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11:05:00

에른스트 린데만


파일:Bundesarchiv_Bild_101II-MN-1361-21A,_Schlachtschiff_Bismarck,_Kapitän_Ernst_Lindemann.jpg
이름 Otto Ernst Lindemann
오토 에른스트 린데만
생몰년도 1894. 3. 28. ~ 1941. 5. 27.
복무 독일 제국 해군
국가방위군 해군
나치 독일 전쟁해군
최종계급 대령(Kapitän zur See)
주요참전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
스페인 내전
비스마르크 추격전
서훈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사후 수여)
1. 개요2. 출생과 성장3. 해군에 입대하다4. 제 1차 세계 대전5. 전간기
5.1. 아드미럴 셰어의 포술장이 되다
6. 제2차 세계 대전
6.1. 비스마르크의 함장이 되다6.2. 라인 연습 작전6.3. 뤼첸스와의 대립6.4. 전사
7. 사후8. 여담

[clearfix]

1. 개요

크릭스마리네의 장교이자 전함 비스마르크의 처음이자 마지막 함장으로 유명하다.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전사하였다. 최종 계급은 대령(Kapitän zur See)이다.

2. 출생과 성장

린데만은 1894년 3월 28일 예비 판사이자 프로이센 중앙 토지 신용 회사의 사장이었던 게오르크 하인리히 에른스트 린데만과 마리아 린데만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밑에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린데만의 가족은 각각 1895년과 1905년에 이사를 해서 최종적으로 베를린 달렘(Dalem) 지구에 정착했다.

이후 그가 16세였던 1910년,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린데만의 삼촌 프리드리히 티에스메이어는 독일 제국 해군 중령(Fregattenkapitän)으로 경순양함 SMS 마인츠의 함장을 맡고 있었는데, 린데만은 티에스메이어가 극동까지 항해한 경험담을 듣고 난 다음부터 해군 장교가 되는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1912년 린데만은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비스마르크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이후 그는 6개월동안 런던에 위치한 왕립 폴리테크닉 대학교에 다녔고 이후 1913년부터 본격적으로 해군 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3. 해군에 입대하다

1913년 3월 린데만은 플렌스부르크에 위치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해군 사관학교의 등록금은 1년에 1천 마르크로, 당시 독일의 철강 공장 노동자가 1년에 1,366 마르크를 벌었고 교사의 연봉이 3,294 마르크였음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매우 비싼 편이었지만 린데만의 가족은 경제적으로는 꽤 잘 사는 편이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여기서 그의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았는데 사관학교의 군의관은 린데만이 어린 시절 폐렴을 앓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가 U보트에 근무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린데만은 제한된 임무만을 맡게 된다.

1913년 4월 두 번의 시험과 보호관찰 기간을 거친 린데만은 사관학교에 성공적으로 입학한 다음 본격적으로 사관학교 교육을 이수받았다. 그는 이후 훈련함 SMS 헤르타에 승선하여 본격적으로 경험을 쌓았다.

4. 제 1차 세계 대전

5. 전간기

5.1. 아드미럴 셰어의 포술장이 되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린데만은 킬에 있는 해군 포술 대학에서 근무하였다. 그리고 1932년, 린데만은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1934년, 이제는 이름이 바뀐[1] 독일 해군에 소속되어 있던 린데만은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2번함 아드미럴 셰어의 건조를 감독하게 된다. 이후 1936 아드미랄 셰어가 첫 출항을 하자 린데만은 아드미랄 셰어의 포술장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함 내의 모든 무기에 대한 관리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동년 10월 1일, 린데만은 중령으로 진급했다.

6. 제2차 세계 대전

6.1. 비스마르크의 함장이 되다

린데만은 1940년, 당시에는 아직 건조중이었던 크릭스마리네 최대의 전함 비스마르크의 초대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린데만은 비스마르크의 초대 함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광스러웠다고 하나, 동시에 전쟁이 끝나기 전에 비스마르크를 제대로 지휘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이후 1940년 8월 24일 비스마르크는 공식적으로 취역하였고 에른스트 린데만은 비스마르크의 초대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린데만이 처음 비스마르크의 함장으로 취임했을 때 일각에서는 함장 경험이 없고 해군 사관학교에서 포술 훈련만 했던 자가 제대로 된 전함을 지휘할 수 있는지에 관한 말들이 무성했지만, 린데만은 취임 후 부하들의 두터운 신망과 함께 뛰어난 임무 수행 성과를 보여 이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사실 저 우려부터가 상당히 설레발이었던 것이, 린데만은 1913년 해군 사관학교에 입교한 기수들 중 종합 평가에서 전 기수들 중 2위로 여겨질 정도로 유능했으며, 군 경력 내내 주포 구경이 최소 11인치인 함선에만 근무했던 관계로 대형함에도 상당히 능통하였고 또 포술교관을 맡았던 만큼 포술에 대한 지식도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린데만은 단순히 포술에만 능했던 것이 아니라 휘하 승조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독쟁이로 소문나 휘하 승조원들에게 인기가 전무했던 귄터 뤼첸스 제독과는 반대로, 유머러스한 성격과 융통성, 뛰어난 업무 능력을 고루 갖췄고 부하들을 살뜰하게 챙겨주었으며 언제나 그들의 의견을 귀기울여 들었던 린데만을 승조원들에게 좋은 함장이라 부르며 절대적인 충성심을 표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렀고 마침내 1941년 4월 말, 린데만은 첫 전투 명령을 하달받았다. 그가 하달받은 명령은 전함 비스마르크를 이끌고 대서양으로 나가서 영국 함대에 대한 통상파괴작전을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출항 전 비스마르크를 지원하기 위해서 린데만의 사관학교 동기인 헬무트 브링크만(Helmuth Brinkmann) 대령이 지휘하는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이 지원함으로 편성되었고, 작전을 총괄할 뤼첸스 제독 역시 비스마르크함에 승선했다.

1941년 5월 5일에는 출항을 한창 준비중이던 비스마르크함을 아돌프 히틀러 빌헬름 카이텔, 에리히 레더 높으신 분들이 방문했다. 이후 벌어진 만찬에서 히틀러는 미국이 절대 독일과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린데만은 이를 적극적으로 반박하며 미국이 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파력하기도 했다. 비록 게급은 낮을지언정, 린데만이 단순한 예스맨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6.2. 라인 연습 작전

1941년 5월 19일, 드디어 뤼첸스와 린데만의 지휘를 받는 비스마르크와 브링크만의 지휘하는 프린츠 오이겐이 라인 연습 작전의 일환으로 고펜하펜을 떠났다. 함대는 노르웨이의 베르겐을 경유한 뒤 다시 항해를 시작했고 마침내 5월 24일, 영국 해군의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순양전함 후드를 포착한 뒤 교전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때부터 린데만과 함대사령관 귄터 뤼첸스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사령관 뤼첸스는 해군 사령부의 지시에 철저히 따라서 원 목표였던 통상파괴작전에 집중하기 위해 일체의 반격을 하지 말고 계속 대서양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린데만과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은 적이 계속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향해서 포격하는 것을 무시하고 도망가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는" 내 배 꽁무니에 포탄이 날아오는 것을 놔둘 순 없습니다!" 라고 강하게 일갈하며 교전을 지시하였고, 결국 뤼첸스는 교전을 막는 걸 포기했다.[2] 그리고 치열한 교전 끝에 후드는 끝내 격침당하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도 손상을 입었지만, 그 대가로 비스마르크도 연료 저장고가 피탄당하며 연료가 유출되기 시작하였다.[3]

6.3. 뤼첸스와의 대립

후드를 격침시킨 것은 대단한 성과였으나 문제는 이후에 독일 함대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두고 뤼첸스와 린데만의 갈등이 격화되었다는 것에 있었다. 뤼첸스는 비스마르크가 연료 저장고에 손상을 입었으며 기본적으로 적 군함과의 교전을 회피하라는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근거로 홀로 남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4]에 대한 추격을 중단하고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고 명령했고 린데만은 다 잡은 목표물을 왜 놓치냐며 반발했지만, 결국 비스마르크는 추격을 계속하는 쪽으로 결정이 난다.[5] 참고로 이후 임무를 계속하는 쪽으로 결정이 나자, 린데만은 입장을 바꾸어 연료가 새는 현상이 심각하니 일단은 항구로 귀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로도 연료가 계속 누설되었고 비스마르크를 잡으려 영국 해군이 떼거지로 몰려오자 결국 뤼첸스는 통상파괴작전을 포기하고 귀환을 결정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대립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후 비스마르크의 귀환 루트를 가지고 두 사람이 또 충돌했다는 것이다. 린데만은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꾼 뒤 다시 북해를 통과해서 베르겐으로 가는, 즉 온 길을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뤼첸스는 이러면 너무 경로가 길어지며 현재 연료가 유출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대로 직전하여 최단거리 귀환루트인 프랑스로 항해하라고 명령했고, 결국 이번에도 뤼첸스의 안이 받아들어지면서 비스마르크는 그대로 프랑스를 향해서 전속력으로 항해하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이 귀환 루트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 날 당일 오후 6시 14분,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로 귀환하기 위해 프린츠 오이겐과 헤어지면서 비스마르크는 홀로 남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계속된 뤼첸스와의 대립과 의견 충돌로 린데만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6.4. 전사

이후 비스마르크는 추격을 열심히 뿌리치며 프랑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정신을 차린[6] 영국 해군의 뇌격기들이 맹공을 가한 탓에 비스마르크의 키가 손상되었고,[7] 이로 인해서 사실상 비스마르크는 앉은뱅이 상태가 되면서 프랑스로 귀항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후 린데만과 뤼첸스는 키를 수리하기 위해 애썼고 잠수부들을 투입, 손상된 2개의 키들 중 우현쪽 키는 성공적으로 분리한 뒤 제자리로 고정시켰으나 좌현쪽 키를 끝내 수리하지 못했고, 린데만은 폭약까지 사용하는 것을 검토하였으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은 뒤 끝내 키를 고치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렇게 키가 손상되고 도망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던 비스마르크는 추격해온 영국 해군의 순양함들과 구축함들과 교전하였다. 키가 망가진 당일에는 전함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교전 중 큰 손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영국 해군과 자유 폴란드군 구축함들로부터 어뢰 공격이 이어졌고, 이로 인하여 린데만과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은 밤새 경계 태세를 취하느라 휴식을 전혀 취하지 못했다.

생존 승무원들 중 차선임자인 4등포술장교 부르카르트 폰 뮐렌하임레흐베르크(Burkard von Müllenheim-Rechberg) 대위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 날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린데만은 평소와 같이 유머러스하고 웃음있는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린데만은 뮐렌하임레흐베르크의 대화 요청도 무시했는데, 뮐렌하임레흐베르크 본인은 훗날 당시 린데만 대령이 밤새 이어진 전투로[8] 너무 피로해서 그랬거나 뤼첸스 제독과의 지속된 대립으로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후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고, 비스마르크는 로드니 킹 조지 5세를 위시한 다수의 영국 군함들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오전 9시 2분경 비스마르크의 전방 포탑 2문이 무력화되었고 포술장 아달베르트 슈나이더(Adalbert Schneider) 소령이 전사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비스마르크의 함교가 직격탄을 맞았고,[9] 이로 인해 뤼첸스를 비롯한 함교 인원들이 전부 몰살당하고 만다.

이때부터 린데만의 행적은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뤼첸스와 같이 함교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때 최후를 맞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각에서는 당시 린데만은 퇴함 명령을 내리기 위해 함교를 떠났던 관계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도 주장한다. 다만 어찌 되었든 이 시점에서 지휘권 자체는 린데만을 건너뛰고 부장으로 넘어갔는데, 아마 린데만이 갑판으로 내려간 걸 알지 못했던 지휘부 측에서 린데만이 함교에서 폭발이 일어났을때 전사하였다고 생각해서 그랬거나, 아니면 진짜로 그 때 전사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전투는 계속되었고 이후 9시 24분에는 비스마르크의 4번 주포탑 "도라"(Dora)[A]가 무력화되었으며, 9시 40분경에는 함선에 화재가 발생, 급기야 10분 후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3번 주포탑 "체자르"(Caesar)[A]마저 파괴되면서 주포탑들이 모두 무력화된 비스마르크는 사실상 무저항 상태가 되었다.

만약 린데만이 이 시점에서까지 살아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갑판에서 퇴함을 지휘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단 생존한 수병 한 명은 뱃머리에 흰색 모자를 쓴 장교[12]와 20명에서 3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다른 생존 수병은 비스마르크가 기울어지고 있었을 당시 린데만과 전령 한 명이 1번 주포탑 "안톤"(Anton)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했는데, 사실이라면 해당 전령은 배와 함께 죽으려는 린데만을 만류하려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해당 수병은 전령이 마지막으로 린데만에게 경례한 뒤 바다에 빠졌고 홀로 남은 린데만은 함수부의 깃대를 붙잡고 배와 함께 최후를 맞았다고 증언하였다.

뤼첸스와 마찬가지로, 이후 침몰지점에서 대대적인 수색이 이루어졌으나 린데만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7. 사후

이후 비스마르크가 격침된 지 정확히 7개월 후였던 1941년 12월 27일, 린데만은 후드의 격침에 기여했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게 손상을 입힌 공로로 기사십자 철십자상을 사후 수여받았다.

참고로 당시 이 훈장 수여는 큰 논란이 되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대령이었던 린데만보다 계급이 낮았던 포술장 슈나이더 소령이 비스마르크 격침 당일 뤼첸스 제독이 격침 전 전문으로 상신한 기사 철십자장 수훈 건의가 즉시 채택되어 곧바로 수여받았던 것[13]에 비해 린데만이 이를 수여받은 데에는 무려 7개월이라는 긴 공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군대에는 상관이 먼저 훈장을 받은 뒤 부하가 수여받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절차도 지켜지지 않아서 말이 많았다. 이는 해군을 넘어 독일 국내에서 큰 논란이 되었고, 결국 1942년 1월 6일 화요일, 에리히 레더 제독이 직접 린데만 제독의 미망인 힐데가르드에게 직접 훈장을 전달하면서 논란을 종식시켜야 했다.

위 논란에 대한 만회 및 추모 차원에서, 독일 해군은 1942년에 프랑스 칼레 지역 해안포 1개 포대를 린데만 해안포대로 명명했다.

8. 여담

  • 총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1921년 2월 베를린에서 활동하던 가수였던 샤를로테 웰리와 했고, 결혼 3년 후였던 1924년 딸 헬가 마리아를 가졌다. 이후 린데만이 본격적으로 해군 장교가 되면서 가족과 자주 떨어져 살자 두 사람의 사이는 소원해졌고 결국 둘은 1932년 이혼했다. 1934년 10월 린데만은 막내동생의 재수와 재혼했는데, 무려 14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다고 한다. 이후 둘은 1939년 7월에 딸 헤이디를 득녀했다.
  • 반나치 운동가 활동과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라는 시를 지었기로 유명한 마르틴 니묄러 목사와 인연이 있다. 린데만이 재혼할 때 성당에서 주례를 서준 사람이 바로 니묄러였다.

[1] 1933년 히틀러와 나치당이 독일을 장악하고 난 뒤 국가방위군이 독일 국방군으로 전환되었는데, 그 과정의 일부로 해군 역시 이름이 국가해군(Reichsmarine)에서 전쟁해군(Kriegsmarine)으로 바뀌었다. [2] 계급은 뤼첸스가 대장, 린데만이 대령으로 차이가 꽤 났으나, 전통적으로 해군에서는 함장이 해당 배에 한해서는 모든 권한을 쥐기 때문에 정말 필요하다면 상급자의 명령을 무시할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함장이었던 린데만이 자기 배를 직접 언급하면서까지 강하게 밀고 나오자 뤼첸스도 더는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3] 더 자세한 내용은 비스마르크 추격전 문서를 참조. [4] 당시 독일 함대는 홀로 남은 함선이 프린스 오브 웨일스인 걸 알지 못했지만, 외형을 보고 킹 조지 5세급 전함 중 하나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5] 당시 두 사람의 의견 충돌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함교 인원들이 이후 전부 전투에서 전사한 관계로 자세한 대화 내용은 일절 전해지지 않으나, 생존한 조타수의 증언에 따르면 전화를 받는 과정에서 린데만이 뤼첸스에게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추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 엿들었다고 한다. [6] 영국 해군은 은근히 비스마르크에게 뇌격을 가하기 전까지 온갖 삽질은 다 했다.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전혀 다르게 계산한 건 물론이고 심지어는 뇌격기가 아군 순양함을 비스마르크로 착각해 뇌격을 실시하는 일까지 벌어졌었다. [7] 키가 이뢰에 직격당하면서 그대로 한쪽으로 돌아간 채 고정되어 버렸다. [8] 밤 사이 대규모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구축함들이 계속해서 뇌격을 시도했던 탓에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과 린데만은 휴식을 전혀 취하지 못한 상태였다. [9] 물론 함교는 360mm 장갑으로 둘러싸져서 철저히 보호되었지만, 훗날 탐사대가 비스마르크함의 잔해를 조사할 때 함교 부분에서 무려 50발이 넘는 피탄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함교가 집중적으로 포격을 당해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A] 포네틱 코드로, 독일이 사용하던 포네틱 코드는 영미가 사용하던 것과 달랐으며 체자르(Caesar)는 포네틱 코드로 C를, 도라(Dora)는 D를 의미한다. [A] [12] 당시 크릭스마리네에서 흰색 정모는 오직 함장들만이 착용할 수 있었고 이 시점에서 뤼첸스는 함교에서 전사했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관계로 저 흰색 모자는 린데만을 가리킬 확률이 높다. [13] 전사 직전 해상에 있었기에 슈나이더 소령은 정식 수훈식 및 생전 패용은 못 했지만, 공식 기록으론 생전 수훈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