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2:53:53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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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빌라스보아스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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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상강 역대 감독
스벤예란 에릭손
(2014~2016)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2016~2017)
비토르 페레이라
(2018~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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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포르투
Futebol Clube do Porto
<colbgcolor=#ffffff><colcolor=#00528b,#191919> 이름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André Villas-Boas
본명 루이스 안드레 드피나 카브랄 이 빌라스보아스
Luís André de Pina Cabral e Villas-Boas
[1]
출생 1977년 10월 17일 ([age(1977-10-17)]세)
포르투갈 포르투현 포르투시
국적
[[포르투갈|]][[틀:국기|]][[틀:국기|]]
신체 182cm[2]
직업 축구 감독[3]
축구 경영인
소속 <colbgcolor=#ffffff><colcolor=#00528b,#191919> 감독 FC 포르투 유스 (1997~2000 / 코치)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대표팀 (2000)
인테르나치오날레 (2008~2009 / 코치)
아카데미카 드 코임브라 (2009~2010)
FC 포르투 (2010~2011)
첼시 FC (2011~2012)
토트넘 홋스퍼 FC (2012~2013)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2014~2016)
상하이 상강 (2016~2017)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2019~2021)
기타 FC 포르투 (2002~2004 / 스카우트)
첼시 FC (2004~2007 / 스카우트)
FC 포르투 (2024~ / 회장)

1. 개요2. 이름3. 축구인 생활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여담
5.1. 일반5.2. 다카르 랠리 참가

[clearfix]

1. 개요

포르투갈의 전 축구 감독. 2024년 4월 27일 FC 포르투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로 선수 경력이 없는, 유명 감독 중에서는 매우 특이한 커리어를 가진 감독이다.[4][5] 아카데미카 드 코임브라에서 감독으로 입문하고, FC 포르투에서 미니 트레블을 경험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 프리미어 리그 첼시 FC 토트넘 홋스퍼 FC에서의 실패를 겪은 후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부활하며 상하이 상강까지 이어졌고 2017년 시즌에서 리그 2위, FA컵 준우승, 아챔 4강까지 갔다. 처음 계약시 재계약 조건인 3대컵의 하나도 차지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성적에 만족했는지 상하이 상강 구단측은 재계약을 제의했으나 본인이 거절하여 야인생활을 하다가 올랭피크 마르세유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유럽으로 복귀했다.

2. 이름

이름이 워낙 길어서, 흔히 AVB라는 약칭으로 불린다. 중국 등록명은 "Villas"를 뺀 '보아쓰(博阿斯)'이다. 국내에서는 (후술하겠지만) Villas를 '비야스'로 잘못 읽은 것에서 기인한 '안비보'라는 약칭으로도 불린다.

그의 전체 이름인 '루이스 안드레 드피나 카브랄 이 빌라스보아스(Luís André de Pina Cabral e Villas-Boas)'에서, '루이스 안드레(Luís André)'가 이름이고, '드피나 카브랄(de Pina Cabral)'이 그의 첫째(모계) 성씨이며, '빌라스보아스(Villas-Boas)'가 둘째(부계) 성씨이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루이스 필리프 마누엘 엔히크 두발르 페이쇼투 드소자 이 빌라스보아스(Luís Filipe Manuel Henrique do Vale Peixoto de Sousa e Villas-Boas)'이고, 어머니 이름은 '테레자 마리아 드피나 카브랄 이 실바(Teresa Maria de Pina Cabral e Silva)'이다.

이름이나 성에 줄표(-)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이름이고 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줄표를 적지 않고, 두 단위를 붙여 쓰는 것이 현행 외래어 표기법상 맞는 표기다. 루빈 로프터스치크, 캘럼 허드슨오도이 등이 그 예시.

한때 '비야스보아스'나 '비야보아스'라고 표기가 됐었으나 이는 포르투갈어 철자법이 스페인어와 같다고 착각한 결과이다. 포르투갈어는 스페인어와 달리 'll'이 '이(/ʝ/)' 발음으로 나지도 않고, 프랑스어처럼 끝 자음이 묵음 처리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비야스보아스나 비야보아스는 아예 틀린 표기이다. 주제 무리뉴의 이름 표기가 호세가 아니고 주제인 것과 마찬가지다.

3. 축구인 생활

3.1. 축구 입문

포르투의 귀족 출신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안드레 빌라스보아스는 어려서부터 축구와 FC 포르투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만 16세의 나이로 FC 포르투의 감독이던 명장 바비 롭슨의 지도[6] 아래 불과 만 17세의 나이에 스코틀랜드에서 UEFA C급 지도자 자격증을 따내고 FC 포르투의 유스팀의 지휘를 맡았다. 만 18세에 UEFA B급, 만 19세에 A급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하고 감독으로서의 능력계발에 매진하던 그는 만 23세가 되던 2000년에 버진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의 기술위원장 겸 감독을 맡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북중미 예선을 지휘하였다. 당시 버뮤다를 만나 1차전 1-5, 2차전 0-9 합계 1-14라는 압도적인 대패를 당하지만 이 때의 쓰라린 경험은 훗날 그의 능력의 훌륭한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3.2. 무리뉴 사단의 스태프

2002년, 주제 무리뉴 FC 포르투감독직에 오르자 구단에 '전력분석팀'을 조직하고 그가 코치시절부터 지켜봐왔던 빌라스보아스를 불러들여 이 팀의 지휘를 맡겼다. 이 전력분석팀은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어 상대팀의 선수, 전술 등을 낱낱이 분석한 보고서가 무리뉴 감독과 선수들에게 전달되었고 이것은 무리뉴 감독이 2년만에 리그 우승컵, 포르투갈 컵, UEFA컵(현 UEFA 유로파 리그의 전신), UEFA 챔피언스리그우승컵을 쓸어담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무리뉴 감독이 포르투를 떠나 첼시, 인터 밀란으로 팀을 옮길때도 빌라스보아스는 전력 분석관 혹은 코치로서 함께 동행하였고 무리뉴 감독의 아이콘인 4-3-3 전술을 고안해내는데 큰 역할을 하는 등 음지에서 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왔다. 다만 빌라스보아스가 포르투에서 구사한 4-3-3은 무리뉴식이 아니라 매우 공격적 전술인 것은 나름 주목할 부분.[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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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 시절의 빌라스보아스와 무리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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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시절의 빌라스보아스와 무리뉴

3.3. 아카데미카 드 코임브라

2009년, 인터 밀란의 무리뉴 감독 밑에서 코치직으로 있던 빌라스보아스는 독립을 결심하고 포르투갈 1부리그의 아카데미카 드 코임브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의 나이 만 31세. 빌라스보아스는 당시 리그에서 최하위권에 쳐져있던 코임브라에 전방위 개혁을 단행하여 팀을 중위권으로 끌어올리고 포르투갈 컵에서도 예상을 깨고 4강까지 진출하였다.[9]

3.4. FC 포르투

이러한 빌라스보아스의 모습을 관심있게 지켜보던 FC 포르투는 리그 3위에 그친 팀의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빌라스보아스에게 감독직을 맡긴다. 자신의 축구커리어가 시작되었던 애정어린 팀을 이끌고 2010-2011 시즌을 시작한 빌라스보아스는 이때까지 갈고 닦은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헐크, 팔카오, 주앙 무티뉴 등을 앞세워 포르투갈 리그 우승컵[10], 포르투갈 컵 우승컵,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컵을 싹쓸이 하여 미니 트레블을 달성하며[11]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특히 UEFA 유로파 리그 4강 비야레알과의 1차전에서 1-0으로 뒤지며 전반전을 끝냈다가 후반에만 5골을 몰아쳐 승리한 경기는 빌라스보아스의 공격 축구의 진가를 세계에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2차전에서 3-2로 패했지만, 합계 4-7로 결승에 진출하였다.

빌라스보아스는 포르투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자기 사단을 구축하기 시작했으며, 주제 마리오 로차(피지컬), 루이스 마르틴스, 다니엘 소사로 스탭을 꾸려 이후 첼시, 토트넘, 제니트, 상하이 상강 등에도 대동하였다.

3.5. 첼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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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화려했던 2010-11 시즌이 끝난 후, 카를로 안첼로티가 해임되어 떠나 공석이던 '독이 든 성배' 첼시 FC의 감독직에 전 유럽의 관심을 받으며 취임하였다. 다른 유력한 후보이던 거스 히딩크 당시 터키 국가대표팀 감독은 먼저 제의를 받았으나 터키와의 계약을 그대로 이행하기로 하고 정중히 거절했다고. 첼시 FC의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 FC 포르투에 1,500만 유로(한화 약 215억원)나 되는 위약금을 지불하면서 까지 모시고 왔다는 이야기로 보아 로만이 빌라스보아스에게 거는 기대는 상당해보인다. 첼시팬들도 빌라스보아스가 드라마 같은 성공스토리를 이어가 첼시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첼시에서 리그 초반 성적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현지 언론들에게선 초반부터 경질설까지 나왔다. 12라운드까지 7승 1무 4패로 리그 5위로 내려앉았는데, 심판 판정에 문제가 있던 퀸스파크 레인저스 원정경기 패배를 제외하고도 나머지 패배한 3경기 리그 우승을 어둡게 만드는 경기들이었다. 아스날 FC에게 안방에서 무려 5점을 헌납하며 5:3으로 패했고, 리버풀 FC에게도 안방에서 2:1로 패했다. 맨유 원정에서 3:1로 패한 것을 비롯하여 4강급 상대에게 아직 경기가 없는 맨시티를 제외하고 죄다 1패씩 당했다. 특히 저 당시 맨유는 아직 퍼거슨이 건재했지만 아스날과 리버풀은 경기력의 기복이 심한 팀이었다.

2011년 11월 24일, 챔피언스리그 32강전 예선 바이어 레버쿠젠 원정에서 2:1로 패하면서 마지막 6차전 예선을 단두대 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발렌시아 CF와의 안방경기에서 반드시 이기거나 골을 넣고 비기면 조 3위로 탈락하여 유로파리그에나 나가게 된다. 발렌시아와 똑같은 승점 8점인 상황에 골득실도 밀려있으나 겨우 발렌시아 원정에서 1:1로 비겼기에 원정 득점으로 앞서 조 2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만약 마지막 조리그에서 1:1로 비기면 골득실로 뒤쳐진 첼시는 탈락한다.

11월 26일, 약체 울버햄튼을 안방에서 3:0으로 이기며 간만에 승리를 거뒀다. 일단 리그 5위를 지켰으나, 6, 7위인 아스날과 리버풀과 승점이 2점차라서 7위까지 추락할 수도 있다. 11월 29일에는 리버풀과 풋볼 리그 컵 8강전 안방경기에서도 2:0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리그컵이야 리그보단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해도 리버풀 2연전을 연패한 셈이었다.

그리고 12월 3일에 벌어진 뉴캐슬 원정에서 3:0 대승을 거뒀다. 이후 열렸던 11-12 챔피언스리그 32강 예선 6차전에서는 발렌시아의 상승세 및 첼시의 들쑥날쑥한 경기력으로 인해 첼시가 힘들 것이라 여겨졌지만 2골 1도움을 터뜨린 드록바의 맹활약 덕에 3:0으로 가뿐하게 완파하고 조 1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12월 13일에 있었던 맨시티와의 홈경기에서는 2:1로 역전승을 거두면서 맨시티에게 첫 리그 패배의 아픔을 안겨줬다. 대체로 보아스의 터닝 포인트는 로메우의 기용과 맞물렸다는게 중평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절망에 빠졌다. 4경기 연속 무승, 3무 1패를 기록했다. 3위 토트넘 홋스퍼 FC 원정 경기 무승부를 제외하고 풀럼, 위건과의 경기에서 무승부에 13위이던 아스톤 빌라에겐 안방에서 3:1로 지면서 리그 4강까지 불안할 지경이라 벌써부터 보아스가 경질당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다.

2012년 2월, 시즌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에버튼에게 2:0으로 패배한 뒤 무능한 감독에 화난 선수단이 들고일어나는 등 로만제국 첼시의 역대 최악의 위상과 함께 그야말로 막장가도를 달렸다.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인내심이 어디까지 지속될 지 모두가 궁금해 할 지경. 27라운드에서 10위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에게 지면서 리그 5위로 확 떨어졌고 이제 그도 이 경기 전부터 경질되어도 할 말 없다며 포기한 상태의 인터뷰까지 했다.

허나, 나이와 함께 실력은 떨어지고 자아만 남은 스타 플레이어들과 젊은 감독의 부조화라는 의견도 많다. 그리고 예전같았으면 벌써 잘리고도 남았을 성적으로도 살아남아 있는데다 구단주가 별 불평도 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로만 아브라모비치도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보아스를 밀어주기로 했다는 해석도 있다. 만약 여름까지 잘리지 않는다면 첼시 스쿼드에는 피바람이 몰아칠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많았다.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빌라스보아스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는 듯한 기사가 여러번 나오며 여름 이적시장때 피의 숙청이 시작되나 싶었으나…

로만 "감독에 대한 반항은 나에 대한 도전"
로만 첼시 구단주 "애슐리 콜 나가!"

그러나 결국 2012년 3월 4일, 웨스트 브롬위치 전 패배 이후 집에도 가지 않고 훈련장에서 먹고 자며 전술 구상에 전념하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는 결국 경질 통지서를 받아들었다.

본인도 예전 인터뷰에서 "지금 상황에선 나도 경질될 수 있다."라고 말할정도로 어느 정도 경질의 위험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겠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자 빌라스보아스는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결국 빌라스보아스마저도 경질당하며 역대 첼시 감독의 수난시대를 이어나가자 전 첼시 감독이기도 했던 루이스 스콜라리 감독은 빌라스보아스의 리빌딩 작업을 백업해주지 못한 첼시 구단을 비판했다.

공석이 된 감독직에는 일단 임시로 로베르토 디 마테오 1군 코치가 감독대행이 되어 잔여경기를 지휘하기로 했다.

첼시는 다음 감독으로 펩 과르디올라 전 바르셀로나 감독, 주제 무리뉴 전 레알 마드리드 감독, 라파엘 베니테스 전 인터밀란 감독 등 유력 감독들과 링크가 걸렸다. 그러나 디 마테오 임시 감독이 FA컵 우승과 더불어 마침내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에게 안김으로서 2년 재계약에 성공하여 정식 감독이 되었다.

첼시 시절 선수단과의 불화, 전술을 팀에 맞추는게 아니라 팀을 전술에 맞추는 고집 등이 누구를 닮았다고 해서 보광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경질된 후 첼시가 나폴리를 4-1로 꺾고 챔스 8강에 진출하자 보아스를 비판하는 쪽에선 역시 보아스가 문제였다고 하는 중이다.

그리고 첼시가 챔스 4강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에 1:0으로 이기고, 2차전에서 2:2로 비겨 결승전에 진출한 이젠 그 누구도 빌라스보아스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의 영입 자체가 첼시의 이번 시즌을 말아먹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데에는 더 이상 이견이 없는 수준. 오히려 그를 더 빨리 경질시켰으면 첼시가 리그에서도 챔스 진출 순위권에 들었으리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리그 승률은 디마테오보다 더 낮으며, 디마테오가 극단적인 수비전술로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함께 FA컵에서도 우승하며 컵대회 더블을 이루었으나 반면 리그에서의 모습은 형편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건 보아스가 디마테오 부임 이전 싸질러 놓은 똥이 워낙 컸다는 점과, 3개 대회[13]를 병행해야 했던 첼시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14]

영국 축구 평론가들과 기자들은 그가 너무 '오타쿠적'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야전에서 선수들을 지휘하고 함께 호흡하며 전술을 짜는 스타일이 아니라,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 펜과 데이터 가지고만 전술을 짰다는 것. 이러니 선수들과 소통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고, 선수들에게 맞는 전술을 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술에 선수들을 끼워맞추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니 경기력이 안좋은 건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어질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에 첼시에서 코치와 스카우트로 일했었다는 사실이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 되고 말았다. 선수들 입장에서 전에 스카우트로 일하던, 새파랗게 젊은 코치가 갑자기 와서는 감독이라고 하니 권위가 설 수가 없었던 것. 특히 첼시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부임한 이후로는 선수단의 입김이 굉장히 강한 팀이라 더 큰 문제가 되었다. 빌라스보아스에게 반항을 주도한건 프랭크 램파드와 존 테리였으며 이들은 라커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임 감독들의 경질에도 한 몫을 했었다. 이후 빌라스보아스가 첼시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던 이유를 디디에 드록바가 본인의 자서전을 통해서 직접 언급했었는데, 실제로 디디에 드록바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빌라스보아스가 자기의 방식을 밀어붙이기만 하면 첼시에서도 포르투 시절과 마찬가지로 쉽게 승리를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점이 첼시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라고 견해를 밝혔고, 첼시와 같은 클럽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서로 소통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통해 빌라스보아스의 소통 부재를 대차게 깠다. 드록바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빌라스보아스 부임 후 선수들이 내부 정보를 입수해서 드록바 본인과 프랭크 램파드, 애슐리 콜 등을 일방적으로 내칠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는 사실도 언급했는데, 여기에 빌라스보아스 본인이 주축 베테랑 선수들과는 대화를 제대로 하지도 않은 채로 지나친 로테이션을 고집하면서 선수들이 단체로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고, 특히 드록바는 꾸준히 경기에 긴 시간을 출전하면서 정기적으로 리듬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음에도 빌라스보아스가 자신을 계속 로테이션으로만 기용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조차 해 주지도 않았으며 앞서 언급되어있는 것처럼 본인의 선수단 기용이나 전술 플랜에 대해서도 선수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러한 소통 부재와 일방적인 전력 외 통보 등으로 인해 불만이 쌓이고 쌓였던 베테랑급 선수들은 빌라스보아스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로 인해 이 시즌은 태업을 한 것이 맞다는 것을 자서전을 통해 직접 인정했다.[15][16]

이후 2024년 4월, 존 테리는 이 시기를 회고하며 부임 직후 프리시즌 홍콩 투어 당시 있었던 일로, 조쉬 매키크런 등의 유스들을 별 이유도 없이 일등석에 태우고 존 테리와 같은 베테랑 선수들에게 별다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이코노미석에 탑승하라고 한 적이 있었고, 그에 반발한 선수들이 강하게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고 이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즉 부임 후 첫 단추부터 팀내 코어급 선수들과 일련의 트러블이 생기며 첫단추부터 단단히 잘못 꿰었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 이 당시 존 테리 본인은 이에 반발해서, 무단으로 프리시즌 투어에 불참까지 고려했을 정도였다고.

경질 후 그의 주가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인터 밀란 감독직에 링크가 걸리며 명불허전 제2의 무리뉴답게 무리뉴가 걸어간 포르투 - 첼시 - 인터밀란의 길을 그대로 따라갈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한창 이야기가 나오던 도중 인터밀란 보드진이 공식적으로 빌라스보아스는 인터밀란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여 흐지부지 되었다.

리버풀 FC 케니 달글리시 감독이 경질되면서 공석이 된 감독직에도 링크가 걸렸으나 그 자리는 브렌던 로저스 당시 스완지 시티 감독에게 돌아갔다. 빌라스보아스가 첼시에서의 아픈 기억 때문인지 구단 수뇌부에 전권 위임과 계약 기간 보장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6. 토트넘 홋스퍼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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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3일, 토트넘 홋스퍼 FC가 빌라스보아스를 감독으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계약 기간은 3년. 팀이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따내는데 실패하자 구단이 개혁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엠마누엘 아데바요르를 벤치에 앉혀놓고 저메인 데포를 원 톱으로 세우고 공격형 미드필더들과 꼬꼬마 공격진을 두터운 중앙 미드필더들로 지원해주는 역습 위주 전술을 들고 나왔으나 2012-13 시즌 초반 3경기에서 2무 1패를 거두면서 말이 많았다. 그러나 이후 레딩과 퀸즈 파크를 상대로 2연승을 거두며 8위까지 순위를 올렸다. 새 감독의 적응기간과 더불어 이적 시장 기간 동안 원하는 선수를 못 데려온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 가능한 수준이지만 팬들은 전술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상황이다.

그러다 9월 29일에 벌어질 맨유와의 원정 경기에서 3:2로 승리를 거두며 수많은 팬들을 자기 편으로 돌려놓았다. 전반에 2:0으로 순식간에 앞서간 후, 후반엔 적절히 잠구면서 올드 트래포드 원정에서 89년 이후로 처음이며,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이후로는 처음으로 승리하였다. 전술적인 문제로 새 감독을 까던 사람들도 이 결과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세를 몰아 아스톤 빌라전서도 승리를 거두며 리그 4연승과 함께 어느새 리그 5위까지 팀을 올려놓았다. 앞으로 얼마나 선수들을 잘 운용하는지에 따라서(특히 로테이션) 전임 감독 해리 레드냅과의 견줌이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시각 2012년 10월 20일, 프리미어리그 8라운드에서 첼시와 맞붙었다. 첼시 시절 그의 수석코치였던 디 마테오와의 지략대결에서 누가 이길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후반 9분까지 2:1로 앞서고 있다가 후안 마타와 스터릿지에게 내리 3골을 내줘 4:2로 패배했다. 리그 13차전까지 순위는 7위. 하지만 4위 첼시와 승점 차는 5점이다.

확실히 미드필더진에 여유가 많은[17] 토트넘 핫스퍼 감독을 맡은 이후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스트라이커들이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흠이라면 흠. 맨유 원정 경기에서 3:2로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특유의 4-3-3이 아니라 4-4-2를 통해 자신의 축구를 구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첼시에서의 실패가 좋은 경험으로 남은 듯.[18] 1월 21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홈경기에서 1:1로 비기며 맨유에게 시즌 1승1무를 거두는 위업(?)을 달성했다.

최근에는 가레스 베일에게 프리롤을 부여한 후 쏠쏠한 재미를 맛보고 있다. 베일의 포텐이 대폭발하여 중요한 순간마다 골을 터트려주어 토트넘의 최근 무패행진[19]을 이끌고 있다. 첼시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결국 위건 등 약팀에 발목을 잡혀 리그 5위에 그치며 마지막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4위 아스널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모드리치가 떠난데다 아데바요르가 완전 영입 이후 귀신같이 형편없는 폼을 보였고, 보아스의 첫 시즌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아쉽긴 하지만 그럭저럭 평균은 해냈다는 것이 중론이다. 보아스 감독과 토트넘은 레알 마드리드가 노리는 베일을 지키고, 시즌 내내 고질적인 문제였던 스트라이커 진을 보강하면 다음 시즌에는 충분히 4위안에 들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해하고 있다.

첼시에서와는 달리 토트넘에서의 보아스 감독의 입지는 탄탄해보였다. 또한, 첼시에서의 경질 후 심해로 가라앉았던 그의 주가가 다시 상승하며 많은 팀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세리에A의 나폴리는 실제로 보아스를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시도했으나 바이아웃이 무려 1,170만 유로(약 171억 원)이라 포기하고 대신 베니테즈 감독을 선임했다. 또한, 무리뉴 감독이 떠나 감독직이 공석이 된 레알 마드리드와 티토 빌라노바 감독의 건강 문제와 전술 논란이 가라앉지 않은 바르셀로나도 보아스 감독을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보아스 감독은 2013년,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가레스 베일을 팔고 새로 영입한 선수( 로베르토 솔다도, 파울리뉴, 에릭 라멜라, 크리스티안 에릭센)들이 12라운드가 지나도록 팀에 융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12경기 9득점이라는 빈곤한 공격력이 문제라는 평이었다.[20] 일단 30m이라는 거액을 주고 영입한 솔다도가 팀에 적응을 하지 못하면서 스코어러가 실종이 되어 버린 게 큰 이유 중 하나이다. 2012년에는 가레스 베일이 위기 상황에서 꾸역꾸역 골을 집어 넣어서 성적이 나왔지만, 2013년에는 골을 넣을 선수가 없어서 경기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국 12라운드에서 맨체스터 시티 FC에게 6-0이라는 스코어로 떡실신. 그래도 짠물 수비로 11라운드까지 6실점으로 수비 조직력은 잘 지키고 있었지만,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는 11경기 동안 했던 실점을 한 경기만에 다 해 버렸다. 현지에서는 경질 여론이 팽배해졌다. 그리고 홈에서 열린 리버풀과의 경기에서도 5-0 으로 참패하면서 결국 경기 다음날 토트넘 감독직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첼시에서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는듯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 결국 전술의 유연성이 부족한 면을 고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보아스는 수비 라인을 끌어올리는 공격적인 전술을 사용하는데, 시도때도 없이 수비라인을 끌어올리다 보니 수비 뒷공간이 털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대패한 맨시티전에서 이 문제가 여실히 드러났는데, 맨시티 골대 앞에서 시작된 롱패스가 단번에 토트넘 골대 앞까지 날아가서 실점으로 연결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비라인을 끌어올리는 공격적인 전술은 수비수들의 스피드와 활동량이 아주 중요한데, 토트넘 선수들로는 제대로 구사하기가 힘든 전술이었다.[21] 결국 다시 자신의 전술에 억지로 선수들을 끼워맞춘 셈. 베일이 있던 시절에는 꾸역꾸역 승리로 승점을 챙겼으나, 베일이 떠나고 새로 영입된 선수들의 조직력이 완성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토트넘의 경기력은 바닥을 치게 됐다.

감독직 막판의 결과 때문에 빌라스보아스에 대한 토트넘 팬들의 인식은 좋지 않은데, 2018년엔 해리 케인에 대하여 '우승과 명성을 위해선 토트넘을 나가야 한다'고 발언해 팬들의 인식이 더욱 나빠졌다. # 이에 토트넘의 전 수비수 그레이엄 로버츠가 '실패한 감독 주제에 입 다물라. 우리 선수는 우리가 알아서 한다'며 일침을 놓았다. #

3.7.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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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 시절의 제자였던 헐크와 제니트에서 다시 만난 빌라스보아스. 이어 상하이 상강에서도 헐크와 만나게 된다.

2014년 3월 20일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감독에 취임하였다. 계약기간은 2년간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 취임한 후 헐크가 되살아나며 7승 1무 1패로 리그 2위를 기록하며 챔피언스리그 2차예선 티켓을 취득하며 2013/14 시즌을 마무리 했다.

2014-15 시즌 20승 7무 3패로 CSKA 모스크바를 승점 7점차로 따돌리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챔피언스리그는 2차예선에서 키프로스의 AEL 리마솔을 3차예선에는 벨기에의 스탕다르 리에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본선진출에 성공했다.
본선에서는 바이어 레버쿠젠, AS 모나코, SL 벤피카와 같은 조에 배정되었고 2승 1무 3패로 조 3위를 기록 유로파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다. 유로파리그 32강에서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 16강에서는 이탈리아의.토리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8강전에 진출했지만 세비야에게 원정에서 1-2 패배, 홈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합계 3-4로 8강에서 탈락했다. 러시안 컵에서는 16강에서 탈락했다.

2015-16 시즌 초 전 시즌 FA컵 우승 팀 FC 로코모티프 모스크바와의 슈퍼컵에서 승부차기 승을 거둬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정규리그 시즌 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장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예정대로 2015/16 시즌을 끝으로 제니트를 떠나겠다고 밝혔다. 제니트는 2015/16시즌에서 17승 8무 5패 승점 59점을 기록하며 리그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2위까지 주어지는 챔피언스리그 티켓은 놓쳤고 2016/17시즌은 유로파리그에서 시작해야 한다. 반면 15/16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별리그에서 5승 1패의 성적으로 조1위 16강 진출을 확정지었으나 16강에서 포르투갈의 벤피카를 만나 탈락했다. 러시안 컵에선 결승전에 진출하여 CSKA 모스크바를 4:1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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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트시절 작전 노트

2015/16시즌을 마무리하고 예정대로 팀을 떠나 러시아에서의 감독 생활을 마감했다. 러시아에서 첫해 정규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명예 회복을 했고 다시 빅리그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22]

3.8. 상하이 상강

2016년 11월 4일에 중국 슈퍼 리그 소속 상하이 상강과 감독 계약을 체결했다. 기사 계약 기간은 1년이지만 이 1년간 우승컵을 하나라도 차지하면[23] 바로 재계약을 할수있는 조건이다. 중국 슈퍼 리그 감독중에서 최고의 연봉인 1200만유로(140억 원)을 받고 있다. 자신의 사단을 모두 중국에 데려왔으며, 수석코치는 포르투 시절부터 따라다닌 다니엘 소사(Daniel Sousa). 중국인 수석코치는 2000년대 초반 분데스 2부의 알레마니아 아헨에서 2년간 뛰었던 셰후이(谢晖).

2016년 시즌에서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 아래서 상하이 상강은 3위를 했는데, 광저우 헝다 못지 않게 돈지랄을 시전하는 상하이 상강 구단주는 이에 만족 못하고, 빌라스보아스를 데려온 것. 2017년 시즌에서는 2위를 달리고 있다. 5월까지만 해도 광저우 헝다를 위협했으나, 쓸데없이 SNS질을 하다가 중국 축협으로부터 출장금지 징계를 먹은데다가 (아래 참조) 여름이 지나면서 광저우의 뒷심이 발휘되어 선두권에서 멀리 달아났고, 콩라인 신세가 되었다.

상하이 상강에서는 엘케손이나 헐크를 최전방에 두고, 그 뒤에 3명의 공격수(헐크, 우레이, 오스카, 웨이스하오)를 배치하는 전술을 주로 쓰고 있다. 아챔에서는 전술을 바꾸어 엘케손, 헐크, 우레이 세명을 최전방에 둔다. "크랙 마스터"라는 별명 답게 크랙인 헐크가 특히 아챔에서 가장 필요할 때, 원더골을 많이 터트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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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아챔 일차전에서 FC 서울 감독 황선홍의 배를 만져보는 빌라스보아스

2017년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같은조 FC 서울을 두번 연속(1-0, 4-2)으로 깨뜨리고 우라와 레즈와 승점동률을 이뤘으나 골득실로 조 2위로 올라갔다. 16강전에서는 최용수가 지휘하던 장쑤 쑤닝을 격침시켰다. 이 탈락으로 리그부진에도 자리를 유지하던 최용수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8강전에서 광저우를 꺾고(4-0, 1-5로 동률이었으나 승부차기에서 승리) 4강에 올라서 우라와 레즈와 맞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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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리그 광저우 헝다전을 앞두고 토트넘 시절 제자였던 파울리뉴와 이야기하는 보아스. EPL 시절에는 그라운드에 정장차림으로 자주 나왔는데, 중국에 간 다음에는 중국스타일에 적응하는지 수염도 안깎고 머리도 부스스한 채 거의 운동복 차림으로 나온다. 보아스 오른쪽은 파울리뉴와 2014년 브라질 국대 동문인 오스카르.[24]

2017년 중국축구협회 FA컵에서는 파비오 칸나바로가 이끄는 톈진 취안젠을 격침시키고(3-0, 0-4) 준결승으로 올라갔고, 광저우 헝다를 꺾고 결승까지 올라갔다.

2017년 10월 3일, 중국 축협에서는 9월 22일 베이징 궈안전(1-0으로 상하이 승리)에서 빌라스가 심판을 모욕했다[25]고 8게임 출장 정지를 먹였다. 남아 있는 게임이 4게임이기 때문에 사실상 2017년 시즌은 끝난 듯.

나름 부임 첫해 트레블을 달성할 가능성이 보였으나, 정규리그는 위에서 쓸데없는 짓을 하다가 8게임 출장정지를 먹어서 기회를 날려버렸고, 아챔 준결승에서도 예상밖으로 우라와 레즈에게 져서 둘다 트로피는 놓쳤다. 마지막으로 상하이 선화와의 결승이 남아있는 중국 FA에서 우승해야 재계약을 할 수 있을 듯. 그런데 상하이 선화의 팀 리더십이 현재 무너졌기 때문에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2017년 11월 19일 정식 감독이 공석인 상하이 선화와의 FA컵 결승전 원정 첫경기에서 1-0으로 패배하였다. 다음 경기에서도 이기지 못할시 재계약에 난항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FA컵에서 지속적으로 대패 후 대승을 하여 1골 차이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적이 많아 FA컵 승리가 가능할 것으로 보였지만, 11월 26일의 2차전 홈경기에서 3-2로 이기고도 원정골 다득점 룰로 인해 결국 준우승에 그쳤다.

중국리그 첫해에서는 사실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적만 보면 괜찮다. 정규 2위, 아챔 4강, FA컵 준우승 트레블 권까지 갔으나 모두 콩라인처럼 한발자국씩 못미쳐 고배를 마신것. 하지만, 상하이 상강은 빌라스보아스가 오기 전인 2016년 시즌에서 정규리그 3위를 한 원래 강팀인데다가, 유럽에서 비싼 돈 주고 헐크와 오스카를 사왔고, 빌라스보아스는 1200만 유로의 거금(세계 3위)을 받는 감독이니만큼 구단주의 기대가 컸는데, 트위터질이나 언플(이건 스승(?)인 무리뉴에게 배운듯), 심판에게 모욕적인 제스쳐로 중국 축협 및 AFC와 마찰을 빚으며 퇴장명령을 계속 받고, 세 컵중 하나도 건지지 못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이다. 거기에 지역더비가 대체로 그렇지만 팬덤끼리 사이가 극히 나쁜 상하이 선화에게 FA컵을 내준 것도 문제.[26] 최근에 중국구단은 황사머니를 자제하고 내실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과연 재계약을 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결국 시즌이 끝난 후 본인이 재계약에 연연하지 않고 중국리그를 떠난다는 보도가 났다. # 상하이 선화전을 마친 후, 라커룸에서 우승컵을 차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선수들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사실 빌라스보아스는 쓸데없는 언플과 자제력을 잃은 짓을 많이 해서 중국 언론들이 "오만하다", "중국을 무시한다"며 계속 두들겼고, 이렇게 언론과 사이가 매우 적대적이기 때문에 설령 재계약을 원했어도 남아있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상하이 구단 측은 트레블의 가시권까지 도달한데 만족했는지, 중국언론 보도로는 일단은 1년 계약 연장안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빌라스보아스는 " 다카르 랠리"에 참여하고 싶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11월부터 영국언론에서는 겨울이적시장에서 빌라스보아스가 쿠만이 잘린 에버튼 FC으로 부임한다는 설이 나돌았다. 하지만 빌라스보아스는 EPL 복귀설을 묻는 영국언론의 질문에 영국에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재확인해서, 복귀하더라도 EPL에서 보긴 힘들듯. 사실 포르투갈, 러시아, 중국에서는 정상권에서 놀았는데, 첼시와 토트넘에서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걸로 봐서는 지휘스타일이 EPL에 잘 안맞는듯.

상하이 상강을 떠나면서 공항에 수많은 팬들과 서포터즈들이 전송을 왔다고 한다. 후임은 공교롭게도 포르투에서의 후임이었던 비토르 페레이라.

3.9. 상하이 상강 이후

2018년 초, 뜬금없이 바이에른 뮌헨 감독 취임설이 나돌고 있다. #

2018년 6월, 지네딘 지단이 사임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 물망에 올랐으나, # 결국 훌렌 로페테기에게 돌아갔다. 사실 레알 마드리드 감독은 더블도 본전인 자리라서, 최근에는 대부분의 특급감독들이 기피한다고 한다.

2018년 7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 후보군에 오르내리고 있다. 특유의 공격축구가 한국 팬들에게 어필하고 아시아 축구에도 밝은데다가 유망주 발굴에도 일가견이 있다. 하지만, 다혈질에다가 한팀에서 오래 못버티는 성격 때문에 팬들도 설왕설래중. 결국 파울루 벤투 감독이 선임되어 없던 일이 되었다.

3.10.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2018-19 시즌 종료 후, 전임 감독 뤼디 가르시아가 사임한지 1주일 만에 2년 계약으로 마르세유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하면서 수석코치를 포르투 시절에 인연이 있는 히카르두 카르발류로 교체했다.

2019-20 시즌을 앞두고 잉글랜드 EFL 리그 1소속 애크링턴 스탠리 FC에게 2:1 패배를 당하면서 새 시즌 전부터 걱정이 쌓이게 되었다.

개막 후 2경기를 1무 1패로 마쳐 암담했으나, 3연승으로 9월 현재 리그 4위까지 뛰어올랐다. 9월 15일 경기에서는 AS 모나코와의 경기에서 전반 초반에 0:2로 끌려갔으나 4골을 넣어 4-3으로 승리했다.

13경기를 끝낸 현 시점에서 리그 2위로 순항하고 있다. 마르세유가 원래 리그앙에서 중상위권이기는 하지만, 몇년간 챔스권(3위까지) 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순위를 유지한다면 챔스에서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코로나 19 여파로 리그앙이 중단되었고 조기종료됨에 따라 28경기를 기록하고 2위로 마쳤다. UEFA에서 조기종료된 리그팀들은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박탈하기로 방침을 정했으므로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할것으로 보였으나, 이후 방침을 변경해서 조기종료를 원하는 리그의 경우 경기가 평균 승점으로 진출가능으로 변경하였기 때문에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성공하였다.

한편 뉴캐슬 유나이티드 FC가 신임감독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절대 PL 복귀는 없을 것이라고 다시한번 확인했다.

2020-21 시즌 초반에는 그럭저럭 나갔으나, 12월 부터 갑자기 팀이 난조에 빠지며 연패행진을 벌이게 되었다. 순위는 12월 초 리그 3위에서 2월초 9위까지 수직으로 내려갔는데, 팀웍이나 리더십에 상당히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 프랑스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2월 2일에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돌연 자진 사퇴를 선언했다. 물론 감독이 자진사퇴하는 경우가 잦긴 하지만, 빌라스보아스의 사퇴 선언이 주목받는 이유는 성적도 수직하강이지만, 선수 영입 문제로 구단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올리비에 은참 임대 영입과 관련해서 본인은 구단으로부터 전혀 들은 바가 없고, 모르강 상송을 내보낸 후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선수를 구단이 일방적으로 영입한 데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특히 자진 사퇴 사실을 스티브 망당다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며, 선수단도 기자회견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고 한다. 빌라스보아스는 기자회견에서 “나는 돈을 원하지 않는다. 그냥 (구단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27]

결국 구단 측에서 빌라스보아스에게 징계를 내렸다. 추가 제재또한 내려질 수도 있다고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2월 3일 경질 당했다.

3.11. 마르세유 이후

2024년 FC 포르투 회장직 선거에 출마했다. 31대 조르즈 누누 핀투 회장이 어마어마한 기간의 장기집권 중인만큼 어려운 선거가 될 것으로 보였으나, 회장에 당선되었고 4월 27일자로 FC 포르투의 32대 회장으로 부임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 포르투갈 축구 협회 올해의 약진 감독상[28]: 2010
  • 포르투갈 축구 협회 올해의 감독상: 2011
  • 포르투갈 골든 글러브: 2011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감독: 2012년 12월, 2013년 2월

5. 여담

5.1. 일반

  • 흔히 "제2의 무리뉴"라고 불리지만 본인은 그런 표현을 좋아하지 않고, 언론에서도 자신은 무리뉴와 다르다며 확실히 선을 그었다. 그외에 무리뉴의 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빌라스보아스의 스승은 어디까지나 바비 롭슨이고, 무리뉴와는 같은 스승을 둔 동문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무리뉴의 코치를 수행하던 시절도 제자라기보다는 비즈니스 관계이지 사제 관계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스타일부터 수비적인 무리뉴와는 반대로 공격적인 스타일이다.
  • 토트넘과 첼시의 경기 전 인터뷰에서 빌라스보아스가 무리뉴와는 "더이상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한 걸 보면 둘 사이의 친분관계는 깨진 걸로 보인다. # 그런데 이 인터뷰를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무리뉴를 성이 아니라 이름인 "조제"라고 부르고, 조제에게 많은 걸 배웠다고 하는걸로 봐서는 사이가 벌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쁘게 보는건 아닌듯. # 2016년 인터뷰에서는 무리뉴와 더이상 연락 안한다고 말했다. 둘이 인테르에 있던 시절 빌라스보아스는 전력 분석관을 그만두고 코치직을 수행하길 원했으나 무리뉴가 거절한게 원인이 되어 둘 사이의 갈등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보아스는 무리뉴의 곁을 떠나 포르투갈로 돌아가 감독직을 얻었다. 8월에 있던 프리미어리그 감독들의 모임에서도 둘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니 둘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어보인다. 다만 빌라스보아스는 무리뉴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런데 토트넘 감독직에서 경질된 후 무리뉴가 보아스를 위로해줬다고 한다. #
  • 청소년 시절 FM의 전신이었던 CM의 매니아였다고 한다. 참조.
  • 별명으로는 보아스+스카우터인 보카우터가 있는데, "꿀영입의 귀재"라며 팬들이 붙인 별명이다. 다만 이 별명에는 거품이 많이 끼어 있는데, 일례로 마타의 영입은 보아스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첼시 보드진들이 점찍어서 협상 막바지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실제로 프리미어리그 감독 중 자신이 주도해서 자신이 원하는 선수의 영입이 100% 가능한 감독은 감독 시절 이 분을 빼면 없다고 봐야 한다. 13/14 시즌 시작 전 베일을 팔고 영입한 선수들이 모두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 선수들의 영입 역시 보아스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다만 보드진에서 이 선수들의 영입을 제안했고, 보아스도 이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 토트넘과의 계약 해지가 경질이 아닌 선수 영입과 관련된 견해 차이인 것이라는 기사가 올라와 재평가를 받고 있다.
  • 몇몇 축구 팬들은 빌라스보아스의 첼시 감독 부임이 너무 일렀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주제 무리뉴가 포르투 FC에서 첼시로 부임했을 때는 39살로 무리뉴 역시 젊은 나이에 첼시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이미 1992년 부터 1997년까지 6년동안 바비 롭슨의 수석코치로, 1998년 부터 2000년까지는 루이 판 할의 수석코치로 활동하며 빅클럽의 유명선수들을 지도한 경력이 있었다. 수석코치로 활동하던 1992~2000년까지 무리뉴가 지도한 선수들을 나열하자면 호나우도, 펩 과르디올라, 루이스 엔리케, 히바우두, 루이스 피구 등이 있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벤피카를 거쳐 2002년 포르투 FC의 감독으로 부임 하여 UEFA 컵과 챔피언스리그 우승 타이틀을 가지고 첼시로 이적한 것이었다. 빌라스보아스 역시 2010/11시즌 리그, FA컵, 유로파 리그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긴 했지만 무리뉴와는 달리 빅클럽의 세계적인 선수들을 지도한 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무리뉴가 첼시 감독으로 부임한 2003년에는 빅 클럽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수들 역시 세계적인 인지도, 유명도 등을 가진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2011년 빌라스보아스가 첼시로 부임했을때는 이미 빅 클럽이었고 기존 선수들 역시 2003년과는 다르게 이미 프라이드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첼시의 기존 1군 선수들 입장에선 불과 5년전만 해도 무리뉴 밑에서 상대 팀 관찰하고 전술 분석이나 하던 나이어리고 선수경력도 없었던 젊은 스태프가 갑자기 감독이라고 부임했으니 어지간한 리더십이 아니고선 선수들을 단합시키는 것은 무리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결국 이 문제는 빌라스보아스라는 사람 자체의 소통 부재 문제였음이 밝혀지긴 했지만.
  • 의외로 보아스 체제에서 밑에 있던 수석 코치들이 대행을 맡으면 보아스보다 성적을 잘 내곤 한다. 로베르토 디 마테오는 보아스가 경질된 뒤에 첼시에 챔피언스 리그우승컵과 FA컵을 안겨주는 등 지금도 첼시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있고[29] 팀 셔우드는 보아스가 싸지른 똥을 치우고 토트넘을 5위까지 순위를 상승시키고 보아스가 버린 엠마누엘 아데바요르를 갱생시키고 토트넘의 에이스인 해리 케인을 발굴하는 등 토트넘의 어린선수들 상당수가 팀 셔우드가 중용한 선수들이다. 이에 팬들도 재계약을 바랬으나 실패했다. 이에 장난으로 보아스가 수석코치를 보는 눈은 정확하다고 한다.[30] 하지만 셔우드나 디 마테오는 빌라스보아스가 잘린 후 땜방으로는 역량을 발휘했지만, 정규 감독감은 아니었는지 장기 레이스에서는 별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둘다 아스톤 빌라에서 감독생활을 했었는데 각각 2년, 1년도 못채우고 경질당한 이후 다른 직장을 찾지 못하고 야인 생활을 하다가 로베르토 디 마테오는 7년 뒤인 2023년에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테크니컬 어드바이저로 일하고 있고, 팀 셔우드는 감독직이나 코칭직이 아닌 해설로서 축구계에 몸 담고 있는 중이다.
  • 할머니가 영국인이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로부터 영어를 배워서 매우 유창한 영어를 한다. 하지만 무리뉴와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식 억양은 약간씩 배어 나온다.
  • 보광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자기 작전에 선수를 끼워 맞추려는 철학이 조광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 2017년 6월, 오스카가 광저우 푸리전에서 상대 수비수에 고의킥을 날렸다가 퇴장 명령을 받았는데, 이에 불복하고 심판에게 강하게 항의했다가 8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빌라스보아스는 아래와 같이 트위터로 오스카를 옹호했다가 중국 축협으로부터 2경기 출장금지 및 벌금의 징계를 받았다. 이 기간동안 팀분위기가 어수선해져서 7월 한달동안 2승 1무 2패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고, 6월까지 승점 2점차로 뒤쫓던 선두 광저우의 승점차는 6점 이상으로 벌어졌다. 사실 빌라스보아스는 항상 판정을 두고 협회와 마찰을 일으키곤 했다. 첼시 때도 비슷하게 영국 축협을 비난하고 판정불만을 표출했다가 징계를 먹은 바 있다. 이런 설화는 아챔에서도 다시 한번 반복되었는데, 2017년 광저우를 8강전에서 반칙을 저질러도 경고를 받지 않는 등, AFC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광저우와 AFC를 비난했다가 # AFC가 발끈하여 징계에 들어간다고 한다. 결국 14,0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한편 우레이 헐크도 오스카 출장중지에 항의하여, 항의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빌라스보아스에 동조했다가 같이 징계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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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 감독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라며 40대를 끝으로 축구계를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해 왔는데, 상하이 상강 감독직에서 물러난 2017년 빌라스보아스의 나이는 공교롭게도 만으로 40세이다.
  • 2018년 다카르 랠리에 참가하겠다고 한다. 참가차종은 토요타 하이럭스가 될 것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오토바이 종목에 출전하고 싶었지만 준비 기간이 더 필요하다는 조언을 들어 픽업트럭 부문에 출전하겠다고 한다. 빌라스보아스의 삼촌 역시 1982년 다카르 랠리에 출전한 바 있다고 한다. 자동차 수집광이라고 한다.
  • 무리뉴와 비슷하게 언플에 능하고 감독으로 스타성이 있어서 그런지, EPL에서 그다지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는데도, 영국언론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영국입장에서 변방리그라고 할 수 있는 중국리그의 상하이 감독 시절에도 빌라스보아스나 상하이 상강의 일거수 일투족이 영국언론에 매번 보도될 정도였다.
  • 토트넘 구단 수뇌부에 대해 상당히 유감이 많은듯, 2018년 11월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업적을 망쳤다"고 집중 비난했다.

5.2. 다카르 랠리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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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호기롭게 1월 6일 시작된 다카르 랠리에 은퇴한 모터사이클 랠리 레이서인 루벤 파리아[31]와 함께 참가했고, 선두와 2시간 뒤지며 43위로 랠리를 계속 했으나, 2018년 1월 10일 페루의 산후안 데 마르코나 근방에서 자신이 몰던 토요타 하이럭스가 모래 사구에 쳐박혔고, 등에 통증을 느껴 중도에 랠리를 포기하고 병원에 실려갔지만 다행히 무사하다고 한다.

포르투갈 축구인들 중에서 모터 스포츠 애호가가 많은듯, 카를로스 케이로스 루이스 피구는 아예 모터스포츠단을 공동 운영한 바 있다.
[1] 포르투갈어 발음은 [luˈiʃ ɐ̃ˈdɾɛ ðɨ ˈpinɐ kɐˈβɾaɫ i ˈviɫɐʒ ˈboɐʃ\]이다. '빌라스-보아스'나 '빌라스 보아스'는 틀렸다. 이름의 표기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아래에 있다. [2] 실제로는 이보다 작을 가능성이 있다. 184cm인 페예그리니와 181cm의 파울리뉴, 176cm인 무리뉴와 찍은 사진(아래 참조)을 보면 파울리뉴, 폐예그리니보단 작고 무리뉴와 비슷한 수준. [3] 무리뉴처럼 비선수 출신 감독으로 착각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4] 10대 시절 아마추어로 축구를 하기는 했다. 단 프로를 할 수준은 아니었으며 본인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듯.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주제 무리뉴처럼 비선수 출신 감독으로 오해 받는다. [5] 이렇게 선수 출신이 아니거나, 혹은 아주 무명 선수였던 사람이 감독으로 성공하는 예는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무리뉴부터가 무명선수였고, 2000년대 중반 RCD 마요르카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현재 구이저우 헝펑 즈청 감독을 맡고 있는 그레고리오 만사노는 아예 선수 경력이 없는데, 교사로서 고등학교 축구부를 맡았다가 능력을 발휘, 라 리가 감독까지 올랐다. 압박축구의 창시자이자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유명한 아리고 사키 또한 무명 선수 출신이라 이탈리아 언론의 야유를 받기도 했다. 마우리치오 사리도 있다. [6] 롭슨이 포르투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빌라스보아스의 아파트 이웃에 이사오게 되었는데 포르투 팬이던 빌라스보아스가 롭슨에게 벤치 멤버였던 스트라이커 도밍구스 파시엔시아를 기용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롭슨은 직접 답장을 써 자신이 그 선수를 배제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고 몇 차례의 편지가 오가며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롭슨은 소년의 남다른 축구 지식과 열정에 감동받게 된다. 롭슨은 만 16세의 빌라스보아스를 곧장 포르투 구단 유스 운영팀에 채용하였고 유학을 보내 스코틀랜드에 개설된 UEFA C급 지도자 코스를 수강시키는 한편 자신의 친정팀인 입스위치 타운의 훈련 시스템도 견학시키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빌라스보아스 본인은 당시에도 이미 세계 유수의 감독이었던 롭슨이 일개 소년에게 베푼 친절과 열린 자세에 깊이 감사하고 있으며 롭슨을 축구계의 인물들 중 가장 존경한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한다. [7] 단 무리뉴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축구를 자신이 하고있지 못하다고 말한적이 있다.무리뉴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축구보다 팀을 분석하여 그에 맞는 스타일축구를 하는편이다. [8] 오히려 펩 과르디올라 스타일의 전술과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도 의 바르셀로나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9] FC 포르투에게 라스트 미닛 골을 허용하여 아쉽게 탈락하였다. [10] 27승 3무 무패우승 달성, 포르투갈 리그 역대 최다 승점 우승, 포르투갈 리그 역대 최다 연승 [11] 시즌 130골을 돌파했다. [12] 뒤에 루카쿠, 블랙맨, 로메우 등이 보인다. [13]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 FA컵 [14] 거기에 첼시는 리그 우승이 멀어지자 리그를 포기하고 챔피언스리그와 FA컵에 올인했고 두 대회에서 우승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감안하면 리그 성적이 나쁘게 나왔다는 이유로 보아스가 디 마테오보다 나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15] 빌라스보아스의 이 소통 부재 문제는 첼시 시절뿐만 아니라 이후 토트넘과 마르세유 등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제니트와 상하이 상강처럼 본인이 왕처럼 대접을 받는 구단에서는 이 문제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첼시와 토트넘, 마르세유 등의 대형 클럽에서는 이 불통 문제로 인해 결국 모두 말로가 좋지 못했다는 점을 보면 빌라스보아스의 사회성 부재가 결국 감독 커리어에도 영향을 준 것인데, 어떻게 보면 드록바가 빌라스보아스라는 사람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드록바 본인은 커리어 내내 거친 감독에게 유일하게 요구했던 것이 선수들과 적극적으로 소통을 하는 것이라고 언급하며 빌라스보아스라는 사람을 인간적으로는 좋아했다고 그나마 립 서비스를 하긴 했고, 마르세유 시절은 첼시와 토트넘 시절과는 달리 이적시장 문제로 선수단이 아닌 이사회와 불화가 터지면서 급발진을 한 케이스에 가깝다. [16] 후에 감독대행으로 부임한 로베르토 디 마테오 또한 드록바를 마찬가지로 로테이션 위주로 기용을 하긴 했었지만, 이 때는 디 마테오가 직접 선수들에게 지금 상태로는 너는 모든 경기를 뛸 수는 없으니까, 다음 경기에서 중요한 선수인 만큼 다음 경기에서는 네가 뛸 거야라고 하면서 지속적으로 선수들을 설득하는 자세를 취하고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해서 선수들도 군말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결국 소통의 부재가 빌라스보아스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는 것만 다시 한 번 입증해버린 것. 여담으로 이 당시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는 빌라스보아스를 경질하면서, "선수단 모두를 바꾸는 거보다 감독 하나를 바꾸는게 더 싸기에 감독을 경질했다. 성적이 안 나오면 다음은 너희들이다."라고 선수들에게 메시지를 던졌다고 한다. 즉 앞서 언급된 대로 그 이전의 행적과는 다르게 이례적으로 빌라스보아스를 많이 지지해준 행적은 사실이었던 것. [17] 산드로, 허들스톤, 파커, 뎀프시, 뎀벨레, 시구르손 등등 적절한 영입 및 로테이션을 통해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18] 무엇보다도 토트넘에는 가레스 베일이라는 EPL 최강급의 크랙이 있으니까. [19] 12월 10일 에버튼전 2:1패배 이후 8승 4무로 3달동안 무패행진이다. [20] 이 득점량은 루이스 수아레스가 7경기 동안 만든 득점과 같다. [21] 보아스 감독은 요리스 키퍼를 스위퍼 키퍼처럼 기용하고, 수비라인을 끌어올려 상대 진영에서 공격전개를 하길 원했지만, 그로인해 수비라인 뒷공간이 너무 많았고, 애초에 요리스는 스위퍼 골키퍼 유형이 아닌데다 발밑이 약하다. 발이 느렸던 마이클 도슨의 구멍화와 베르통언의 잦은 부상등이 겹치면서 발빠른 공격수들이 즐비한 강팀들을 상대로 연달아 대패하였다. [22] 프랑크 데 부어가 잘린 인터 밀란 VfL 볼프스부르크에서 관심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23] AFC 챔피언스리그, 중국 슈퍼 리그, 중국 FA컵 셋 중 하나. [24] 잘 보면 빌라스보아스가 입고있는 상하이 상강과 파울리뉴가 입고 있는 광저우 헝다의 츄리닝이 똑같은데, 나이키는 구단별이 아니라 슈퍼리그 전체에 후원을 하면서, 똑같은 자주색 츄리닝을 제공하고, 구단 로고만 바꿔 달고 있다. [25] 판정에 불만을 품고, 매수되었음을 뜻하는 돈 세는 포츠를 취해보였다. [26] 중국의 지역 더비에서는 일종의 토호라고 할 수 있는 구단주끼리 사이가 좋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패하면 잘리는 경우가 많다. 2017년 톈진 터다의 자이메 파체코 감독도 구단주가 직관한 지역더비전에서 톈진 취안젠에게 3-0으로 참패한 후, 격노한 구단주에 의해 경기가 끝나자마자 잘렸다. [27] I don’t want money, I just want to leave. [28] Breakthrough coach 상, 선수로 가정하면 올해의 유망주 상 같은 상이다. [29] 애초에 디 마테오는 선수 시절에도 첼시에서 6년간 뛰었던 레전드였는데, 감독으로 부임해 구단 역사상 첫 챔스 우승까지 안겨줬으니 사랑받지 않을 수가 없다. [30] 다만 셔우드는 보아스가 선임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디 마테오는 보아스 시절 첼시에 입성한 게 맞으나 셔우드는 보아스가 오기 훨씬 전부터 토트넘 리저브팀 감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1] 2013년 다카르 랠리에 모터사이클로 2위 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