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13 20:16:52

예브게니 플루셴코/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예브게니 플루셴코

1. 유년 시절2. 1995-96 시즌3. 1996-97 시즌4. 1997-98 시즌5. 1998-99 시즌6. 1999-00 시즌7. 2000-01 시즌8. 2001-02 시즌
8.1. 그랑프리 시리즈~러시아선수권8.2.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8.3. 라이벌 알렉세이 야구딘
9. 2002-03 시즌10. 2003-04 시즌11. 2004-05 시즌12. 2005-06 시즌13. 2009-10 시즌14. 2011-12 시즌15. 2012-13 시즌16. 2013-14 시즌
16.1. 볼보 오픈 컵~비공개 테스트16.2. 2014 소치 동계올림픽
17.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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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 시절

볼고그라드 출신[1]으로 워낙 잔병치레가 잦아 뭔가 운동을 시켜야겠다는 어머니의 결단으로 4살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다. 자서전에 우연히 같은 동네 여자 아이로부터 스케이트를 받은 경위[2] 등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11살 무렵 볼고그라드의 스케이팅 시설이 재정 부족으로 문을 닫게 되자 당시 코치의 추천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혼자 떠나서 피겨를 계속했다. 얼마 안 가 어린 아들을 혼자 둘 수 없었던 어머니가 곧 따라오지만 본래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의 피겨 교육은 국가에서 육성하여 무료였지만 그의 집은 너무 가난하여 허름한 공동 아파트에서조차 지내기 힘들었다. 어린 나이로 어머니와 함께 빈 병을 주워 팔아 빵을 사먹거나 사과 하나로 하루를 버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역시 자서전에 실려있는데 팬이라면 안쓰러움 없이 볼 수 없는 대목이다. 그 와중에 시골 출신인 데다 어리다는 이유로 여러 선배들에게 집단괴롭힘도 당했던 듯하다.[3] 정작 본인은 “덕분에 나는 더 강해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11살 때 이미 전 종류 트리플 점프를 마스터, 14살 때는 쿼드러플 토룹을 마스터하였다. 당시 알렉세이 미신 코치 아래에는 워낙 많은 주니어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주목의 대상이 되어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실력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는 코치가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같은 코치 아래에서 트레이닝을 받던 알렉세이 야구딘은 미신과 결별하고 타티야나 타라소바 코치 밑으로 들어갔다. 혹자는 코치의 편애라고 말하지만 사실 당시 알렉세이 미신 밑에는 많은 선수들이 경쟁 상태였고 그 중 플루셴코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신의 취향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실 코치와 선수의 추구하는 방향이 맞지 않으면 서로 다른 길을 모색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신이 가장 아끼는 애제자이기도 하다.

2. 1995-96 시즌

1996 러시아선수권과 1996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6위를 기록했다.

3. 1996-97 시즌

핀란디아 트로피에서 7위를 하고 1996 컵 오브 러시아에서 4위를 하며 시니어 그랑프리(당시 명칭은 챔피언 시리즈)에 데뷔했다. 1997 러시아선수권에서 4위를 기록했다. 블루 스워드 트로피와 유러피언 유스 올림픽 페스티벌에서도 우승하였다. 1997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14세의 어린 나이로 사상 최연소 우승을 하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4. 1997-98 시즌

이 시즌 갓 시니어에 데뷔한 새내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실력으로 1997-98 챔피언 시리즈 파이널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서 포디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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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스케이트 아메리카
1997 스케이트 아메리카 1997 컵 오브 러시아에서 모두 은메달을 따며 파이널에 진출했고, 1997-98 챔피언 시리즈 파이널에서는 5위를 했다. 1998 러시아선수권에서는 3위에 오르며 처음으로 포디움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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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8 세계선수권 남자싱글 포디움.jpg
1998 유럽선수권 1998 세계선수권
1998 유럽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따고, 1998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따내 만 15세의 나이로 최연소 세계선수권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5. 1998-99 시즌

본격적으로 치고 올라오며 다른 대부분의 남자 싱글 선수들이 대부분 주니어에 머물 16세의 나이에 벌써 2년 8개월 위의 선배인 알렉세이 야구딘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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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8-99 그랑프리 파이널 남자싱글 포디움.jpg
1998 스케이트 캐나다 1998-99 그랑프리 파이널
1998 스케이트 캐나다 1998 NHK 트로피에서 우승하고 1998 컵 오브 러시아에서는 은메달을 따며[4]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다. 1998-99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동메달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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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9 세계선수권 남자싱글 포디움.jpg
1999 러시아선수권 1999 세계선수권
1999 러시아선수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1999 유럽선수권 1999 세계선수권에서는 모두 은메달을 땄다.

6. 1999-0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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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슈파카센 컵 온 아이스
1999 슈파카센 컵 온 아이스, 1999 컵 오브 러시아, 1999 NHK 트로피에서 모두 우승하였고 1999-00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처음으로 우승했다. 2000 러시아선수권에선 2연패를 달성했고 2000 유럽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정작 2000 세계선수권에서는 실수 연발로 4위를 기록해 포디움에도 오르지 못했다.[5]

7. 2000-0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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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0-01 그랑프리 파이널 남자싱글 포디움.jpg
2000 NHK 트로피 2000-01 그랑프리 파이널
2000 슈파카센 컵 온 아이스, 2000 컵 오브 러시아, 2000 NHK 트로피에서 모두 우승했고 2000-01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우승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 2001 러시아선수권에서는 3연패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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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유럽선수권 2001 세계선수권
2001 유럽선수권 2001 세계선수권에서도 모두 우승하며 시즌 스윕을 달성했다. 이 시즌의 그는 프리 프로그램에서 두 번의 쿼드러플 컴비네이션(4-3, 4-3-2) 점프를 구사하는 등 외계인 같은 기술 수준을 보여주며, 연기 또한 나이가 믿기지 않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내어 진정한 먼치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8. 2001-02 시즌

8.1. 그랑프리 시리즈~러시아선수권

2001 슈파카센 컵 온 아이스 2001 컵 오브 러시아에서 모두 우승하며 파이널에 진출, 2001-02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2002 러시아선수권에서는 4연패를 달성했다.

그러나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몸으로 고난이도의 기술들을 구사한 부담이 터져 쿼드에 무릎 나가고 비엘만에 등 나가고 유럽선수권 세계선수권을 스킵하고 수술하였다.

8.2.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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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쇼트에서 거하게 넘어지는 실수를 범해 쇼트와 프리 모두 2위에 그쳐 은메달을 땄다. 당시 플루셴코에게 은메달은 곧 패배였는데, 19살인데다 처음 나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놓고 그것을 패배라고 정의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인식시킬 선수는 그밖에 없었다. 같은 나이의 남싱들과 성과를 비교해보면 극명했다.

8.3. 라이벌 알렉세이 야구딘

한때 같은 코치 밑에서 훈련하기도 했던 두 러시아 선수의 라이벌 관계는 팬들의 엄청난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러시아 선수끼리 치고박고 하는 통에 북미 언론들은 러시아의 플루셴코, 미국에서 훈련받는 야구딘의 대결로 자극적으로 포장하기도 했다.(일명 '닥빙')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때에 이르러서는 플루셴코에 대한 반감이 미국 언론을 장악했다.[6] 마침 여자 싱글 쪽에서도 미셸 콴 이리나 슬루츠카야의 라이벌 구도가 조성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피겨에서의 라이벌리는 카르멘 전쟁, 브라이언 전쟁과 같이 아주 흔한 이야기였다.

두 선수의 라이벌 관계는 1998-99 시즌은 야구딘의 압승, 1999-00 시즌은 호각지세( 유럽선수권은 플루셴코, 세계선수권에선 야구딘), 2000-01 시즌은 플루셴코의 압승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플루셴코의 우위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9. 2002-03 시즌

2002 보프로스트 컵 온 아이스, 2002 컵 오브 러시아에서 모두 우승하며 파이널에 진출, 2002-03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우승했다. 2003 러시아선수권은 출전하지 않아 연패 기록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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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세계선수권
2003 유럽선수권 2003 세계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하며 통산 2번째 시즌 스윕을 달성했다.

알렉세이 야구딘과의 라이벌리 시대인 10대 시절을 마치고 20대를 맞이하며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빙판 위의 황제로써 홀로 군림하시며 무차별적 양민학살을 저질렀다. 당시 남성 피겨에 있어 플루셴코가 어떤 존재였는가는 2002-03 시즌부터 2005-06 시즌까지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2번을 빼고 전부 우승했다. 4년 동안 출전한 대회에서 2번 빼고 우승이라는 것은 정말 압도적인 성과였다.

10. 2003-04 시즌

이전부터 계속 이어진 부상이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했을 때로 심한 무릎 부상이 시즌 내내 영향을 미쳤다.[7]
파일:2003 스케이트 캐나다 남자싱글 포디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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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3-04 그랑프리 파이널 남자싱글 포디움.jpg
2003 스케이트 캐나다 2003 트로피 랄리크 2003-04 그랑프리 파이널
2003 스케이트 캐나다, 2003 트로피 랄리크, 2003 컵 오브 러시아에서 모두 우승했다. 2003-04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2004 러시아선수권에서는 챔피언 타이틀을 탈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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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유럽선수권 2004 세계선수권
2004 유럽선수권에서는 은메달을 땄지만, 2004 세계선수권에서는 프리 수행 중 한 번 넘어진 걸 제외하고 훌륭한 경기력으로 심판 전원의 만장일치 1위를 하며 우승했다.

11. 2004-0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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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5 유럽선수권 남자싱글 포디움.jpg
2004-05 그랑프리 파이널 2005 유럽선수권
그랑프리 시리즈에서는 컨디션 조절차 시리즈 경기 중 한 경기만 나갔으나 포인트 꼴찌로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여 쇼트와 프리 모두 1위를 기록하며 우승하였다! 2005 러시아선수권에서 6번째 우승이자 2연패를 달성했다. 2005 유럽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4번째 유럽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2005 세계선수권에서는 양쪽 서혜부 탈장으로 쇼트 프로그램을 마쳤으나 결국 프리는 하지 못하고 기권했다.[8] 무릎 부상도 심각한 수준이라 이미 여러 번 수술을 받은 바 있다.[9] 한편 이 대회 기권 이후 자국 연맹과 언론에게 심한 비난을 받았고 복귀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12. 2005-06 시즌

12.1. 그랑프리 시리즈~ 2006 유럽선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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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컵 오브 러시아 2006 유럽선수권
2005 컵 오브 러시아에서 우승하고 2006 러시아선수권에서는 7번째 우승이자 3연패를 달성했다. 2006 유럽선수권에서 통산 5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12.2.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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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압도적인 점수 차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올림픽 때도 역시 식중독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쇼트, 프리, 총점에서 모두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때의 프리 프로그램 연기를 두고 성의 없이 대강 했다고 안티들은 까고 있다. 성의 없이 대강 한 걸로 세계신기록 수립에 올림픽 금메달이라면 성의 있게 할 경우 어떤 점수가 나온다는 건지 알 수 있다.[10] 당시 올림픽에서의 프리 프로그램이 플루셴코의 다른 경기에 비해 비교적 심심한 경기였다는 것은 팬들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완벽한 쇼트 경기에 이어 프리도 당시 식중독으로 며칠 동안 링거를 맞은 상태였음에도 시즌 중 시도하지 않았던 자신의 4-3-2 점프를 시도하여 성공했고 하나의 실수를 제외한 모든 요소를 클리어하는 여전히 괴물 같은 경기력을 보였다.

당시 점수는 쇼트 90.66점, 프리 167.67점, 총점 258.33점으로[11] 플루셴코가 휴식기를 가졌다가 3년 후 다시 복귀할 때까지 이 점수를 깬 사람은 2008 사대륙선수권에서의 다카하시 다이스케 뿐이며[12] 쇼트 90.66점을 깬 다른 선수는 없다.[13] 또한 2009년 12월 ISU의 총점 기록에선 2위부터 5위까지는 싹 다 플루셴코가 차지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 플루셴코는 선수생활 잠정 휴식에 들어갔다.

13. 2009-10 시즌

13.1. 그랑프리 시리즈~ 2010 유럽선수권

잊을 만하면 복귀 떡밥을 뿌리며 팬들의 원성을 샀다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진짜로 복귀하여 다른 의미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전통적으로 대립 관계인 북미에서는 “그만 좀 해먹어” 라는 반응이 대다수다. 플루셴코는 오랜 기간 동안 모든 북미 선수들을 금메달 꿈도 꾸지 못하게 했던 소비에트 엘리트 중 마지막 세대로 러시아가 남자 싱글에서 알렉세이 우르마노프 일리야 쿨릭 알렉세이 야구딘 예브게니 플루셴코 라인으로 장장 16년 간 동계 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을 독차지한 것을 생각하면 그럴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 소련 시대[14] 빅토르 페트렌코부터 세면 더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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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로스텔레콤 컵 2010 러시아선수권
휴식 기간 동안 몸무게가 불어나버렸고 트리플 점프도 되지 않는 상황이라 팬들조차 복귀에 회의적이었으나 무릎 수술과 다이어트를 감행하며 2009 로스텔레콤 컵으로 복귀하였다. 이 대회에서 전성기 못지않은 4차원적 점프들을 선보이며 우승하며 싱글 선수로서는 역사상 유래 없는 복귀에 성공하여, 황제의 귀환을 선포하여 많은 선수들을 긴장 타게 만들었다.

2010 러시아선수권 쇼트 프로그램에서 100.09점이라는 괴악한 점수를 기록했다.[15] 플루셴코는 현역 시절 거의 매 시즌마다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무릎에 반월판이 없다. 수술 당시 여러 차례 잘라내고 찢어진 곳을 꿰맨 반월판은 떡이 져서 제거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현재 열흘이나 짧으면 사흘에 한 번 무릎에 주사를 주입하고 이틀 동안 걷지 못하고 다시 연습하는 비인간적인 생활을 반복 중이었다. 러시아선수권 쇼트 경기 후 인터뷰에서는 진통제에 맛이 가 “고통은 신의 소명”이라는 마조히스트스러운 말을 하여 팬들을 충격과 슬픔에 빠뜨렸다. 그리고 통산 8번째 내셔널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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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유럽선수권
4년 만에 돌아와 2010 유럽선수권의 쇼트 프로그램에서 91.30점이라는 점수를 세우며, 그동안 아무도 깨지 못했던, 4년 전 토리노 올림픽에서 자신이 세운 90.66점의 신기록을 자기가 깨는 기염을 토하며 여유롭게 통산 6번째 유럽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피겨 팬들은 제냐의 미친 컨시의 4-3 점프에 경이로움을 넘어선 두려움을 호소했다. 하지만 쇼트 프로그램의 정줄 놓은 음악 편집과 함께 빈 안무는 두고두고 까였다.

13.2.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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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2010년 2월 17일 쇼트 프로그램에서 90.85점을 받아 1위를 차지했으나, 19일 프리 스케이팅에서는 기술점에서 가산점 차이로 쇼트 2위였던 에반 라이사첵에게 역전을 당해 총점 1.31점 차이로 은메달을 땄다.

미국 브라이언 보이타노 이후 22년 만에 나온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인지라 무척 기뻐했으나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알렉세이 우르마노프(러시아) 이후 처음으로 4회전 점프를 전혀 시도하지 않은 금메달리스트 탄생이라는 결과는 피겨계에 논란을 가져왔다. 예브게니 플루셴코는 밴쿠버 올림픽에서 쇼트와 프리 경기에서 쿼드러플 점프를 넣어 모두 클린한 유일한 남자 싱글 선수였으며, 출전한 남자 싱글 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선수였다.

13.2.1.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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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플루셴코는 시상식 직후의 인터뷰에서 "은메달을 받아들인다" 고 말했다. 플루셴코가 주장한 것은 신채점제에서 채점 방식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16] 그러나 북미 언론의 기사가 널리 알려진 나라들에선 마치 금메달을 못 받은 게 부당하다고 말한 걸로 퍼졌다. 신이 나서 몰아붙이는 북미 언론들에 당황한 다른 남싱 선수들이 "제냐는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닌 것 같다" 라고 말해도 한동안 수그러들지 않았다. 덧붙여 플루셴코가 금메달을 받아야 했다고 말한 건 푸틴이다. 또한 플루셴코가 "우리 마눌님이 이건 플래티넘 메달이랬어여~" 라며 러시아 기자들 앞에서 귀엽게 은메달을 척 내밀었던 것이 은메달을 못 받아들이고 플래티넘 메달 운운한다는 오해의 발단이 되었다.

여성 싱글 경기가 끝난 뒤 그의 입장과 명성에 호가호위하려던 일본에서 아사다 마오와 관련 프로그램을 위해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고 그때 한 말이 일본의 절륜한 인터뷰 편집 신공으로 인해 특정 부분만 부각되었다. 이에 한일 양국의 팬들이 낚였다. 그는 이때 신채점제에 대한 불만과 함께 여자 싱글에 대해 말하며 아사다의 트리플 악셀엔 좀 더 많은 점수를 줘야했다고 말했다. 아사다의 트리플 악셀이 가진 문제점을 생각해보자면 사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신채점제하에서 선수들이 어려운 기술은 시도하지 않고 안전한 기술과 안무만으로만 점수를 따려는 경향을 질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방송의 편집으로 인해 점프 하나만으로 아사다를 옹호하는 발언이 되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일본 팬들은 환호하고 한국 팬들은 그를 엄청 깠다.

나중에야 플루셴코가 "이번 올림픽에서 경의를 표할 만한 선수는 김연아 뿐이다. 압도적인 여유로 이겼다." 라는 호평을 남겼으며 일본 방송이 그의 아사다에 대한 발언을 미묘한 뉘앙스로 의역했다는 게 알려지자[17] 일본 팬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딱히 여자 싱글 자체만 놓고 말한 게 아니었던 플루셴코의 말 한마디에 양국 여자 싱글 팬들이 낚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전에도 딱히 플루셴코는 아사다가 금메달을 받았어야 했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신채점제와 남싱의 다른 피겨 종목과의 차별화 문제와, 북미 유럽간의 오랜 대립, 북미-유럽 간의 입장차가 뒤섞인 이 복잡한 문제로 인해 팬들 사이에선 이번 남싱의 결과와 채점제의 문제에 대해 의견이 갈렸고 여기에 여자 싱글도 관련되면서 김연아 아사다 마오란 라이벌 구도가 부각되는 바람에 복잡한 양상을 띠었던 것이다. 기술 선도의 책임을 지고 있던 남자 싱글에서의 쿼드러플과 여자 싱글에서의 트리플 악셀은 역사와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오랫동안 남싱에서 챔피언의 상징이었던 쿼드러플과 달리 프로그램 자체의 예술성이나 완성도를 더 중시하며 한 번도 일반화된 적이 없던 여자 싱글에서의 트리플 악셀은 선수들에게 있어 차지하는 위치가 다르다.

첨언하자면 결과적으로 남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은 지난 십수년간 그러했듯이 쿼드 전쟁의 시대로 복귀했다. 현재 거의 모든 탑싱들이 쿼드러플 점프를 시도하고 있고 한 때는 반 쿼드러플 진영의 선두 중 한 명였던 캐나다 패트릭 챈마저 쿼드러플과 쿼드러플 콤비네이션을 장착하는 등 2008 세계선수권부터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까지의 쿼드의 필요성 논란은 불과 2년 만에 결국 신채점제 과도기의 한 현상이 되어 과거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남자 피겨 선수로서 현역에서 은퇴했다가 3년 만에 돌아와서 다시 공식 경기에서 우승을 하거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전례가 없는 만큼 플루셴코의 복귀는 그의 운동 선수로서의 능력과 흥행 보증수표임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13.3.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이후

세계선수권에 출전하기 위해 연습하다가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2010 세계선수권은 기권했다. 몸 상태와 ISU의 징계[18] 때문에 2010-11 시즌을 건너뛰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쉬게 되었던 이 시즌에 수술도 하고 휴식도 취했다. 시즌은 스킵했지만 2010 재팬 오픈에 유럽 팀으로 출전해 개인 3위, 팀 3위를 기록했다.

14. 2011-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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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러시아선수권 2012 유럽선수권
두번째 컴백을 했다. 2011년 말 부상 악화로 골골대서 팬들을 정신고문하더니 정작 나온 2012 러시아선수권에서 통산 9번째 우승을 했다.

2012 유럽선수권에 출전해서 프리 록산느의 탱고로 경기장 전체 기립박수를 이끌어내고 우승을 했다. 이것이야말로 시니어 데뷔 15년 차 대선배의 연기인가 싶은 여유만만함과 2009-10 시즌보다 더욱 유려해진 스케이팅과 카리스마가 인상적인 2012 유럽선수권 프리 프로그램 "록산느의 탱고"다. 2008년 이후 무릎을 안 깎아내고 넘어간 해가 없는 거 같은데 경기에선 훌륭한 퀄리티의 쿼드러플과 트리플 악셀을 뛰는 게 이젠 불가사의의 경지에 이른 거 같다. 팬들이 봐도 괴물이다. 그러나 부상이 악화되어 다시 세계선수권은 포기. 그리고 수술을 받으러 갔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도전한다는 말을 남겨 지금도 피겨 스케이터로서는 많은 나이에 무너지기 직전의 유리몸이 2014년까지 버텨줄 지 많은 우려와 의심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2012 유럽선수권에서의 화려한 컴백으로 대부분 불식되었다.[19]

15. 2012-13 시즌

재팬 오픈에 유럽 팀으로 참가해 개인 4위, 팀 3위를 기록했다.
파일:2013 러시아선수권 남자싱글 포디움.jpg
2013 러시아선수권
2013 러시아선수권에 출전하여 전무후무한 10번째 내셔널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 한 달 전에 척추 시술을 받아 완전하지 않은 몸 상태로 진통제를 맞아가며 해낸 결과. 그러나 이후로 허리 부상은 계속 악화되어 2013 유럽선수권은 쇼트를 마친 뒤 기권하고 만다. 기권 직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이스라엘에서 인공추간판 삽입술을 받은 뒤 회복하였다. 척추에 인공디스크를 넣는 대수술 후 6개월 만에 트리플 악셀을, 7개월 만에 쿼드러플 점프를 뛰는 연습 영상을 공개했다.

16. 2013-14 시즌

16.1. 볼보 오픈 컵~비공개 테스트

올림픽 기술점 최저 한도를 충족시키기 위해 B급 대회인 볼보 오픈 컵에 출전하여 우승했다.
파일:2014 러시아선수권 남자 싱글 포디움.jpg
2014 러시아선수권
2014 러시아선수권 쇼트에서 98.41점으로 1위에 올랐으나 프리에서 예전이라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후반 점프를 연달아 더블링하여 결국 1999년 이후 처음으로 2위에 그쳤다.[20] 마침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나가게 되더라도 자신은 단체전에 참가하고 개인전에는 다른 선수가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규칙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을 받아서 취소했다.

어쨌든 원래 러시아 올림픽 대표는 러시아선수권과 유럽선수권을 통틀어 평가 후 최종 확정되는데 2014 유럽선수권을 불참하고 대신 비공개 테스트를 받기로 했다.[21] 그런데 플루셴코를 러시아선수권에서 이기고 챔피언이 되었던 막심 코브툰이 막상 유럽선수권 프리를 거하게 말아먹으며 5위를 하는 바람에 출전이 불투명해졌고, 플루셴코는 비공개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서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출전이 확정되었다.

16.2.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단체전 쇼트에서 91.39점으로 2위를 했다! 특히 단체전 금메달의 가장 강력한 경쟁국인 캐나다[22]의 가장 강력한 선수 패트릭 챈을 3위로 밀어내면서 러시아의 초반 기선제압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단체전 남자 싱글 프리에서는 168.20점으로 캐나다, 일본을 제치고 1위를 함으로써 차르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러시아의 단체전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자신의 2번째 올림픽 금메달이자 4번째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4번이나 포디움에 오른 유일무이한 선수이다.

그러나 개인전에서 컨디션 문제인지 오전 연습에도 불참하고 이후 워밍업 때 착지 이후 무릎이 안 좋은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자기 순서 직전에 기권을 선언했고 갑자기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경기장을 찾은 러시아 국민들은 갑작스런 기권에 멘붕했지만 기립박수를 보냈다.[23]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개인전 연습에서 등에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고 경기를 수행할 수 없어서 관계자에게 기권의 의사를 밝혔으나 대기 선수가 아픈데다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통보에 웜업까지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경기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라 기권하게 되었다. 아쉽지만 러시아 남자 싱글 출전권이 1장밖에 없어 단체전에서 쇼트와 프리를 모두 수행해야 했던 탓에 수술한지 1년도 안 된 인공디스크에 부담이 가중된 결과였다. 기권하지 않고 개인전에서 넘어지지만 않았으면 하뉴 유즈루를 제치고 홈 어드밴티지로 금메달을 땄을텐데 아까비[24]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25] 이젠 아마추어 스포츠와는 이별이라고 해 곧 정식으로 은퇴할 것임을 시사했다. 워밍업을 할 때 첫 번째 트리플 악셀를 한 직후 심한 통증을 느꼈고 두 번째 트리플 악셀을 한 뒤에는 아예 오른쪽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더 이상 현역으로 활동하기엔 한계가 왔음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아니 사실 한계는 옛날옛적에 지나갔지 애초에 수술만 12번에 허리 디스크를 인공 디스크로 갈아끼우고 충격을 흡수하는 무릎 반월판조차 없는 상황에서 부담 가는 쿼드 점프를 팡팡 뛰었다. 아내는 그가 장애인이 될까봐 두려웠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그러나 이후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다시 살만해졌는지 은퇴얘기는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갈라는 보여줄 지 모른다고 기대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허리에 있는 인공 디스크의 나사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결국 2014년 3월 3일 다시 이스라엘에서 척추 수술을 받았다.[26] 마지막 갈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당연히 갈라보단 사람 목숨이 먼저이므로 팬들은 아쉬움보다는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허리 수술 후 3달 동안 휴식한 뒤 6월 일본 아이스 쇼에 참가해 수술 후 3개월, 연습재개 약 2주 만에 첫 트리플 악셀을 뛰었다. 쇼를 무사히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온 뒤 2014년 7월 2일자 인터뷰에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준비한다고 밝혔으며 2014년 7월 10일부터 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나 앞으로 2시즌 정도 쉴 예정이며 자신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출전이 꿈같은 얘기인건 알지만 그건 밴쿠버나 소치 때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어떻게 될 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였다.

17. 은퇴

2017년 3월 31일 건강 문제로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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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지는 오호츠크해 근방의 하바롭스크 크라이지만 어릴 적 심한 폐렴을 앓아 의사의 권유로 남쪽 지방인 볼고그라드로 이사했다. 사실 어느 쪽이나 시골이다. [2] 스케이트를 타기 싫어하는 엄마 친구 딸의 나라를 구했구나 여아용 스케이트화를 선물로 받았다고한다. 플루셴코나 그 어머니도 처음에는 스케이트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본인은 '운명이었다' 라고 적었다. [3] 주로 라커룸에서의 폭행과 나이키, 심지어 불에 달군 쇠꼬챙이까지 듣기만 해도 충공깽. 여담으로 여기 집단괴롭힘에 가담한 선배중에 순해 보이고 댄디한 인상땜에 상상이 안가지만 알렉세이 야구딘도 아주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4] 상위 두개 대회 성적 반영 [5] 당시 17세였던 그는 6연승으로 주요 타이틀을 차례로 따냈기에 이때의 세계선수권 프리 전날 밤 승리할 거라는 설렘 때문에 거의 잠을 못 자고 경기를 망쳤다. 플루셴코는 이 경험을 통해 승리가 아니라 경기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며 '다시는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겠다' 고 다짐했다고 한다. [6] 정작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시상식에서 미국 중계진들이 '러시안/아메리칸' 이라며 찬양하던 야구딘은 은퇴 몇 년 후 러시아로 되돌아간다. [7] 이 때 프리 프로그램이 바로 전설적인 니진스키에 헌정이었다. 하지만 자주 클린하지 못했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8] 2003-04 시즌에서도 문제가 있었던 계속 누적된 부상이 끝내 2005 세계선수권에서 터진 셈이다. 이때 플루셴코는 가축용 진통제를 맞고 쇼트를 출전했는데 환각과 시야 흐림, 구토와 발열의 부작용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프리 당일에는 결국 그것조차 듣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9]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회에서 보여준 쇼트 "월광" 프로그램은 연기하는 선수가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팬들에게는 기피 영상인 동시에 최고의 월광 프로그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0] 2위를 차지했던 스위스 스테판 랑비엘과의 점수차가 약 27점이다. 당시 프리 프로그램 중계 영상에는 플루셴코의 경기 이후부터는 남은 선수들이 1위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점수가 아닌 2위가 되기 위하여 필요한 점수가 떴다. [11]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이 끝난 후, 1위부터 10위까지의 기록 중 8개가 플루셴코의 기록이었다. [12] 프리 175.84점, 총점 264.41점으로 경신했다. [13] 2011년 세계선수권에서 패트릭 챈이 93.02점으로 경신하였다. 이후 하뉴 유즈루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101.45점을 기록하며 최초로 100점을 돌파했다. 2018-19 시즌 채점제가 또 바뀌기 전까지의 세계신기록은 하뉴 유즈루의 112.72점이다. [14] 정확하게는 1991년 소련 해체 후 1992년에 구소련을 이어받아 출전한 독립국가연합도 포함이다. [15] 내셔널의 점수는 어느 나라건 높기 마련이며 100점이 나오든 200점이 나오든 공식 기록으로 들어가지 않고 게다가 러시아 쪽 채점 방식은 어려운 점프를 구사할 경우 보너스 점수를 얹어주는 자체 채점 방식이지만 점수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본인은 키크존에서 이 점수를 보곤 기분 나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내 점수가 아니었다고 냉정하게 인터뷰했다. [16] 현재의 신체점제를 비판하며 "고난도 점프를 구사하는 선수들에게 좀 더 많은 점수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최고점과 최저점을 준 양극단의 심판 점수를 제외하고 평균을 내는 구채점제 방식에 비하여, 랜덤으로 두 명의 심판의 점수를 제외하는 현행 방식이 불합리하다는 점을 피력하였다. [17] 일본에서는 플루셴코가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 아사다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고 말했다고 전했다. [18] 1년간 공식 경기 출전 금지였다. 실제로는 무기한이었지만 금지 처분 다음해 총회에서 금지를 풀어줬다. 밴쿠버 올림픽 전후로 러시아 빙상연맹을 공개적으로 지탄한 데다가 감히 2010 세계선수권을 막판에 기권해버린 괘씸죄로, ISU의 골 때리는 아마추어 선수 자격 규정(간단하게 말해서 ISU에 자국 연맹을 통해 허락을 맡지 않고 ISU가 아마추어 선수가 공연해도 괜찮다고 지정하지 않은 상업적 쇼에서 공연하면 훅 간다)을 이용한 러시아 빙상연맹의 보복성 플레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물론 플루셴코 이후 국제대회 우승이 보장된 남자 선수가 없다시피 한 러시아가 소치 올림픽을 앞두고 스스로 진짜 무덤을 팔 리는 없기 때문에 1년 만에 출전 자격이 복귀 되었다. [19] 피겨 선수들의 선수 생명은 매우 짧은데, 특히나 미래의 건강을 깎아서 선수 생활을 하는 수준으로 거의 초고난도 기술로 가득한 남자 싱글은 많은 선수들이 더 하고 싶어도 누적된 부상 등으로 몸이 못 버텨서 선수 생활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20] 플루셴코는 16살 이후부터는 러시아선수권에서 챔피언을 놓친 적이 없다. [21]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의 미셸 콴의 경우와 비슷하다. [22] 미국은 페어, 일본은 페어와 아이스 댄스의 수준급 선수가 없어서 단체전 금메달을 노리기 힘들다. [23] 하지만 인터넷 상에서는 너 때문에 우리 러시아가 남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못 땄다고 비난하는 러시아 네티즌들도 많았다. 결국 소치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경기는 피겨 스케이팅 경기 중 유일하게 러시아 출신 선수가 없는 상태로 치루어져 일본 하뉴 유즈루가 우승했다. [24] 다만 플루셴코는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와 비교하기 실례가 될 정도로 자신의 실력을 기존의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 입증을 한 실력파 선수다. [25] 나는 끝까지 버티려고 노력했다. 신께서 예브게니, 스케이트는 이제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는것 같다. 모두에게 죄송하지만 나는 정말 울고 싶어질 만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26] 다행히 뼈가 잘 붙어 소치 올림픽에서 부러진 나사를 포함해 채 붙지 않은 인공 디스크를 지지하고 있던 나사 모두를 제거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