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57:47

예리코의 전투

파일:external/rccanapolisgo.files.wordpress.com/jerico_muralhas.jpg
the Battle of Jericho.
예리코의 전투(여리고성 전투)
날짜
기원전 13세기
장소
팔레스타인 예리코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히브리 가나안
지휘관 여호수아
나머지는 불명
불명
병력 불명 수 불명의 여리고 성내 주민과 병력들
피해 규모 불명 전멸, 여리고 성 붕괴
결과
히브리인 승리
기타
가나안 평정의 시작

1. 개요2. 내용
2.1. 전투 이전의 상황2.2. 전개2.3. 전투에 대한 분석2.4. 전투 이후2.5. 전투의 의의
3. 예리코의 전투에 대한 견해
3.1. 지혜서의 언급3.2. 기독교의 의견3.3. 비기독교적 의견
4.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4.1. 보수 기독교의 설명과 반론4.2. 여호와의 증인 관련4.3. 가톨릭의 설명과 반론
5. 역사적 사실?6. 영향7. 여담8. 대중 매체

1. 개요

구약성경 여호수아서에 실려있는 히브리인 가나안인의 전투이다. 현재 팔레스타인 아리하(영어 발음 제리코)가 전장이다. 개신교에서는 '여리고'라고 부른다.

성경 속의 전투 중 하나인 예리코의 전투(여리고성 전투)를 다루는 문서.

구약성경에 실린 다른 전투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중심으로 성스러운 전투로 서술되어 있다. 있는 그대로 보면 히브리인의 가나안 침략 전쟁이다. 성경에 묘사된 그대로를 따르면 히브리인들은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예리코에 쳐들어가서 힘 없는 노약자와 유아까지 전부 죽였다.

구약성경은 잔혹하고, 현대인 관점에서 비윤리적인 내용이 많기 때문에 한국이든 미국이든 구약성경을 공유하고 있는 교회 입장으로는 저연령층은 구약성경이 아니라 신약성경부터 가르치는 편이다.

가톨릭은 신약을 구약보다 중요하고 비중있게 생각하기 때문에 신약부터 가르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미사 전례 도중에 구약성서 봉독이 거의 없었다. 정교회는 지금도 성찬예배 도중에 구약성서를 봉독하지 않는다.

성경 중에서도 구약, 그중에서도 특히 예리코의 전투 부분은 '성경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축자적으로 참인가, 유기적으로 참인가?' 등의 개념이 잡혀있거나 최소한 비슷한 개념이라도 잡혀 있어야 이해할 수 있기에 저연령층에게 교육하기는 쉽지가 않다. 또 교육하더라도 학살을 옹호하는 식으로 교육받는 아이들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2. 내용

2.1. 전투 이전의 상황

성경에 기록된 정황으로는, 당시 히브리인은 이집트로부터 벗어나긴 했지만 앞날이 막연하기만 했던 떠돌이 집단이었다. 이들의 첫 지도자였던 모세는 계시를 통해 가나안 땅이 야훼로부터 약속받은 땅이라며 그 땅의 선주민들을 축출하고 가나안을 차지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이하 사건 때문에 40년간 광야만을 떠돌게 된다.

처음에는 히브리인이 이집트를 나와서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정찰을 위해 보낸 스파이 12인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야훼의 말을 믿고 바로 침공하자라고 주장하고 나머지 10인은 가나안에 가면 다 죽는다고 히브리인을 선동하였다고 한다. 이에 야훼의 분노를 사서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세를 포함하여 아무도 40년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막을 뺑뺑이 돌라는 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는 40년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 40년이 현재 우리가 쓰는 단위인 년과 당시의 년의 단위가 다르기 때문에 실제 40년이 아니기는 하며, 성경에서 40은 반복적으로 쓰이는 숫자인 만큼 실제 40년은 아닐 가능성이 많다. 또한 당시 팔레스타인 람세스 2세의 전쟁 때문에 히브리인들이 정착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성서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포도 이야기와 저주는 예리코 전투 이전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려다 실패했음을 암시한다는 분석도 있다.

2.2. 전개

모세의 사후, 리더의 자리는 여호수아가 잇게 되었다. 그는 히브리 민족을 전투종족으로 개량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고, 체계적인 가나안 공격에 착수했다. '하느님이 약속해준 땅이다.'라는 명령하에 마침내 히브리군이 요르단 강을 넘어 가나안 침략을 개시했으나, 가나안 주민들이 당연히 자신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맞서 항전했다.

구약 성경 여호수아서 6장에 따르면 이때 여호수아에게 야훼의 계시가 있었다. 요약하자면 성채를 일곱 번 돌고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서 야훼의 영광을 외치면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백성이 성에 들어가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고 남녀 노소와 가축을 가리지 않고 칼날로 멸했으며 성읍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각종 보물과 기구는 야웨의 집 곳간에 두었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적으니 설명이 좀 긴데, 한마디로 파괴, 살육, 방화, 약탈을 했다는 것이다.

예외적으로 히브리의 스파이들을 숨겨준 창녀(개역개정판은 '기생'으로 번역)인 라합과 그 관계자들은 살려주었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나중에 그녀가 다윗의 고조모가 되기 때문. 성서에서는 붉은 줄을 내린 성벽 부분만 무너지지 않아 라합 일가는 살아 남았다고 한다.

2.3. 전투에 대한 분석

예리코의 성벽이 실제로 나팔소리와 함성만으로 무너졌는지, 아니면 이전부터 무너져 있었는데 나중에 히브리인이 와서 그것을 이용했을 뿐인지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현대 고고학에서 성벽이 무너졌었다고 유추하기 위해선
  1. 같은 성벽 내에서 축조방식이 다른 부분이 있다.
  2. 주변 지층에 분석대상에 영향을 줄만한 단층, 혹은 지각활동이 없었다.
  3. 축조방식이 다른 두 성벽의 지질을 분석했을 때 완벽히 이질적이다.
위와 같은 조건들이 확인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벽은 이전 시대에 무너졌었다고 보게 된다. 그것도 언제 무너졌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당시 역사서와 대조해서 "그랬을 거 같다" 수준의 결론이 나올 뿐. 만약 발굴했을 때 무너져 있는 상태이고 보수, 증축, 개축한 증거가 없을 경우, 고고학적 결론은 "이 성벽은 약 몇 세기에서 몇 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성벽이고 언제 무너졌는지는 잘 모르겠다."이다.

히스토리 채널의 고대의 전투를 주제로 한 시리즈 다큐에서는 예리코 성의 함락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성경에서 여호수아의 첩자들이 자신들을 도와준 라합에게 '나중에 우리가 공격할 때 너와 너의 친지들을 해치지 않게 너네 집이 어디인지 창가에 줄을 내려서 표시를 하라.'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 라합의 집은 성벽에 있었으므로 나중에 침공군이 성벽을 돌면서 수비대의 시선을 뺏는 동안 일부 특공대가 몰래 이 밧줄을 타고 성 내로 들어와 성문을 열어주고 불을 지르는 등의 사보타주를 벌여 함락시켰다는 것이다.

전투 이전에 성벽이 무너져 있었다기보다는, 어떤 방법으로든 히브리인이 성을 점령하고 쑥대밭으로 만들어놨으니 성벽이 무너져 있는 게 당연하다고 보는 게 서술된 내용과 일치한다.
여호수아 6장
26. 그 때 여호수아가 맹세하였다. "이 성을 다시 짓겠다고 나서는 자는 야훼께 저주를 받으리라. 맏아들을 죽이지 않고는 기초를 놓지 못하고 막내아들을 죽이지 않고는 성문을 달지 못하리라."
히브리인들이 성을 박살내놓고 다시 재건하지 않은 이유는 유목 민족이라 천막만 칠 줄 알면 됐으므로 건축 기술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된 이유는 여호수아가 재건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막 가나안 정벌을 시작한 상황에서 재건할 여유도 없었을거고. 히브리인들이 축성술에 집중하고 요새를 짓기 시작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처음 볼 수 있다.

불법건축물로 인한 붕괴라는 의견도 있다. #

2.4. 전투 이후

이렇게 진멸당한 예리코는 히브리 민족 최초의 거점이 되었고 가나안 정복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예리코 전투 이후로도 가나안을 둘러싼 싸움은 당연히 계속되었다. 다만 초토화 몰살이 자행된 예리코 성과는 달리 다른 가나안 정착민들에 대해서는 유화적으로 구슬린 사례도 종종 있다. 이 경우는 그 부족 대표가 속임수를 써서 머나먼 곳에 있는 부족에서 온 것처럼 거짓말을 해 동맹를 맺은 후 나중에 진상이 밝혀져서 그 대표가 노예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평화조약이란 조약을 맺으면 전부 노예가 되는 것인데 천하게 부려먹는 노비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나 야훼의 제단에 필요한 나무나 물을 구해오는 정도에 그쳤다. 그리고 조약을 거절하면 멸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예 취급이 결코 잔인하지는 않았는데, 기브온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히브리인들에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한 결과 그들은 히브리인들과 같이 살면서 여러가지 잡일을 돕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정복전쟁을 진행 중인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항복한 민족을 가혹하게 부려먹기엔 리스크가 컸을 것이다.

이후 히브리인은 가나안 완전 정복에는 실패하였고, 가나안 토착 민족과 종교가 히브리인 세력과 혼합되어 판관기의 대혼란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전투에서 야훼는 예리코 성의 생명은 창녀 라합과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여버리고, 재물도 모두 불태워버리라고 지시되었다. 하지만 금은보화에 눈이 먼 아간(아칸)이라는 자가 예리코 내부의 재물 일부를 자신의 집에 몰래 감추어 놓았다. 그 결과, 이스라엘군은 이후에 벌어진 아이성 전투에서 참패한다. 아이성은 예리고성보다 훨씬 작은 성이긴 했는데 여호수아가 여기에 방심해 3천 병력만으로 공격에 나섰다가 참패하였다. 군사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이성이 작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공성전이라 공격측이 불리해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상대의 규모만 보고 적은 숫자로 공격에 나선 여호수아의 판단이 문제였다.

여호수아는 아이성 전투의 참패 원인이 여리고성에서 재물을 노략질하여 숨겨둔 자가 있어 야훼의 노여움을 받아서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철저한 조사끝에 아간의 노략질이 들통나 아간을 군법에 의해 처형하고, 노략질한 재물은 재차 없애버렸다. 이후 다시 나선 아이성 전투에서 지난번과는 달리 10배의 병력인 3만을 투입하고 적을 매복지까지 유인해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하여 드디어 아이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참고로 예리코 성은 꽤 수백 년이 지나 이스라엘 남북국 시절까지 오랜 시간동안 재건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예리코 정벌 이후 여호수아가 남긴 저주가 오랜 시간동안 일종의
금기로 계속 남아있었다.
그 때 여호수아가 맹세하였다. "이 성을 다시 짓겠다고 나서는 자는 야훼께 저주를 받으리라. 맏아들을 죽이지 않고는 기초를 놓지 못하고 막내아들을 죽이지 않고는 성문을 달지 못하리라."
(여호수아기 6장 26절)

그 저주탓에 그 누구도 건축을 시도하지 못했지만, 솔로몬 대왕 승하 이후 남북으로 갈라지고 야훼 신앙이 약해져 이방신 바알을 섬기던 북이스라엘 아합왕 재위 당시에 벧엘 사람 히엘이 재건을 감행했다. 국방을 목적으로 재건한 것으로 보이며, 그 덕에 예리코 성은 다시 세워졌지만, 터를 쌓을 때 첫 아들 아비람을,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어서 저주가 남아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열왕기 상권 16장 34절에 언급되어 있다.
아합이 다스리는 동안 베델 사람 히엘이 예리코 성을 재건하였다. 히엘은 성의 기초를 놓다가 큰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닫다가 막내아들 세굽을 잃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시켜 하신 야훼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열왕기 상권 16장 34절)

어떤 사람들은 근동에서 자주 일어나는 건축물에 대한 인신공양을 빗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예리코를 개축할 당시 히브리인들은 야훼 신앙에서 다소 마음이 떠나 있었다고.

2.5. 전투의 의의

예리코 전투 이전 아브라함 시대는 어디까지나 유목민이 이 지역을 배회하면서 거주한 것이지 가나안을 통치하는 정치체를 구축했다고 보긴 힘들다. 아브라함 시절의 근동은 아직 부족 사회였다. 그 당시에 제대로 국가라고 불릴만한 건 지중해 해안 쪽의 팔레스타인 도시국가들과 고대 이집트가 전부였으므로 가나안 지방엔 확실하게 자기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세력이 없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 터를 잡긴 했지만, 흉년 때 곡식을 얻으러 이집트로 내려갔다는 성경의 기록도 있다.

게다가 어느 정도 사료적 증명이 되는 예리코 전투 이후와 달리 이집트 이전 시대의 행적은 나중에 가나안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꿰어맞춘 전설에 가깝다는 소수의 견해도 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유대인들의 조상 히브리인들은 어떤 도시에도 정착하지 못한 이집트 출신 난민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를 통해 가나안 주민들로부터 예리코를 강탈함으로써 히브리인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들의 땅을 갖게 되었다.

예리코 자체가 서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 길목에 놓인 요충지로서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도시들에 맞먹을 정도로 오래 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후에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가 불탄 곳이라는 점을 들어 이렇듯 처참한 사건은 예정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아무리 고대의 일이었다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엄연히 침략에 전쟁 범죄를 저지른 셈이며, 그것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이 있다. 그 비판을 하는 이들이 소속된 나라 역시 씨족, 부족 국가 간의 전쟁을 통해서 형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걸 신의 뜻이라며 정당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위의 의미부여는 일종의 상징적 해석과 의미 부여에 가깝다. 때문에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이 사건을 현대 팔레스타인 분쟁과 연계하는 것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단 당시의 가나안 토착 세력과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 거주 아랍인들 간의 접점이나 계승 관계는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전혀 없다. 양자는 히브리 민족과 대립했다는 측면에서만 공통점을 가질 뿐이다. 당시의 가나안 토착 세력은 이후 수백 년에 걸쳐서 히브리 민족과 융합되어서 소멸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3. 예리코의 전투에 대한 견해

3.1. 지혜서의 언급

당신의 거룩한 땅에 살던 옛 주민들,
당신께서는 그들의 가증스러운 관습 때문에, 마술과 불경한 제사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셨습니다.
아이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음복한다며 사람의 살과 피에다가 내장까지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광란의 의식이 한창 벌어질 때에 그 참가자들을
힘없는 생명들을 살해한 그 부모들을 당신께서는 저희 조상들을 통하여 멸망시키시어
모든 땅 가운데에서 당신께 가장 값진 이 땅이 하느님의 자녀들인 훌륭한 이주민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도 인간이기에 당신께서는 소중히 여기시고 당신 군대의 선봉으로 말벌들을 보내시어 저들을 조금씩 멸망시키게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싸움터에서 저 악인들을 의인들 손에 넘기실 수도, 무서운 야수나 엄중한 말씀으로 단번에 파멸시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조금씩 심판하시어 저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물론 당신께서는 저들이 근본부터 악하고 악을 타고났으며 그들의 사고방식이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저들은 처음부터 저주받은 종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저지른 죄를 당신께서 용서하신 것은 누가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지혜 12:3-11

3.2. 기독교의 의견

구약성경의 도덕성과 합리성에 문제가 있다고 보이며 단순한 타종교 신화와 다를게 없다고 보는 시각에 그리스도교(특히 교부들과 교부학을 중요시하는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야훼가 기독교인 입장에서 지성을 초월하였다고 생각한다.

예형론이 발전한 많은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하긴 하지만, 구약성경의 이런 장면 때문에 교부시대 때 예형론이 더욱 발전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염소에게 빨간 비단을 입히는 건 매 맞고 채찍질을 당해 온몸에 유혈이 낭자한 그리스도의 예형'이라거나, '구약에서 돌로 새겨진 하느님의 말씀인 십계판을 보관하는 계약궤는 신약에서 육화된 하느님의 말씀을 안에 품은 성모 마리아의 예형'이라거나 하는 식이다.

그리고 예형론이 발달하게 됨에 따라 구약성서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예언서로 보고 그 안에 있는 예리코의 전투 같은 역사적 사실들이 실제로는 안 일어났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교부시대 때부터 생겼다. 예를 들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 건넘이 실제로 일어났든 안 일어났든 상관없고, 그건 단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세례와 세상의 나그넷길 걸음의 예언이며 예형일 뿐이다.'같은 식으로.

그렇게 돼서 예리코의 전투 또한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악마를 이겼다는 것에 대한 예표이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든 그렇지 않았든 별 상관없다.'는 견해 또한 교부시대 때부터 있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성서 저자가 분풀이 겸 정신 승리로 그렇게 기록했는데 이게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가 되었고, 이게 더 폼나고 그럴싸하다고 생각돼서 하느님의 섭리는 신비하다.'고 생각했다는 소리.

다만, 19세기 들어서야 교황청에서 "요즘에 자꾸 구약성서에 나오는 일이 실제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 도는데, 실제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일이 맞는지 아닌지 면밀히 알아보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실제로 있던 일이 아닐 거다."라는 것은 신학적 이론으로만 존재했지, 보편적인 견해는 아니었던 것 같다.

3.3. 비기독교적 의견

성경이 시대적 한계가 분명한 당대인의 사상임을 감안한다면, 성경이 다른 신화나 다른 종교의 경전들과 다르다는 그 어떠한 근거도 없다고 본다. 그리고 성경은 온갖 오류와 이문과 상호 모순과 비과학과 전근대적인 내용들이 즐비하다고 본다.

이렇게 성경이 인간적인 한계가 분명히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축자적으로 진리로 믿는다는 말 자체가, 여기에는 기독교도들의 신앙심이라는 주관적인 요인 외에 어떠한 합리적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개신교의 해명은 물론, 비교적 온건한 가톨릭의 해명 역시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신자들의 믿음을 공고히 하는데나 쓰일 뿐, 기독교 내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근거없는 내용을 사실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본다.

한마디로 신자들의 마음 속의 신앙심을 제외하면 외부적으로 볼 때 성경이 다른 종교의 경전이나 여타 다른 신화와 비교해서 다르다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기독교적 입장에서 야훼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존재라고 하면서 어째서 야훼의 유아 학살을 문제시 삼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야훼의 존재나 그의 유아 학살이 허구라 하더라도 그러한 야훼의 유아 학살을 합리화/옹호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반론할 수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라도 유아 학살을 자행했다면 그 인물을 미화/합리화 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기때문.

덧붙이자면, 성서무오설을 일관되게 주장하자니 자승자박에 빠져버리고, 이것을 포기하고 유연한 해석을 하면 신자들에게나 효과가 있을 뿐아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겐 성경의 권위가 일반적인 신화 수준 이하로 추락하는 것이 성경 기독교를 비롯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딜레마라고 하겠다.

4.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구약에 나타나는 야훼의 학살과 기독교의 설명을 다루는 항목이다.

구약에는 예리코의 전투 뿐 아니라 이집트 탈출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살고 있던 다른 민족들을 침략하여 전멸시킨 내용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이 민족들의 성읍들에서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그러니 헷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신명기 20:16~17, 공동번역성서)

중세 유럽에서 악마라고 부르며 그렇게도 싫어하던 징기스칸도 '두 발로 걷는 것은 모두 죽여라' 라거나 '수레바퀴보다 더 큰 남자들을 모두 죽여라' 등의 비슷한 명령을 내렸는데, 이건 유아는 살려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야훼보다 자비로운 편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전하였다. "야훼께서 나를 보내시어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소. 그러니 이제 야훼의 말씀을 들으시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즉 이집트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러니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사무엘기 상 15:1-3, 공동번역성서)

유아 살해를 야훼가 직접 명한다.
백성들은 고함을 지르고 나팔 소리는 울려 퍼졌다. 나팔 소리가 울리자 백성은 "와!"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백성은 일제히 성으로 곧장 쳐들어가 성을 점령하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여호수아 6장 20~21절, 공동번역성서)

온 세상을 창조한, 사랑 넘치고 전지전능한 야훼가 자기를 믿지 않는 자유의지를 행하는 것을 처벌하고, 이스라엘인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준답시고 사람을 전멸시키는 것도 충격과 공포지만 젖먹이 아기까지 죽이는 짓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말 그대로 극단적인 편애 행위이다.

가톨릭 기준으로 야훼가 예리코를 학살하도록 한 이유가 구약에 나온다. 지혜서에 따르면 예리코 땅 사람들이 어린 아이로 인신공양을 지냈기 때문이다. 침략하여 승리한 사람들이 1300년 뒤에 쓴 책의 내용을 근거로 예리코 사람들이 진짜 그랬다고 믿을 수 있느냐는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어린 아이로 인신공양을 지내서 예리코를 벌한다는 야훼가 예리코의 어린 아이까지 죽이라고 명령하면 말이 앞뒤가 안 맞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예리코성의 문제는 고대 근동 사회의 윤리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오래 전부터 시작된 성전의 관습으로써, 적군의 모든 것을 없애 주님 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이는 히브리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근동 사회에서도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관습이었다. 즉 그들이 섬겼던 신은 위대하고 자비로운 창조주의 개념보단 그들 민족을 외적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성경 안에서도 야훼는 단일한 존재라고 볼 수 없다. 마르키온의 문제의식이 옳았던 셈.

역사적인 것을 놓고 보면 이런 모순은 당연한 것이 성경의 역사는 수천년 이상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유대인들의 가치관이나 풍습 등이 불변할 수는 없는데 이를 하나의 가치관에 담아내다 보니 앞뒤가 안맞는 모순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료를 뛰어넘어 신도들이 따르거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는 경전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 마녀사냥 당시 '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애굽기 22:18)라는 구절이 사용되었다. 땅밟기는 여리고성 정복 일화와 관련 있고 개신교인들은 불교 사찰 등을 훼손하여 비판받는다.

굳이 경전이 아닌 단순 사료라고 가정하면 도덕성 문제 같은건 있다쳐도 큰 의미는 두지 않는다. 왜냐면 사료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아니요 시대에 따라 도덕 관념은 변하기 마련이며, 단지 학술적으로 가치는 있는지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이 되는가에 대한 여부만 파악되면 그만이다. 허나 그 사료가 현전하는 종교의 경전으로 이용된다면, 그것도 지고지선한 신을 섬기는 종교의 경전이라면 도덕적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경/논란 항목과 인신공양 항목 참조.

4.1. 보수 기독교의 설명과 반론

이에 대해 복음주의자 신학성향이었던 R.A 토리(1856~1928 미국의 신학자,목사) 1907년 저서 <성경의 난제 해석>에 잘 나와 있으며, 아래의 의견도 여기서 발췌한다. 그외에 개신교 복음주의 근본주의자들, 내지는 전통주의 가톨릭 신자들(이하 보수파로 통일)도 마찬가지이다.

암세포를 사전에 방지
가나안과 예리코의 장정들 뿐 아니라 힘 없는 노인과 아녀자, 갓난 아기까지 죽이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이 얼핏 보면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만큼 그들 민족의 죄악이 심각했다고 봐야 한다. 이 죄악은 너무도 심각한 것이어서, 당시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에 심각한 패해를 주는 암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암세포를 제거해내야 했다. 암세포를 절제하는 수술은 매우 무서운 수술이지만, 나머지 건강한 몸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도덕적인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였던 것이다. 아이들도 암세포라는 것인가

출처를 가리면 열에 아홉은 싸이코패스나 악마가 한 말이라고 생각할 혐오스러운 주장. 전술했지만, 갓 태어난 아기는 그 부모의 죄와는 상관없다. 심지어 연좌제를 금지하는 내용이 성경에도 나온다. 또한 가나안과 예리코인들이 그 정도로 타락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그들의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설사 그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전지전능하다는 야훼가 교육이나 제도 정비를 통해 교화하는 방법을 충분히 생각해냈을 법한데 이런 방법 밖에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야훼는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이 되는데, 개신교인이 그것을 인정할 리는 없다.

따라서 어떤 그럴듯한 변명을 덧붙이더라도 학살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자들도 자신들의 학살 행위에 온갖 변명과 핑계, 명분을 댄다. '정화'라는 명분으로. 예리코의 전투로부터 3천년 후에 아돌프 히틀러 역시 해당 전투의 후손인 유대인들을 학살하면서 유사한 명분을 제시하였다.

게다가 보수파들은 바알 신앙이 인신공양을 하니까 도덕적으로 유대인들보다 더욱 할말이 없다거나 살려두면 부모의 복수를 할 게 뻔하기 때문에 씨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고 변론하는 경향이 있다. 고대 문명을 조사해보면 자연재해나 기복을 인신공양으로 해결하려는 종교는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딱히 이들이 도덕적으로 더욱 사악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굳이 말하자만 기독교에도 인신공양의 흔적은 분명히 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친 이야기, 입다가 자기 딸을 전승의 대가로 바친 이야기가 그렇다. 심지어 전자는 불발로 끝났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야훼가 이를 저지하지 않았기에 정말 제물로 바쳐졌다.

그리고 자기들의 종교를 믿으면서 별 문제없이 살던 민족을 싸그리 죽이고 그 처자식들을 노예로 삼으면 국제법 따윈 없던 당시 시대에 그 부당함을 해결할 방법은 당연히 복수뿐이 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객관적으로 예리코의 전투에 대한 기록은 히브리인이 잘 살고있던 가나안 선주민에게 정복전쟁을 시전했고, 승리했으며, 가나안민족에게 전멸에 준하는 피해를 입힌 것이다. 이게 여러 방면으로 비판을 받자 기독교인들의 변명이라는 게 고작 "감정에 호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게 매우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위의 논리로 반론하면 감정이나 신앙에 대한 호소로 논란을 잠재우려는 기독교인은 자기신앙이 진실로 정당한 신앙인지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요컨대 이러한 변증이 보여주는 바는 신을 믿고싶은 욕구가 얼마나 추악한 형태로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예증일 뿐이다.

• 정당방위
만일 가나안 인들과 예리코인들이 멸절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인들과 예리코 인들에게 멸절됐을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정당방위였다.

강도가 칼 안 들면 집주인에게 맞고 체포 당할테니 칼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애당초 침략한 쪽은 이스라엘이다. 침략 전쟁을 두고 정당방위 운운하는 것은 북한군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2023년 현재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략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야훼가 전지전능하면 굳이나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시키지 않더라도 새로운 땅 하나 정도는 뚝딱하고 만들어서 이스라엘 인들을 거주하게 하면 그만이다. 물론 교리상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에 가야 하므로 반대로 가나안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게 더 합리적이겠지만 가나안 사람들은 또 갑툭튀한 이스라엘인 때문에 왜 옮겨가야 하냐는 반론이 생기게 된다. 이를 또 대신 더 좋은 땅 주겠다고 무마하면 반대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더 좋은 땅 안 주고 가나안 사람들에게 더 좋은 땅 주냐는 게 되고... 그럼 안 좋은 땅 주겠다고 하면 다시 왜 옮겨야 하냐가 되고...

• 예수가 오기 전이라서
부모들의 타락으로 인해 아이들도 오염 되었을 것이며 이는 예수의 복음으로만 치유할 수 있는데, 당시는 예수가 오기 전이었다.

이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은 원죄(기독교) 항목을 참조하자. 이게 사실이라면 야훼가 너무 무능하다. 이것도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원죄 개념을 굳이 적용할 이유가 없는 비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전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내수용 논리일 뿐이며 결정적으로 이 이야기를 기록한 주체인 유대교 입장에서도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이다. 애초에 이는 신에게 시간성을 부여하는 처사인데, 이 경우 시간에 따라서 신은 능력이 제한된다. 미래에 대한 무지는 물론이거니와 시점에 따라 다른 존재보다 능력이 떨어질지 모른다.

• 구약 시대니까 그 시점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성경에서 예리코 성 전투의 시점은 분명히 구약이고, 이방인들의 믿음과 구원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시점은 신약이다. 즉 구약 시대에는 선택받은 민족인 히브리인만의 야훼였으므로 성경에 쓰인 기록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다. 처음부터 모두의 구원자로 기록되지 않았고, 여리고 전투 당시에는 선택 받았다는 히브리인만의 야훼였던 시대에 쓰여졌으므로 성경의 중심 사상에서 전체를 놓고 보면 벗어나지만 쓰인 시점만을 놓고 보면 문제가 없다.

이러한 논증이 성립하려면 성경이 성스러운 책, 신의 의한 역사가 아니라고 인정해야만 한다. 오직 역사적, 시대적 배경에서 쓰여진, 다른 기사,기록,전설 등과 같은 문서라고 했을 때만 인정할 수 있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증을 인정한다면 성경의 내용은 21세기에 사실로 믿을 필요가 없는 텍스트일 뿐이다. 말하자면 길가메시 서사시, 단군 신화,그리스 로마 신화에 오늘날 보기에 비도덕적인 일화가 있다고 해도 아무도 그것을 비판거리로 삼지 않는다. 즉 성경도 '그 시대에는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려면 그 내용이 진리라고 주장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구약 시대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구약 시대의 이웃에 대한 관용이나 사랑은 어디까지나 형제들, 즉 히브리인 집단 내에 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 안에서' 모순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구약이 쓰여졌던 그 당시 시대가 그랬다는 거고, 21세기 현대의 보편 타당한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비윤리적이며 잔악하다. 때문에 구약 성경의 이 부분을 21세기 현대에 가치 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일 근거에 대한 변론이 전혀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야훼는 세상 만물의 신이다. 그러니까 가나안 사람들도 결국은 야훼와 연결되어 있는데 아무리 가나안 사람들이 인신공양을 했네마네 해도 그렇다고 아기나 젖먹이까지 죽여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는 없다. 차라리 다신교에서의 일이라면 선신 VS 악신의 대리전이 되어 상대 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식으로 넘어갈 수라도 있지 일신론에서는 그것도 안 통한다. 심지어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만큼 악마를 비롯한 그 어떤 존재에게도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 무지에 의거한 논증
하나님의 계획은 크고 광대해서 지각이 제한된 인간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이건 전형적인 무지에 의거한 논증이다. 이 논지라면 적그리스도와 무신론자도 신의 계획일지 모른다. 신의 계획은 온 인류가 의심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LGBT와 BDSM, 각종 페티쉬즘과 성적 취향을 포함해 자유로운 성적 자유를 만끽하길 바랄 가능성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지각이 제한된' 인간이 '함부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그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다가 벌이고 다니는 게 신이라면 인간은 그런 신을 숭배할 이유 따위는 없다. 평소에는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간헐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규모 학살을 하는 존재를 섬겨야 할 이유가 없다. 나아가 이 문서의 모든 논증이 그렇지만 특히 이 논증은 신이 있음을 은근슬쩍 가정한다. 이 논증에서 특히 그러한 가정이 비열한 까닭은 무지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왜곡하기 때문이다. '신의 뜻'은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신이 있음'은 슬며시 전제하는 태도는 부정직하다.

• 아이들은 죽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가나안과 예리코의 아이들은 타락한 사회에 있느니 차라리 죽어서 하나님 품에 있는게 나았을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혹여 부모가 된다면 무서운 일이다. 이는 죽은 아이들은 천국으로 간다는 가톨릭 등의 현대 교리에 따른 논증이다. 다만 이 교리를 적용한다고 해도 그 방법에서 대단히 비윤리적이라는 건 절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백번 양보하여 천국에 간다고 쳐도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 생전 처음보는 이방인의 칼날에 의해 살해 당할 때 고통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전지전능하고 미래를 볼 수 있는 신이 왜 그렇게 비참히 죽을 아이들을 태어나게 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나아가 신앙의 관점에서 도덕감정의 설정이 몹시 의문스럽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자. 즉 신이 있고 그를 불신하면 지옥에 간다. 그런데 인간의 도덕감정으로는 누구나 저러한 죽음이 끔찍하다고 느껴진다. 이에 따라 이런 사건에 나타난 신의 행동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그들 중 일부는 신앙에서 멀어지고 죽은 후 지옥에 간다. 즉 신은 인간 내면과 성경 곳곳에 지옥으로 향하는 구렁텅이를 파놓은 셈이드.

무엇보다 이런 논리로 설명해도 구약의 다른 부분들과 비교했을 때 비일관성의 문제가 남는다. 구약성경의 예언서 중 소예언서의 하나인 '요나'에는 예언자 요나의 행적이 나와 있는데 요나의 행적의 시작은 야훼가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로 가서 자신의 명령을 전하라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명령은 '니들이 죄를 하도 많이 지어서 회개 안 하면 멸망시키겠다.'는 얘기, 이에 요나는 그냥 확 멸망시켜버리시지 뭐 하러 이런 걸 시키시냐는 생각으로 배 타고 도망치는데 그 말 그대로 니네베를 그냥 멸해버려도 되었다. 가나안과 예리코의 사람들을 멸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니네베는 요나가 마지막까지 태업을 했는데도 도시 전체가 회개했기에 케이스가 다를 수 있겠지만... 저렇게 도망쳤다가 어찌저찌 돌아왔음에도 평소 아시리아를 싫어했기에 니네베가 다 돌아보는데만 사흘이 걸리는 도시임에도 단 하루만에 말씀을 전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야훼가 요나를 도와줘서 가능했던게 아니라 사흘이나 해야 할 일인데도 하루만 하고 끝낼 정도로 요나가 아시리아를 싫어했고 그래서 온 도시가 회개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저렇게 한 것이다.

또 이렇게 놓고 생각하자면 소돔은?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처음에 야훼가 그냥 소돔을 쓸어버리려고 할 때 아브라함이 의인이 단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말아달라고 점점 숫자를 줄여가며 애걸복걸했지만 그럼에도 롯과 두 딸을 제외한 모두가 사망했다. 문제는 저 협상을 1번도 아니고 10명이 될 때까지 6번이나 했다는 것, 6번이나 애걸복걸하는 걸 다 들어줄 정도로 자비로운 야훼께서 어째서 가나안과 예리코에서는 저토록 무자비한 짓을 한 게 된다. 가나안과 예리코에는 소돔처럼 단 10명의 의인도 없었던 건지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만류하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하는 물음이 생긴다. 한편으로 니네베처럼 이들을 회개시키려는 시도도 없었나 생각해볼 수 있는데 성경에는 그 흔적이 없다.

• 신약성경 위주로 보자

애초에 이런 호의를 현대인이 배풀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런 말을 하려면 최소한 기독교 측에서 먼저 구약은 사실성,정합성이 떨어진다고 인정해야 하지만 예수조차 모세의 율법, 예언서를 통해 일어난 인물이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의 복음서 5장 17절
그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루가 24장 25-27절

구약의 비중을 축소하여 신약을 위주로 보자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며 신성모독이다. 그러한 요구 자체가 그들의 믿고자 하는 의지의 추한 형태를 보여줄 따름이다.

최소한 현대에 사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이 이야기 가지고 타 종교 배척을 정당화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구약이 아니라 예수님 하신 말씀을 제발 듣자면서 왠지 모르게 신약과 예수를 가지고 기독교의 이미지를 미화시키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기독교 교리로 봐도 잘못된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동일하게 존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구약이 원본이라면 신약은 증강본과 같은 개념이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이 충돌하는 부분은 신약에서의 관점이 더 완전한 관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서술했다시피 원조라 할 수 있는 유대교 입장에선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이다.

신약에서 예수에 의해 야훼의 성향이 구약과 다르게 그려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야훼가 구약에서 저지른 이러한 학살 행위를 미화하거나 덮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예수는 야훼로서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만물이 이 말씀을 통하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야훼가 명한 예리코의 학살이 이루어지는 동안 예수도 그 야훼의 우편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봤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덧붙여 참조하면 그런 예리코의 유아 학살 행위를 직접 시행한 것이 예수(=야훼) 자신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 성경도 좀 틀릴 수도 있지

저런 논변은 언제나 엄청난 우연들을 동반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 교리의 가장 주요한 부분들은 늘 오류 가능성에서 암묵적이면서도 제외된다. 삼위일체나 십계명이 오류가 아닐 까닭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러한 비판은 '비유'라는 명목으로 성경 내부의 부정합을 옹호하려는 입장에도 적용된다. 다시 성전을 짓겠다고 선언한 예수가 이를 행하지 않은 것이 비유로 설명하려는 예수의 의지였다면 성령이 임했다는 서술 또한 비유라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예수가 겨자씨가 가장 작다고 한 것이 식물학적 무식이 아니라 비유의 일환으로 넘어갈 일이라면 하늘나라에 대한 그의 수훈도 좋은 삶에 대한 수사라고 봐도 된다.

나아가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야훼가 사실은 성적 자유와 방종을 권장했는데 성경의 오류로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원칙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더 놀라운 우연은 언제나 이러한 논변은 문명 발달이 성경 텍스트를 더이상 받아들이지 못할 때만 나타난다는 점이다. 어째선지 과학적 오류나 윤리적 논란을 포함한 구절이 사회적으로 문제되지 않을 땐 저런 주장이 나온 적이 거의 없다. 만약 바벨탑보다 높은 건축물을 만들지 못했다면 바벨탑이 오만에 대한 비유라고 말하거나 틀릴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하는 신학자가 있었을까? 무화과의 생태를 몰랐다면 예수의 저주를 은유라고 쉴드쳤을까? 아마 아직도 무화과를 먹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전까진 숭고한 신의 말씀이었던 것이 그 타이밍에 틀릴 수도 있다고 인정해버리는 것. 달리 말해 기독교에 불리한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 타이밍이 더욱 놀라운 점은 교회의 권세가 약할 때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 교회권력이 정치권력을 대신할 때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기독교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에 가까웠다.

이렇게 주장하는 기독교 그룹들은 성경에 나온 내용을 사실 그대로 믿는 것은 근본주의적 기독교인의 태도라 이야기한다. 이 그룹에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감리교와 예장 통합 측의 아주 적은 부분적 교세가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수 교단에 비하면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성경을 그대로 믿으면서도 구약의 학살을 애써 무시하며 조롱해도 상관 없지만 성경이 신화도 섞여있으며 왜곡도 섞여있고 편집과 필사상의 비의도적 오류도 있으며 고대인들의 낙후된 세계관과 히브리인들의 민족성 등이 섞여있는 경전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 문단의 비판은 사실 조금 핀트가 맞지 않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적 자유주의 개신교인들의 주장에 대해, 성경이 신화도 섞여 있으며 왜곡도 섞여 있고 편집과 필사 상의 비의도적 오류도 있으며 고대인들의 낙후된 세계관과 히브리인들의 민족성 등이 섞여 있는, 말하자면 인간적인 한계점이 존재하는 경전이라면, 성경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 신화와 같은 다른 신화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애초부터 모든 기독교 종파를 해석하는 통일되고 권위있는 해석이란 전무하며, 성경의 어느 구절이 비유인지 어느 구절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지 알 수 있는 기준 역시 없다. 성경/논란 항목의 4중적 해석법 단락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여기에 대해 크게는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 그리고 개신교 내부의 25000여개의 종파들마다 저마다의 성경 해석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은 더더욱 시궁창에 가깝다.

이렇다 보니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나타나는 유아 학살이나 곤충이 네 발로 기어다닌다는 등의 비합리적인 부분들처럼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불리한 부분에 대해서 풍유적/영적 해석 운운하는게 아니냐는 비기독교인들의 지적이 나올 정도다. 게다가 성공회를 제외하면 성서무오설을 사실상 국내 개신교 종파들의 대다수가 지지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고신 측),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측),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측), 순복음, 침례, 합동 보수, 성결교, 감리교, 그리고 C.C.C. 예수전도단, 밀알 등등의 우리나라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이 성서 무오설을 지지하는 교단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합동과 통합이 우리나라의 제일 큰 교단이다. 근본적으로 '이렇게 해석하면 말이 되지 않을까?'라는 의식 자체가 어떻게든 억지로라도 옹호하고, 믿고 싶다는 의지의 추한 추상일 뿐이다. 어떤 관점을 택하는 기준은 그것이 합리적인가이지 그 결과물이 원하는 결론을 주는가가 아니다.

• 성경은 기독교적 해석법을 가지고 읽으라고 있는 책이다.

지적 빈곤을 그렇듯한 수사로 숨기려는 시도다. 그냥 '나 유리한 대로 해석하련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원래 성경 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 경전은 그 종교의 교리적 관점에서 읽으라고 있는 책이다. 좀 더 자세히 서술하면, 바빌론 유수나 페르시아에 지배를 받은 것이나 이집트에 대한 기록 등은 개략적으로 성경에도 나와 있긴 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이집트 총리 대신을 역임했다는 요셉부터, 모세, 아론 및 여호수아 등등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은 고대 이집트 왕조의 기록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집트인들은 그 자신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해가는 과정까지 기술한 사람들로서, 그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하여 기록을 누락시켰다는 개신교인들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이 밖에도 예는 많다. 다니엘서에서 짐승으로 변했다고 묘사하는 느부갓네살( 네부카드네자르)은 해당 시기에 멀쩡하게 옆 나라 왕과 영토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으며, 성경과 비슷한 내용은 보이지도 않는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은 짐승으로 변해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왕이 짐승으로 변했다는 디테일한 기록은 무리이더라도 최소한 대리 통치인이나 섭정이 바빌론을 통치했다는 기록이라도 있어야 정상이다. 그 이전에 느부갓네살이 총애했다던 다니엘에 대한 기록도 바빌론 역사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도 반박할 여지가 있는 것이 전승과정에서 전승유포를 위해 극적인 상황을 위해 변형하였거나, 아니면 구전으로 전해져서 변해졌을 가정으로 나보니두스가 느부갓네살로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나보니두스는 병을 얻었고 아들인 벨사살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을 섭정으로 제국을 통치 하였는데, 사해문서의 나보니두스의 기도문에선 나보니두스가 피부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유대인 덕분에 나아졌다고 적혀져있는데, 왕이 피부병으로 신들에게 저주를 받고 야생 동물처럼 건조한 대초원을 방황해야 한다는 메소포타미아 전통과 유사하다.

또한 히브리 여인으로서 아하수에로( 크세르크세스)의 둘째 왕비가 되었다던 에스델(에스더)의 기록도 헤로도토스의 역사의 내용과 상충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는 왕비가 교체된 적이 없으며, 그 왕비는 페르시아 장군의 딸인 아메스트리스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한편 세계 그리스도교의 주요 종파인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는 성경을 소설책처럼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는데, 해당 종파도 성경의 내용 중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디까지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어디까지를 풍유적이며 영적으로 해석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논란 항목의 4중적 해석법 단락을 보면 알겠지만, 가톨릭과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는 성경 해석에 대한 통일된 기준이 없다. 한마디로 어디까지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어디까지를 풍유적으로 해석하는지 그 기준이 다 제각각이라는 소리다.

게다가 매우 우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기독교인들이 비유적인 의미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경 구절이 공교롭게도 대부분 야훼의 비윤리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나, 비과학적이거나,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구절들이다 보니, 답변하기 곤란한 것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해석법 운운하며 변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사회에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사고방식이 있고 텍스트,메세지에 대한 이해 양식이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적 사고로 텍스트 해석을 하고 사회적 해석의 접근은 배제한다면 이런 집단은 맹목적이고 나아가 반사회적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백발 양보해 기독교적 해석 권리를 인정한다면 최소한 그 해석물을 사회적으로 외표하거나 주장하지 않는 염치라도 있어야 한다.

4.2. 여호와의 증인 관련

집총거부 문제로 군대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도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전투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집총 문제의 경우 이들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지구의 정부에 대한 권위는 자신들의 신으로부터 내려진 것이라 인정하지만 실제 자신들의 나라는 하늘 왕국이라고 믿고 교리에 의해 군대를 거부하기 때문.

물론 하느님의 군대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무기를 잡을 준비도 되어있지만 이들은 교리적으로 성서의 '복수는 하느님의 것(아마겟돈)'이라고 여기며 폭력, 살인 등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리코 주민들에 대한 학살에 대해선 이들은 물론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니 긍정적 평가를 한다.

4.3. 가톨릭의 설명과 반론

신명기를 저술한 ‘학파’에 속하면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최근(기원전 7-6세기)의 체험에 비추어 묵상하려는 편집자가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해서, 그 때까지 형성된 여호수아기의 자료들을 재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묵상은, 이전 작품에 가한 수많은 손질 외에, 특히 1장과 23장에 나오는 긴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이로써 가나안 땅의 정복은 이제 일부 이스라엘인들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일로 제시된다(10, 28-39 참조). 그리고 이 책에서는 요르단 동쪽 지파들이 계속 언급되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일치가 위협받는 시대에 그것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다(1,12-16; 12,1-6; 13,8-32; 22,1-6 참조).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이스라엘에게 나뉘지 않은 온전한 마음으로 그분을 위하여 투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다른 신들을 섬기는 민족들과 공존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충성이 언제든지 훼손될 수 있다. 그래서 여호수아기에 이 충성에 관한 생생한 관심이 배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가나안 땅에 사는 민족들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곧 그들을 모두 “완전 봉헌물”로 바쳐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망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6,17.21; 11,12.14). 이 책을 읽는 이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이러한 조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이 책이 쓰일 당시의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인 설명이다.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피할 수 없었던 우상 숭배의 위험을 뼈 저리게 경험하고 난 뒤의 생각을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에 투영시킨 것이다.
(중략) 반면에 예리고의 경우, 이 시대와 관련된 고고학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럽다. 예리고 함락을 이야기하는 6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떠한 자료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로써 이 이야기를 좀더 깊이 살펴보게 된다. 그러면 복잡한 과정과 복합적 구성을 드러내는 이 6장이 예리고라는 성읍의 포위 공격에 관한 자세한 보고서가 아님이 드러난다. 6장의 이야기는 일종의 ‘종교 의식’, ‘전쟁 전례’로 제시되는 것이다(6,2 각주 참조). 성서 본문이 우리가 제기하는 의문이나 질문에 항상 시원한 대답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해설 中>
예리코를 무너뜨리는 이야기는 가나안 도시국가들을 정복할 때 쓴 전략을 드러내 보이는 하나의 본보기다. 예리고를 정복할 때 그 도시에는 성벽이 없었고 아마 이미 주민도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도시는 벌써 두 세기 전에 무너졌다. 아마도 예리고에서 거룩한 전쟁을 예절적으로 표상하고 거행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때 전례적인 세부 사항(계약궤, 행렬, 사제들, 일곱날, 나팔소리)과 전사에 관한 세부 사항(계약궤, 전사들, 전쟁의 함성, 나팔소리)을 곁들였을 것이다. <성서해설 - 국제가톨릭성서공회 편찬>

가톨릭에선 후대의 저자 혹은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되어서 그렇게 쓰여졌으며, 이 전투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는 이 책이 쓰일 당시의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인 설명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을 단기간에 모조리 밀어버린 뉘앙스로 나오지만, 역사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오랜기간 그곳 원주민과 공존한 것이 확실하다. 이 과정에서 우상숭배 등 원주민들의 영향이 나타났고, 후대의 히브리인 편집자는 '그때 원주민 놈들 전멸시켰으면 우린 오염되지 않았을 텐데 ㅜㅜ'라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 역시 흡사 나치 냄새가 나는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논리이다. 또 기원전 사람들의 현대적 가치와는 동떨어진 논리가 반영되어 있지만, 성경에 고대인의 사상이나 도덕 등이 반영된다는 것이 가톨릭에서 성경의 권위가 죽는 것도 아니다.(고 신앙인은 믿는다.)

여기서 신앙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많은 것을 주려고 하신다."이지, 누구누구를 죽여라 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수아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역시 신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죽여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성경은 당대인의 사상을 감안하고, 경전이 본래 하고자 하는 말을 파악하며 읽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만들어진 책이지만, 그것이 문자 하나하나가 참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 태도는 '예리코의 전투'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이런 것들을 감안하지 않고 성경을 읽을 경우 자칫 근본주의 성향을 가지거나 성경의 참 뜻과는 10000광년쯤 멀어진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라는 구절은 배금주의를 경계하라는 뜻으로 해석될지언정 말 그대로 천국가려면 돈을 다 내다버리라는 뜻으로 해석되지 않는다.이 구절을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부의 추구를 인정했던 존 칼뱅과 그의 주장을 따르는 장로파는 이단중의 상이단이 되어버리고 유럽인들과 북미인들은 거의 다 지옥행 확정이다. 심지어 이 구절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다만 일부에서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상이나 문화 같은게 성경에 반영되었다는 걸 너희들은 인정하지? 그러면 성경은 물론이고, 기독교의 신은 성서 저자에게 시대를 초월해서 성서를 쓰게 하지 못했으므로 권위가 없는 거 아니냐?"라는 식의 비아냥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는 근본주의 개신교인들이 주장하는 성서무오설과 오히려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상이나 문화 같은게 성경에 반영되었다는걸 인정하면, 성경의 권위가 추락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그러니까 기독교는 사기"와 "그러니까 성경은 100% 무오함"이라는 결과만이 다르게 나왔을 뿐이다.

비록 설정 놀음에 불과해 보이고,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설명이기는 하다. 그러나 가톨릭은 내부적으로 비록 고대인들의 사상이나 문화가 반영되었지만, 성경의 권위를 믿는 자체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 즉 가톨릭에서도 주장하지 않는, 오히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서무오설이 가톨릭을 비난하는 근거가 된다면, 가톨릭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논란 항목의 4중적 해석법 단락을 보면 알겠지만, 대체 어느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어느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지의 기준이 없다. 가톨릭은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 같은 사건 말고는 성서에 나오는 것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마인드를 전제로 깔고 있다. 그러나 그런 류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유목민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인정하지만 해석하는 이들의 비교적 현대의 기준으로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것과 동의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레토릭과 팩트는 나누는 준거점이 '신앙을 옹호하고 싶다.'는 욕구에 있다. 욕구를 위해 논증을 왜곡하는 케이스에 가깝다.

이는 결국 그 기준을 정하는 교단 내부의 주장이 외부에서 보았을 때 어떤 명확한 근거가 있어보이진 않게 된다. 예수가 얼마 안되는 빵과 물고기로 장정 수백 명을 먹여살리지 못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후에 부활한 건 사실이며 예리코 전투는 비유지만 성모 발현과 같은 기적은 현실로 인정된다. 이런 기준에는 신은 시대를 초월한 도덕적인 존재라는 기본 바탕이 깔려있을지는 몰라도 그 신을 구사하고 있는 성경에 나와있는 몇몇 내용은 분명히 이런 기준에 반하고 있다. 결국 성경의 일부 부분을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게 되는데 부정하는 부분과 긍정하는 부분의 기준은 '신은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기본적으로 신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야만 이런 해석법이 타당하게 되는 셈이다. 결국 어느 정도 결론을 내놓은 다음의 해석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시각에 대해서 문자 그대로의 내용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 성서무오설과 다름없는 근본주의적인 행태라는 것은 다소 핀트가 엇나간 비판이다. 이 둘은 '성서 텍스트의 사실성'이라는 문제의식 말고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역사적 , 과학적, 경험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권위는 보장될 수 있는가?'하는 입장이다. 반면 성서무오설은 '그러니까 아무튼 전부 맞자고 하자.'는 소리다. 이 둘을 같은 범주로 역는 건 의도적 오독에 가깝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잘못한 것을 왜 가톨릭에게 책임을 묻느냐'라는 명제는 전형적인 '섀도복싱'이다. 여기에 대한 가톨릭의 해석은 결국 신앙이 있고 나서의 해석일 뿐이며,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성경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위에서 보듯 죽어 마땅했다와 같이 여러가지 이유를 따로 덧붙인다.

그러나 결국 이런 논리들도 그들의 내부 논리와 신념을 받아들인 다음에야 현대의 도덕 기준과의 괴리를 신앙심으로 메꿀 수 있도록 만들 뿐이다. 그런 성서무오론자, 그런 근본주의자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 성경의 내용이 다소 괴악하더라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해주기 위해서 가톨릭의 내부 논리를 받아들여야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믿지 말 것을 강요하면 안되고 신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기 때문에 내부의 논리가 있다면 그 도덕성을 제대로 평가해줘야 하지만 기독교의 교의에 대해서 의문을 표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진지하게 믿는 신자들이 제우스를 절조없는 바람둥이 신으로 받아들인다면 신화를 신화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 광신도들, -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을 만들기 위해서 간음을 한다고 주장하며 제우스가 변장했을 지도 모르는 동물들과의 수간을 권장하는 - 의 행태와 결론만 다를 뿐이라며 신화 무오설에서 벗어나야한다고 말한다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리고 제우스가 괴물들을 무찌르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오와 간음했다는 부분은 신의 것을 함부로 탐해선 안된다는 교훈담이라고 한다면 그 또한 말이 안 된다. 그 말을 듣는 것이 애초에 그 신화를 진지하게 신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단순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독자라면 애초에 먹히지 않을 주장이다.

결국 이런 면은 성경의 명확한 한계라고 볼 수도 있고 가톨릭을 믿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위의 해석에 반박을 하자면 기본적으로 다른 해석 - 아마도 신은 선하지 않거나 성경은 다소 한계점이 있다 - 도 가능하다 정도일 것이다.

5. 역사적 사실?

실제로 1900년대 초반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예리코를 발굴한 결과에 의하면, 예리코는 기원전 16세기 가나안으로 군사 원정을 간 제18왕조의 초기 파라오들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Kenyon, "Palestine in the Middle Bronze Age," in CAH3, pp. 92-93; "Jericho," EAEHL, p. 563.).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왔을 때, 이미 예리코에는 사람이 아무도 안 살았는데, 구약성경의 묘사처럼 무슨 대학살극이 벌어질 일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여호수아기에서 묘사한 것처럼 이스라엘인들은 결코 가나안 원주민들을 말살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할 능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여호수아의 시대로부터 훨씬 이후인 판관기 무렵에도 이스라엘인들은 왕 같은 단일 지도자나 통합된 왕국 같은 정치 체제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던 부족 사회였고, 게다가 철기 무기를 만드는 방법도 몰라서 부족 연맹인 블레셋인들한테 수백 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았을 만큼 힘없던 집단이었다.

당시 헤브라이 족의 숫자는 성경에서 장정만 수십만이라고 쓰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많아야 만여 명, 일반적으로는 수천 정도로 비정된다. 참고로 "만여 명"의 숫자는 비농경 체제(즉 여진족 같은 반유목 반농경이 아닌, 몽골과 같은 완전한 유목 체제)의 제한된 공간 내에서 전근대 기술로 감당 가능한 인구의 일반적인 한계치다.

오히려 뒤의 내용인 판관기(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인들은 여부스인 같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원주민들의 바알 신앙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결정적으로 만약 구약성경의 내용처럼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인들이 여러 도시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해서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한 집단이었다면, 그 이후 오랫동안 블레셋인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 이유가 없다. 더구나 블레셋은 중동의 강대국인 이집트나 바빌론처럼 하나로 통합된 왕국이 아니라, 여러 개의 부족 연맹체였다. 여러 도시 국가들을 멸망시켰을 만큼 무시무시했던 이스라엘인들이 어째서 블레셋을 상대로는 그렇게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았단 말인가? 이는 터무니없는 모순이다.

다만 성경에서는 "신앙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이에 대한 매우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민족 개념이 없었던 전근대에 종교란 공동체 유지 수단이었으므로, 신앙을 잃는 것(=이교도가 내부에 대량 발생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 사회 공동체의 붕괴로 직결된다. 다시 말해 하나의 통합된 국가가 되었다가, 종교적 분쟁으로 인해 국가가 충분히 결속력을 잃고 내우외환에 빠져 블레셋에게 지배당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도 단순히 "부족 연맹체"라는 이유만으로 통일 제국보다 약할 이유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 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생동감있게 묘사한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솝 우화처럼 다분히 가르침을 주려는 일종의 우화로 봐야 한다. 즉,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말살하고 그들의 문화를 철저히 파괴했다면 이스라엘인들의 전통 문화인 야훼 신앙을 순수하게 지켰을 수 있을 거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일방적으로 정복하고 멸망시켰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과장을 했던 것이다.(출처: 중동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85~87쪽).

하지만 실제로 성경을 정경적으로 읽어보아도 가나안 정복 전쟁이 가나안 전체를 말살한 듯이 얘기하지 않는다. 몇몇의 도시만 불태워졌고, 가나안 주민들과 협정을 맺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외부인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충돌과정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물론 신학적인 채색이 들어간 여호수아는 과장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고대근동 역사서에서 충분히 보이는 모습들이다.

아니면 블레셋인들이나 그 이후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같은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인들이 "그래도 우리가 옛날 가나안 땅에 수십만이 몰려와서 닥치는 대로 원주민들을 다 죽였을 만큼 강했던 시절이 있었다!"라고 정신적인 위로를 하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예리코의 전투 같은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무용담을 만들어서 구약성경에 넣었다고 볼 수도 있다.

6. 영향

땅밟기를 위시한 이른바 영적전쟁 운운하는 각종 교계 병크들의 근거도 바로 이것. 특히 부산 지역 기도회에서 있었다는 "부산시내의 모든 (불교) 사찰이 무너지게 하소서." 등의 발언을 보면 이른바 '마귀의 세력' 이 예리코 성마냥 무너지고 불타기를 소망하는 뉘앙스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을 통해 종교라는 미명하에 빚어지는 인간의 잔학성으로서 이 사건을 매우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또 이 책의 386~388쪽에는 이스라엘 어린이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예리코의 전투 내용을 읽어주고 그 반응을 파악한 표본조사도 실려있다. 어린이들은 여호수아와 예리코의 전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았는데, 내용 전개는 그대로 두고 무대를 이스라엘 대신 3000년 전의 중국 왕조로, 여호수아를 '린'이라는 이름의 장군으로 살짝 바꿔 소개해줬더니 대부분 침략자 쪽을 나쁜놈이라고 보았다 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만들어진 신 항목을 참고할 것.

이 일화를 동화처럼 재밌게 묘사해서 아직 역사에 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어린이에게 읽게 한다는 사례도 있다. 기독교의 친유대주의 성향이 강한 몇몇 기독교인들이 이러는 일도 있고, 이딴 미친 짓을 국가 정책으로 시행하는 이스라엘은 말 할 것도 없다. 고대의 엄연한 침략 전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전쟁 자체에 대한 분노를 키워야 할 나이에 전쟁과 학살을 미화하는 사상을 주입시키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 교회에서 이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들려줄 때는 순화하거나 비튼다. 직접적으로 라합 빼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과 가축 등의 생명을 다 죽였다고 어린이들에게 설명하면 너무 잔인한 내용이기때문. 그래서 하느님과 히브리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까봐 또는 동심파괴를 받을까봐 곤란함을 느끼는 건지 그렇게 직접 얘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직접 죽인 게 아니라 성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다 깔려 죽었는데 라합과 그 집의 사람들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니면 그냥 성을 점령했다까지만 설명하거나 또는 성 안의 임금이 나쁜 사람이라(안의 백성들은 죄없이 시달림을 받고) 성 안을 점령해서 그 사람만 감옥에 집어넣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인권이나 국제법 따위는 있을 리가 없던 고대 민족 간의 치열한 점령 전쟁을 미화해서 설명한 것인데 그걸 현대 기준에 적용시키는 것( 땅밟기)이 무리라고는 할 수 있다. 모든 종교의 경전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전형적으로 담고 있다. 게다가 구약은 히브리 민족들의 역사책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에서는 지금도 실제로 구약을 가지고 역사를 배운다! 그래도 차마 창세기부터 역사로 배우지는 않지만. 물론 그러한 잔혹한 내용이 담긴 구약을 현대 기독교에서도 오류가 없는 경전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는 상당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구약이 역사서라는 주장은 당연히 근거가 부족하다. 일단 교차검증이 안 되기 때문에 주류 사학자와 고고학자와 문헌 비평가들은 성경이 역사서라는 주장을 가볍게 개드립 취급한다. 물론 성경은 역사서가 아닌 종교경전이다. 하지만 없는 사실을 지어서 냈다고 생각하는건 너무 지나친 생각이다. 교차검증이 안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있는 사실이 아니라는 말은 말도 안되는 말이다.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기록이나 유물들이 많음에도 역사성을 인정하는 경우는 많이 있다. 과장이 되었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없는 일이다 라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주로 이러한 공격은 기독교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한국사회에서 20세기 연구결과물과 최소주의자의 대표격인 핑켈슈타인의 의견을 주로 이용하여 공격하는 것인데, 그때에 비해 타협적인 의견도 많이 도출되었고, 핑켈슈타인에 대립하여 윌리엄 데버나 히브리 대학이 반대 의견을 내놓고 있다. 현재 학계에선 구약은 거짓말이다가 아니라, 어디 부터 역사성이 담겨 있는지 논란이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역사서는 아니나 사료는 맞지 않냐는 의견이 있는데 이건 당연한 것이다. 이전 시기에 쓰여진 기록은 하다못해 광고지나 개인의 기록도 모두 사료다. 같은 맥락에서 쿠란 힌두교 경전, 불경,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문서 및, 북유럽 신화와 관련된 기록도 모두 사료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운용한 급강하폭격기 Ju 87 슈투카가 급강하 폭격을 할 때 나오는 사이렌 소리는 예리코의 전투에서 모티브를 따 와서 ‘ 예리코의 나팔(Jericho-trompete)’이라 불린다. 날카로운 음색의 사이렌 소리와 급강하 폭격의 위력이 더해진 전장의 공포가 마치 예리코 성벽을 무너뜨리고 예리코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나팔소리와 비슷하다는 것. 다만 전쟁 초기에 사람들을 공포로 불어넣던 특유의 이 소리는 전쟁이 진행되면서 느린 슈투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 대공포병/제공기 파일럿들에게 매우 익숙한 셀프 공습경보가 되어버려 손실을 입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에 전쟁 후반부에서는 쓰이지 않게 된다.

7. 여담

예리코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등 신약성경에서도 가끔씩 등장하지만 예리코이 아닌 '예리코'라는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예리코성 자체가 예리코에 세워졌었기 때문에 예리코성이라고 불린 거다.

8. 대중 매체

여호수아서의 내용이 현대적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보일 내용들이 많은 만큼 여호수아를 주인공으로 한 영상물은 잘 안만들어지고 간혹 미니시리즈 수준의 영상물만 나오는 수준이다. 그것도 예리코 공격에 대한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해 예리코를 거의 소돔 수준으로 막장화 시켜놓고 시작하고 전투에 돌입하면 예리코의 민간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며 히브리군에게 죽는 예리코인은 악역으로 엄청 어그로를 끌어댄 인물들로 한정시켜놓아 성경에 묘사된 예리코 민간인 학살은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폴아웃: 뉴 베가스의 DLC Honest Hearts의 내용은 예리코의 전투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인물의 이름이 조슈아 그레이엄인 데다 이 사람 출신지가 뉴 가나안이고 무엇보다 신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정복과 파괴를 한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다.

흑인 영가 중에 이를 소재로 한 것이 있다. 제목은 Joshua fit the battle of the Jericho. 19세기 초에 만들어져 1865년에 공식적으로 기록되었다.

독일 파워 메탈 밴드인 헬로윈의 1집 앨범명이 월스 오브 제리코(Walls of Jericho) - 예리코의 성벽인데, 프로레슬러 크리스 제리코의 링네임과 대표 피니쉬인 월스 오브 제리코(Walls of Jericho)는 여기서 따온 것이다.

영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서는 남주인공 피터가 여주인공 엘리와 함께 한 방에 묵을 때 밧줄과 담요로 두 침대 사이에 칸막이를 만들고는 예리코의 장벽 드립을 친다. 이 예리코의 장벽 드립은 영화 맨 마지막에도 나온다.

초고대문명설을 주장하는 불쏘시개급 소년잡지는 성벽을 무너뜨린 나팔소리를 초음파 공격으로 무너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21화에서 네오 아틀란티스의 간부가 가고일과 대화 하는 장면이 있는데, 공중전함의 무기인 원자진동포와 동일한 병기가 예리코를 멸망시켰다고 언급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9화에서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이카리 신지에게 "이 문은 이제부터 예리코의 벽이야, 절대 넘을 수 없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신지는 아스카와 합숙을 하고 있을 당시, 미사토가 잠시 외출해서 밤 동안 집을 비워서 단둘이 남았던 적이 있었는데 아스카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들어오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화를 내면서, 경고를 했다. 그러나 예리코의 벽은 신자들의 함성만으로 무너졌던 벽이므로 신지가 아스카의 방에 들어올 마음이 있었다면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이언맨 1의 초반부에서 토니 스타크가 판매하기 위해 시연해 보인 미사일의 이름이 '제리코 미사일'이다. 평화를 위한 폭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시리즈 초반의 무기상인 토니 스타크의 인물상과 잘 어울리는 네이밍.

예리코의 성벽과 관련한 종교 유머가 존재하며 최불암 시리즈에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