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라이터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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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라이터의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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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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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1993 | 1997 |
토니 그윈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 |
알 레이터 ( 뉴욕 메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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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실링 (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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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이스 테리 "알" 라이터 Alois Terry "Al" Lei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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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65년 10월 23일 ([age(1965-10-23)]세) |
국적 | 미국 |
출신지 | 뉴저지 주 톰스 리버 |
신체 | 188cm / 90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 입단 | 1984년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50번 ( NYY) |
소속팀 |
뉴욕 양키스 (1987~1989) 토론토 블루제이스 (1989~1995) 플로리다 말린스 (1996~1997) 뉴욕 메츠 (1998~2004) 플로리다 말린스 (2005) 뉴욕 양키스 (2005) |
가족 | 형 마크 라이터 , 아들 잭 라이터 , 조카 마크 라이터 주니어 |
기록 | Pitched a no-hitter (1996.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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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저리그의 투수 출신 선수. 선수생활을 은퇴한 이후 해설가와 분석가로 방송계에서 활동하고 있다.2. 경력
2.1. 뉴욕 양키스 시절
가족은 일리노이 주 출신인데 1963년 이후 뉴저지로 이사왔다. 다섯 형제가 모두 유년시절 야구 선수 생활을 한 야구가문에서 태어난 라이터는 고등학교 졸업해인 1984년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뉴욕 양키스에게 지명받는다.[1] 3년간의 마이너리그를 거쳐 1987년 9월 40인 확장 로스터를 통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콜업된 라이터는 9월 15일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데뷔전을 갖고 이 경기에서 감격적인 첫 승을 획득한다. 후일 선수 생활에서 은퇴하고 해설가로 활동하면서 라이터는 당시 양키스의 감독이었던 빌리 마틴과의 일화를 회상하기도 했는데, 팔의 근력을 키우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던 라이터를 보고 빌리 마틴은 "팔 근력을 키우고 싶으면 웨이트 말고 롱 토스를 해라."라고 충고해줬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시기 양키스에서 라이터는 87년부터 89년까지 총 3시즌 동안 106.2이닝에 7승 평균자책점 5.00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내는데 그쳤고, 한창 암흑기를 겪고 있던 양키스는 그를 89년 4월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시킨다[2].2.2. 토론토 블루제이스 시절
토론토로 트레이드 되기 직전에 라이터는 당시 양키스 감독 댈러스 그린[3]에 의해 162개의 투구를 던졌는데, 4월이라서 여전히 날씨는 춥고 습한 상태였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라이터는 토론토로 트레이드되자 마자 투수에게 치명적인 어깨 관절경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이후로도 팔꿈치 부상, 어깨 건초염, 또다른 어깨 관절경 수술을 거치면서 라이터는 유리몸이 되어버렸고,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총 네 시즌동안 도합해 0승 0패, 15.2이닝, 평균자책딈 5.17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거둔다.[4] 또한 이 시기 그는 또다른 치명적인 문제를 겪는데, 바로 상습적으로 그의 손가락에 잡히는 물집이 그것이었다. 다행히 도찰제 혹은 리니먼트제(Liniment)라고 불리는 약품으로 물집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했으며, 토론토 구단 측도 이런 갖가지 부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 라이터를 유망주로 여기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93년 라이터는 재기에 성공하여 선발과 불펜을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등판하여 9승 6패, 105이닝에 평균자책점 4.11이라는 괜찮은 성적을 기록한다. 특히나 플레이오프에서도 총 5경기에 등판하였고 특히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는 승리투수가 되기도 하면서[5] 두 번째 우승반지[6]를 챙긴다. 이듬해인 94년부터 선발로 다시 나서기 시작한 라이터는 이 해에는 6승 7패 111.2이닝 평균자책점 5.08로 살짝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선발 적응이 끝난 95년에는 11승 11패, 183.2이닝 평균자책점 3.64라는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다음해 FA를 통해 신생팀 플로리다 말린스로 이적한다. 토론토에서 7시즌간 거둔 성적은 415.1이닝 26승 24패, 평균자책점 4.20.2.3. 플로리다 말린스 시절
플로리다 말린스에서 잠재력이 대폭발하면서 그야말로 대기만성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5월 11일에는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더니 데뷔 10년만에 처음으로 올스타 선출되는 영광을 누린다. 1996년 최종 성적은 16승 12패 평균자책점 2.93, 215.1이닝. 특히나 삼진을 200개나 잡았다. 다음해인 1997년에는 살짝 주춤하여 11승 9패 4.34를 기록했지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월드 시리즈에서 꺾고 세 번째 우승 반지을 획득했다.[7] 하지만 이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폭등한 팀의 페이롤을 감당할 수 없어진 말린스는 역사에 남을 폭풍 세일을 선보였고 에이스 알 라이터도 결국 뉴욕 메츠로 팔리고 만다.2.4. 뉴욕 메츠 시절
그렇게 시작된 뉴욕 메츠에서의 커리어에서, 첫 해인 1998년 라이터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경신한다. 17승 6패 방어율 2.47을 거둔 것. 다만 서부지구의 어느 미친 불꽃을 뿌려대는 랜디 존슨 그리고 톰 글래빈때문에 올스타와 사이영 상 모두 날려버리고 만다. 1999년에는 13승 12패 4.23으로 주춤했지만 이 해 가장 중요한 경기였던 신시내티 레즈와의 단판 플레이오프 진출자 결정 경기[8]에서 9이닝 2피안타 완봉승[9]을 거두면서 메츠를 1988년 이후 11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일등공신이 된다. 다만 팀은 NLCS에서 같은 지구 라이벌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게 2승 4패로 탈락. 이후 짝수해인 2000년에 다시 귀신같이 부활[10]해서 16승 8패 3.20이라는 성적을 거두고 이를 발판으로 생애 두 번째로 올스타에 뽑힌다. 팀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만 당시 메이저리그를 제패하던[11] 악의 제국 뉴욕 양키스와의 서브웨이 시리즈에서 1승 4패로 패배. 라이터 본인은 1차전과 5차전에 각각 등판해 도합 15.2이닝 5실점을 허용하며 호투를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특히 5차전은 아직도 메츠 팬들에게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데 9회 투구수 140개를 넘긴 상황에서도 믿을 불펜이 없어 그를 올렸다가 결국 역전타를 맞은 뒤 불펜에서 눈물을 보였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은 관련 기사를 보자. '늦깎이 투수' 알 라이터의 아름다운 눈물 [12]알 라이터의 눈물을 보고 싶다면 2시간 41분 33초로 넘기자. |
한편 2000년 정규시즌 종료 이후 라이터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누렸다.[13]
이후 2001년에도 11승 11패 평균자책덤 3.31로 제몫을 한 라이터는 2002년에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상대로 승리투수가 되면서 30개 구단 전체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역대 첫 메이저리그 투수가 되는 쾌거도 누린다. 이후로 2004년까지 메츠에서 뛰면서 매 시즌 10승 이상의 승수에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면서 든든한 선발진의 한 축이 되었지만 이 시기 메츠가 모 본으로 대표되는 고비용 저효율의 대명사 팀이었던 지라 자신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메츠에서의 7시즌 동안 라이터는 95승을 기록했다.
2.5. 플로리다 말린스, 뉴욕 양키스로의 복귀
2004 시즌 종료 후 40이 되는 라이터[14]와 메츠는 더 이상 함께 할 마음이 없었고 그의 1년 1000만 불 짜리 계약 연장 옵션을 거부함에 따라 라이터는 다시금 FA로 풀린다. 그리고 라이터는 1년 8백만불 짜리 계약으로 다시 친정팀 플로리다 말린스로 복귀한다. 그리고 급격한 노쇠화가 시작되어, 전반기 동안 3승 7패 6점대 평균자책덤이라는 그답지 않은 성적을 보인다. 고액 연봉자[15]였던 라이터는 신나게 까이다가 결국 6월 이후 선발진에서 탈락해 불펜으로 강등된다. 7월 팀의 에이스 조시 베켓이 부상당하자 다시 선발직을 맡게 되지만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서 3이닝 6실점으로 처절하게 털린 뒤 지명할당 조치를 받는다. 이 라이터를 데려간 팀이 바로 선발진이 죄다 드러누운[16] 뉴욕 양키스. 양키스에서는 그래도 조금 괜찮은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선발진들이 하나 둘 부상에서 컴백함에 따라 다시 불펜진으로 강등되었다. 그의 은퇴경기가 되었던 2005년 ALDS 4차전에서 라이터는 애너하임 에인절스를 상대로 구원등판해 0.2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면서 승리를 챙겼다. 이후 2006 WBC에 참가하기 위해 양키스와 1년 계약을 맺은 라이터는 WBC 종료 이후 은퇴를 선언한다.[17] 프로에서 통산 19시즌 동안 뛰면서 라이터는 162승 132패 2391이닝 평균자책덤 3.80 1974 탈삼진을 기록했다.2.6. 은퇴 이후
은퇴 이후로는 폭스 스포츠에서 해설자 겸 분석자를 맡고 있는데 2009년, 2011년, 2013년 세 차례나 올해의 해설가 수상 후보에 오를 정도인 것을 보면 꽤나 시청자들의 평가가 좋은듯.
3. 여담
- 열혈 공화당 지지자여서 고향인 뉴저지 주에서 공화당으로 공직에 출마할 것을 꽤나 진지하게 고려해보기도 했다는 듯.
- 라이터라는 성에서 보이듯이 독일계 미국인이다. 정확히는 독일이 아니라 오스트리아라고 한다. 덧붙여 영국과 체코의 혈통도 섞여있다.
- MLB 30개 구단 모두를 상대로 승리를 기록해본 투수들 중 한 명이다.
- 부인인 로리 라이터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두었다.
- 조카인 마크 라이터 주니어는 현재 뉴욕 양키스에서 투수로 활동중이다.
- 아들 중 하나인 잭 라이터는 2019년 드래프트에서 20라운드에서 뉴욕 양키스의 지명을 받았지만 거부하고 밴더빌트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진학 후 첫 경기서 사우스 앨라배마 대학교와 대결에서 5이닝동안 12K 노히터를 기록했다. 이후 2021년 3월에는 9이닝 노히트 게임을 기록하면서 밴더빌트 대학교의 에이스로 군림하고 있으며 2021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이 유력한 상황인데, 아버지와는 정 반대로 우투우타 투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소속 학교인 밴더빌트 대학은 테네시 대학을 4-2로 제압하고 오마하에서 열리는 칼리지 월드시리즈로 진출했다. 그리고 실제로 1라운드에서 텍사스 레인저스의 지명을 받았다.
- 통산 2391이닝을 던지며 1163개의 볼넷을 내주는 등 볼넷 허용이 많은 투수인지라 최훈 작가는 MLB카툰 연재 당시 2004년 메츠의 시즌 정리를 그리며 알 라이터의 피칭을 도넛 피칭에 비유했다. 2004년 메츠의 시즌 정리
4. 관련 문서
[1]
여담으로 두 살 위 형이었던 마크 라이터도 이 때 같이 양키스에게 지명받는다. 알 라이터보다는 여러모로 부족해서 데뷔도 동생보다도 한참 늦게 할 정도였지만 형 마크 라이터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통산 65승을 거둔 꽤나 능력있는 선수.
[2]
그리고 양키스가 받았던 선수가 제시 바필드였다. 토론토의 간판 타자로 있던 선수였으나 양키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는 하락세를 탔다.
[3]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스타 선수들한테까지 욕설을 퍼부어 마찰이 잦았다.
[4]
연 평균이 아니라 도합이다.
[5]
3차전에서는 2루타를 치기도 했다.
[6]
1992년에도 블루제스가 우승했기에 우승반지는 챙겼지만 제 몫을 했다기엔 부족하다.
[7]
라이터 본인이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선발로 나와 6이닝 2실점으로 비교적 호투했다. 팀은 9회말 극적인 동점에 이어 연장전 끝내기를 통해 3-2 승리.
[8]
다른 지구 팀끼리 붙은 것을 보면 알겠지만 와일드카드 자리를 놓고 벌인 경기였다. 요새와는 다르게 와일드카드가 한 자리 뿐이었다.
[9]
심지어 신시내티의 홈경기였다.
[10]
물론 1999년의 성적이 엄청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짝수해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다.
[11]
월드시리즈를 3연패하던 시기였다.
[12]
이 시리즈에서 상술한 아르만도 베니테즈의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의 불쇼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뉴욕을 배경 유명 시트콤
프렌즈에서도 등장한다. 7시즌에서 메츠팬 여성과 데이트를 하는 양키스팬인 주인공
조이 트리비아니가 '메츠 그 제대로 된 마무리 투수도 없는 팀?'이라고 여성을 놀렸고 그 여성이 '베니테즈 있어!' 이렇게 항변했는데 조이는 '걔가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던지는거 보고서도 그런 말이 가능하니?'라고 말해 메츠팬들의 속을 더 쓰리게 한다.
[13]
그런데 이게 월드시리즈 2차전 시작 직전에 발표되어서 홈 팀이었던 양키스 팬들이 엄청난 야유를 했다.
[14]
표면적인 성적은 준수했지만 경기당 이닝 수 측면에서 이전 6이닝 이상은 넘기던 이전과 달리 2004년 시즌에는 이닝 소화율이 저하되는 등 에이징커브 조짐은 이미 있었다.
[15]
물론 8백만 불이 메이저 전체로 보면 결코 고연봉이 아니지만 팀사정이 좋지 못했다.
[16]
2005년 당시
조 토레가 구상한 선발진 5명 중 네 명이 부상자명단에 올랐던 상황이었다.
[17]
애초에 양키스와 계약을 맺은게 WBC에 참가할 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본인이 계약을 맺을 당시부터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