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6:32:11

예루살렘 왕국/가문

1. 개요
1.1. 왕가
1.1.1. 플랑드르 Flandre1.1.2. 레텔 Rethel1.1.3. 앙주 Anjou1.1.4. 알레라미치 Aleramici1.1.5. 뤼지냥 Lusignan1.1.6. 블루아 Blois1.1.7. 브리엔 Brienne1.1.8. 호엔슈타우펜 Hohenstaufen
1.2. 공작가
1.2.1. 이벨린 Ibelin1.2.2. 툴루즈 Toulouse1.2.3. 쿠르트네 Courtenay1.2.4. 오트빌 Hauteville1.2.5. 생토메르 Saint-Omer1.2.6. 플랑시 Plancy1.2.7. 밀리 Milly1.2.8. 샤티용 Châtillon
1.3. 백작가
1.3.1. 베상 Bessan1.3.2. 그레니에 Granier1.3.3. 기네스 Guines1.3.4. 몽포트 Montfort1.3.5. 몽벨리아르 Montbéliard1.3.6. 뷔르 Bures1.3.7. 생 질 Saint-Gilles1.3.8. 토롱 Toron1.3.9. 르 퓌세 Le Puiset

1. 개요

예루살렘 왕국은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가 아닌 영주들의 연합 집합체에 가까운 왕국이었기에 십자군 국가들은 다른 유럽에서도 그러하였지만 성지에서는 더더욱 왕국들이 가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1. 왕가

1.1.1. 플랑드르 Flandre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의 아들 외스타슈, 고드프루아, 보두앵 삼형제는 1차 십자군에 참가했는데 보두앵은 도중에 에데사에서 영주로 추대받아 에데사 백국을 세웠고, 아버지에게서 볼로뉴를 물려받은 외스타슈 3세는 영지로 귀향한다.

1099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십자군 지휘관들에게 충성 서약을 시켰고 원칙대로라면 점령한 땅을 바쳐야 했으나 이는 십자군을 제국 영토 수복을 위한 용병으로 쓰려 했던 알렉시오스와 자기 땅을 얻고 싶어했던 십자군 지도자 사이의 동상이몽이었고, 누가 예루살렘의 왕이 되느냐는 문제가 나왔다. 리더격 인물이던 툴루즈 백작 레몽이 처음 왕으로 추대받았으나 거절, 예루살렘 공성전 당시 성문을 열었던 고드프루아가 지명받았다. 고드프루아는 왕이라는 칭호 대신 '성묘의 수호자' 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서 논란을 피했다.

주변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를 계속하던 고드프루아가 1100년에 자식 없이 급사하고,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다임베르트 다 피사는 예루살렘을 교황청 산하에 바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따를 생각이 없었던 십자군 영주들은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을 추대한다. 보두앵은 에데사를 외가 친척 보두앵 드 레텔에게 맡기고 형의 직위를 물려받아 정식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 됐다. 그는 후속 십자군들과 힘을 합쳐 레반트의 무슬림과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했으나 역시 후계자 없이 1118년에 식중독으로 사망한다.

1.1.2. 레텔 Rethel

레텔의 4대 영주 위그 1세(Hugues I de Rethel)의 자녀 중에 보두앵(Baudouin de Rethel)이 있었는데, 장남인 므나쎄가 있었기에 영지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당시 십자군 운동이 전 유럽을 뒤 흔들었고, 외육촌 친척 3명이 1차 십자군에 참전하자 같이 끼어든다. 그 세 명이 외스타슈, 고드프루아, 보두앵이었다.[1] 그들과 함께 아나톨리아 반도에 이르러 안티오키아로 가는 갈림길에서 에데사로 향하던 보두앵 드 플랑드르의 뒤를 따랐고, 그 수는 신의 한수가 된다. 훗날 보두앵 드 플랑드르가 2대 예루살렘 국왕으로 지명받아 예루살렘으로 떠나자 보두엥 드 레텔은 에데사 백국의 2대 영주로 임명되었고, 보두앵 1세가 자식 없이 병사하자, 그 당시 성지에서 가장 가까운 촌수였던 보두앵이 예루살렘의 3대 국왕으로 의회에서 추대가 된다. 사실 유럽으로 돌아갔던 보두앵 1세의 큰형 외스타슈가 왕의 유언으로 승계받으러 성지로 오는 길이었는데, 모종의 술수로 왕위를 낚아채버린다.

레텔 가문은 그렇게 성지 예루살렘 왕국의 왕가가 되었지만, 보두앵은 모르피아 말라티아치라는 현지 에데사 귀족 가문 여자와 결혼했고, 운명인지 딸만 3명 낳았다. 장녀는 멜리장드였고, 사위로 풀크를 얻었지만 가문은 거기서 멈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운명은 피할 수 없는지 유럽 본국의 레텔 가문도 보두앵의 여동생 마틸드를 끝으로 부계가 끊긴다.

1.1.3. 앙주 Anjou

앙주의 백작이던 풀크 5세는 1129년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 계승자 멜리장드와 결혼해 영지를 큰아들 조프루아 당주에게 맡기고[2]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1131년 공동 왕이 되었으나 유럽에서 온 심복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며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으며, 아내 멜리장드와 십자군 지휘관들의 후예인 영주 파벌과 대립했다. 둘 사이에서 보두앵과 아모리 두 아들이 태어났다. 풀크는 1143년 사냥 도중에 낙마해서 중태에 빠지고 곧 사망한다.

왕위 계승 당시 13세였던 보두앵이 보두앵 3세로 즉위한다. 나이 때문에 어머니 멜리장드가 섭정을 맡았으나 성년이 됐는데도 온전히 권력을 내어주지 않자 왕국을 남북으로 분할시키고 내전을 벌여 어머니를 은퇴시키기에 이른다. 이후 아스칼론을 점령해 이집트로의 교두보를 얻고 동로마 제국 마누일 1세의 조카 테오도라와 결혼해 동맹을 꾀하는 등 분전했으나 성과를 내기 전에 자식 없이 병사하며 동생 아모리 1세가 왕위를 물려받는다.

아모리는 쿠르트네의 아녜스와 결혼해 시빌라와 보두앵, 알릭스(유년기에 사망)을 자녀로 두었는데 예루살렘의 귀족들과 성직자는 아녜스에게 적대적이었고 아모리가 아녜스와의 결혼을 무효로 하지 않는다면 왕위에 오르는걸 반대했다. 아모리는 아녜스와 이혼하는 대신 시빌라와 보두앵은 적자로 인정받게 했고, 고조부가 같다는 명목으로 아녜스와 헤어졌다. 그 후 아모리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 공략을 시도하면서 동로마와 황족인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해 동맹을 강화하며 형처럼 세력 확장을 시도했지만 역시 이집트를 노리던 장기 왕조에서 파견한 시르쿠와 그 조카 살라흐 앗 딘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으며, 1174년 이질로 사망한다.

장남 보두앵이 보두앵 4세로 즉위했으나 당시에는 불치병이었던 나병 환자였기 때문에 오래 살지도, 혼인을 해 후계자를 가질 가망도 없는 몸이었다. 때문에 누나 시빌라를 유력 귀족과 결혼시켜 왕국을 안정화시키려 했는데 첫 결혼 상대는 몬페라토 후작의 장남인 알레라미치 가문의 굴리엘모였으나 그가 유복자 보두앵만 남기고 말라리아로 사망하자, 기 드 뤼지냥과 다시 결혼시켜 섭정으로 삼았다. 병마에 고통받으면서 이집트의 지배자가 된 살라딘과의 전투와 휴전을 반복하던 보두앵 4세는 시빌라와 굴리엘모의 유복자인 외조카 보두앵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24세로 요절한다.

보두앵 사후 친누나 시빌라와 아모리와 마리아 콤니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여동생 이사벨이 여왕이 될 때도 있었으나 통치는 부군들이 하게 된다.

1.1.4. 알레라미치 Aleramici

1183년 외삼촌 보두앵 4세가 공동 왕으로 세우고 1185년에 단독 왕이 된 보두앵 5세였지만 불과 여덟 살 꼬마였고, 그나마도 병약한 아이라 1년 만에 사망해 어머니 시빌라가 왕관을 받는다.

한편 아모리 1세의 새 아내인 마리아 콤니니는 아모리 사후 이벨린의 발리앙과 재혼했는데, 발리앙은 시빌라와 기 드 뤼지냥의 반대파 귀족이었다. 발리앙은 보두앵 5세의 섭정이던 트리폴리의 레몽과 손잡고 의붓딸인 왕녀 이사벨과 남편 토론의 옹프루아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친 뤼지냥 파벌인데다 나약한 성격인 옹프루아가 시빌라와 기에게 충성하며 실패한다. 하틴 전투의 여파로 예루살렘을 잃고 시빌라가 1190년 죽자 발리앙은 이사벨을 이혼시키고 몬페라토의 코라도와 재혼하게 했다.

시빌라의 첫 남편 굴리엘모의 동생 코라도는 살라딘의 공격으로부터 티레를 지켜낸 전적이 있고 무능한 기보다 영주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3차 십자군 원정으로 온 프랑스의 필리프 2세도 코라도를 지지했고,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반대로 기를 후원했으나 결국 1192년 귀족들의 회의에서 만장일치를 받은 코라도를 리처드도 차기 예루살렘 국왕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아내 이사벨과 콘라드 1세로 공동 왕에 오른 코라도였지만 한 달도 못가서 어새신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이사벨은 그 후에도 팔려다니듯 결혼을 두 번 더 했지만 후계자가 될 아들을 보지 못하고 1205년 30대에 사망, 이사벨과 코라도의 장녀였던 마리아가 차기 국왕이 된다. 마리아는 장 드 브리엔과 결혼해 1212년 21세의 나이에 이사벨 2세를 낳고 직후 산욕열로 인해 죽는다.

4차 십자군에도 참가하여 라틴 제국 테살로니카 왕국을 지배하기도 한다.

1.1.5. 뤼지냥 Lusignan

기 드 뤼지냥과 그의 형이자 또다른 예루살렘 왕인 아모리 2세의 가문. 키프로스 왕국의 왕가였으며 위그때부터 예루살렘 국왕도 겸임하게 된다.

1.1.6. 블루아 Blois

리처드 1세 필리프 2세의 조카이자, 이사벨 1세(예루살렘 왕국)의 남편이었던 앙리 1세(예루살렘 왕국)의 가문이다.

1.1.7. 브리엔 Brienne

마리아(예루살렘 왕국) 여왕의 남편 장 드 브리엔의 가문이다.

1.1.8. 호엔슈타우펜 Hohenstaufen

이사벨 2세(예루살렘 왕국)의 남편으로서 공동왕이 되었던 프리드리히 2세의 가문 호엔슈타우펜 출신 왕은 그의 아들과 손자인 콘라트 2세 콘라트 3세까지 이어지다 이후 뤼지냥 가문으로 넘어간다.

1.2. 공작가

1.2.1. 이벨린 Ibelin

이벨린(Ibelin)의 초대 당주 바리장(Barisan)은 람라(Ramla)의 상속녀 헬비스(Helvis)와 결혼하면서, 람라를 혼수로 얻고 위그(Hugues) 보두앵(Baudouin) 발리앙(Balian) 에르망가르데(Ermengarde) 스테파니(Stéphanie), 3남 2녀를 슬하에 둔다. 시간이 흘러 장남이 이벨린을 차남이 람라를 물려받지만 장남 위그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병사를 하고만다. 차남 보두앵이 이벨린을 물려받으나 자신이 다스리는 람라를 가지고 영지가 없는 막내 발리앙에게 이벨린을 건넨다. 삼남 발리앙은 훗날 비잔티움 제국의 황녀이자 아모리 1세의 미망인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하여 멜리장드 이후로 왕비의 직할령이였던 나블루스까지 얻고, 기 드 뤼지냥이 즉위하자 왕국의 환멸을 느낀 둘째 형 보두앵이 키프로스 섬으로 넘어가며 람라를 양도하여 이벨린 람라 나블루스 그리고 브엘세바까지 얻는다.

발리앙의 후손들은 예루살렘 왕국과 키프로스 왕국에서 가장 영향력 높은 귀족들이었다. 발리앙의 장남인 요한(John)은, 예루살렘 왕국의 베이루트 백작령을 다스리는 동시에 키프로스 왕국의 섭정의 자리에 있었는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6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 국가에 제국의 권속을 강요하며 키프로스를 아래에 두려 할 때, 쉽게 말하면 야당 지도자로 황제의 권위에 반발을 했었다. 1241년 이벨린 가문은 황제가 맺은 종전 협정에 의해 예루살렘을 다시 되돌려 받자 그 여파로 살라딘에게 점령 당했던 이벨린 영토를 돌려받았다.

요한은 아르수프(Arsuf)의 멜리장드와 함께 베이루트의 군주인 발리앙 3세를 포함하여 키프로스 왕국의 대집사인 보두앵, 아르수프의 영주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집정관인 요한, 그리고 키프로스 집정관 기(Guy) 등의 많은 자녀를 두었다.
발리앙 3세는 몽벨리아르(Montbéliard)의 에쉬바(Eschiva)와 결혼하여 베이루트 요한 2세를 낳았고, 요한 2세는 아테네의 공작 기 드 라로체(Guy I de la Roche)의 딸과 결혼했다.
아르수프의 요한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플레정스(Plaisance)와 결혼 한 아르수프의 발리앙의 아버지였다.
기는 예루살렘 왕국의 위그 1세이자, 키프로스 왕국의 위그 3세의 왕비인 이사벨라의 아버지였다.

이렇듯 이벨린 가문은 라틴 제국의 위성 국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십자군 국가와 혼맥이 닿았고 특히 키프로스 왕국은 대대로 왕비 가문인 셈이다.

1.2.2. 툴루즈 Toulouse

툴루즈 가문은 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중 1명인 레몽의 가문이다. 레몽은 툴루즈 백작 기욤 4세의 동생이었으나, 기욤 4세가 딸 필리파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자, 곧바로 찬탈하여 툴루즈 백작이 되었다. 그 때문에 필리파와 결혼한 아키텐 공작 기욤 9세는 여러 차례 백작의 지위를 주장하며 툴루즈를 공격했지만 잘 방어한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스스로 성지에서 죽기를 원했기 때문에 제1차 십자군 참가의 권유를 교황 사절에게 받았을 때도 레콩키스타 운동을 하고 있었고, 제후 중에서 가장 먼저 참가를 맹세했다. 나이로는 최연장자 였기에, 남 프랑스 제후들의 리더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에게 신종을 맹세를 했다. 안티오크 공략 후, 시내에 병사를 주둔을 시켰으나, 보에몽 1세에게 쫓겨났기 때문에 보에몽의 영토확장을 방해하기 위해 자신의 영토로써 안티오크 남부의 트리폴리의 소유를 원하며 점령도 전인데 선언을 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예루살렘 진격을 바랐기 때문에 일단 중단하고, 부용의 고드프루아와 함께 예루살렘을 공략했다.

처음엔 그가 예루살렘 왕에 추대되었으나, 그리스도가 죽은 땅에 왕이라고 불리길 원하지 않았기에 거절했다. 그 때문에 고드프루아가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고드프루아도 왕으로 불리길 싫어해 성묘의 수호자하는 명칭을 썼다. 그 후 아스칼론 전투에 참가했으나, 아스칼론 점령을 두고 고드프루아와 다툼을 벌였기에 이곳을 공략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십자군과 결별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냈다. 여기서 1101년 십자군과 합류했으나, 아나톨리아에서 패배했다.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돌아가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의 원조을 받아 트리폴리 공략을 목표로 삼았으나, 원정 도중 병사했다.

그의 조카인 기욤 주르당이 포위를 계속했으나, 그 후 베르트랑이 그를 대신했고, 1109년 트리폴리를 함락시켜, 트리폴리 백국을 세웠다. 그의 휘하에 있던 레이몽드 드 아길레스(Raimundus de Aguilers)가 제1차 십자군의 기록을 레몽의 관점으로 기술하였다. 트리폴리 백국의 건립은 목도하지 못했지만 명목상 트리폴리를 자신의 영토로 선언했기에 1대 트리폴리 백작이라고 인정을 한다. 이후 예루살렘 왕국의 북쪽을 방비하며 최전선에서 활동한다.

1.2.3. 쿠르트네 Courtenay

위에서 상술한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의 어머니인 아녜스 드 쿠르트네의 가문이다. 원래는 에데사 백국을 소유하던 가문으로 마지막 백작인 조슬랭 2세는 아녜스의 부친이자 이 가문 출신.

1.2.4. 오트빌 Hauteville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공작으로 유명한 노르만족 정복자 로베르 기스카르의 가문. 로베르 기스카르 사후 작위 승계 다툼에서 밀린 장남 타란토 공작 보에몽은 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가 바로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우는 보에몽 1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2.5. 생토메르 Saint-Omer

1.2.6. 플랑시 Plancy

보두앵 4세의 세네샬이자 섭정인 밀 드 플랑시가 이 가문 출신이다.

1.2.7. 밀리 Milly

험프리 2세의 며느리이자 이사벨 1세(예루살렘 왕국)의 첫 시어머니인 밀리의 스테파니의 가문, 스테파니의 다른 남편은 아래의 르노 드 샤티용이다.

1.2.8. 샤티용 Châtillon

르노 드 샤티용의 가문 샤티용의 딸 아녜스는 헝가리 왕비가 되기도 했다.

1.3. 백작가

1.3.1. 베상 Bessan

1.3.2. 그레니에 Granier

1.3.3. 기네스 Guines

1.3.4. 몽포트 Montfort

예루살렘 왕 풀크의 어머니이자 필리프 1세의 왕비인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의 가문. 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활약했다. 플랜태저넷 왕조 시기 잉글랜드 프랑스 귀족 가문으로 이 가문 출신인 시몽 드 몽포르 헨리 3세 마그나 카르타의 후신인 옥스퍼드 조례(Provisions of Oxford)를 제대로 지키지 않자 남작(Baron)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1264년의 루이스 전투에서 국왕군을 격파하고 왕을 포로로 잡았다. 1265년 1월, 그는 잉글랜드 최초의 의회인 모범의회를 소집하였으나 그해 8월에 벌어진 이브셤 전투에서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의 군대에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비록 1년 남짓한 기간만 집권하였지만, 그는 근대 영국의 의회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다.

1.3.5. 몽벨리아르 Montbéliard

1.3.6. 뷔르 Bures

1.3.7. 생 질 Saint-Gilles

1.3.8. 토롱 Toron

십자군의 명장 중 일인인 험프리 2세가 속한 가문이다.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1세의 첫 남편인 험프리 4세(옹프루아 드 토롱)도 그의 손자로서 이와 같다.

1.3.9. 르 퓌세 Le Puiset



[1] 십자군을 출발하고 보두앵이 에데사 백국의 백작이 되었을 즈음에 큰 형 므나쎄가 후사없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기에 원래라면 레텔의 영주가 되었을 터였지만 운명은 그렇게 되었다. [2] 조프루아는 잉글랜드 왕국의 공주 마틸다와 결혼했고, 둘의 아들인 헨리 2세 플랜태저넷 왕조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