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염재보(廉在輔) |
이명 | 염선달(廉先達) |
자 | 인서(仁瑞) |
본관 | 파주 염씨[1] |
출생 | 1863년[2] |
전라도
보성군 봉덕면 내리 (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양동리 내동마을)[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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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0년 7월 18일[4] |
대구형무소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114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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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염인서는 1863년 전라도 보성군 봉덕면 내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양동리 내동마을)에서 아버지 염종환(廉鍾煥)[5]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주성(姜周星)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딸만 셋 있던 숙부 염범환(廉范煥)에게 입양되었다.이후 보성군에서 농사를 짓던 그는 1908년 2월 안규홍 의병장이 보성군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즉각 가담하여 좌우포장(左右砲將)·좌우익장(左右翼將)이 되었다. 이후 보성군, 순천군, 동복군, 장흥군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같은해 4월 6일 동료 의병 30여명과 함께 의병의 이름을 가탁(假託)하여 양민의 재물을 탈취하던 강사문(姜士文)[6]을 포박하여 보성군 문전면 고부기(古府基)[7]의 산중에서 총살했다.
1908년 5월 초, 염인서는 일진회 회원으로서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하던 염영화(廉永化)를 보성군 봉덕면 법화리(현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 자택에서 총살했으며, 같은 해 12월 17일에도 동복군 내남면 주소리(현 화순군 사평면 주산리)에서 양민의 재산을 탈취하던 강모(姜某)를 잡아서 익사시켰다. 이듬해인 1909년 3월 6일에는 역시 양민의 재물을 강탈하던 일진회원 박봉조(朴鳳朝)를 잡아 머리를 난타하여 주살했으며, 그해 9월 4일에는 양민의 재물을 탈취하던 이용서(李用西)를 참살했다. 이렇듯 그는 주로 민간에 폐해를 입히던 일제 부역배를 단죄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나 1909년 9월 18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 모살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2일 대구공소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고, 이에 상고하였으나 같은 달 21일 고등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1910년 7월 18일 대구형무소에서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염인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