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9:53:15

신우파

1. 개요2. 대안 우파 진영에서의 사용3. 나라별 신우파
3.1. 한국 뉴라이트3.2. 일본3.3. 영국3.4. 미국3.5. 독일3.6. 프랑스
3.6.1. 연혁
3.7. 이탈리아

1. 개요

신우파(New right)는 여러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주로 기성 우파와 구분되는 새로운 우파 세력을 자처하는 집단이 사용한다. 대부분 신우파는 1960년대 이후 대두한 신좌파에 대한 반발로 탄생하였다.

세계 각지의 정치가 모두 다르듯이 신우파라고 해서 모든 나라의 신우파가 다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후술할 나라별 신우파 참조.

2. 대안 우파 진영에서의 사용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Alt-lite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대안 우파 성향과 유사하지만 자신은 백인 우월주의에 동조하지 않고 모든 정체성 정치에 반대하니까 대안 우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스스로 "New right"라고 칭한다.

3. 나라별 신우파

3.1. 한국 뉴라이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뉴라이트(대한민국)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2. 일본

신우익 청년민족파, 민족파 문서 참조.

3.3. 영국

대처주의 문서 참조.

3.4. 미국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보수주의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5. 독일

독일의 신우파는 Neue Rechte라고 불리는데 말 그대로 새로운 우익이라는 뜻이다. 가끔 종족적 민족주의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많이 쓰이는 용법은 아니다.

1964년 창당된 민족민주당의 청년 당원들이 시초로 여겨지며 다른 나라의 신우익처럼 당대 서독의 신좌파 학생운동의 안티테제로 탄생한 것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나치와 다르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이들의 이념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우익 정치인 및 지식인들과 비슷했다. 이들의 성향을 한 단어로 요약하라면 보수혁명이라는 단어로 요약 가능하며 반자유주의, 반민주주의, 반의회주의 성향에 권위주의 정권을 찬양하고 역사에 있어서 독일의 특수성을 믿었다.

신우익들은 이런 보수혁명론자들의 견해를 계승해 반평등주의, 반다원주의적 성향을 띄었으며 민족 분리주의[1]를 믿어 독일 민족과 국가 정체성애 매우 긍정적이다. 안티페미니즘, 반다문화적 성격을 띄어 신좌파 운동권과 극심히 대립했으며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신좌파들의 죄의식에 부정적이었다.

다만 그들이 이전 세대의 보수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들은 '국가나 민족의 부활'이라던가 '전통의 회복'따위의 슬로건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신우파들과 유사한 점으로, 그들은 현세가 문화, 문명, 전통이 쇠퇴하는 문화 비관주의적 입장을 취했으며 독일이 부흥하기 위해선 단순히 전통적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서방 연합군을 추방하고 독일 민족을 통일시켜 '국가적 재탄생'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쉽게 생각해 일본 국가의 재탄생을 주장한 미시마 유키오와 비슷한 사상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이런 입장에서 이들은 공공연하게 '혁명'을 외치기도 했다.

의외이지만 환경 운동에 긍정적이어서 환경운동에 대한 것만큼은 신좌파와 견해가 일치했다. 실제로 70년대 이후 많은 신우익들이 환경 운동에 참여했으며 제국주의에 부정적이고 평화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독일의 신우익 운동은 1974년을 기점으로 분열되었는데 강경파는 '민족'(Volk) 개념에 어마어마하게 집착하는 이들로서 국가 재탄생을 위해 혁명을 외치며 독일 민족적 전통 수호를 위해 노력했고 독일이 이주민들로 인해 과도하게 외국화되고 있다며 이민 반대와 독일 민족 고유 생존권 보장을 외치는 등 현대 대안 우파와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대안 우파의 반이민 정서는 유럽 신우익 운동으로부터 계승된 것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온건한 이들은 전통 수호는 인정하면서도 혁명을 부르짖지는 않았고 생태운동 및 평화운동에 신좌파들과 손잡고 참여하거나 반자본주의 및 반공주의 운동을 펼쳐 제3의 위치를 주장하는 등의 독자적인 정치 운동을 해나갔다.

그러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다시 전환기를 맞이했는데 사상이 비슷했던 프랑스 신우파 운동과 연대하게 되어 이념을 공유하게 되자 오직 독일 민족의 생존권만을 외쳤던 것에서 시각을 범유럽적인 전통으로까지 넓히게 된 것이다. 이는 유대-기독교 전통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문화적 전통을 옹호해야 한다는 '문화 투쟁'으로 이어졌고 80년대 후반에는 이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각종 우파 정당들에 침투하거나 직접 우익 포퓰리즘 성향 정당을 만들어 정계에 진출하는 등의 노력이 이어졌다. 독일의 위한 대안(AFD)이나 공화당의 부상 배경에 대해선 정치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갈리기는 하지만 신우익 운동가들의 침투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대체로 인정된다. 한편 시간이 지나며 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온건화한 이들은 민족자유주의를 주장하며 보수자유주의 세력에 참가하게 된다.

3.6. 프랑스

프랑스의 신우익 운동은 Nouvelle Droite라 불리며 ND라는 약칭으로 쓰이는데 역시 말 그대로 새로운 우파라는 뜻이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후반 신좌파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하였다. 프랑스의 신우익 운동은 독일을 비롯해 유럽의 신우익 운동에 이념적, 정치적으로 영감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1968년 우파 정치철학자 알랭 드 베누와(Alain de Bedoist)가 주도해 창립된 유럽 문명 연구회(GRECE)가 시초로 여겨지며 전간기 독일의 우파 사상인 보수혁명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강력한 반공주의, 반신좌파 성향을 띄었지만 동시에 신좌파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특히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화이론(헤게모니 이론)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 스스로가 우파 그람시주의라고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ND는 강경한 인종차별주의, 문화 분리주의적 성격과 함께 유사 파시즘적 성향을 띄었지만 동시에 반미주의, 제3세계를 향한 관심, 친환경주의 등 신좌파들의 많은 의제를 수용함으로서 단순 극우로서의 성격보다는 극좌와 극우가 혼합된 제3의 위치처럼 보이게 되었다. 더불어 중앙집권보다는 지역주의, 연방주의적 성격을 띄었으며 독일 등 타국의 신우파 운동과는 달리 유럽의 문화적 전통 수호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프랑스 민족주의를 딱히 내세우지 않았다. 이는 ND가 전통적인 우파와 차별화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반자본주의, 반민주주의적 성격은 공산주의자들과 동일해서 의외로 프랑스 공산당 등의 극좌 세력과의 사이가 생각만큼 아주 나쁘진 않았다고 한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한다.

ND는 자신들의 의견을 주류로 만들기 위해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적극 차용해 사회 대중의 의견에 자신들의 주장을 장기적이고 천천히 주입하여 최종적으로 사회 권력의 주류를 차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는 메타정치적 전략이라 부르며, ND의 최종 목적은 당연히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이었다. 다만 민주주의 자체에 부정적인 것은 아니며 지역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지역화된 형태의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그들은 이를 유기적 민주주의라 불렀다.

민족간의 분리와 민족 집단의 권리를 주장하는 민족 분리주의의 시초이기도 하며 다문화주의를 인종 말살이라는 극언까지 쓰며 비판했고 이민에 부정적이었으며 프랑스 내 소수민족에 대해 그들 고유의 전통을 지키게 한다는 명목으로 민족 간의 문화적 분리를 주장했다. 따라서 '민족국가'또는 '국민국가' 개념에는 의외로 부정적이었고 프랑스를 프랑스 민족 연합 공화국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ND의 이상향이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공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ND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부정적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에도 당연히 부정적이었으며 유럽과 제3세계가 연대해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ND 내부에도 매우 다양한 분파들이 존재해 어떤 사상이라고 딱잘라 말하기 힘들기는 하다. 백인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서구 제국주의자들, 유럽 문화적 전통을 숭배하는 전통주의자들이나 평범한 공동체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신이교주의자들도 있고 반유대주의자, 심지어 포스트 모더니스트(!)도 있다.

3.6.1. 연혁

비시 프랑스 정권이 붕괴하고 비시 정권이 나치의 괴뢰국으로서 청산 대상으로 여겨지자 프랑스에서 권위주의 극우 이념은 양지에서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한 신세가 된다. 그러다 5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어느정도 제도권 정치권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 알제리를 비롯한 식민지 독립 문제가 대두되자 탈식민지화 운동에 반대하는 세력으로서 다시 극우 세력이 성장하였다. GRECE는 식민지 독립에 반대한 극우 성향 지식인들이 창설한 조직으로, 고대 그리스의 이교적 유산에서 유래한 프랑스, 더 나아가 전 유럽의 전통을 수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수많은 극우 조직 중 하나에 불과했던 GRECE는 군 내 쿠데타 시도의 좌절 및 비밀조직의 해체, 파시즘 극우 조직인 Jeune Nation의 해체 및 극우 정당들의 선거 참패 등으로 인해 젊은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에게 대안적인 정치 세력으로 주목받게 된다. 1967년 총선에 참가한 GRECE는 파시즘과의 연관성을 끊어내기 위해 파시즘적인 언동을 하지 말도록 내부단속을 시키는 한편 당대 유행하던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백인 우월주의, 서양우월주의, 반공주의를 표방했다. 그리스-로마의 이교 전통에 우호적이라 반기독교적이었으며 엘리트주의적이었고 강경한 인종주의 성향을 띄었으며 백인민족주의적 성향도 있었다. 신좌파가 성장한 것이 신좌파의 문화적 헤게모니 장악 때문이라 보고 신좌파의 방법론을 배워 각종 대중용 책들을 출판하는 등 자신들의 이념 홍보에 총력을 다했고, 그 결과 상당한 호응과 지지를 얻게 된다.

ND는 197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프랑스 보수 일간지 르 피가로의 후원을 받았으며 이에 힘입어 각종 기사나 잡지, 책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지지를 확보해나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도 있어서 자유주의, 좌파 성향 지식인들이 ND를 네오 파시즘이자 프랑스 혁명을 거부하는 인종차별주의라고 주장하며 규탄에 나섰고, 그 결과 피가로의 지지를 잃고 상당한 대중적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기존의 우생학적 백인 우월주의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ND 지식인들은 전술한 민족 분리주의를 고안해 명목상 각 민족별 문화적, 역사적 차이를 인정하는 척하면서 이를 보존하기 위해 민족별 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974년에는 ND 지식인들이 The Club이라는 싱크탱크를 설립했으나 점점 ND 이념에서 이탈해 친 가톨릭적 성향을 보이거나 경제적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등 정통 ND이념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로는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에 대거 입당해 중앙 정치권에 진출한다. 실제로 국민전선의 민족 분리주의적, 차별주의적 이념은 ND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국민전선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파벌 중 하나로 현재까지도 남아있다고 한다. 다만 ND의 시조인 알랭 드 베누와는 르펜의 국민전선이 내세우는 포퓰리즘적 경향이 ND의 엘리트주의적 성향과 대조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3.7.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뉴라이트 운동은 Nuova destra라고 불린다. 이웃나라들보다 다소 늦은 1970년대 후반에 생겨났으며, 그것도 프랑스의 ND 운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이들은 1990년대 베를루스코니의 당선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1] 각 민족에는 지켜야 할 고유한 영역과 문화, 전통이 있으며, 이는 존중되어야 하고 이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사상이다. 언뜻 봐서는 문화적 다원주의와 유사해보이고 실제로 문화 다원주의라고도 불리지만 현대에는 이민 반대를 주장하는 대안 우파들에게 사상적 기초를 주장한 극우 이념으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