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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팽크허스트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실비아 팽크허스트
Sylvia Pankhurst
파일:Sylvia_Panhurst_c_1920.webp
본명 에스텔 실비아 팽크허스트
Estelle Sylvia Pankhurst
출생 1882년 5월 5일
영국 잉글랜드 맨체스터 올드 트래포드
사망 1960년 9월 27일 (향년 78세)
에티오피아 제국 아디스아바바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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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리처드 팽크허스트 (부)
에멀린 팽크허스트 (모)
학력 왕립예술학교
종교 기독교
직업 사회운동가, 예술가
소속 WSPU -> ELFS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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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사회주의자, 예술가, 반식민주의 운동가

2. 생애

에스텔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1882년 5월 5일 맨체스터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 집에는 디자이너이자 사회주의자인 윌리엄 모리스와 독립노동당의 창립자인 키어 하디 하원의원 등이 자주 방문했고 이 영향으로 인해 정치성향이 사회주의 성향을 띄게 되었다. 그녀는 1904년부터 1906년까지 왕립예술학교에서 수학한 재능 있는 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월터 크레인,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을 받아 자유의 천사 로고를 포함하여 여성운동의 보라색, 흰색, 녹색 색상 구성표로 디자인을 만들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실비아의 작품이 건물에서‘팽크허스트 홀(Pankhurst Hall)’을 장식할 것이라고 약속했으나, 이 건물은 1902년에 개관되었을 때 여성은 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발견은 실비아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녀의 어머니인 에멀린은 이 사건을 계기로 1903년에 새로운 여성 단체인 WSPU를 창립하게 되었다. 몇 년 후, 실비아는 왕립미술학교에서 대부분의 장학금이 남성에게만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항의했고 인맥을 동원하여 키어 하디가 이를 의회에서 문제삼아 봤지만 무시당했다.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실비아는 WSPU의 많은 디자인을 담당했다. 그녀의 어머니인 에멀린이 WSPU를 이끌면서, 자연스럽게 실비아가 그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몇 년 동안 실비아는 점점 더 여성 참정권 운동에 몰두하게 되어, 결국 예술 경력을 포기하게 되었다.

1913-14년 여성 참정권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실비아는 일부 서프러제트들의 극단적인 폭력 전술에 불안감을 느끼며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을 확보하는 것보다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 계층 간 불평등, 특히 여성들 간의 계급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WSPU를 창설했을 때, 실비아, 그녀의 어머니 에멀린 , 그녀의 언니 크리스타벨은 투표권을 위해 단결했다. 하지만 그들의 서로 다른 견해는 결국 가족 내에서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실비아는 무엇보다도 여성 투표에서 승리하는 데 초점을 맞춘 WSPU의 좁은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였고, 노동계급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여성이 동시에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한 독립노동당에서 일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사상은 WSPU에 분열을 일으켰다. 1912년 10월, 실비아는 동런던 보우에서 새로운 WSPU 그룹을 설립하는 데 참여했으며, 그곳에서 노동 계급 여성들의 열악한 생활 조건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힘썼다. 1914년 1월, 실비아는 노동 운동과 아일랜드 자치 정부 지지로 인해 WSPU에서 축출되었다. 실비아의 그룹은 이제 '동런던 여성사회정치연합(East London Federation of Suffragettes)'으로 이름을 바꿨고, 대다수의 서프러제트들이 전쟁을 지지한 것과 달리 전쟁을 반대했다.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고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동런던의 노동계층 가정은 고통을 겪었다. 실비아는 사회 복지 활동에 참여하여 노동계급 어머니들의 자녀를 위한 보육소, 일자리를 제공하는 장난감 공장, 식비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저렴한 식당을 설립했다. 실비아는 사회의 불평등에 분노하며, 1917년 러시아 혁명에 큰 관심을 가졌고, 공산주의 지지자로 변모했다. 1918년 전쟁이 끝나자 실비아는 공산주의, 반파시스트, 반식민지 운동에 참여했다.

그 결과 1920년, 실비아는 자신이 편집한 잡지 『워커스 드레드노트(Workers' Dreadnought)』에 실린 기고문으로 인해 왕립 해군의 선원들을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한 혐의로 투옥되었다. 사실 이 기사는 자메이카 작가 클로드 맥케이가 그녀를 위해 대필하고 이름만 그녀의 이름으로 발표한 글이었다. 1924년, 실비아는 동런던을 떠나 에식스주 우드포드 그린으로 이주하였고, 여기서 다양한 주제에 대한 문학을 출판했다. 그녀는 특히 어머니와 육아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어, 1930년에는 『Save the Mothers』라는 책을 출판하여, 영국 웨일즈에서 매년 약 3,000명의 출산 중 사망한 어머니와 20,000명의 유아가 죽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촉구했다. 이 책에서 다룬 일부 내용은 1948년 국립보건서비스 창설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 그녀는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 실비오 코리오(Silvio Corio)를 만났다. 그는 인쇄술 타이포그래피를 배운 후 정치에 관심을 가진 기자였다. 그들은 사랑에 빠져 우드포드에서 함께 살게 되었고, 1927년에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들 리처드 팽크허스트를 출산하여 큰 논란이 되었다. 1935년 10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에 의해 에티오피아가 침공당하자, 실비아는 에티오피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서구의 식민주의 파시즘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녀는 이후 평생을 에티오피아에 헌신했으며, 1944년 이탈리아 통치에서 해방된 후 처음으로 에티오피아를 방문했다.

1956년, 실비아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초청을 받아 에티오피아로 이주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어머니와 아기들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활동을 펼쳤고, 여성 전문 병원을 설립하려고 캠페인을 벌였다. 1956년, 74세의 나이로 그녀는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로 이사했다. 4년 후인 1960년에 그곳에서 사망했을 때, 그녀는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로부터 정식 국장을 받았다. 에티오피아 국가 장례식을 거행한 뒤 에티오피아의 영웅들이 묻히는 곳에 묻혔다.

3.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