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0:31:28

시바타 카츠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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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사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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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 카츠이에 니와 나가히데 타키가와 카즈마스 아케치 미츠히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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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柴田 勝家, ruby=しばた かついえ)]
(1522년(?) ~ 1583년 6월 14일)
파일:897px-Shibata_Katsuie_large.jpg
파일:1024px-Japanese_Crest_Maru_ni_futatu_Karigane.svg.png
두 마리 기러기 가몬[1]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오다 가문의 가신이다. 오다 노부히데 시기부터 오다 가문을 섬겼고, 오다 노부나가 시기에는 그의 주요 가신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2. 생애

기노시타 히데요시 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용될 때 카츠이에와 나가히데와 같이 기존 가신들에게 찍힐까봐 아부하기 위해 고참들의 성에서 한자씩 따서 성을 바꾼 것이 '하시바'이며, '하()'는 니와 나가히데에서, 시바()는 시바타의 성에서 따왔다.

본래 노부나가 집권 초창기에는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다 노부유키 파에 서서 활약했으나 노부유키가 1번 패하고 노부나가에게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차 모반을 꾀하자 차마 그 꼴을 못본 카츠이에는 노부유키의 모반을 밀고했고 군단장으로 중용되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자 서열 2위에 가까운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오다 가문 최강의 맹장으로 용명을 떨쳤으며 그래서 붙은 별명이 오니 시바타(), 돌격 시바타(かかれ[2]柴田).

그의 통솔력을 보여주는 일화로, 비와호 동남에 위치한 쵸우코지성에 카츠이에의 군세가 롯카쿠 요시카타의 맹공으로 성에 틀어박힌 채 고립되었는데, 거기에 물과 식량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자 카츠이에는 큰 항아리에 성에 남은 물을 모두 모아 병사들에게 한 사발씩 먹이고 자신의 창으로 항아리를 깨면서 "이제 성에 남은 이 없으니 죽기로 싸우는 일만 남았다!!"며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파부침주()와 비슷한 효과. 결국 그와 그 병사들은 죽기로 싸워 적의 포위망을 돌파, 성에서 탈출하여 퇴각하는 데 성공한다. 이 일화로 독깨기 시바타(り柴田)라는 이명도 얻었다.

항상 여러 방면에 적을 두고 싸웠던 오다 가문의 한 방면군을 맡아 활약했으며 니와 나가히데, 아케치 미츠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타키가와 카즈마스 등 중신 중에서도 필두 가로에 속하는 인물로, 에치젠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격파한 후 노부나가는 가츠이에에게 에치젠을 맡기고 나아가 호쿠리쿠(北陸) 방면 공략을 담당하게 했다. 한때는 테도리가와에서 우에스기 겐신에게 대패[3]하여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겐신의 급사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노부나가의 원군은 강 건너에서 도와주지 못하고 지켜만 보다, 간신히 빠져나온 시바타만 데리고 후퇴한다. 오다 노부나가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의 급습으로 패사했을 즈음에는 엣츄 방면에서 우에스기 겐신 사후의 우에스기 가문을 공략 중이었고, 이와중에 우에스기 측의 우오즈성을 함락시켰다.

당시 노부나가의 장자였던 노부타다 역시 니죠 성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순서대로라면 시바타가 권력을 쥐었어야 할 것이었으나, 북방에서 어물거리는 사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당시 적대하던 모리와 재빨리 화평하고 돌아와 아케치 미츠히데를 격파하고 "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았다!!"고 선포하며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히데요시보다는 필두 가로였던 카츠이에가 훨씬 유력한 후계자로 받아들여졌으나 키요스 회의에서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의 차기 후계자 문제로 가신들끼리 치고박는 내전을 틈타 서쪽의 모리, 동쪽의 우에스기 호조가 쳐들어올까 봐 우려한 나머지 히데요시와 타협하면서 주도권을 뺏기게 된다. 이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기존대로 다른 다이묘 가문을 견제하였는데 교토에 남던 히데요시가 의도적으로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주도하면서 오다 가의 진정한 충신이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완전히 주도권을 지닌다. 카츠이에는 노부나가의 적통인 산보시를 옹립하려 드는 히데요시와의 정권 다툼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노부나가의 누이 오이치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했다.[4]

카츠이에는 오다 가의 중진과 협의 없이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주도한 히데요시에게 불쾌함을 느꼈고 히데요시의 야망을 확인하자 그를 칠 준비를 했으나 안타깝게도 폭설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서 골든 타임을 놓치는 악재를 맞이했고 이후 히데요시와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맞붙었으나 이번에도 유인 및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 주민들의 환심을 사 히데요시가 유리하게 선점했고 유인 이후 기동전에서 앞선 히데요시군이었지만 후방에 있던 마에다 토시이에 등의 카츠이에 휘하 가신들이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게 되면서[5] 전세가 불리해지고 말았으며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수세에 몰리게 되면서 최후에는 투항을 거부하고 할복을 시도해 천수각에 불을 붙여 아내인 오이치와 함께 죽었다.

3. 기타

  • 맹장에 초상화에서 풍기는 험악한 인상으로 인해 내정이나 지략 등에 약할 것이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영지 관리는 [오다의 가신들 중 원탑이었다. 히데요시보다 먼저 영지 내에 남아있는 이나 등의 무기를 녹여 농기구로 개량하거나 다리를 연결하는 쇠사슬로 만들었으며 측량 및 행정 수완도 뛰어났다. 단, 지략이나 능구렁이 같은 전략은 히데요시에게 밀렸지만 범장에 비해서는 전장 판단은 상위였고 지략에 부족한 부분은 감으로 대처하기도 했다.
  •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가 가장 아끼는 두 장수 중의 1명으로 언급했으며 명예를 중시하는 카츠이에와 흙수저 출신인 히데요시는 도저히 죽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프로이스는 카츠이에를 “노부나가의 시대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무장이자 과감한 사람이며 평생을 군사에 바친 사람”으로 평가했다.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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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바타 카츠이에의 가문으로, 기러기 가몬을 사용하였다. [2] かかれ(가카레)는 전국 시대 관련 매체에서 주로 대장급 무장들이 많이 외치는 말로 "덤벼라!" "돌격하라!" 정도의 뜻이다. 동사 かかる는 흔히 '걸리다'라는 뜻으로 제일 많이 쓰이지만 일어사전을 찾아보면 '덤벼들다, 공격하다'의 뜻으로도 쓰인다. [3] 히데요시가 멋대로 전선을 이탈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나, 가장 큰 원인은 도하 직후 테도리카와가 범람하여 퇴로가 차단되고 전군이 분단된 상태에서 우에스기 군의 급습을 받아 각개격파 당했기 때문. 이 때문에 일각에선 우에스기 군이나 그와 연합한 세력이 오다 군에게 수공을 건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4] 노부나가의 가족 사랑은 끔찍해서 친인척을 죽였다는 이유로 절간에 불을 싸지르거나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이치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첫 결혼 생활은 남편 아자이 나가마사와 오빠 노부나가가 적대 관계로 치닫는 등 이례적으로 불행했고 오이치의 재혼은 노부나가 사후에 일어난 일이라서 노부나가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다. [5] 마에다 토시이에가 배신했을 때도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때까지의 공을 칭찬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프로이스는 훌륭한 기사도 정신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