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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렬은
지로코드순. 전신 법인: 법인은 현존하나 계열이 변경된 경우. 우체국예금은 농협금융에 흡수된 후 재설립되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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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은행 | 대한민국의 비은행예금취급기관 | 각 기관의 코드 보기 |
<colcolor=#fff> 신한은행
新韓銀行 | Shinhan Ba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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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e8375> 법인명 | 주식회사 신한은행 |
株式會社 新韓銀行 | |
Shinhan Bank | |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설립일 | 1982년 7월 7일([age(1982-07-07)]주년) |
해산일 | 2006년 4월 1일 |
후신 | 신한은행 |
은행장 | 신상훈(2006년 기준) |
업종명 | 국내은행 |
상장 여부 | 상장폐지 |
상장 시장 |
유가증권시장 (1989년 11월 3일 ~ 2001년 8월 30일) |
종목 코드 | 015580 |
본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2가 120[1] |
은행 코드 | 026 |
SWIFT 코드 | SHBKKRSE |
[clearfix]
1. 개요
민단 측의 자본으로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 민간 자본 설립 은행. 은행 코드는 26번이었다.2. 역사
1977년 간사이흥은[2] 설립자 이희건(1917~2011)이 세운 단기금융회사 제일투자금융을 기반으로 1982년 7월 7일 신한은행을 세웠다. 하나은행과 다른 점은 단자회사에서 은행으로 전환된 게 아니라 신한은행이라는 회사가 별도로 생겼다는 점. 제일투자금융은 종합금융회사로 전환되었다 IMF 외환위기로 인해 1998년 퇴출되었다.
창립 두 달 후 증권업 허가를 받고 1985년 청화기업으로부터 동화증권을 인수한 후 1987년 신용카드 업무를 개시하고 신한종합연구소를 세웠다. 1989년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1990년 신한생명을 세운 뒤 홍콩 현지법인 신한금융유한공사를 세웠다. 이후 1991년 신한리스 및 신한은시스템, 1992년 신은상호신용금고, 1996년 신한투자신탁운용을 각각 세우고 미국 마린 내셔널 뱅크를 인수하는 등 사세확장을 거듭했다.
민간자본을 기반으로 한 출발 과정이 과정이었던지라 규모는 작았지만 재정 상태가 양호했던 터라[3] IMF 외환위기 후 1998년 구 동화은행 자산을 P&A로 인수하고 2001년 신한금융지주 출범으로 자회사가 되었고, 2006년에는 조흥은행과 합병해서 현재의 통합 신한은행이 발족되었다. 대한민국에서 100% 지점장 재량이었던 대출을 최초로 중앙 전산망에 의한 평점에 따른 대출(CSS)로 바꾼 것도 이 곳이라고 한다. 하나은행, 한미은행과 함께 비교적 늦게 생긴 신한은행이 최고(最古)의 조흥은행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일 듯. 어쨌든 조흥은행의 역사는 그냥 없애기에는 너무나 중요했기에, 신한은행 법인이 사라지고 조흥은행 법인이 존속되어 신한은행으로 행명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른다.[4]
2.1. 역대 로고
<rowcolor=#fff> 1982 ~ 2002[5] | 2002 ~ 2006 |
3. 역대 임원
- 명예 회장
- 이희건 (2001~2006)
- 회장
- 이희건 (1982~2001)
- 라응찬 (2001~2006)
4. 여담
당시 재일동포들이 수트 케이스에 엔화 지폐를 꽉꽉 채워서 반입한 것을 자본금으로 썼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물론 당시 출자한 재일동포들은 이후 신한금융지주가 상장되고 주식 가치가 상승하면서 떼부자가 되었다고 한다.은행원들이 동전과 소액권 지폐가 한가득 담긴 돈통을 실은 손수레, 심지어는 삼륜 개조 오토바이(!)까지 몰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상인들을 일일이 만나 잔돈을 바꿔 주고 계좌 개설을 유도하는 파출 수납 마케팅으로 은행을 키웠다는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물론 이것은 전설이 아닌 역사로, 당시의 세태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 혁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은행원=갑 오브 갑'이라는 마인드와 인식이 팽배했던 시절에 시장에서 쉴 새 없이 일하느라 은행 갈 시간도 없는 상인들을 위해 은행원들이 직접 현장으로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비록 관리는 손을 놓았지만 국내 최초의 맥뱅킹을 지원한 곳이 구 신한은행이다. 2004년 ezplus라는 이름으로 지원했지만 아무런 보안 장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