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4 08:17:13

아돌프 니콜라스 폰 부크코프

파일:Adolf_Nikolaus_von_Buccow.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말년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군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부크코프는 1712년 1월 7일 하노버 선제후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게오르크 빌헬름 폰 부크코프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군의 대위였다. 부크코프어린 시절부터 군대 경력을 위한 군사학을 공부했다. 그가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그는 이탈리아반도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전투에 참가했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도 참가했다. 오스트리아군의 총사령관인 로트링겐의 카를 알렉산더는 곧 부크코프의 진가를 눈치채고 그를 고급 부관으로 임명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4년 11월 12일,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엘베강을 도하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카를 알렉산더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끌기 위해 부크코프 대령에게 1,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흐루딤으로 가서 쾨니히그레츠를 향해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부크코프는 곧 흐루딤을 지나 파르두비츠 근처까지 진군해 프로이센군의 탄약고를 불살라 프리드리히 대왕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한편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11월 18일 텔치체에서 엘베강을 건널 계획을 세웠으나, 부크코프는 그보다 먼저 크사우제츠 대위 휘하의 1개 자유 대대와 후사르 100명을 파견해 세세미체 부근에서 엘베강을 건너게 했다. 그런 후 부크코프는 흐루딤에서 파르두비체로 진군했으나 파르두비츠 교외에서 적의 거센 저항을 받고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곧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파르두비체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수비대가 탄약고에 불을 지른 뒤 퇴각했고, 부크코프는 11월 22일 파르두비체에 입성한 뒤 일부 탄약고를 지켜냈다.

이후 부크코프는 파르두비체를 수비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남겨둔 후 쾨니히그레츠로 진격했다. 11월 26일 오전 4시 30분, 부크코프는 프로이센 전초기지를 습격해 격파한 뒤 연말까지 미텔발트를 점령했다. 그 후 카를 알렉산더는 부크코프 대령을 팻츄카우로 파견해 슐레지엔의 프로이센군의 위치를 정찰하게 했다. 12월 7일 펫츄카우에 도착한 부크코프는 적을 정찰한 뒤 프로이센군이 철수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에 카를 알렉산더는 슐레지엔에서 병력을 분산시켜 각자 겨울 숙영지를 세우게 했다.

1745년 1월 초, 프로이센군은 오펠른에서 철수했고, 부크코프는 즉시 이 도시를 점령했다. 이후 부크코프는 카를 알렉산더로부터 코젤 요새 탈환 작전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받고 판두르 연대, 요제프 에스테르하지 휘하 보병 200명, 작센-고타 용기병 100명, 포병 몇 명을 이끌고 코젤 요새를 향해 출발했다. 5월 24일, 부크코프는 분견대를 이끌고 뢰비츠를 출발하여 린슈도르프로 진군해 저녁 무렵에 도착했다. 그날 자정, 부크코프의 군대는 프로이센 탈영병인 워노프스키의 안내를 받으며 코젤 요새를 향해 소리 없이 진격했다.

5월 25일 새벽 2시경, 12명의 판도르 병사들가 선두에서 참호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했고 200명의 판도르들이 그 뒤를 따랐다. 판도르 병사들은 성공적으로 요새 전면에 배치된 포대들을 탈취했다. 그러나 포병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판도르 병사들은 대포를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도르 인들은 프로이센군을 습격했고 새벽 3시 15분에 요새를 공략했다. 부크코프는 이 전투에서 요새 수비군 지휘관 포리스 대령을 포함한 13명의 장교와 583명의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코젤 요새에 플란드리니 소령의 지휘하에 오길비 보병대 200명, 요제프 예스테르하지 휘하 보병대 200명, 그렌저 200명을 배치했다. 6월 3일, 부크코프는 코젤 요새를 성공적으로 공략한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부크코프는 오스트리아군의 여러 전투에 가담했고 1754년 8월 3일 중장으로 승진했다.

2.3. 7년 전쟁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군 원수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은 부크코프를 3개 연대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글래츠를 통해 보헤미아 국경의 안전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그는 이 작전을 피콜로미니 장군과 함께 이행했다. 그러나 그는 피콜로미니 장군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여 쾨니히그레츠에서 떠나 프로이센군과 로보지츠 전투를 치르고 있는 브라운 원수를 지원하지 못했다. 그 후 1757년 12월 5일 로이텐 전투에서, 부크코프는 좌익에 배치된 3개 기병 연대를 지휘했다. 그는 전투 도중 2마리의 말을 잃었고 오스트리아군이 완패한 후 도주할 때 후위대를 지휘해 19개의 대포와 2,000명의 부상병들을 구했다. 이후 부크코프는 슈바이드니츠 요새 수비대에 식량을 공급하고 탄약고들을 란츠후트에서 트라우테나우로 옮겼으며, 겨울 동안 슐레지엔에 주둔한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1758년 1월 30일, 부크코프는 기병대 대장으로 승진하여 4개 연대와 3개 후사르 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의 군단은 그해 4월 말까지 트라우테나우 근처에 주둔했고 5월 프로이센군이 모라비아를 침공했을 때 니켈로 파견되어 하르쉬 장군의 지휘 아래 작전을 수행했다. 그해 6월 중순, 부크코프 군단은 6월 16일에 도착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휘하 오스트리아 주력군의 진군을 지원하기 위해 코니츠에 주둔했다. 이후 그들은 프로티와나우로 이동했고 프로이센군이 모라비아의 수도 올뮈츠를 포위했을 때 프틴에 주둔하여 프로이센군의 보급로를 교란하고 오스트리아 주력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7월 1일, 부크코프는 카이저 후사르 분대를 파견해 코스테레츠에서 프로이센 치텐 후사르 분대를 습격하게 했으나 격퇴되었다.

그러다가 프로이센군이 올로모우츠에서 후퇴한 후, 부크코프는 레토비츠의 탄약고를 지키기 위해 그의 군단과 함께 오파토비츠로 행진했다. 7월 5일, 부크코프는 브뤼사우와 보나우로 진군했고 7월 6일에는 폴리치카로 진군했다. 7월 7일, 부크코프 휘하 그렌저 부대가 프로이센군과 마주쳐 소규모 접전을 치렀으나 수적인 열세에 밀려 철수했다. 이후 부크코프는 1758년 10월 14일에 7개 기병 연대의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1760년 11월 3일, 부크코프는 5개 기병 연대를 이끌고 토르가우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전투 초반 아군 보병대를 향해 공격해오는 프로이센 기병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고, 이후 프로이센 2개 보병 대대와 드래곤 1개 연대의 공세 역시 저지해냈다. 그러던 중 총사령관 다운 백작이 부상당하자, 그는 다운 백작을 대신해 짧은 시간 동안 군대를 지휘했다가 부상을 입었지만 끝까지 전장에 남았다. 그러나 결국 한스 요아힘 폰 치텐이 이끄는 프로이센 별동대가 고지를 장악한 뒤 오스트리아군 진영을 향해 포격을 퍼붓자 견디지 못한 오스트리아군은 퇴각했다.

1761년 12월 22일, 부크코프는 토르가우에서 용전을 벌인 공로로 마리아 테레지아 사령관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토르가우 전투 때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후로는 전장에 서지 못했다.

2.4. 말년

1762년, 부크코프는 지벤뷔어겐 대공국 총독으로 임명되어 국경 수비대의 재편성과 신병 모집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끝내지도 못하고 1764년 5월 18일 헤르만슈타트에서 사망했다. 향년 52세. 부크코프에게는 외아들 게오르크 폰 부크코프가 있었다. 게오르크는 1737년 하노버 인근 하스베른에서 태어났고 1758년부터 오스트리아군에 복무해 1789년 10월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 도중에 벌어진 벨그라드 포위전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