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안석중(安奭中) |
이명 | 안석(安錫), 안석중(安奭仲) |
생몰 | 1868년 10월 24일 ~ 1950년 6월 20일 |
출생지 |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 레드랜드 |
매장지 | 로즈데일 공동묘지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안석중은 1868년 10월 24일 서울 중구 광희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미국으로 이주했고, 1905년 4월 공립협회 레드랜드 경찰소 경찰원, 12월 레드랜드 지방회 회장을 역임했고, 1906년부터 1908년까지 레드랜드지방회 회장, 부회장, 대의원, 서기 등을 맡았다. 1908년 3월 스티븐스 저격사건 현장 사진을 언론에 배포하여 장인환, 전명운의 의거를 널리 알렸고, 그해 11월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의 합동 발기인으로 참여했다.1909년 국민회 레드랜드지방회 학무, 대의원, 총무로 활동했으며, 1910년 레드랜드 대표원으로서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창건보관가옥취지서(倡建報館家屋趣旨書)>에 참여했다. 또한 1910년 북미지방총회 순행위원, 중앙총회 법무원, 1911년 북미지방총회 대의원과 회장으로 활동했다. 1918년 산타바바라에서 열린 8.29 국치기념식에서 연설했고, 1921년 북미지방총회 특별외교비 다뉴바 수전위원(收錢委員)과 시사연구회 간사, 1931년 한인공동위원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32년 삼일국어학교 위원장, 133년 삼일국어학교 권유원 겸 교육위원, 1938년 북미지방총회 감찰원 등을 역임했다.
193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후원회를 조직했고, 1939년 10월 조선의용대 후원회 집행위원장, 1940년 5월 조선의용대후원회 연합회 위원장,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로스엔젤레스지방부 서기를 역임했고, 1942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등지에서 활동했다. 1943년 8월엔 기관지 <독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1906년부터 1941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8.15 해방 후에도 미국에 그대로 머물렀으며, 1950년 6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안석중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