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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별궁 연희궁 衍禧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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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700> 위치 |
한성부 북부 연희방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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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시기 | 1420년 | |
해체시기 | 1764년 |
|
<colbgcolor=#bf1400> 연희궁 터 안내표지석 |
[clearfix]
1. 개요
조선 초기의 3대 이궁이자 별궁이다. 1420년( 세종 2년)에 한양도성 밖 서쪽 무악산 아래에 건립한 이궁으로, 당시 이궁 중에서 한성부 서쪽에 위치하여 '서이궁(西離宮)'이라 부르다가 1425년(세종 7년)에 '연희궁('衍禧宮)'으로 궁호를 바꾸었다. '연희궁(延禧宮)'으로도 적혔다.주로 조선 전기에 왕들이 피어(避御) 목적으로 사용했다. 이후 연희궁은 1764년(영조 40년)까지 존재했다가 해당 터에 영빈 이씨의 묘역을 조성하면서 사라졌다.
2. 역사
이어소에 문안했다. 상왕이 편전에 나아가 병조 당상관 및 선공 제조 박자청 등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피방할 곳에는 마땅히 이궁을 두는 것이므로 내가 이미
낙천정을 짓고, 또 이궁을
포천과
풍양에 짓고자 했더니, 지금 생각하니 재액을 피함에는 그 해에 따라 방위가 달라질 것이다. 포천과
풍양은 다 나라의 동쪽에 있는데, 유독 나라 서쪽에는 피방할 궁이 있지 않으니 신궁을 무악 명당에 지을 것이나, 크고 사치하게 하지 말고 백 칸을 넘게 하지 말라." 고 했다.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월 2일 신축 1번째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무악 명당에 신궁을 짓도록 명하다.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으로 불리는 이 지역(무악)은
조선
개국 당시 현
경복궁 터,
왕십리와 함께
궁궐 터 후보지로 고려되었다. 당시 태조 이성계로부터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도읍터를 찾아보라는 명을 받은
하륜이 이곳(무악)이 풍수지리 길지라고 말하며 도읍으로 정할 것을 청하였지만, 성리학 이외에는 지독히 배타적이었던 정도전은 무악이 풍수지리적 길지라는 이야기를 듣자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대신 정도전 일파는 현 경복궁 터를 제안했고, 태조는 풍수지리적 길지인 무악을 지지했었지만 결국 이번에도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었다.《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월 2일 신축 1번째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무악 명당에 신궁을 짓도록 명하다.
이후 1420년(세종 2년)에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현 위치에 연희궁을 지었으며, 세종 본인도 잠시 머물렀지만 독사나 해충이 많단 이유로 대신들은 거처를 옮길 것을 요구했다. 세종은 뒤에 누에를 치는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했고 서잠실(西蠶室)이라고 불렀다.
1505년( 연산군 11년)에 연산군이 연희궁을 연회장으로 꾸몄고[1] 그로 인해 이궁의 지위는 상실되었다.
천추사 윤안국과 서장관 안경이 배사했다. 지난해 동지사 목대흠이 아뢴, 융덕전(隆德殿)과 연희궁(延喜宮)이 모두 불에 탔다고 한 데 대한 진위문서를 수찬(修撰)하고 예물을 갖추어서 윤안국 등의 행차에 부쳐 보내었다.
《 광해군일기》 114권, 광해 9년 4월 28일 임술 1번째기사 1617년 명 만력 45년. 천추사 윤안국과 서장관 안경이 배사하다
《
광해군일기》에 이러한 대목이 나오는걸로 보아서, 임진왜란 직후까지 남아있던 연희궁은 이후 1615년에 화재로 연희궁에 있던 중심건물로 추정되는 융덕전과 연희궁 전체가 모두
전소되어 사라진 것으로 유추할수 있다.《 광해군일기》 114권, 광해 9년 4월 28일 임술 1번째기사 1617년 명 만력 45년. 천추사 윤안국과 서장관 안경이 배사하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정문 옆에 비석만이 남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연희궁이 있었던 곳은 현재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근처로 추정할 수 있다.
3. 여담
- 연희궁 이외에도 한성부 주변에 잠실이 몇 군데 더 존재했다. 송파구 잠실 지역에 동잠실[2], 서초구 잠원동에 신잠실이 있었다. 그 중 동잠실과 신잠실 주변의 지역명에는 잠실이 들어갔으나[3] 서잠실이 있는 지역의 이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 전두환의 집을 연희궁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