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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25대 국왕 언드라시 3세 III. Andrá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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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65년 |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 |
사망 | 1301년 1월 14일 (향년 35~36세) |
헝가리 왕국 부더 | |
재위 |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트 왕국의 왕 |
1290년 ~ 1301년 1월 14일 | |
배우자 |
쿠야비아의 페네나 (1290년 결혼/1295년 사망) |
오스트리아의 아그네스 (1296년 결혼) |
|
아버지 | 헝가리의 이슈트반 |
어머니 | 토마시나 모로시니 |
자녀 | 에르제베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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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 크로아트 왕국 제25대 국왕. 아르파드 왕조의 마지막 국왕으로,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을 구하기 위한 개혁을 시행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자녀 없이 사망했다.2. 생애
1265년경 베네치아 공화국의 중심지인 베네치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이슈트반(Utószülött István 1236~1271)이고, 어머니는 베네치아 귀족인 미켈레 스바라 모로시니의 딸 토마시나 모로시니다. 아버지 이슈트반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언드라시 2세의 세번째 왕비인 베아트리체 데스테(Beatrice d'Este 1215~1245)의 유복자였다. 언드라시 2세가 1235년 9월 21일에 사망한 후, 베아트리체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그러자 언드라시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벨러 4세는 뱃속의 아이가 언드라시 2세가 아닌 재무관 데네시(Ampod fia Dénes ?~1236)의 자식이라며 그녀를 간통 혐의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데네시는 실명형에 처해진 뒤 1236년경에 사망했고, 베아트리체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 사절단의 도움으로 남장한 채 탈출한 후 튀링겐에서 이슈트반을 낳은 후 이 아이가 아르파드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벨러 4세를 비롯한 언드라시 2세의 다른 자식들은 이슈트반을 왕실의 일원으로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왕족으로서 지원금을 받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베아트리체는 친정으로 돌아가 이슈트반을 키우려했으나 베아트리체의 삼촌 아초 7세(Azzo VII d'Este 1205~1264)는 조카의 입국을 거부하고 재산도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베아트리체는 몇 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를 떠돌아다니면서 아들을 어렵게 양육했다. 이를 보다못한 교황 인노첸시오 4세 덕분에 몇몇 수도원의 수입을 보장받으면서 가난을 해결했다. 1243년이 되어서야 아들을 친정인 페라라로 보낼 수 있었지만, 베아트리체는 2년만인 1245년에 사망했다. 이슈트반은 어머니가 생전에 약혼시켰던 베네치아 귀족의 딸인 토마시나 모로시니와 결혼하여 아들을 얻었다.
아르파드 왕조는 여전히 이슈트반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슈트반은 아들의 이름을 헝가리어 이름인 언드라시로 지으면서 외부의 의심을 부정했고, 우수한 교수들을 초빙해 아들에게 제왕학을 가르치게 했다. 또한 1271년 사망했을 때 자신의 상속권을 아들에게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던 1278년, 라슬로 4세를 상대로 반기를 든 이반 쾨세그가 언드라시를 초빙한 뒤 "슬라보니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의 공작"이라는 칭호를 붙인 후 벌러톤 호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민중이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는 데다, 쾨세그 가문이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루돌프 1세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오타카르 2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데 일조한 덕분에 신성 로마 제국을 등에 업은 라슬로 4세를 두려워하여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1278년 가을에 베네치아로 돌아갔다.
1290년 초, 언드라시는 또다시 이반 쾨세그의 초대를 받고 쿠만족처럼 행동하는 라슬로 4세에 대한 반감이 들끓어 오르던 헝가리로 돌아왔다. 에스테르곰 대주교 루도메르는 라슬로 4세를 파문한 뒤 그에게 어서 합류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쾨세그 가문의 경쟁자인 아놀드 하호트가 언드라시를 슈트리고바 요새로 초빙한 뒤 체포했다. 아놀드는 언드라시를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보냈고, 공작 알브레히트 1세는 빈에 감금했다.
1290년 7월 10일, 라슬로 4세가 그동안 총애했던 세 명의 쿠만인에게 암살당했다. 루도메르 대주교는 2명의 수사를 빈으로 보내 왕의 죽음을 알렸고, 언드라시는 수사들의 도움으로 변장한 채 감옥을 탈출하여 헝가리로 달려갔다. 1290년 7월 23일, 루도메르 대주교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언드라시를 언드라시 3세로서 즉위시켰다. 영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동안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자가 하루아침에 왕이 된 것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언드라시 3세가 평화를 회복하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자 충성을 맹세했다.
언드라시 3세는 집권 후 헝가리의 가장 강력한 귀족들을 최고위직에 앉혔다. 왕국의 북동부를 지배하던 어버 어머데는 궁정백으로 선임되었고, 트란스다뉴비아 서쪽 지역의 지배자인 이반 쾨세그는 재무관이 되었으며, 롤랑 보르사는 에르데이에서 군림했다. 또한 그는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모든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왕실의 허가없이 세워진 성들을 파괴하고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을 원주인들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그를 몰아내고 헝가리 왕위를 탈취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독일왕 루돌프 1세는 1241년 벨러 4세가 몽골 제국군의 공세를 피해 달아났을 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원군을 요청하면서 충성을 맹세한 사실을 들며, 봉신인 라슬로 4세가 자식 없이 사망했으니 주군으로서 봉신의 영지를 회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아들이자 오스트리아 공작인 알브레히트 1세에게 헝가리를 맡기려 했다. 여기에 라슬로 4세의 형제 언드라시(1278년 사망)를 사칭하는 자가 폴란드 왕국에서 지지자를 규합하여 헝가리로 쳐들어왔다가 패퇴한 뒤 폴란드에서 피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위세를 갖춘 처가를 구하는 것뿐이라고 여긴 언드라시 3세는 1290년 쿠야비아 공작 지에모미수(Ziemomysł inowrocławski 1245~1287)의 딸 페넨나와 결혼했다. 그리고 1291년 초 티서강 동쪽에 있는 비하르(Bihar), 쾨레슈비데크(Körösvidék), 서볼치(Szabolcs), 서트마르(Szatmár), 솔노크(Szolnok) 등 5개 주 귀족들의 총회를 너지바러드에서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라슬로 4세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현재 언드라시 3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슈트반 발로센젠을 역적으로 간주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소집된 또다른 회의에서 지역 귀족들과 작센인, 루마니아인 등 소수민족들에게 왕에게 충성을 바치라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으며, 어버 어머데를 궁정백에서 해임하고 자신을 옹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이반 쾨세그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1291년 4월, 나폴리 왕국 국왕 카를로 2세의 왕비이자 라슬로 4세의 누이인 마리어가 헝가리 왕위를 주장했다. 바보니치, 프랑코판, 슈비치 등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주요 귀족 가문들이 그녀를 합법적인 군주로 받들었다. 하지만 언드라시 3세는 일단 그녀 문제는 내버려두기로 하고,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 왕을 칭하는 알브레히트 1세부터 손보기로 했다. 그는 군대를 소집한 뒤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알브레히트 1세가 라슬로 4세 치세 말기에 점거했던 포조니와 쇼프론을 포함한 여러 요새를 탈환했다. 당시 알브레히트 1세는 아버지 루돌프 1세가 사망한 뒤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와 독일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터라 그와 대적할 겨를이 없었다. 이에 양자는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알브레히트 1세가 쾨세그 가문에게서 탈취한 요새들을 파괴하고 철수하며, 양자는 서로를 적대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1292년 봄, 쾨세그 가문은 자기들 소유의 요새들을 파괴하게 한 그에게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마리어의 아들인 카로이 마르텔을 왕으로 옹립했다. 언드라시 3세는 즉각 반란 토벌에 나서 7월에 진압을 성공했지만, 그해 8월에 슬라보니아로 가던 중 쾨세그 가문을 따르던 병사들에게 습격당해 체포되었다. 언드라시는 4개월간 억류되었다가 지지자들이 그들의 친척을 쾨세그에 인질로 보낸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1293년 어머니 토마시나를 헝가리로 모셔온 뒤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슬라보니아의 관리자로 임명했다. 베네치아 귀족의 여식이었던 그녀가 이 지역을 담당하자, 베네치아의 영향력이 강력했던 해당 지역들은 언드라시 3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언드라시 3세는 뒤이어 헝가리 북부 지역을 방문해 토지 보조금을 개정했으며, 부다로 돌아온 후 어버 어머데를 다시 궁정백에 선임했다.
1294년 5월, 롤랑 보르사가 너지바러드 주교 베네딕토를 사로잡고 정부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언드라시 3세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한 뒤 공세를 개시해 아도르한에 있는 보르사의 요새를 포위했다. 3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공략에 성공한 그는 에르데이의 보이보드(voivode)로 라슬로 3세 칸을 선임했지만, 자신에게 복종을 맹세한 보르사의 영토를 보전해주었다. 1295년 초, 크로아티아의 귀족 파울 슈비치가 또다시 그에게 등을 돌리고 카로이 마르텔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러나 카로이는 그해 8월에 사망해버리면서 반란은 흐지부지되었다.
1295년 아내 페넨나가 사망하자, 1296년 초 빈에 방문하여 알브레히트 1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그해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쾨세그 가문을 상대로 알브레히트 1세와 협공했지만, 여러 요새에서 농성하는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1296년 메테 3세 크사크를 궁정백으로 선임했지만, 1297년 말에 메테 3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언드라시 옹립에 기여하고 반란군을 상대로 파문을 선포하는 등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루도메르 대주교가 이 시기에 사망했다. 이렇듯 국내가 귀족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는 알브레히트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를 거머쥐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도왔다. 1298년 7월 2일, 그와 알브레히트 1세는 괼하임 전투에서 아돌프를 격파했다.
1298년 여름, 언드라시는 고위 성직자, 귀족, 작센인, 세케이인, 쿠만인을 소집하여 회의를 연 뒤, 자신의 허가 없이 건설된 요새를 파괴하고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재차 명령했다. 또한 삼촌인 알베르티노 모로시니를 슬라보니아 공작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좀처럼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슈비치 가문, 쾨세그 가문, 차크 가문을 포함한 여러 귀족들이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에게 당시 12살인 손자 카로이 로베르트를 헝가리로 보내서 왕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카를로 2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1300년 8월 손자를 스플리트에 파견했다. 대부분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티아 영주들은 카로이가 자그레브로 진군할 때까지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쾨세그 가문과 메테 가문은 곧 마음을 바꿔 언드라시 3세와 화해한 뒤 카로이의 진군을 막았다.
이리하여 헝가리에서 또다시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던 1301년 1월 14일, 언드라시 3세는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당대에 그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그의 유해는 부더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두 아내를 맞이했지만 딸 에르제베트 외에는 자식을 얻지 못했기에, 귀족들은 논의 끝에 보헤미아 왕국과 폴란드 왕국의 국왕 바츨라프 2세의 아들 바츨라프 3세를 새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언드라시 3세는 첫번째 왕비 쿠야비아의 페네나와의 사이에서 딸 에르제베트를 낳았다. 에르제베트는 1298년 2월 12일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2세의 외아들인 바츨라프 3세와 약혼했다. 1301년 1월 14일 언드라시 3세가 사망한 후 계모 아그네스의 손에 이끌려 빈으로 이동했다. 약혼자 바츨라프 3세가 헝가리 왕으로 추대되면서 그녀 역시 헝가리 왕비가 되는 듯 했지만, 알브레히트 1세의 압력으로 약혼이 깨지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다. 아그네스는 에르제베트를 자신의 형제인 헨리크 1세와 약혼시켰지만,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1310년 쾨니히스펠덴 수도원으로 보내졌다가 다시 도미니코회 토스 수녀원으로 이송된 뒤 수녀로 살아가다가 1336년 10월 31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