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행 | ||||
사법 담당 | 행정 담당 | 토목 담당 | 재정 담당 | 종교 담당 |
아사노 나가마사 | 이시다 미츠나리 | 마시타 나가모리 | 나츠카 마사이에 | 마에다 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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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浅野 長政(1547~1611년 5월 29일)아사노 나가마사는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오봉행 중 한 사람으로 사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서 에도시대 전기까지 다이묘였다.
2. 생애
아사노 나가마사는 덴분 16년인 1547년 태어났다. 원래 아사노 가문이 아니었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외삼촌 아사노 나가카츠의 후계자가 없자 그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코다이인 또한 나가카츠의 양녀였기 때문에 나가마사는 히데요시의 가장 가까운 인척 중 하나였고, 오다군에서 주로 히데요시의 부하로 활동했다. 특히 아자이 나가마사의 몰락 이후 히데요시가 오우미국에 영지를 받았을 때 히데요시에게 120석을 받았다.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 정권에서 계속 출세해 봉행이 되었다. 특히 히데요시가 실시한 전국의 토지조사인 태합검지에서 행정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1587년에는 와카사국 오바마 8만석을 받았다가 임진왜란에서 공적이 인정되어 카이국 고후 21만 5천석으로 올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아사히히메의 결혼에 참석한 이후 이에야스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와는 사이가 나빴다는 설이 있지만 반론도 있다.
1599년 마에다 토시이에의 장남 마에다 토시나가와 함께 이에야스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근신을 명받고 가독을 장남 아사노 요시나가에게 넘기고 은거하였다. 이에야스의 본거지 에도에서 감시를 받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 소속으로서 에도에 남아 에도 수비에 기여했다. 이 공(및 얌전히 은거한 대가)으로 히타치 마타베번 5만석을 받았고, 이는 나가마사의 3남 나가시게에게 이어졌다. 나가시게의 가계는 추신구라 사건으로 유명한 아사노 나가노리에게까지 이어졌다가 나가노리가 할복을 명받고 개역된 이후 나가노리의 동생 나가히로에 의해 하타모토로 이어졌다.
한편 장남 요시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기이국 와카야마 37만 6,560석을 받았고, 요시나가 사후 그의 동생이자 나가마사의 차남 나가아키라가 번주가 되었다. 나가아키라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막부에 꼬투리를 잡혀 강제로 감/이봉된 이후 마사노리를 대신해 히로시마 번으로 전봉되었고, 나가아키라의 후손이 에도 막부가 끝날 때까지 히로시마의 다이묘로 군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