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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1978~1987) جمهوری دمکراتی افغانستان[1] دافغانستان دمکراتی جمهوریت[2] Democratic Republic of Afghanistan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1987~1992) جمهوری افغانستان[3] د افغانستان جمهوریت[4] Republic of Afghanistan |
||
<rowcolor=#fff> 국기[5] | 국장[6] | |
1978 ~ 1992 | ||
<rowcolor=#fff> 성립 이전 | 성립 이후 | |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 국가 | 국가 | |
위치 | 아프가니스탄 지역 | |
수도 | 카불 | |
정치체제 |
공산주의 공화제 일당제 |
|
국가원수 |
혁명평의회 의장 (1978~1987) 대통령 (1987~1992) |
|
집권여당 |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1978~1992) | |
언어 | 다리어, 파슈토어 | |
종교 |
없음(
국가 무신론) (1978~1987) 이슬람[7] (1987~1992) |
|
통화 | 아프가니 |
[clearfix]
1. 개요
1978년에서 1992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했던 공산주의 국가이자 소련의 괴뢰국. 1987년에는 국명을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으로 바꿨다.2. 국기
1978년 ~ 1980년 | 1980년 ~ 1987년 | 1987년 ~ 1992년 |
1987년에는 새로운 국장과 국기를 제정했지만 그럼에도 당시 정국이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내전으로 혼란해서 카르말 정권 시대의 국기와 국장이 1992년 나지불라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혼용됐다고 한다.[8] 한국에서는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이 국기를 볼 수 있다.
3. 역사
3.1. 아프가니스탄 왕국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1919년 왕국으로 독립한 아프가니스탄은 1933년 모하마드 자히르 샤 국왕이 즉위하면서 정치, 경제적으로 평화를 누렸지만 내부적으로 파슈툰, 하자라, 타지크 등 여러 민족들의 갈등과 왕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자는 공화파와 사회주의파,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파 등으로 나뉘어져 내부 분열과 내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1965년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했던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등 아프간 국내 좌익 인사들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라는 정당을 세웠는데 농민, 노동자, 극빈층 등의 지지를 키워나가 아프가니스탄 최대 좌익 정당으로 성장했다.
3.2.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1973년 전 총리였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자히르 샤 국왕을 몰아내고 군주제를 폐지하여 공화국을 선언했으며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다우드 칸은 쿠데타를 일으킬 때 왕정통치에 반대하던 아프가니스탄 최대 공산주의 정당인 인민민주당 등 아프가니스탄 내 좌익 세력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장기 독재를 꿈꾸면서 점차 다른 세력들을 탄압해 나갔는데 공산주의 세력과 아흐마드 샤 마수드, 부르하누딘 라바니 등 이슬람주의 세력을 동시에 탄압하는 치명적인 우를 범해 독재에 대한 아프간 내부의 불만이 거세어져 갔다.
3.3.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1978년 4월 저녁 모함마드 아슬란 와탄자르와 압둘 카디르, 샤나와츠 타나이 등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과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을 지지하던 아프간군 내의 좌파 성향 장성들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격해 다우드 칸 일가와 대통령궁을 지키던 경호병들을 모두 사살한 후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던 인민민주당 당원들을 석방시켜 새 정부를 구성하게 했다. 4월 30일 인민민주당의 지도자였던 누르 타라키가 새 정부의 대통령직인 혁명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여 인민민주당 1당 독재 국가인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서 아프가니스탄은 친소 공산국가가 되었다.공산 아프가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주석)이 된 타라키는 왕정처럼 세속주의를 추구했으며 토지 국유화, 사유 재산 금지, 조혼 금지, 농촌 부채 탕감 등의 전형적인 소련식 공산주의 개혁 정책을 밀어붙였으나 대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이념에 따라 인민민주당 공산 정권은 이슬람을 탄압했는데 이는 이슬람 문화가 뿌리깊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타라키 공산정부에 저항하여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이라는 이름의 이슬람 반란군들이 봉기하여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내전이 발생했다. 이에 타라키 정부는 진압군 병력을 파병해 봉기를 진압하며 무자헤딘 반란군 수만명을 검거, 총살하였다. 내전으로 인한 전투 및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보복 처형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민민주당은 내부적으로도 여러 파벌들로 분열되어 서로 권력 쟁탈전을 벌이는 등 상태가 영 아니었으며 대통령이 된 타라키마저도 정권 내부의 갈등 조정과 국내 무자헤딘 반군 진압 등 강력한 지도력을 내지 못했고 인민민주당 내 일부 인사들도 타라키 대통령의 자질을 의심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더욱더 혼란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1979년 9월 16일 타라키의 심복이었던 하피줄라 아민이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대통령인 타라키를 암살하였으며 타라키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대통령이 된 아민은 공산 정권 통치에 반대하는 자국민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가혹하게 탄압, 학살하는 등 억압적인 독재정치를 펼쳤고 무장투쟁을 펼치던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들에 대한 진압도 더욱 강화했다.
타라키와 아민은 인민민주당 내 강경파라고 할 수 있는 '할크'파였는데 이들은 원리주의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집착하여 무신론, 국유화에 집을 붉은 색으로 칠하라는 등 패악질에 가까운 막장 통치를 저질렀고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온건파 '파르참'파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으며 특히 군부 내의 파르참파 장군들을 죄다 유배해 버렸다. 이 여파는 이후 대참사로 돌아오는데 후술한다.
3.4.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러나 아민의 폭력적 독재에도 아프가니스탄 정국은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아프가니스탄의 정국 불안은 근접해 있던 소련을 더욱 더 자극했다. 소련 정계 내부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의 내분을 방치하면 아프간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이슬람 인구가 밀집한 소련 남부의 공화국들에 영향력이 미칠 가능성을 우려한 데다가 친소파였던 아민이 사실 미국 유학 시절 CIA에 포섭된 친미파여서 미국에 접근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9] 무력 침공 계획을 수립하였고 결국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국내 내분 종식을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카불을 점령하였으며 아민 일가는 소련에 의해 파견된 KGB 요원들에게 사살당하고 말았다.[10]한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아민을 살해한 소련은 타라키와 아민과의 권력 쟁탈전에서 밀려나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되어 버린 바브라크 카르말을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시켜 새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사실상 아프가니스탄을 위성국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국내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란군들은 서방의 지원을 받아 모든 총부리를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소련군에 돌려 공격하였고 결국 아프가니스탄은 무자헤딘 아프가니스탄 반란군과 소련군 사이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된 카르말은 공산 독재 통치를 어느정도 완화하면서 국내 내정 안정에 힘을 쏟았으며 한편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부군의 전력을 강화하는 등 소련군과 합동으로 정부 통치에 저항하는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 토벌 작전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카르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더욱이 국내 영토 장악에도 실패해 결국 수도 카불과 일부 지역들을 제외하고 모든 아프가니스탄의 지역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특히 카르말은 인민민주당내 온건파인 '파르참'파 소속이었는데 '할크'파로 도배된 아프간 군부는 번번이 카르말의 명령을 무시하였고 유일하게 정부에 가장 충성하던 정부군의 장군으론 북부 마자르이샤리프 지역에 거점을 두면서 정권에 충성하던 압둘 라시드 도스툼과 1978년 군부 쿠데타를 주도하여 다우드 정부를 끌어내리고 공산 정권 초기와 후기에 국방장관을 역임하였던 모하마드 아슬란 와탄자르 정도였는데 저 중에서 도스툼은 소련군 철수 후에도 공산 정권을 지원해 주던 소련이 1991년에 붕괴되자 카르말과 참카니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나지불라와 관계를 단절해 한때 적군이었던 무자헤딘 측으로 전향하였고 하크, 마수드, 라바니, 칸, 모자데디, 샤아프 등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까지 소련군 및 카르말/나지불라 정권의 정부군대와 싸우던 다른 무자헤딘의 지도부 인사들과 함께 수도 카불 등 당시 나지불라 정권이 실효통치하던 영토들을 공략하는 데 앞장서 이듬해인 1992년 나지불라 정권을 패망시켰다.
결국 카르말은 소련군과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 사이에 전쟁이 절정에 달하던 1986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소련으로 망명했고 하지 모하마드 참카니가 1년간 뒤를 이었다가 카르말 정부 아래에서 비밀경찰 국장을 맡고 있었던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공산권이 붕괴되던 세계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이 된 나지불라는 공산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완화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폐지하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했고 억압적이었던 사회 분위기도 대폭 완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국호도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에서 다우드 칸 정권 시절인 70년대 중후반의 국호였던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으로 개정하고 유일한 정당이었던 집권 인민민주당의 당명도 조국당으로 개정하고 당의 정강정책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공산주의에서 탈피해 사회민주주의 및 아프가니스탄 민족주의로 전환했고 그동안 내전으로 인한 적대 세력이었던 무자헤딘 반란군 세력들에게 화평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지불라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거의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고 실권의 대부분을 구 인민민주당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자헤딘들은 나지불라의 화평 제의를 거부했고 나지불라의 정책들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3.5. 소련군의 철수와 정권의 붕괴
1980년대 말 아프가니스탄의 정국 불안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극에 달했고 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침내 1988년 소련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를 결정했다. 철수하지 말아 달라는 나지불라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도록 군사지원은 계속 해 주겠다면서 나지불라 대통령을 설득했고 철군을 시작했다. 결국 소련군은 1989년 2월 철수했다.한편 소련군이 철수하자 무자헤딘 반란군들은 나지불라 정부를 향해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고 이는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란군 사이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소련은 군대를 철수시킨 후에도 나지불라 정부군에 대해 지속적인 군사지원을 유지했기 때문에 나지불라는 무자헤딘의 거센 공격에도 권력을 유지하였다. 소련군 철수 후 무자헤딘과 나지불라 정부군 간의 내전이 격화되어가던 상황에서 나지불라 정부군이 아프간 주둔 소련군 없이 무자헤딘의 공세를 격퇴하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일부 나지불라 정권에 불만을 품었던 정부군의 할크파 출신 장군들이 1990년 나지불라를 대상으로 쿠데타를 모의하다 적발되는 일이 발생하였고 나지불라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숙청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1989년 소련 철수 후 일어난 무자헤딘과 나지불라 정권과의 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던 유능한 장성들이 대거 쓸려나가면서 나지불라 정권의 군세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1991년 3월 호스트 시를 둘러싼 무자헤딘과 나지불라 정부군 간의 전투에서 최요충지인 호스트가 끝내 무자헤딘에게 함락되면서 나지불라 정권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더욱이 동년 12월 소련 붕괴로 인해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끊기면서 나지불라 정권은 고립무원 상태에 내몰렸다. 이듬해인 1992년 무자헤딘 반란군은 나지불라 정권과 구 인민민주당 세력들의 최대 거점지인 수도 카불을 함락시켜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여 카불을 점령하면서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나지불라 정권은 1992년 4월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들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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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 아하드 모만드 # | 다우란-굴람 마숨 # |
의외로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시기 발전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우주비행이다. 1988년[11] 나지불라 정권이 우주비행사를 2명 배출했다. 당시 소련은 우주정거장 미르 발사 기념으로 3개의 친소 국가[12]에서 우주비행사들을 차출해서 미르로 보내주는 일종의 선전성 행사를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아프가니스탄 대표로 민주 공화국 공군 조종사, 파슈툰족 출신인 압둘 아하드 모만드(Abdul Ahad Mohmand)가 선정돼서 1988년 8월 29 소유즈 TM-6에 탑승하여 미르 정거장으로 향했고 9일간 미르에서 생활했다. 당시 모친이 모만드의 안위를 매우 걱정하였기 때문에 그는 모친과 우주선에서 모국어인 파슈토어로 대화했는데 이 덕분에 파슈토어는 우주에서 사용된 5번째 언어가 되었다. 모만드는 민간 항공청에서 일하다가 1992년 나지불라 정권 붕괴 이후 독일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
또다른 우주비행사는 다우란-굴람 마숨(Dauran-Ghulam Masum)으로 직접 미르 정거장으로 가진 않고 소유즈 TM-6의 예비 비행사로 참여했으며 이후의 근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13]
특히 이는 인터코스모스 프로그램(interkosmos program)의 일환으로 비단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뿐만 아니라 동유럽을 포함한 시리아, 베트남[14], 쿠바[15] , 몽골, 그리고 프랑스, 영국, 일본과 같은 서방권 국가들을 포함해 총 14국이 참여하였고 여러 우주비행사를 배출시켰다.
이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되면서 한동안 아프가니스탄 국적의 우주비행사는 저 두 사람 외엔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마치 후삼국시대 신라와 유사한 부분들이 있는 나라다. 우선 중앙 권력을 쥔 지배계층 내부에서 권력 투쟁과 부정부패들이 발생하고 무리한 세금 납부와 정권의 급진적인 사회주의화 정책으로 지방 세력들이 반발하고 봉기하면서 두 나라 모두 각각 여기에 기반한 호족과 무자헤딘 등 반란군 군벌 세력들이 득세, 할거하여 나라가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졌으며 후백제와 소련 등 특정 인접 국가의 침략을 받아 대통령(하피줄라 아민)과 국왕( 경애왕)이 살해당하고 소련과 후백제에 의해 새 대통령(바브라크 카르말, 모하마드 나지불라)과 국왕( 경순왕)이 세워지면서 이후에는 소련과 미국, 후백제와 고려 등 당시 강대한 국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중앙 정권이 수도 카불과 헤라트, 칸다하르 등 일부 대도시와 주요 도로 및 수도 서라벌 일대만 지배하는 완전한 파탄 국가로 전락했다. 대통령, 왕을 죽이고 지도부를 갈아치웠던 이웃나라에서 소련 붕괴와 신검의 쿠데타로 인한 견훤 축출 등의 커다란 사태가 일어나면서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고 아프가니스탄은 무자헤딘들의 공격을 받아 소련 붕괴로 소련의 지원마져 끊긴 친소 정권이 멸망한 것도 비슷하다.
다만 신라는 다 몰락해 가는 상황에서도 한반도의 정통국가로 인정받았고 후백제의 침략으로 옹립된 국왕 경순왕이 후백제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친고려 외교 정책을 펼치는 등 후백제를 적대하다가 935년 고려에 평화적으로 항복해 흡수되면서 멸망하였지만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은 1979년 소련의 침공을 받은 후에는 소련의 지원 없이는 정권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괴뢰국으로 완전히 전락하였고 국제사회에서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서방 선진국들도 정식 아프가니스탄 정부로 인정하지 않은 데다 소련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카르말, 나지불라 정권에 대항하던 무자헤딘 반군 세력들을 지원하면서 서방의 자본주의 진영 국가들과는 끝까지 적대관계로 남았고 1991년 소련 붕괴 후 소련의 지원마저 끊겨 당시 적군이자 서방 열강들의 지원을 받던 무자헤딘들에 의해 무력으로 정권이 전복당해 망한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후백제의 신라 침공 이전까지 후백제와 고려 또는 신라 사이에서 저울질하거나 명목상 신라 조정에 협력하는 세력이 일정 부분 존재하여 신라 정부와의 관계가 복잡했던 후삼국시대 한반도의 호족들과 달리 무자헤딘과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정부의 관계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사회주의로 갈려 이념적으로 대립하다 못해 양자 모두 전면적인 내전까지 치르던 적대, 원수관계에 있었다는 점도 차이점이다.
[1]
다리어
[2]
파슈토어
[3]
다리어
[4]
파슈토어
[5]
3번째로 바뀐 국기.
[6]
3번째로 바뀐 국장.
[7]
대외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했지만, 나지불라 집권 초이던 1987년에 국교 조항을 두면서 1987년부터 국교가 이슬람이었다.
[8]
국기 상단의 국장이 다른 걸 제외하면 흑적녹 삼색기였기에 차이점이 국장이 다르다는 점을 제외하면 당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도 식별하기가 비교적 쉬웠다고 한다.
[9]
참고로 이 소문은 아민을 압박해 아프간의 공산화를 더 촉진하기 위해
KGB가 아민의 반대파들을 선동해서 퍼뜨리게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퍼뜨린 소문에
자신들이 속아넘어간 것이다.
[10]
여담으로 친소파였던 아민은 소련군이 자신을 죽이러 온 줄도 모르고 소련군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그는 살해된 후
미국의 앞잡이로 격하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민을 옹호하면 안되는 것이 전술했듯 집을 붉은색으로 칠하라고 하질 않나 3개월 동안 불법적으로 수천명을 처형한 악랄한 독재자였다.
[11]
참고로 이는 한국인의 최초 우주비행(2008년 4월)보다 무려 20년이나 빠르다.
[12]
시리아,
불가리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13]
전쟁에서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것도 불확실하다.
[14]
최초의 아시아인 우주비행사인 팜툰 (Pham Tuán)
[15]
최초의 흑인 및 히스패닉계 우주비행사인 아르날도 타마요 멘데스(Arnaldo Tamayo Ménd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