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21:30:30

스타니스와프 소사보프스키

<colbgcolor=#fff><colcolor=#e34234> 스타니스와프 프란치셰크 소사보프스키
Stanisław Franciszek Sosabowski
파일:Sosabowski.jpg
출생 1892년 5월 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슈타니슬라우
사망 1967년 9월 25일 (향년 75세)
영국 런던
국적 무국적
학력 야기에우워 대학교
바르샤바 고등군사학교
직업 군인
최종 계급 소장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어린 시절3. 제1차 세계 대전 및 전간기4.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후
4.1. 제2차 세계 대전4.2. 그 후

[clearfix]

1. 개요

폴란드의 군인. 마켓 가든 작전 당시 자유 폴란드군 제1 독립공수여단장이었다.

2. 어린 시절

1892년 5월 8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슈타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지역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10년 크라쿠프 야기에우워 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슈타니슬라우로 다시 돌아와 폴란드 소총부대[1]에 입대한다.

3. 제1차 세계 대전 및 전간기

1913년 소사보프스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징집된다. 훈련을 마친 후 그는 제58 보병연대에서 상병으로 복무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는 Rzeszów, Dukla Pass 및 Gorlice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군에 맞서 싸운다. 그는 여러 개의 훈장을 받고 first lieutenant로 진급한다. 1915년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옮겨진다.

1918년 폴란드가 독립하고 제2공화국이 세워지자 소사보프스키는 폴란드군에 자원한다. 부상이 낫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최전선이 아닌 바르샤바에서 장교로 복무하게 된다. 폴란드-소련 전쟁 이후 소위로 진급하고 바르샤바 고등군사학교에 입학한다. 졸업 이후 1928년 그는 중령으로 진급하고 최전방으로 가게 된다. 1937년 그는 대령으로 진급하고 폴란드 제9군단 보병연대의 지휘관이 된다. 1939년 1월에는 제21 보병연대를 이끌게 된다.

4.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후

4.1. 제2차 세계 대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소사보프스키의 연대는 바르샤바 주변 지역들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운다. 9월 16일 독일 육글 제23 보병연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 및 반격하는 성공을 거두고 Grochów의 폴란드군 전체를 지휘하게 된다.

폴란드가 독일에 완전히 점령당한 이후 소사보프스키는 포로가 되지만 탈출하여 폴란드 저항군에 입대한다. 그는 폴란드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프랑스로 가고 파리에서 폴란드 망명정부에 의해 제4보병사단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혼란한 상황 속에 프랑스군에 의해 무기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의 사단은 영국으로 철수한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소사보프스키는 제4소총여단에 배치되었다. 여단은 주로 폴란드계 캐나다인으로 구성될 예정이었지만 인원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사보프스키는 여단을 공수여단으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낙하산 훈련을 시작한다. 1942년 10월 소사보프스키의 여단은 폴란드 제1독립공수여단이 된다. 1944년 6월 15일 소사보프스키는 준장으로 진급한다.

4.1.1. 마켓 가든 작전

소사보프스키는 이 작전에 대해 무모한 자살행위라며 처음부터 반대했다. 또한 망명정부는 소사보프스키의 여단을 바르샤바 봉기 직전 바르샤바 교외에 투입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제1독립공수여단을 마켓 가든 작전에 투입한다.

마켓 가든 작전의 결과는 소사보프스키의 우려대로 대실패였고 제1독립공수여단은 아른험에서 격전을 치르고 영국군의 퇴각로를 뚫어주다 투입병력의 약 60퍼센트가(590명) 증발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상식적으로 이런 상황이면 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한 버나드 로 몽고메리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옳으나... 소사보프스키가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2]

4.2. 그 후

마켓 가든 작전의 책임을 떠안게 된 소사보프스키는 한직을 전전하다 1948년 군생활을 마감하고 런던의 한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군인연금도 받지 못한 소사보프스키는 1967년 런던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쓸쓸히 사망한다. 유해는 폴란드에 남은 유족이 인수해서 바르샤바에 있는 포봉츠키 묘지에 안장했다.

사후 네덜란드 베아트릭스 여왕은 소사보프스키에게 청동사자장(Bronze Lion)을 추서하였다.


[1] Polskie Drużyny Strzeleckie, PDS.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병합된 지역의 폴란드인들이 만든 준군사조직으로 폴란드의 독립을 지지했다. [2] 몽고메리도 양심에 찔렸는지 자신은 호의호식하며 지낼 때 가난에 찌들어사는 소사보프스키에게 개인적으로는 사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