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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6대 데스포티스 {{{#fff {{{+1 스테판 브란코비치}}} }}} {{{#fff Стефан Бранкови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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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17년 |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베오그라드 | |
사망 | 1476년 10월 9일 (향년 59세) |
이탈리아 북부 우디네 인근 베오그라드 성채 | |
재위 |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
1458년 ~ 1459년 | |
아버지 | 주라지 브란코비치 |
어머니 | 이리니 칸타쿠지니 |
형제 | 토도르, 그르구르, 마라, 카타리나, 라자르 |
배우자 | 안젤리나 브란코비치 |
자녀 | 도르제, 요반, 마리아 |
가문 | 브란코비치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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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6대 데스포티스.2. 생애
1417년경 코소보와 코파오니크 산지, 타라 강, 모라차 강 상류를 중심으로 페치, 프리즈렌, 부치트른, 즈베칸, 코마라니, 트레프차 시를 점거하던 세르비아 영주 주라지 브란코비치와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의 딸 이리니 칸타쿠지니의 3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토도르, 그르구르, 마라, 카타리나, 라자르가 있었다. 1439년 스메데레보가 오스만 제국군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 형제 그르구르와 함께 에디르네로 끌려갔다.1441년,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비밀리에 오스만 술탄국에 끌려간 두 아들 그르구르와 스테판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무라트 2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토카트에서 주라지가 헝가리군과 연합해 자신에 대적하는 걸 응징하겠다며 그르구르와 스테판에게 실명형을 선고했다. 마라는 형제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두 형제는 실명형에 처해졌다. 1444년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 종식된 뒤, 스테판은 형제 그르구르와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데스포티스 직위를 돌려받은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1458년 1월 20일 데스포티스를 맡던 막내 동생 라자르 브란코비치가 급사한 뒤 데스포티스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실명 상태였기에 통치할 수 없었고, 그 대신 미하일로 안젤로비치와 라자르의 미망인인 엘레니 팔레올로기나가 섭정했다. 엘레니는 친 헝가리 왕국 성향이었던 반면, 미하일로는 친 오스만 제국 성향이었다. 1458년 3월 말, 미하일로는 스메데레보에 튀르크 분견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같은 날 스메데레보 주민들이 튀르크군의 진주에 분노해 폭동을 일으켜 튀르크 장병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미하일로도 3월 31일에 체포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이 가시화되자, 헝가리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헝가리인들은 두 사람에게 방어를 위해 전제군주국을 자기들에게 맡기라면서, 그 대신 헝가리 남부의 일부 영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시라지 미하이가 이끄는 헝가리군 8,000명이 다뉴브 강을 따라 배치되어 강을 건너려는 오스만 제국군의 횡단을 저지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이 헝가리군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은 헝가리 왕국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그나마도 오스만 제국이 그르구르를 앞세워 공세를 벌이자 본래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영역에 속했던 영주들이 별다른 저항없이 잇달아 투항하면서, 스메데레보와 골루박 만이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에 남았다.
한편, 보스니아 왕국의 국왕 스테판 토마시는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라자르 브란코비치의 미망인이자 동로마 제국 공주인 엘레니 팔레올로기나의 딸 옐레나를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동로마 제국의 혈통을 지닌 며느리를 확보하고, 스메데레보 요새와 그 주변으로 축소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을 보스니아에 편입하려 했다. 1458년 10월, 명목상 주권자인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자기 계획을 설명했고, 마차시 1세는 보스니아 왕국과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이 서로 힘을 합친다면 오스만 제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해 헝가리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헝가리 의회는 1459년 1월 스테판 토마셰비치의 세르비아에 대한 권리를 확인했다.
그 후 부더에서 옐레나와 결혼식을 치른 스테판 토마셰비치는 1459년 성주간 동안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중심지인 스메데레보에 도착한 뒤 3월 21일 세르비아 데스포티스에 즉위했다. 스테판 브란코비치는 데스포티스에서 강제로 물러난 뒤 4월 8일 추방 통보를 받고 세르비아를 떠났다. 이후 부더로 갔다가 다시 라구사 공화국으로 갔고, 1460년 알바니아 영주 스컨데르베우를 방문한 뒤 스컨데르베우의 아내 도니카 아리아니티의 자매인 안젤리나 브란코비치와 결혼했다. 말년엔 베네치아 공화국에 머물다가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우디네 인근 베오그라드 성채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베네치아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 교황청이 보낸 구호품으로 연명하다가 1476년 10월 9일에 사망했다. 사후 프루슈카 고라의 크루세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가 1716년 튀르크인에 의해 수도원과 함께 불태워졌다.
3. 가족
- 안젤리나 브란코비치(1440 ~ 1520): 스컨데르베우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알바니아 영주 게르기 아리아니티의 딸. 생전에 수많은 수도원을 세우고 고아를 돌봤기에 세르비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축일은 8월 12일 또는 8월 30일이다.
- 도르제 브란코비치(1461 ~ 1515): 1486년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 의해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로 선임된 뒤 10년간 헝가리군이 오스만 제국과 맞서싸우는 걸 돕다가 1496년 데스포티스를 내려놓고 수도사가 된 뒤 베오그라드의 막심 대주교로 활동했다.
- 요반 브란코비치(1465 ~ 1502): 1496년 형 도르제로부터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직위를 물려받은 뒤 사망할 때까지 헝가리군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맞섰다.
- 마리아 브란코비치(1466 ~ 1495): 몬페라토 후작 보니파초 3세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