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20:39:39

안나 야기엘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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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리투아니아 여왕
안나 야기엘론카
Anna Jagiellonka
파일:안나 야기엘론카.jpg
이름 안나 야기엘론카
(Anna Jagiellonka)
출생 1523년 10월 18일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사망 1596년 9월 9일 (향년 72세)
폴란드-리투아니아 바르샤바
재위 폴란드 왕국의 왕,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1575년 12월 15일 ~ 1587년 8월 19일
배우자 스테판 바토리 (1576년 결혼 / 1586년 사망)
아버지 지그문트 1세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
형제 야드비가, 안나, 이자벨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조피아, 카타지나, 올브라흐트
문장 파일:Coat_of_Arms_of_Jagiellon_kings_of_Poland.svg
서명
파일:안나 야기엘론카 서명.svg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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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여성 군주. 폴란드 왕국에서는 14세기의 야드비가에 이은 2번째 여왕이다.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군주이기도 하다.

2. 생애

1523년 10월 18일 폴란드 왕국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인 지그문트 1세와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딸인 보나 스포르차의 3녀[1]로 출생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누이 조피아, 카타지나와 함께 크라쿠프에서 함께 살면서 폴란드의 저명한 학자들의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건축과 재정에 정통했고,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시간이 남을 때마다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수놓곤 했는데, 그 중 많은 작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안나를 비롯한 세 자매는 딸들의 결혼을 통한 정치적 이익을 까다롭게 따지던 부모 때문에 혼기가 늦어질 때까지 결혼하지 못했다. 지그문트 1세가 사망한 직후인 1548년, 브란덴부르크-콜름바흐 변경백 알브레히트 2세가 안나와 결혼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가 개신교 신자인데다 몹시 방탕하고 빚이 많기 때문에 사위로 삼을 수 없다는 보나 스포르차 왕비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후 오빠 지그문트 2세가 정부였던 바르바라 라지비우를 폴란드 왕비로 삼는 문제로 어머니와 심한 갈등을 벌인 끝에, 어머니와 세 누이를 마조프셰로 보내버렸다. 1558년 빌뉴스로 이주했고, 1564년에는 프워츠크에 거주했다.

안나는 언니 조피아와 여동생 카타지나가 각각 브리운슈바이크뤼테베르크 공작 하인리히 5세, 스웨덴 국왕 요한 3세와 결혼하는 와중에도 결혼 대상이 정해지지 않았다. 이는 자식을 좀처럼 얻지 못하던 지그문트 2세가 그녀를 차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여왕으로 염두에 두고, 결혼시켜서 해외로 보내기보다는 국내에 붙잡아두는 걸 선호했기 때문이다. 1565년 5월 덴마크 왕자 마그누스가 안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의하자, 지그문트 2세는 리가 대주교구의 여러 성을 지참금으로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해 무산시켰다. 그렇게 그녀는 지그문트 2세가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못했으며, 마조프셰에 있는 자신의 궁정에서 여동생 카타지나가 보낸 스웨덴 왕위 계승자 구스타프 에릭손 바사를 돌봤다. 한편, 그녀는 오빠 주변에 있는 므니셰크 형제, 크라쿠프 주교 피오트르 미슈코프스키, 왕실 비서 얀 자모이스키가 오빠를 정신적, 도덕적으로 타락시켰다고 여겼고, 평생 그들을 적대했다.

1572년 지그문트 2세가 사망한 후, 그녀는 야기에우워 가문의 상속녀로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차기 국왕으로 세워질 인물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첫 국왕 선거 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인 에른스트 대공을 지지했다. 그러나 얀 자모이스키 등 폴란드의 여러 대귀족은 에른스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되면 가뜩이나 전 유럽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자국까지 집어삼킬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그 대신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아들인 앙주 공작 앙리를 지지했다. 선거 결과, 앙리가 에른스트를 꺾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앙리는 프랑스를 떠나 머나먼 폴란드로 가기를 주저했다.

1574년, 앙리 왕자는 프랑스 국왕이자 형제인 샤를 9세의 최후 통첩을 받고 측근 몇 명만 대동한 채 폴란드로 가서 2월 21일 바벨 대성당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헨리크 발레지'로 즉위했다. 얀 자모이스키 등은 앙리에게 안나와 결혼하도록 권고했지만, 앙리는 51세였던 안나와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졌다. 급기야 얀 자모이스키가 왕의 명의로 크늬쉰 시를 인수하자, 그곳을 영지로 삼고 있었던 안나는 격분해 앙리에게 명령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녀는 언니 조피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앙리는 자신이 그런 명령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얀 자모이스키가 제시한 서류에는 그의 서명이 있었다며 불만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조피아에게 이 사건을 다른 유럽 통치자들에게 알려서 앙리의 부당한 결정을 물려달라고 요구할 사절단을 세임에 보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뤄지지 않았고, 안나는 자신이 아끼던 도시가 얀 자모이스키에 의해 부실하게 관리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1574년 5월 30일, 샤를 9세가 사망한 뒤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앙리를 프랑스 차기 국왕으로 지명하고 귀국하기 전까지 섭정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앙리는 프랑스에서 함께 동행했던 측근들과 모의한 뒤 6월 18일 폴란드 왕위를 미련없이 버리고 크라쿠프에서 도망쳐 프랑스로 돌아갔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그가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돌아오기를 간청했지만 무시당하자, 결국 포기하고 1575년에 차기 국왕 선거를 벌이기로 했다. 이때 안나는 일전의 일을 교훈으로 삼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 직접 출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이자 폴란드 추기경 야쿱 우한스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를 추천했고, 즈보로프스키 가문은 트란실바니아 공국 프린스 스테판 바토리를 추천했다. 두 후보 모두 안나와 결혼하겠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세 후보가 경합한 결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여왕이 단독 군주가 되거나 위세가 대단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까지 꿰차는 대신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스테판 바토리를 군주로 세우고, 안나를 그와 결혼시키는 쪽을 택했다. 이에 안나는 승인을 요청하는 귀족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 되고 싶다!"

다음 날인 1575년 12월 15일, 귀족들은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여왕이자 트란실바니아 공의 아내로 추대했다. 헤움의 시종장이자 세임의 의장인 미코와이 시에니츠키는 선거인단의 결정을 발표하면서, "공주를 여왕으로 지명하며, 스테판 바토리를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지명했다"고 밝혔다. 1576년 5월 1일, 그녀는 바벨 성에서 스테판 바토리와 결혼했고, 바벨 대성당에서 쿠야비 주교 스타니스와프 카르노코프스키가 주관하는 대관식에 참석해 남편과 함께 왕관을 받았다. 그날 그녀는 어머니와 형제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포기하기로 동의한 법령에 서명했고, 그 대가로 리투아니아와 마조프셰 영지의 수입을 평생 가질 수 있었다. 여기에 어머니가 티코친에 보관한 금고에 들어있던 금화 60,000개와 어머니가 필리프 2세에게 대출한 돈의 이자를 매년 수령할 수 있었다.

안나는 남편보다 우위를 점하려고 노력했다. 외국 사절은 먼저 그녀에게 신임장을 제출하고 공사관권을 제시해야 했다. 또한 그녀는 스테판 바토리와 크라쿠프 대학의 학자들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했고, 1584년 크라쿠프 대학의 소재지를 방문한 후 대학에 보석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활용해 여러 건설 계획을 후원 및 감독했다. 바르샤바 왕궁, 우야즈두프 성의 재건축을 감독했고, 오빠 지그문트 2세 치세부터 건설되고 있던 바르샤바와 비스와 강을 가로지르는 목조 다리 건설을 완료하고 '지그문트 아우구스트 다리'로 명명했다. 이때 목조 다리를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스타라 프로호프니아(Stara Prochownia) 방벽을 건설했다. 1574년부터 1584년까지 이탈리아 건축가 산티 구찌의 도움을 받으며 지그문트 2세의 무덤 기념물을 건설했으며, 1589년부터 1595년까지 바리의 바실리카 디 산 니콜라스 대성당에 어머니의 무덤을 건설했고, 지그문트 예배당에 자신의 무덤을 별도로 짓게 했다.

그러나 그녀와 스테판 바토리의 결혼 생활은 지극히 형식적이었고, 서로에게 이렇다할 애정이 없었다. 애초에 스테판 바토리가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한 이유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관을 쓰고 싶다는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것이었고, 실제로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근엄하기까지 한 안나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부부는 멀리 떨어져 살았고, 리보니아 전쟁에 몰두했던 바토리가 바르샤바 회의에 참석했을 때에서야 대면할 뿐이었다. 게다가 바토리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희망한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고 자신이 정국을 진두지휘했고, 안나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바토리가 젊은 여성과 결혼하여 자식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상속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녀와 이혼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그녀는 리보니아 전쟁에서 바토리를 상대하는 적들을 은밀히 지원했다. 하지만 바토리는 그녀와 이혼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손상을 입어 입지가 위태로워진다는 걸 잘 알았기에 이혼하지 않았다.

1586년, 스테판 바토리가 사망했다. 안나는 폴란드의 단독 여왕으로서 정치를 주도할 수 있었지만, 당시 62세로 고령이었던 그녀는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조카인 스웨덴의 시기스문드 왕자의 입후보를 지지했고, 또다른 후보인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선거 결과, 이번에는 시기스문드 왕자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로 등극했다. 안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반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시기스문드 왕자의 누이인 안나 바사와 막시밀리안 대공의 결혼을 약속했다.

이후 지그문트 3세가 개신교 신자인 홀스타인 공주 크리스티나와 결혼하는 것을 가톨릭 세임 의원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했다. 지그문트 3세는 이모의 뜻대로 크리스티나와의 결혼을 포기했지만, 그 대신 맞이한 아내인 합스부르크의 안나[2]가 폴란드 królowa() 칭호를 받는 것에 대해 안나가 강력하게 항의했을 때는 묵살했다. 지그문트 3세가 대항종교개혁을 단행해 개신교 세력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밀어내고 자국을 가톨릭에 신실한 국가로 세우고자 노력할 때 적극적으로 호응했으며, 마조프셰에서 개신교의 영향력이 사라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안나는 말년을 바르샤바에서 보냈고, 1596년 9월 9일 조카 지그문트 3세의 품에 안긴 채 사망했다. 사후 지그문트 예배당에서 아버지와 오빠 옆에 묻혔다.


[1] 지그문트 1세가 보나 스포르차와 결혼하기 전 헝가리 왕국 출신 서포여이 바르바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딸까지 더하면 5녀 [2] 외스터라이히 대공 카를 2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