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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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57년 5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과 벨가이 계통의 아투아투키족이 맞붙은 전투.2. 상세
기원전 5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악소나 전투에서 벨가이 연합군을 격파했고 뒤이어 벨가이 족 중 상무정신이 가장 투철한 네르비족을 토벌하러 진군했다. 뒤이은 사비스 전투에서 네르비족의 탁월한 작전으로 인해 패배 위기에 몰렸지만, 로마군의 탁월한 전투력과 단합력, 카이사르 본인의 통솔력에 힘입어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아투아투키족은 네르비족을 도우러 접근했지만, 네르비족이 사비스 전투에서 거의 전멸해 로마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돌아갔다. 카이사르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아투아투키족의 영지로 쳐들어갔다.로마군이 접근해오자, 아투아투키족은 성채에 숨어 농성했으며 참호를 파는 적군을 지속적으로 습격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성채 주변에 5km의 방벽을 세워서 감히 출격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거대한 공성탑을 건설하여 성벽으로 가까이 이동시키자, 그런 탑을 생전 처음 본 그들은 공포에 휩싸여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 의사를 밝혔다. 카이사르는 아투아투키 족에게 모든 무기를 내놓고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그들이 "무기가 없으면 이웃 부족들로부터 지킬 수 없다"고 호소하자, 카이사르는 로마의 동맹이 된다면 이웃 부족들이 그들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 할 테니 안심하라고 답했다. 이에 주민들은 무기를 성벽 위에서 내던졌는데, 그 양이 워낙 많아 성벽 자체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투아투키족은 3분의 1가량의 무기를 몰래 숨겨뒀다. 그들은 로마군이 방심했을 거라 여기고, 야밤을 틈타 숨겨뒀던 무기를 들고 적진을 습격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불상사를 대비해 경비병을 충실히 배치해뒀기에, 그들의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로마군은 곧바로 반격해 4,000명을 죽이고 나머지는 성채로 몰아냈다. 다음날 카이사르는 성채를 공격해 단숨에 함락시킨 뒤, 약속을 위반한 대가로 53,000명에 달하는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다. 이후 모든 벨가이 족이 복종하였고, 라인 강 건너편의 게르만 부족들도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고자 했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겨울 숙영지로 보내고 자신은 갈리아 키살피나로 돌아가 총독으로서 업무를 수행했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갈리아가 평정되었음을 보고했고, 로마 원로원은 승리를 기리기 위해 15일간의 감사 축제를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