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0 18:03:52

알 하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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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파 우마이야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알 하캄 2세 히샴 2세 무함마드 2세 술라이만 2세 히샴 2세 술라이만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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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드 야햐 이븐 알리 이븐 함무드 알 무탈리
우마이야 히샴 3세 }}}}}}}}}}}}

الحکم بن هشام
알 하캄 이븐 히샴

재위 796년 6월 12일 ~ 822년 5월 21일
생몰 771년 ~ 822년 5월 21일

1. 개요

후우마이야 왕조의 3번째 아미르. 히샴 1세의 아들.

2. 상세

즉위 직후 부왕 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축출된 숙부 술레이만과 압둘라가 돌아와 각각 탕헤르 발렌시아의 통치권을 요구하였다. 알 하캄이 이를 거절하자 압둘라는 두 아들인 우바이둘라와 압둘 말리크를 아헨 샤를마뉴 궁정으로 파견해 원군을 청하기까지 하였다. 술라이만은 프랑크의 개입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코르도바를 공격했으나 패하였고 메리다로 후퇴했으나 붙잡혀 처형되었다. (800년) 이후 항복한 압둘라는 사면되었으나 그토록 원했던 발렌시아에 유배되었다. 한편 내전을 틈타 프랑크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하고 801년 백작령을 설치하여 프랑스와의 완충지대 겸 교두보로 삼았다. 이후로도 샤를마뉴의 개입은 계속되었다.

이후로도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톨레도, 사라고사, 메리다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두 차례나 수도 코르도바를 위협하였다. 806년에는 궁정 내부에서도 알 하캄을 폐위하고 그의 사촌 무함마드 이븐 알 카심을 옹립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11월 16일 72명의 귀족들과 (일설에 의하면) 5천에 달하는 그 일족이 연회 자리에서 멸문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박혀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 전시되었다. 이는 반역자들 혹은 기독교 세력권의 수급들이 코르도바 성문에 효수된 당대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잔혹한 편이었다. 그 틈에 프랑크 군이 재차 공세에 나서 806년 팜플로나를 점령하였다. 다만 808년의 토르토사, 811년의 타라고나 공격은 격퇴되었다. 이에 샤를마뉴는 피레네 산맥 남쪽에 마르크 (변경백)를 세우고 귀환하였다. 816년 압둘 카림 이븐 압둘 와히드가 프랑크 침공군을 격퇴한 후에야 안달루스는 북방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코르도바의 음모를 진압하며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알 하캄은 코르도바의 서고트 코뮌의 지도자 라비[1]를 대장으로 한 개인 경호대 알 하라스를 창설하였다. 그럼에도 반란은 이어졌다. 809년 리스본 총독 투물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고, 818년에는 코르도바 과달키비르 남안의 알 리바드 지구에서 성직자들이 주도한 반란이 있었다. 후자의 결과로 300여명의 귀족들이 체포되어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이를 묵인한 죄로 주민들은 추방되었다. 이들은 안달루스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점거했다가 크레타를 점령하고 정착하게 된다. 동로마 의문의 1패 일부는 페즈에 정착하거나 레반트의 해적이 되었다. 안정적인 통치를 할 겨를도 없이 822년에 알 하캄은 사망하였다. 26년의 긴 통치에도 반란에 얼룩졌다는 점에서 고조부인 칼리파 히샴과 비교된다. 그동안 아스투리아스 왕국 히샴 1세 때의 타격을 극복하고 813년 산티아고 성지를 세우며 때를 기다렸다.


[1] 안달루스의 세금 징수관 테오둘프의 아들. 하지만 훗날 부정부패 혐의로 십자가 형에 처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