쿰란 문서에만 나오고, 힐렐학파의 창시자인 랍비 힐렐[52]도 역시 바리사이파였던 요세푸스가 언급하지 않았다. 역시 디오 카시우스는 유대의 반로마 저항 운동을 기록한 내용에서 제3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자칭 메시아였던 지도자 바르 코크바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지나쳤다.

요세푸스는 유대의 배신자였다. 66-74년 유대-로마 간의 전쟁에서 패하자 다른 동료들은 자살했지만, 요세푸스는 항복하여 로마의 옹호자가 되었다. 자기 책을 통해 변명을 할 필요도 있었으므로, 요세푸스는 유대-로마 간 항쟁에 유달리 관심이 많아서 《유대 전쟁사》를 쓰기도 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헤롯의 결혼 문제로 시비를 걸기까지 하는 등 로마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요세푸스가 관심할 수 있었다. 또,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 이집트의 거짓 예언자 이야기를 썼다. 그자가 올리브산에 3만 명을 집결시켜 무장 추종 세력과 함께 예루살렘에 진입하여 로마군을 몰아내려 하다가, 펠릭스 총독에게 발각되어 현장에서 대참사가 벌어졌다는 내용이다.[53] 즉, 대로마 항쟁에 관심이 있었던 요세푸스에게 황제에게도 세금을 바치라고 했던,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는 관심 밖이었다.

여섯째, 플라비우스 증언을 좀 더 짧게 전하는 10세기 사본의 존재다.
그러나 최근에 셜로모 피네스Shlomo Pines 교수,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뒤바를르A.-M. Dubarle 신부가 이른바 '플라비우스 증언'을 좀 더 짧게 전하는 10세기의 사본을 발견하여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시리아의 히에라폴리스의 멜키트파 주교 아가피우스가 전하는 이 이본異本은 12세기의 시리아 사람 미카엘의 《연대기Chronique》라는[54] 책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무렵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 행실이 착했다. 그 덕망도 모두 인정하는 터였다. 그리고 많은 유다인들과 그 밖의 다른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빌라도가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그의 교리를 설파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그가 부활하여 사흘 만에 자기들에게 나타났으며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메시아일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번역: 그는 메시아로 생각되었다.) 그분을 두고 예언자들은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을 미리 말했다." 이 본문에는 그리스도인들의 가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 대목은 예수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심을 떨치지 못했던 요세푸스 자신의 증언을 전해 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 요세푸스의 이 증언 역시 기원후 1세기 말경의 그리스도교 집단들 가운데서 떠돌던 소문을 이 유다인 역사가가 전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증언 자체는 매우 간소한 편이고, 또 그 저자 역시 로마인들을 상대로 글을 쓸 때면 으레 기원후 70년의 유다 전쟁 이전에 있었던 이른바 메시아 운동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회피하는 편이기 때문에 예수에 대해서도 그는 얼마든지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힐렐Hillel이나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ï 같은 유명한 율법 학자들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을 회피했던 것처럼 말이다.[55]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예수와 역사》, 가톨릭출판사, 36-37p[56]

이 이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가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가필한 부분까지 인용을 해야만 주장을 전개하는 데에 유리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달랑 위의 구절만 인용한 것이다. 아가피우스가 이 자료를 어디서 구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원본에 비교적 가까운 요세푸스의 사본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인기 있는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저서는 많이 필사됐을 테니, 누군가가 가필을 했다면 로마와 그리스까지 퍼진 사본들에 모조리 가필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3.2.1. 정리

학자들은 가필 범위에 대해서 의견이 분열되어 있다. 루이스 필데만의 "Josephus and Modern Scholarship (1984)"에 따르면 1937년부터 1980년까지 이 주제를 다룬 52 명의 학자를 조사한 결과, 39명 즉 75%의 학자가 진실한 부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57][58] 비교적 최신 연구의 동향은 켄 올슨, 폴 하퍼, 리처드 캐리어가 전체 가필을 주장했고, 루이스 필데만이 전체 가필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반면 엘리스 윌리는 부분적인 가필을 주장했다.

가필 범위와 상관없이 확실하게 가필로 추정되는 문장은 다음 세 구절이다.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였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것을 떼어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이때에,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현자라고 말해야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고, 수많은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다. 본시오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고소 때문에 이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신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족속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유대인 고대사』, Bk.16, Ch.3, 63~64)

물론 이 가정은 앞서 언급한 의문시되는 3구절을 제거했을 뿐이고, 부분 가필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지금도 확실한 원본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원본이 예수에 대해 호의적이냐/중립적이냐/악의적이냐 여부도 중요한 논란거리이다.

아래는 플라비우스 증언 논란의 간략한 역사다.
  • 16세기: 조지프 스칼리거가 '증언' 구절의 진위를 처음으로 의심했다. 너무나도 기독교 색채가 짙다는 것이었다.
  • 17세기: 리처드 몬터규 추기경이 "그는 구원자였다."라는 구절이 훗날 어느 신자가 필사하면서 덧붙여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 1737: 위스턴이 요세푸스의 저술들을 번역하며 요세푸스가 유태인 기독교도였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요세푸스 본인이 증언 구절 전체를 썼을 수 있다고 했다.
  • 18세기 ~ 20세기 초반: 많은 학자들이 상기 구절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다.
  • 1929: 대커리가 위조설을 지지하다. 그는 또 루카 복음과 연대기에 공통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루카와 요세푸스가 서로 만났을 가능성을 꺼내었다.
  • 1931: 아이슬러가 그리스도교 검열 때문에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다고 주장하고, 자기 나름대로 원래의 구절을 복구하여 제시했다.
  • 1941: 마틴이 부분적인 위조를 지적하고 나머지 부분은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 1954: 폴 윈터가 위조된 구절은 세 개뿐이고 나머지는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위조되었다고 하는 부분은 '그는 구원자였다.',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하는 두 구절과 뒷 부분의 부활과 예언에 관한 구절이었다. 이 주장에 당시 많은 학자들이 공감했다.
  • 1960: 콘젤만은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에 내포된 신앙관과 '증언'의 공통성을 발견했다. 따라서 '증언' 전체가 그리스도교도가 가필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 1963: 펠드만은 거의 모든 부분이 정확하다고 단정했다.
  • 1971: 파인스가 9~10세기 아랍 및 시리아본(아가피우스의 구절)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구원자' 운운하는 구절과 '인간이라 부를 수...' 하는 구절이 없었으므로, 가필되지 않은 원본 기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다.
  • 1973~1983: 렝스토푸가 요세푸스의 저술을 집대성하고 재구성하여 용어 색인 체계를 만들어, 학자들이 연구하기 편하게 하였다.
  • 1984: 버즈올이 렝스토푸의 색인 체계를 이용하여 '증언'의 문체를 분석했는데, 요세푸스의 문체와 너무 다르므로 증언 전체가 위조라고 주장했다.
  • 1991: 마이어가 폴 윈터의 설을 지지했다. 즉 세 군데만 위조됐다는 것이다. 마이어의 연구는 현재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
  • 1995: 골드버그가 '증언'과 루카 복음서의 엠마오 이야기[59]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따라서 증언과 엠마오 이야기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어느 초대 교회의 문서에 근거를 둔다고 주장했다. 결론으로 그는 '구원자', '사람일 수...' 구절 두 개만 빼고는 전부 원본에 있었다는 것이다.

3.3. 타키투스의 기록

예수에 대한 또다른 증거로는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es)에서 네로 때의 로마 대화재 사건에 대해 쓴 기록이다.
ergo abolendo rumori Nero subdidit reos et quaesitissimis poenis adfecit quos per flagitia invisos vulgus Christianos appellabat. auctor nominis eius Christus Tiberio imperitante per procuratorem Pontium Pilatum supplicio adfectus erat; repressaque in praesens exitiabilis superstitio rursum erumpebat, non modo per Iudaeam, originem eius mali, sed per urbem etiam quo cuncta undique atrocia aut pudenda confluunt celebranturque
그래서 네로는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수치스런 행동 때문에 미움을 받고 있던 자들을 범죄자로 몰아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군중은 그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os이라 불렀다. 이 명칭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도'christus는 티베리우스 재임 때 재정 대리인procurator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us에게 극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이 치명적인 미신exitiabilis superstitio은 얼마간 잠잠해졌지만, 그 악의 근원지인 유다에서뿐만이 아니라, 온갖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들이 몰려들어 유행하는 로마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es) 15.44[60]

일단 이 기록은 요세푸스가 쓴 '플라비우스 증언'과는 달리 가필의 건덕지조차 없다. 타키투스는 그리스도교를 exitiabilis superstitio(치명적인 미신)이라 부르고, 이 발췌문 직후에는 그들이 방화 때문이 아니라 odium humani generis(인류에 대한 증오) 때문에 형을 선고받았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혐오 표현을 그리스도인들이 썼을 리 만무하다. 의도적인 가필이라면 목적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써서 그리스도교에 득 될 것은 전혀 없고 흠집만 더해지는 꼴이니 의도적 가필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61]

이 기록의 증거로서의 효력을 무시하는 더 일반적인 방법은 타키투스가 기독교인들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분명 가능성은 있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타키투스는 단순한 소문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자신이 신뢰하는 출처나 사람을 언급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가능한 한 소문, 가십, 간접 보고임을 표시하던 철저한 역사가였다. 그는 작품 초반에 단순한 소문에 근거한 역사 기록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62]

둘째, 타키투스가 자신의 규칙을 깨고 소문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쳐도, 그가 완전히 경멸했던 기독교인들로부터 그렇게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를 '부패한 미신'이라고 불렀다. 그 추종자들을 믿을만한 출처로 간주할 거라고는 믿기 어렵다. 더욱이 그가 예수에 대해 말하는 내용엔 예수의 가르침이나 기적에 대한 어떠한 힌트도 나타나지 않는 반면 로마인들이 주목할 만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출처를 기독교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리고 타키투스는 대화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여러 출처를 참고했다고 밝혔다.(Annals XV 38) 그에게 예수에 대한 출처를 준 것은 이것들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또한 타키투스와 가까운 시기에 로마에 다른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 역시 역사가였고 타키투스가 모호한 유대인 설교자에 대해 물어볼 만한 사람이었다. 다름 아닌 요세푸스다. 비슷한 시기에 요세푸스는 로마에서 글을 쓰고 있었으며 타키투스와 마찬가지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 티투스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타키투스는 이 기독교 분파에 대해 요세푸스에게 물어봤을 가능성이 있다.

3.4.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선동가 크레스투스로 인해 유다인들이 끊임없이 소동을 일으켰으므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그들을 로마 바깥으로 쫓아내았다.(Iedaeos impulsore Christo aaaidue tumultuantis Roma expulit...)
- 수에토니우스,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 클라우디우스 25[63]

이 기록에 대해 신화론은, 라틴어로 그리스도는 크리스투스(Christus)인데 수에토니우스는 크레스투스(Chrestus)라고 썼으니 나자렛 예수가 아니라 말한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는 물론이고, 그리스도인들 자신조차도 그리스도를 종종 χρηστὸς(chrēstos)라 적었다.[64] 크리스토스와 뜻이 비슷하면서도 마침 뜻도 적절했으니[65] 전혀 무리한 일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고대인에게 표준 맞춤법을 강요하는 것 부터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1세기 중반 이후 크레스투스라는 말로 특정 가능한 유다인은 나자렛 예수밖에 없다.[66]

또한 '크레스투스에게 미혹'되었다는 말은 굳이 로마에 예수가 있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표현으로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가 초기 기독교의 핵심이었다는 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 어떤 인물이 주동이 되어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클라우디우스는 다른 로마 황제들처럼 강력하게 진압을 했을 것이나 단순한 추방 명령을 내린 것을 보면 그 원인은 단순한 사상이나 종교적 문제에 대한 대처라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수에토니우스의 이 기록은 사도행전 18:2의 기록[67]과 연대와 인물이 정확히 일치하여 단순히 철자 하나가 다르다는 이유로 수에토니우스의 '증거'를 무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3.5. 랍비 자료

누구보다도 예수를 가까이에서 경험했던 유대인들의 기록에서도 예수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랍비 자료에는 예수가 마리아와 판델라(Pandera, Pantera, Pandila 등 여러 표기가 있다)라는 로마 병사[68]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등 예수를 수차례 언급했다. 이 이야기는 2세기에 반기독교 선전가였던 철학자 켈수스(Celsus)도 전하고 있다.

M. 윌콕스에 의하면 초기 랍비들이 모두 예수를 이단자나 사기꾼으로 보지는 않았다는 기록도 전한다고 한다. 여러 랍비 문서 중 인용할 만한 대표적인 자료로는 탈무드 중 아래의 텍스트(bSanh 43a)가 있다. 2세기 이후 타나 시대에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
파스카 축제 전날 밤 사람들은 예수를 매달았다. 사십 일 전 전령이 이렇게 외쳤다. '그 사람은 마술을 행하고 이스라엘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여 불충한 자들로 만들었으니, 끌려가서 돌팔매질을 당할 것이다. 그를 변호할 자는 나와서 말해보라.' 그러나 아무도 그를 변호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파스카 축제 전날 밤 매달았다. 랍비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예수에게는 마타이, 나카이, 네제르, 부니, 토다 이렇게 다섯 명의 제자가 있었다. 사람들이 마타이를 끌고 갔을 때 예수는 그들(재판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마타이를 처형해야 하는가? '언제(מתי 마타이) 내가 나아가서 하느님을 뵈울 수 있을까? (시편 42,2)라고 기록되지 않았나?" 그들은 예수의 말에 이렇게 응수했다: "물론이지. 마타이는 처형될 것이야. '저자가 언제(מתי 마타이) 죽어서 그 이름이 없어질까?' (시편 41,5)라는 말씀도 있으니까."

신학자 마이어(J.Maier)는 대략 예수 사후 220년까지 랍비 문서에는 단 하나의 '예수 문구'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 자료는 기독교의 도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독자적인 역사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탈무드는 서기 200년 이후부터 구전되는 율법 해석 등을 문서화하는 식으로 집필되었으므로, 그 이전의 랍비 자료에서 예수의 흔적을 찾기를 기대하기란 무리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이단을 별로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20년 이후 예수의 기록이 탈무드에서 나타났다고 꼭 늦은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만의 전승'의 가능성이다. 1900년대 초반 요셉 클라우스너(Joseph Klausner)[69]는 최소한 신뢰할 만한 전승 몇 개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위의 텍스트는 다른 기록이나 복음서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사실을 언급했다. 바로 '돌에 맞아 죽은 후 매달렸다', '40일 동안 증인을 찾았다.', '엉뚱한 다섯 제자의 이름' 등이다. 기본적인 사실은 일치하면서도 나름대로 개성 있게 기록한 부분이 있음은, 기록하면서 급조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두고 그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전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마이어의 이론은 전적으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은 어떠한 역사적 추론에도 딴지를 걸 수 있게 한다. 다른 텍스트에서는 굳이 예수가 마리아와 로마 병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예수 출생과 관련한 특이한 점이 있었을 것임을 암시한다.

3.6. 마라 바르 세라피온의 편지

시리아 스토아 철학자인 마라 바르 세라피온(Mara bar Serapion)은 로마의 감옥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아들에게 전해주는 권고와 경고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중 '유대인의 현명한 왕'을 언급하는 구절이 있다.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죽여서 무슨 이익을 보았느냐? 그들이 무슨 일을 했길래 기아와 역병으로 대갚음을 당했느냐? 사모스섬 사람들이 피타고라스를 불태워 온 나라가 한순간에 모래로 뒤덮이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무슨 득이 있겠느냐? 유대인들이 현명한 왕을 처형하고 그때부터 그 나라를 빼앗겼으니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신께서는 그 세 현자들을 위하여 똑같이 복수를 행하셨다. 아테네 사람들은 굶주려 죽었고, 사모스섬은 바닷물로 뒤덮였으며, 유대인들은 살육당하고 자기네 나라에서 쫓겨나 여기저기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았다-플라톤 때문에, 피타고라스도 아직 살아 있다-헤라스타누에 때문에, 현명한 왕도 살아 있다-그가 준 새로운 율법 때문에.

일단 이 편지는 73년 직후에 집필되었다는 추측이 유력하다. 편지의 다른 부분에서 마라는 아들에게 반로마 정서를 가진 사모사타 주민들이 실루기아로 피난한 일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73년 로마인들이 안티쿠오스 4세를 폐위하고 사모사타에서 추방한 사건과 연관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유대인이 나라를 잃었던 사건은 두 가지의 후보가 있다. 하나는 66~74년에 벌어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고, 하나는 132~135년 있었던 바르 코크바의 난이다. '현명한 왕'이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마라가 언급한 전쟁은 전자의 전쟁일 것이다. 그러나 연대를 132년 이후로 보더라도 이 '현명한 왕'이 예수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별로 위협받지 못한다. 가능한 다른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름이 없으니 여기서 말하는 '왕'이 예수인지 세례자 요한인지 아니면 정의의 스승인지는 알 수가 없다는 반론 또한 있다. 하지만 편지 속 '현명한 왕'이 예수를 가리킨다고 볼 만한 정황이 많다. 우선, 예수의 탄생과 죽음(십자가의 명패)에 이르기까지 왕이라는 수식어는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유대-로마 전쟁에서의 유대가 패하여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사건을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대인들의 죄의 대가-벌로 보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 평가였다. 그리고 '그가 준 새로운 율법'이라는 표현은 예수가 새계명을 준 사실과 일치한다. 새로운 율법과 왕의 칭호,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은 예수 외에 일치하는 인물이 없다.

3.7. 땅이 어두워진 날

복음서들은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둘 때 하늘이 어두워졌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동시대 역사가들이 쓴 문헌이 2개 있다.

1. 탈로스
탈로스는 1세기 그리스인 혹은 사마리아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52년 이후 세 권의 역사책을 썼으나 소실되었다. 탈루스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유대 고대사》에서 언급한 티베리우스 황제(재임 기간 14-37)에게 사면받은 부자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된다. 그의 저서는 현존하지 않지만, 221년 그리스도교 신자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170-240)가 탈로스의 저서를 반박하는 글을 쓴 덕에, 탈로스가 적었을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역사책 제3권에서 탈로스는 이 어둠을 일식이라고 부른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불합리한 것 같다.
(이후 율리우스는 예수가 파스카 축제, 즉 만월이었을 때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보름달일 때는 일식이 일어나지 않음을 주장한다.)

탈로스가 저서에서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반박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 '하늘이 어두워짐'을 일식이라는 자연 현상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1세기 역사학자 탈로스도 기독교인들과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을 두고 논쟁에 끼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2. 플레곤
그리스 작가 플레곤(2세기 초)의 기록에 의하면 202회 올림피아드의 4년째 해(서기 33년)[70] '가장 큰 일식 현상'이 발생했다. 플레곤은 "하루 중 6시경 즉 정오에 밤이 되어서 심지어 하늘에 별이 나타날 정도로 어두워졌다,"라고 썼다.

예수에 대해 회의적인 유대인 학자 폴 마이어도 저서 《본시오 빌라도》(1968)에서 위 기록들을 근거로 "이 현상은 분명히 로마와 아테네 그리고 지중해의 다른 도시에서도 볼 수 있었다."라고 썼다.

3.8. 기타 증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분파로 출발했고 로마 제국에게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로마의 지식인들은 이 신흥 종교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구원자로 믿던 예수 또한 예외가 아니었지만, 당시 反그리스도교 비판자들도 예수의 실존 자체는 인정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지식인 켈수스(Κέλσος, 115~175)는 성모 마리아가 로마 병사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압데스 판테라(Tiberius Julius Abdes Pantera, 기원전 22~서기 40)와 간통하여 예수를 낳았다(즉 사생아)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당시 기록들을 살펴보면 "예수라는 비천한 인간이 어떻게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정치범을 숭배한다니 말이 되는가." 등등 다양한 비판이 있었지만, 이런 비판자들도 예수의 실존 자체를 문제시하진 않았다.

로마는 비교적 행정 체계가 잘 잡힌 국가였고, 법정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처형수는 실존 자체를 조작하기가 매우 어렵다. 즉 완전한 허구의 인물 A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받았다."라고 주장한다고 치자. 그 경우 현지 출신 사람이 "예루살렘에 그런 사형수는 없었는데?"라고 증언하면 완전히 논파되고 만다.[71] 이러한 약점은 두고두고 씹힐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초기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가장 흔한 공격이 '저놈들이 숭배하는 신이란 작자는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중범죄자'라는 논리였고, 초기 신자들은 "우리는 제국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아니다. 그분을 죽인 것은 로마 제국이 아니라 그분을 못 알아본 민초들이다." 하고 엄청나게 어필했다. 이럴 바에는 처음부터 가상인물을 이런 위험한 설정으로 만들 이유가 전혀 없다. 차라리 "우리 구원자는 이스라엘 어느 시골 깡촌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라고 주장하는 편이 훨씬 조작하기 쉽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가 사형수라는 점이 당시 사람들에게 그의 실존을 뒷받침하는 큰 증거가 된 셈이다.

여기에 '정말로 예수라는 인물을 날조할 필요가 있는가?'도 고려해야 한다. 당시 유대에는 메시아를 자칭하는 인물이 흔하디 흔했고, 그 추종 세력도 우후죽순 격이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교주란 사람이 증언상으로만 존재하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선교라는 게 가능할까? 교주를 날조할 작정이라면 적당한 인물을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다. 베드로 같은 인물이라면 그 자신을 교주로 내세울 수도 있었고,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이미 성인으로 대우하던 세례자 요한도 그럴 자격은 충족했다. 굳이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4. 결론

적어도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중략)... 요세푸스의 글에서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 사상을 주장한 유대 종파주의자였고 그가 죽은 이후에 그를 추종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로마 제국을 아주 귀찮게 했다는 것 등을 예상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를 언급하였던 다른 비기독교 문헌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이들 문헌들은 예수의 역사성을 확인해 주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다른 정보를 제공해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연대기'에서 타키투스는 64년에 일어난 로마 화재 사건을 언급하면서 기독교를 '혐오스러운 미신'으로 불렀으며, '이 종파의 설립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 때에 본시오 빌라도 총독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112년에 플리니우스가 쓴 문서에는 기독교 종파를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찬양하였던' 무리들로 기록하였다. 수에토니우스가 쓴 문헌에서도 기독교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는데, 클라우디우스 통치 때엔 41~54년에 로마에는 이미 기독교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당대를 기록한 역사물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실재했던 인물임이 확실하다.
―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中'
결론은 실존 인물이 맞다는 것이다. 기록을 종합하면 예수는 갈릴래아 지방에 살았던 유대인이었고, 그 지역에서 어느 정도의 종교적 영향력이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어떠한 마찰로 인해 로마 법정에서 행정장관인 본티오 빌라도에게 법정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당했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여담

5.1. 예수 신화설

예수가 순수한 신화적 인물이라는 아이디어는 19세기~20세기 초반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1960년대 이후로는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나마 21세기 들어서 예수 신화론은 인터넷 블로그와 자체 출판 서비스를 통해 부흥이라고 하기도 힘든 무언가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 지지자들은 대부분 전문 학자가 아니며 증거에 대한 이해가 열악하고 거의 모든 경우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72]. 반면 전문학자들의 경우, 예수가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예: 바트 어만 모르시 케이시, 폴라 프레드릭센), 유대인 학자(예: 게자 베르메스, 하이엄 매코비)를 포함한 광범위한 합의가 있다.

신화론은 예수 이야기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설명을 제시할 때 그 약점이 드러난다. 그들 대부분은 대체 설명을 제시하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모호한 아이디어를 남기지만, 정말 예수라는 설교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이야기가 발생했는지 상세한 형식을 통해 설명해야만 한다. 이것은 실제로 신화론이 쓰러지는 지점이다. 예수 신화론은 크게 다음의 네 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1) '예수는 이교 신화의 결합체였다.'
- 이것은 한 뉴에이지 작가가 제시한 설명으로서, "The christ conspiracy : The greatest story ever sold(1999)"라는 자체 출판된 책에 나오는 이론이다. 이 작가는 스스로를 'Acharya S'라고 부른다. 그는 예수와 이교도 신화 사이의 유사성을 과장하는 19세기 후반의 아이디어에서 일하면서, 전형적인 뉴에이지 논리에 따라 '유사성'을 '병렬'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결'과 '원인'으로 도약한다.

이 가설은 예수 분파의 초기 추종자들이 독실한 유대인이라는 증거들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는 의견이 있다. 그 의견에 따르면, 그들은 긴 머리가 이교도, 헬레니즘 문화와 연관되기 때문에 머리를 짧게 자르는 등 이교도 문화와 연관된 무엇이든 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이교도 신화의 도입은 매우 끔찍했을 것이다. 또 모든 증거는 최초의 예수 분파가 비유대인을 그룹에 포함하는 과정에서 격동의 시기를 거쳤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람들이 호루스와 아티스, 디오니시우스 신화를 즐겁게 채택하고서 이교도/유대교의 잡종 메시아(존재하지 않은)에 관한 이야기로 합친 다음, 돌아서서 그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잊어버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한다..

(2) '예수는 하늘의 영역에 존재하는 천상의 존재였다. 초기에는 지상의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 이것은 또 다른 자체 출판 작가인 얼 도허티가 "The jesus Puzzle(2005)"에서 처음, 그리고 "Jesus: Neither God Nor Man(2009)"에서 제시한 가설이다. 도허티의 이론은 몇 가지 주요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이 신화/천상의 예수는 천상의 공간이 여러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플라톤의 관점에 근거한다. 그는 그곳이 바로 미트라스와 아티스가 존재했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그가 이론을 제시하는 방식 때문에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고대인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도허티가 발전시킨 가설이다. 그는 이 생각이 플라톤 철학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식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스스로 구성한 것이라고는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둘째로 도허티는 바울을 포함한 최초의 기독교 저술들이 지상의 예수가 아니라 천상의 예수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는 도허티의 가설과 맞지 않는 지상의 예수에 대한 많은 언급이 발견된다. 도허티는 그의 가설이 무너지지 않도록 두 개의 책에서 방대한 단어들을 쏟아부었지만, 설득력 없는 공상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마지막으로 이 천상의 예수 분파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발견된 적이 없다. 따라서 도허티가 옳다면 천상의 예수는 최초의 예수 분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는 도허티가 나타나 한때 존재했었다고 주장할 때까지 미궁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초기 기독교는 다양하고 분열된 논쟁적인 신앙으로서, 다양한 하위 영역과 파생물 및 이단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두 패권을 다투는 신앙이었다. 결국 이 논쟁의 결과는 삼위일체, 신성한 화신으로서의 예수, 육체적 부활 등 오늘날 기독교의 모든 요소를 갖춘 '정통'의 한 형태였다. 우리는 이 정통의 경쟁자들의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 경쟁자들과 다투고 그들의 교리를 반박했던 기독교 저술 덕분이다. 도허티의 가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기독교 저술들이 광범위한 이단을 비난하고 반박함에도 불구하고 천상의 예수라는 독창적인 분파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믿어야 한다.

도허티의 가설은 'Acharya S'의 뉴에이지 사상보다 무신론자들 사이에서 훨씬 더 인기가 있지만, 주로 위에서 언급한 결함들 때문에 학계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물론 도허티와 그 추종자들은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일종의 학문적 음모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3) '예수는 우화적이고 상징적인 메시아 소설로서 시작되었다.'
- 이 가설은 또 다른 아마추어 이론가인 R. G. 프라이스(로버트 프라이스가 아님)가 자체 출판 한 "Jesus: A Very Jewish Myth(2007)"에서 가장 자세하게 제시되었다. Acharya S, 도허티와는 달리 프라이스는 예수 분파의 첫 구성원이 근본적으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기 때문에, 이집트 신화나 플라톤 철학을 포인트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 신화론에 따르면 예수는 단순히 메시아에 대한 이상화였으나, 실수나 오해 또는 어떤 의도로 역사적 인물로 변한 것이다.

도허티 가설에 대한 반대 의견을 이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이 이상화된 메시아를 믿었던 사람들과의 논쟁의 잔재가 없는 것인가? 그리고 왜 기독교의 적들 중 누구도 최초의 예수 분파가 역사적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격의 일환으로 사용하지 않은 걸까?

더욱이 예수 이야기가 메시아에 대한 이상화된 생각으로 발생했다면, 예수가 그 기대에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이상하다.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메시아 예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무엇보다 메시아가 처형되고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해주는 전통과 기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와 함께 처음 나타나며, 유대인에게는 전례가 없다. 예수는 확립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언 비슷하게 보이는 전통을 찾아내기 위해 허둥지둥 달려야만 했다. 예수의 부끄러운 처형에 바탕을 두는 핵심 교리가 유대인들의 이상적인 기대에서 진화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경우에만 의미가 있으며, 추종자들은 그 결과를 예측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성경의 예언을 찾아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예수 이야기가 유대인 신화와 충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프라이스의 가설은 실패한다.

(4) '예수는 유대인 설교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독교 버전, 또는 여러 사람의 혼합체였다.'
이것은 신화론 중 가장 인기가 없는 가설로서, 이탈리아의 아마추어 이론가인 프란체스코 카로타의 "Jesus was Caesar: On the Julian Origin of Christianity: An Investigative Report(2005)",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조셉 아트웰의 "Caesar's Messiah: The Roman Conspiracy to Invent Jesus, (2005)" 그리고 회계사인 다니엘 운터브링크의 "Judas the Galilean: The Flesh and Blood Jesus, (2004)"에서 제시되었다. 카로타는 예수가 사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며 유대인 전통에 적용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아트윌은 예수가 티투스 황제에게 발명되었고 같은 방식으로 유대교에 적용 되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입증된 적이 없다. 만약 티투스 황제가 예수와 관계가 있다면, 로마인들은 왜 서기 64년 그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을까? 어떤 학자도 이들의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어떤 학자도 예수가 다양한 유대인 설교자나 그 밖의 인물들의 혼합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전문 학자든 아마추어 예수 신화론자든 어느 누구도 상세한 형태로 주장한 적이 없다. 이것은 실체도 없고 논쟁도 없는 순수한 수삭학적 발상이다.

신화설과는 다르지만 '이스라엘 관광 수입'과 연관되어 있어서 학계에서 건드릴 수 없다는 음모론도 있다. 이전 항목에도 이스라엘 관광 수입이 GDP의 20%라는 말이 적혀 있었으나 실제 이스라엘(2012년 기준 GDP 2428.97억 $)의 관광 수입은 약 40억 달러이며 GDP의 약 2%이다. 또한 이를 임나일본부설과 동북 공정에 비유하여 '기독교 내부의 학설'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으나, 예수의 실존은 전체 학계에서도 주류 이론이다.

5.2. 예수의 모습에 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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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orged : writing in the name of God [2]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종교학부 학장. 신약 성경에 대한 문헌 비평학적 연구와 초기 기독교회사 연구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로 손꼽힌다.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라 밝히지만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3] 영국의 대중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 그리스도교 분야에 대해서 볼만한 대중 역사서를 많이 남겼다. 국내에도 많은 서적들이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다. 포지션으로 따지자면 비잔티움 역사에서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차지하는 정도 위치이다. [4] '예수 세미나'로 유명하며, 현대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 [5]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종교학자로, 유대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사제가 되었으나 이후 유다교로 개종. 사해 문서와 역사적 예수 연구, 유다교 연구의 거장이며 그의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역사적 예수 연구가라는 평을 받았다. [6] 도킨스는 The God Delusion(만들어진 신)에서 G.A.Wells를 인용하며 가공인물설을 언급한 적이 있다. 위 발언은 Richard Dawkins vs John Lennox | Has Science Buried God? Debate 라는 토론에서 나온 내용. 상세한 건 아래의 '예수 신화설' 참조. 이 발언으로 많은 비판을 받자 가공인물설을 철회했다. [7] 'NonExistence Hypothesis', in Houlden, James Leslie (editor), Jesus in History, Thought, and Culture: An Encyclopedia, page 660 (Santa Barbara: 2003) [8] Jesus outside the New Testament [9] 미국의 신학자이자 교육학 [10] 미국 역사학자이자 베일러 종교 연구소의 종교 역사 연구 프로그램 최고 책임자 [11] 바트 어만 등의 성서학자이든, Philip Jenkins 등의 역사학자이든. [12] 이러한 재구성에는 그리스도교 바깥의 단편적 기록과 신약 성경, 특히 복음서가 사용된다. 물론 사료 비평을 거치면서. [13] 조선왕조실록처럼 사관이 그 행적에 대해 샅샅이 조사하고 기록하는 게 아닌 이상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기록들은 실시간으로 작성되는 게 드물다. 예를 들어 삼국 시대를 다룬 정사 삼국지만 해도 저자인 진수는 233년생이지만 자기가 태어나기 수십 년 전에 죽은 사람들에 대한 열전을 정리해 놓고 있다. [14] "학계의 이 의견 일치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예수는 당대 사람들에게 악마 추방자요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행적 중에서도 특히 그의 악마 추방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그의 선포에 직결되어 있었다는 데에 그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가 예수의 기적이 사실이라든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확인해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사실상 기적을 행하는 사람, 악마 추방자요 치유자로 생각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확인해 줄 수 있다."(Charles Perrot, 《예수와 역사》, 박상래 옮김, 301쪽) [15]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예수와 비슷하게 메시아를 자칭한 종교적 선동가는 많이 있었다. 오히려 로마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빌라도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순순히 따랐던 예수보다 훨씬 큰 사고(군사 반란 등)를 일으킨 종교가도 많이 있다. [16] 제일 후대에 쓰였다고 보이는 복음서인데, 1년에 한 번 있는 유월절이 3번 나온다. [17] 《구름》이라는 희극 작품에 소크라테스가 개막장 엉터리 궤변론자로 등장했다. [18] 성경상에선 예수가 자신이 모든 말을 전하기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고 또, 애초에 이때 자신이 온 이유는 십자가 희생을 통한 전 인류를 구원하는 데 포커스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19] 54세 때에는 '사구'(현대로 치면 법무부장관)에 오르기도 했다. [20] 어부가 과연 낮은 신분이었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제자 중 일부는 배를 소유했던 것 같고, 일꾼도 거느렸다. 어선을 대량 생산하는 요즘도 작은 어선 한 척에 못해도 1억은 한다. 하지만 그렇게 봐줘도 잘해야 지역 유지 정도지, 위에 언급된 다른 성인의 제자들처럼 중앙의 명문가나 관료는 아니니 차이가 매우 크다. 게다가 현대 어선과 고대의 작은 목조 어선(게다가 바다도 아닌 갈릴래아 호수에 띄우는 정도의 용도)을 단순 비교하는 것도 오류다. [21] 단, 성경에 따르면 예수 생전의 직계 제자의 수는 적었지만, 오병이어의 기적 등으로 볼 때 쫓아다니던 추종자들의 수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예수 승천 직후에 예수의 수제자들인 사도들의 영향으로 약 20,000명 이상이 새롭게 제자가 되었다고 나와 있다. [22] 서유럽 중세를 폄하하는 별칭인 '암흑시대'와는 다른 표현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미케네 문명 붕괴 후 기록이 극도로 희귀한 공백기를 가리킨다. 호메로스가 이 시대에 살았다. [23] 주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복음서 중 가장 이른 마르코 복음서는 AD 70년 전후, 가장 늦은 요한 복음서는 AD 1세기 말쯤이다. 예수 사후 고작 40여 년 만에 복음서가 나온 것. [24] 복음서는 저자의 신학적 시선을 반영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구전이든 서전이든) 출전들이 발췌되고 배열된 글이다. 복음서들에 자주 나타나는 어색하고 투박한 문학적 흐름은, 복음서가 '특정 저자가 문학적으로 구성한 역사 소설'이 아닌 '출전들이 발췌되고 배열된 글'임을 반영한다. 물론 출전에 대한 존중이 그 출전 자체의 신뢰성을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복음서들은 실존 인물 예수의 행적을 보존하고 전파하려는 명백한 목적의식을 가졌기에 출전들을 발췌한 것이다. 예수 어록 전승 문서도 참고할 것. [25] 21세기 그리스도인에게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복음서는 '교회가 보장하는 정경'으로 인식되지만,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복음서들은 의심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의 분열, 거짓 복음 등은 1세기 교회에서도 이미 중대한 문제였고, '혹시 저 사람이 예수님을 왜곡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의 시선은 곳곳에 있었다. 더군다나 복음서가 저술된 시대는 역사적 예수를 목격한 사람들이(따라서 언제든지 잘못된 전기들을 고발할 사람들이) 살아 있던 시대이다. [26] 원제: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27] 투퀴디데스 사마천의 객관성마저도 '상대적'인 객관성이다. 도널드 케이건의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와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 등 책을 참고하면 이들의 역사서도 근대적 의미의 객관적 역사 서술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8] 가령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사도들이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으며 예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때문에 역사학적/주석학적 차원에서는 부활 체험(Experience)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는 직접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제자들이 어떤 무언가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음'을 함의하는 표현이다. 이를 당대 자연 과학적 지식에 억지로 끼워 맞출 바에는 보존하여 전해주는 기록이 역사학적 관점에서 훨씬 반갑다. [29] 아마존에서 commentary herodotus나 commentary thucydides만 검색해도 많이 나온다. [30] 전근대 역사서와 상대적으로 비슷한 성격의 현대 장르를 꼽자면 '역사 다큐멘터리'를 꼽을 수 있겠다. 역사 다큐멘터리는 역사를 전하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으나, 학술서보다 훨씬 자유롭게 '작가성'이 반영되고 주제 의식을 드러낸다. [31] 매우 사소한 사생활까지 모두 다 쓰고자 한 조선왕조실록조차도 불완전하거나 객관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32] Jesus: An Historian’s Review of the Gospels # [33] 고전학자 [34] 브뤼셀 대학교 신약학 및 교부학 교수, 'Jesus and Judaism', in Markus Bockmuehl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Jesus (Cambridge, 2001), p. 26. [35] 미국 듀크 대학교 종교학 교수 [36] 유대교와 역사적 예수 연구의 권위자 [37] 예를 들어서 전국 시대 당시 일본 무장들의 행보는 종종 기록이 누락되는데, 당연하게도 출세하기 이전 무명 시절의 행보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다. 기록 자체가 전혀 없거나 교차 검증이 불가능한 자료가 대부분이다. 아예 존재 여부 자체가 불투명한 인물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런 기록들이 사료로서 전혀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간접적인 기록과 비교한 후에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정도며 단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어떤 기록은 지나치게 칭찬 일색이라 미화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38] 혹은 마르코의 이름을 빌린 복음의 저자(들) [39] 혹은 마태오의 이름을 빌린 저자(들) [40]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 하시는 대로 하였다. 《마태 3:14-15》 [41] 당대의 십자가형이 어떤 느낌인지 현대 한국 독자들이 체감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술 마시고 성매매를 하다가 비아그라 과용으로 인해 복상사' 수준의 죽음이었다고 비유할 수 있다. [42]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 1고린 1:23》 [43] 마르코의 복음서의 경우 기원후 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이 실제로 파괴된 사건에 대한 구체적 예고가 발견되지 않기에, 그 사건 전에 저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설령 연대를 늦게 잡더라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직후로 잡히며, 따라서 이 복음서가 나온 시기에는 AD 30년의 예루살렘을 살았던 사람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복음서 중에서 늦게 출간된 여겨지는 요한 복음서 역시도 1세기 말엽에 저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복음서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바울로 서간 중 데살로니카 1서는 AD 51년경에 쓰였으며 또한 예수를 언급한다. [44] 잘 알려졌듯이 그리스도란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으로서, 예수를 위한 독창적인 호칭이 아니라 기원전에 쓰인 70인역(구약의 그리스어판)에서 이미 40번 정도 사용된 표현이다. [45] 요세푸스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면서도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의 신성한 저술에서 발견되는 모호한 신탁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메시아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철저히 피했다. [46] 진정한 메시아를 선언하는 순간에도 "유대인들의 모호한 신탁은 베스파시아누스 정부를 통해 분명히 나타납니다."라고 묘사했을 뿐 메시아라는 표현을 철저히 피했다. [47] 이 때문에 그리스도란 단어는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기 1세기 중반에 이르면 예수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로서 자리 잡게 되며 유대교도들이 이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48] 고전학자 [49] 오리게네스는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야고보의 의를 증언했다면서 그를 칭찬했다. [50] 그 기간 동안 요세푸스를 언급했지만 플라비우스 증언을 언급하지 않은 인물들로는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이레네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테르툴리아누스, 마르쿠스 미누시우스 펠릭스, 히포폴리투스, 줄리어스 아프리카누스, 오리게네스, 키프리아누스, 아나툴리아누스, 아르노비우스, 메토디우스, 락탄티우스 등이 있다. 이 목록은 요세푸스를 언급한 게 확인된 기독교인들만 제시한 것이다. 요세푸스는 너무 유명했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요세푸스를 알았을 것이다. [51] 에세네파로 추정되는 쿰란 집단의 영적 지도자로 기록된 인물로, 예수와 비슷한 가르침을 전한 내용이 쿰란 문서에 나온다. [52] 예수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활동했던 학자. 높은 가르침과 인자한 태도로 인해 존경받았다. [53] 사도행전 21:38에서 사도 바울로가 로마 천인대장에게 이 거짓 예언자로 오해받는 대목이 나온다. [54] (책 속 주석)특히 다음을 보라. a. pelletier, "l'originalité du témoignage de flavius joséphe sur jésus" in: recherches de science religieuse 52(1964), p.177-203; s. pines, an arabic version of the testimonium flavium and its implication, jérusalem 1971; p. winter, "josephus on jesus and james" in: e.schü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 jesus christ(g. vermès와 f. miller의 수정판), i, edinburgh 1973, p.428-441; a.m. dubarle, "le témoignage de josèphe sur jésus d'après la tradition indirecte" in: revue biblique 80(1973), p.481-513; a. paul은 intertestament, "cahiers évangile" 14, cerf, paris 1975, p.22-23에서 여러 가지 판본版本을 번역해 주었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comment. sur matth 1,17; contre celse 1,47), 요세푸스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한 연구 현황에 대해서는 l. h. feldman의 훌륭한 보고서를 참고할 것이다. ''josephus and modern scholarship(1937-1980), berlin, p.691-703 [55] (책 속 주석) H. SCHRECKENBERG, Die Flavius-Josephus-Tradition, Leiden 1972 참조. [56] 원제: Jésus et lihistorie. 위의 발췌문은 1993년(초판: 1985년)의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굵은 글씨는 편집자가 임의로 강조. [57] 4명은 전체 기록이 진실하다. 35명은 부분적으로 진실하다. [58] 부분적인 진실함에 동의하는 35명의 학자는 루이스 필데만, 크레이그 블롬버그, 마크 굿에이커, 존 도미닉 크로산, 레이몬드 브라운, 톰 라이트, 폴라 프레드릭센, ep 샌더스, 게자 베르메스, 게리 하버마스, 로버트 반 부어스트, 폴 윈터, 폴 메이어, 엘리스 윌리, 그레이엄 스텐턴, 앤드류 펠레티어, 에른스트 밤멜, 존 테커레이, 오토 베츠, 안드레 뒤바르, 밴 위더링턴, 존 메이어, 프레드릭 페비 브루스, 루크 티모시 존슨, 제임스 칼튼 패짓, 존 스펜서 키드너, 로버트 아이슬러, 제임스 타보어, 존 오코너 머피, 스티브 메이슨, R.T 프랑스, 슬로모 파인스, 에드윈 야마우치, 데이빗 플루세르, 버클리 칼로써 약 90%가 기독교인이다. [59] 예수가 부활한 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야기 [60] 라틴어 원문: #(=Cornelius Tacitus, Annales (Latin), C.D. Fisher 〈ed〉, 〈Oxford 1906〉); 한국어 번역: # [61] 그 외에, 공식 직함이 Praefectus인 빌라도를 Procurator로 잘못 적은 것 때문에 "설마 타키투스가 지방관 관직명을 헷갈렸겟냐"라는 태클도 있지만, 당대인들은 이러한 직함 구분에 집착하지 않았다. 동시대 사람인 요세푸스는 '유다 고대사"에서 유다 속주 관리인 Cuspius Fadus(44-46년)를 어떤 때(15.406; 20.2.14)에는 ἐπίτροπος(procurator), 어떤 때(19.363)에는 ἔπαρχος(praefectus)라고 부른다. 또한 필론(AD 50 사망)은 이집트/아시아/시리아의 지방관을 모두 ἐπίτροπος(procurator)라 불렀지만 사실은 이집트 쪽이 Praefectus, 아시아 쪽이 Proconsul, 시리아 쪽이 Legatus였다. [62] "이 이야기를 언급하고 반박하는 나의 목적은, 진정한 역사를 등한시하거나, 단순한 소문에 빠지지 말라고 요청하려는 것이다." (Tacitus, Annals, IV.11) [63] 번역 출처: # [64] 예: 칼리스토 비문의 세례 기옥(268년), Deir Ali 비문(318년),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부활에 대한 논고'(43,37; 48,8-10; 49,38-50,1). [65] χρηστὸς(chrēstos)는 인자한, 좋은, 온유한... 등의 뜻이다. [66] 크리스토스 자체는 메시아의 번역어이고, 유다교에선 예수가 크리스토스 칭호를 독점하는 걸 바라지 않았으나, 1세기 중반 이후 크리스토스는 이미 그 뜻과 무관하게 나자렛 예수를 특정하는 단어로 고착되어 있었다. [67] 성 아퀼라와 성녀 프리스킬라 부부가 클라우디우스의 유대인 추방령 때문에 로마에서 추방되어 코린토스로 갔다가 사도 바오로를 만나 동료가 되었다는 내용. [68] 현재도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아브데스 판테라' 상세 내용 이라는 로마군 백인대장을 이 인물로 추정한다. 예수 출생과 비슷한 시기에 유대 주둔군에 복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69]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Klausner [70] 일부 학자들은 29년이라고 본다. [71] 덧붙이자면, 예수에 대한 증언이 굉장히 빠르게 문서화되었음을 생각해 보자. 간단한 예시로 필리피서는 서기 55년쯤에 작성됐다고 보는데, 여기에 십자가형에 대한 증언이 있다. 즉 예수가 처형받을 당시의 예루살렘 주민들이 멀쩡하게 살아 있던 시기에도, 십자가형에 대한 각종 증언들이 돌아다녔다. [72] 반기독교, 반종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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