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경찰관. 본명은 신승희이다.2. 생애
1919년 이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10년대 한반도에서는 신철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악명 높은 친일경찰이었다.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9년 2월 27일[1] 밤, 신철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천도교 소유의 인쇄소 보성사를 급습해 거사 계획을 적발했다. 그러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최린은 신철을 만나 손병희로부터 제공받은 현금 5,000원을 전달하며 "입을 다물어 준다면 역사는 신철이라는 사람을 명예롭게 기억할 것이다"라고 설득했다.[2]
이후 3.1 운동이 일어나자 신의주로 도피했으나 일본 경찰은 곧 신철이 배신한 것을 알게 되었고, 1919년 5월 15일 체포된 신철은 다음날 음독자살했다.
3. 고문치사 의혹
3.1 운동 100주년인 2019년 3월 1일, 한겨레 단독보도로 그가 일제 경찰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다는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는 사료가 공개됐다.한겨레가 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에게 입수한 신철의 사망진단서에는 그가 ‘아편중독으로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기술돼 있다. 이 사망진단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경성지방법원 형사사건기록’ 71권에 편철된 것으로 보고서 2건, 진단서 1건 등과 함께 발굴됐다.
먼저 대정 8년(1919) 5월 23일 헌병 상등병이 경성헌병소대장에게 보낸 ‘피고인(신승희) 사망의 건 보고’ 내용엔 “본월 16일 오후 9시경 자택에서 아편중독으로 병사했다는 소식을 보고한다”고 돼 있다. 첨부된 5월16일자 경성헌병대사령부 소속 군의관이 작성한 진단서에는 병명을 ‘모르핀 중독’으로 표기하고 “입과 입술 및 손톱부에 이미 청색증이 출현하고 의식 응답 불능으로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졌다”며 “응급 상태의 중태로서 예후 불령한 자”라고 기술돼 있다. 마지막으로 편철된 사망진단서에는 신철이 5월 16일 오후 9시 경성부 화동 132번지 자택에서 아편중독으로 자살했다고 적혀 있다.
최 연구원은 “신철이 자신의 집에서 자살했다면 전날 체포한 피의자를 하루 만에 풀어줬다는 얘기인데 상식적이지 않다. 당시 매일신보 보도에는 신철이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던 도중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고 했다. 또 “1920년 1월 6일자 윤치호 일기를 보면 일본인 경찰들한테 ‘신철이 헌병들에게 고문받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며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면 헌병대에서 고문받다 숨진 신철을 아편중독 자살로 조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