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육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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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병법 삼십육계 중 적전계의 제8계.2. 설명
한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은밀히 진창을 건넌다."라는 말이다. 여기서의 진창은 삼국지연의에서 학소가 제갈량의 대군을 격퇴한 그 진창이 맞다. 초한쟁패기 시절에 한신이 삼진을 점령하기 위해 파촉에서 나올 때에 생긴 말로, 원래 말은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度陳倉)이다. 겉으로는 잔도를 고치면서 은밀하게 진창을 건넌다는 말.홍문연 이후 항우의 명에 따라 파촉으로 들어가게 된 유방은 장량의 조언에 따라 들어가고 나서 자신들이 지나왔던 잔도를 모두 불태웠다. 파촉에 있는 동안 소하의 천거로 한신을 얻게되고 그를 대장군으로 삼아 동진을 개시했다. 하지만 관중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가 지키고 있는 삼진을 점령해야 했다. 이에 한신은 6월~7월 사이 자신들이 태웠던 포야도(褒斜道)[1]에 있던 잔도를 병사와 백성들을 대거 동원하여 복구하는 작업을 거하게 펼치며 장한의 관심을 포야도 쪽으로 집중시켰다.[2] 하여 장한은 군을 야곡 쪽에 집중시켰으나 잔도 복구의 시일과 유방의 세력 안정, 복구 후에도 피로에 한군은 지쳐있을거라 생각하여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그 해 8월, 한신은 충분한 시간차를 두어 장한을 안심시킨 후 몰래 진창고도(陳倉故道)를 통해 군을 이끌고 진창을 기습하였고, 한군은 그 기세를 타 어렵지 않게 삼진을 장악할 수 있었다. |
예를 들면 성동격서는 멀티기지를 치는 척 본진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암도진창은 한방 병력끼리 정면대결을 할 것처럼 보여주면서 재빠르게 진형이 채 갖춰지지 못한 적 병력을 급습하는 것이다.
3. 암도진창은 없었다?
홍문연 이후 유방을 위험하게 본 항우는 천하를 나눌 때 유방을 진나라의 남서쪽 구석진 지역인 파군·촉군·한중군을 쪼개어 한나라 왕으로 봉하고, “파촉도 관중이다”라는 말로 정당화했다. 진짜 진나라의 핵심 지역은 항복한 진나라 장수 장한과 사마흔과 동예에게 옹나라·새나라·적나라 셋으로 나눠주니, 역사에서는 이 나라들을 삼진이라고 한다. 벽지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항우는 유방의 군단 중 3만 명만을 한나라로 따라갈 수 있게 했다.자신이 항우에게 심하게 경계를 받고 있다고 느낀 유방은 한나라 수도 남정(오늘날의 한중 시)으로 들어가면서, 장량의 조언을 받아 남정과 관중을 잇는 잔도를 불태웠다. 유방이 남정을 나와서 항우와 겨루려면 통과해야 하는 길을 끊었으니 유방은 이제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다 마침 항우의 세력권인 서초 근처에서 항우가 제북·제·교동 세 나라로 쪼개 놓은 제나라를 제나라의 권력자 전영이 통합하고 항우에게 도전하고 있었으므로, 항우는 유방에 대한 경계를 거두고 전영과 싸우러 나간다. 이 사이 유방은 남정을 나와 삼진을 일거에 평정하고 항우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겨루는데, 이 뒤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이때 암도진창의 고사가 나온다. 어두울 암, 건널 도, 진창은 지명으로 지금의 보계시이다. 즉 몰래 진창을 건너간다는 말. 이는 장량의 조언으로 태워먹은 잔도를 보수해서 옹나라 왕 장한이 그쪽에만 대비를 하게 하고, 실제로는 폐쇄된 옛 길을 지나서 진창을 기습했다는 것이다(삼진 중에서도 한나라와 직접 맞닿은 건 옹나라).
장량의 조언으로 잔도를 태운 것은 《사기·유후세가》에 나온다. 그러나 잔도를 보수해서 장한의 눈을 돌리게 한 사이 장한이 대비하지 않은 옛 길을 지나 진창을 쳤다는 것은 유후세가는 물론이요 사기의 회음후열전이나 번역등관열전, 고조본기, 항우본기에 나오지 않는다.[3]
도리어 당시 한군의 진격로를 살펴보면 과연 옹나라에서 방비하지 않은 옛 길이라는 것이 있었는지가 의심스럽다.
이 위의 그림을 보면 진창 서쪽에서 행해진 작전이 꽤 있음을 볼 수 있다(서현승은 이름이 아니라 서현의 승이라는 관직 이름이다). 장한이 대비하지 않은 옛 길을 통해서 진창을 급습한 것이라면 옹나라의 진창 이서의 군대와 교전하는 것은 이상하다. 옛 길에 대비가 미약하다면 굳이 진창 가기 전에 정리해야 할 만큼의 군대가 있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더구나 옹군은 한군이 진격하는 것에 맞서 싸우려는 움직임까지 보여준다.
이를 통해 봤을 때 한나라의 진창 진격은 옹나라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도리어 옹나라도 한나라가 그쪽으로 올 것을 알고 준비는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옹나라 왕 장한이 원래 거느린 군대는 항우의 신안대학살로 인해 하나도 남지 않았고, 막 옹나라 왕으로 와서 여덟 달 동안 뽑은 군사들과 장한이 진나라 장수로서 함곡관을 나올 때 남아서 진나라 각 지방을 지키던 군사들로서, 실전 경험이 이미 충분히 쌓인 한나라 군대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사기에 한군의 우회공격에 대한 얘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본기나 열전이 아닌, 고조공신후자연표에 107위 공신으로 나오는 수창정후 조연의 공적으로 나온다.
"알자로서 한왕 원년(기원전 206년) 처음 한중에서 일어났는데 옹나라 군대가 진을 막자, 황상에게 아뢨다. 황상은 돌아가고자 했는데, (조)연의 말을 좇아 다른 길을 내니, 길이 통했다. 나중에 하간수가 됐고,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위 상여를 죽였다. 이 공으로 열후가 돼 1400호를 받았다."
그런데 이것도 잘 보면 암도진창의 고사와는 다르다. 여기에서는 길을 막은 주체가 한나라이다. 한나라가 잔도를 태워서 길을 막았고 그 길을 보수하는 움직임에 장한이 따라갔다. 그러나 조연의 이야기에서는 길을 막은 주체가 옹나라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유방이 길이 막히니까 진짜로 돌아가려고 했다.어쩌면, 현재의 암도진창의 고사는 이 조연의 이야기에서 한나라가 옹나라를 우회해서 공격했다는 이야기와, 장량의 계책으로 한나라가 잔도를 태운 것을 가지고, "잔도를 태운 것을 바탕으로 우회공격"으로 대충 짬뽕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리하면, 한나라가 삼진을 평정할 때 부서진 잔도를 수리함으로써 옹나라의 시선을 돌리고 그 틈에 옛 길로 우회해서 기습했다는 이른바 "암도진창"은 없었다는 것이다. 옹나라는 잔도도 없으니 한나라가 서쪽으로 돌아서 나올 것을 알고 있었고, 한나라도 그 길을 따라오면서 도전하는 옹나라 군대들을 무찌르고 북진했을 뿐이다.
[1]
斜는 일반적으로는 "비낄 사"로 읽지만 이 경우는 "골짜기 이름 야"로 읽으므로 포야도가 옳다.
[2]
일단 포야도의 잔도 수리가 장한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긴 하였으나 관중을 점령하고 난 이후에도 군을 움직이고 물자를 나르는 등 보급을 위해서는 반드시 잔도를 복구해야만 했기에 착실하게 행하였고 이것이 장한을 더욱 더 쉽게 속일 수 있는 요소였다.
[3]
'8월, 한왕이 한신의 계책에 따라, 고도를 따라 돌아와서, 옹왕 장한을 습격했다. (장)한은 한군을 진창에서 맞아 싸웠으나, 옹나라 병사가 져서, 돌이켜 달아났다. 멈춰서 호치에서 싸우니, 또 다시 져, 폐구로 달아났다.' 라는 얘기는 있으나, 잔도를 보수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