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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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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몽주를 찬양하다2. 효종과의 관계3. 숙종과의 관계4. 정명공주를 평가하다5. 단종의 복위를 주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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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몽주를 찬양하다

당시 정몽주의 후손이 포은집을 중간하자 서문을 써주는데 그 내용은 그야말로 정몽주에 대한 찬양으로 넘친다. 그래서인지 그 종가에 대해서도 그야말로 오지랖 넓게 간섭하여 제사 문제 등에도 관여 했으며, 후에 종손이 자손 없이 죽자 입양 등의 문제에 끼어들었는데 자신의 제자로 정몽주의 직계 후손이었던 정찬휘라는 인물을 종손으로 올리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유림에서 정몽주가 받은 존경심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 강화에 이용하려고 했다는 했다는 비판도 받았으며 남인과 대립하기도 했다. 후에 후손 정찬휘가 스승의 잘못에 연좌되어 처벌될 위기에 처하자 '차라리 내가 벌을 받을지언정 포은 선생의 대가 끊기게 할 수 없다.'라고까지 하였다. 사실 정몽주에 대한 유림의 존숭은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송시열이 유난했던 것은 아니나 그가 워낙 당시 정국에 끼친 영향력이 강해서 좀 더 돋보이는 면도 있긴 하다. 덕분에 숙종 ~ 영조 시대에 종가의 후사 문제는 조정에서까지 논의가 되며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했다. 자세한 것은 연일 정씨 항목 참조.

2. 효종과의 관계

참 묘한 관계다. 효종은 아버지 인조가 어거지로 소현세자 계통을 후계 구도에서 배제시킨 덕에 왕이 될 수 있었지만 이 때문에 적장자-적장손의 원칙을 따르는 산림들의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문제는 이들 산림이 곧 사대부 전체의 뜻과 비슷했기에 이들의 지지를 안 받을 수도 없었다는 것. 때문에 산림들 사이에서 가장 명망이 높던 송시열의 지지는 효종에게 필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효종 시기의 조정에 잘 출사하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효종 초기에 사직하려고 했을 때 효종이 만나주지 않자 관모고 뭐고 벗어버리고 멋대로 나갔을 정도.[1] 이러다 보니 효종은 재위 기간의 상당 기간 동안 송시열을 출사시키려고 애를 썼다.

다만 그렇다고 송시열이 효종 재위기 내내 조정과 거리를 두었던 건 아니었다. 낙향해 있으면서도 상소를 올려 자기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고 어쨌든 효종 9년에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이를 두고 효종의 북벌론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당시 반청사상은 사대부 전체에 만연한 상황이었고 효종이 이를 이용해 북벌론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어 송시열을 위시한 사대부들의 마음을 잡아보려고 했다는 것. 물론 효종실록에 북벌이란 단어는 2건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적긴 하지만, 북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건 왕이나 사대부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효종의 북벌은 북벌 정책이 아니라 북벌 구호 내지 공약'에 가까웠다고 보면 된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도 명분상 북벌을 거부할 수 없는 송시열에게 피할 수 없는 출사길을 제시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출사한 송시열에게 효종은 힘을 팍팍 실어준다. 물론 그렇다고 효종의 힘이 약해진 건 아니다. 효종에게는 북벌이라는 무기가 있기 때문.

그런데 효종 생전에 둘의 관계를 특별하게 만드는 사건이 하나 벌어지는데 바로 기해독대다. 사관마저 물리고 단 둘이 벌인 독대이기에 그 내용은 효종과 송시열만 알고 있었지만 효종은 죽을 때까지 이를 밝히지 않았고 송시열은 숙종 시기에 그 비밀을 드러냈다.

송시열에 의하면 효종은 이 독대의 내용을 끝까지 비밀로 유지하고 싶어했지만 송시열 입장에서는 이미 효종이 승하한지 많은 시간이 지났기에 공개해도 딱히 문제될 게 없다고 여겨서 공개했다고 한다. 그리고 송시열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기해독대는 북벌이 핵심 키워드다.

헌데 이 독대의 공개 시점이 절묘하다. 당시는 숙종 재위 초로 송시열은 두 번의 예송논쟁에서 예론을 잘못 폈다는 죄로 공격받고 있었고 이게 무려 효종의 정통성까지 걸고 넘어지는 문제라 까딱하면 송시열은 역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송시열 본인이 공개한 기해독대의 내용이 '사실 효종대왕께서 나랑 북벌에 대한 이야기를 은밀히 나누셨다'는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적어도 그에 따르면 송시열은 효종이 독대를 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던 신하이며 자신 또한 그런 왕의 뜻에 동감한 사람이 되기 때문.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독대의 내용에 따르면 효종이 송시열을 끌고 다닌다. 효종은 "10년의 기한만 가지고 준비하면 된다" 식의 강경 북벌 주장을 한 반면 송시열은 "북벌은 좋지만 실패하면 나라가 망할 겁니다." 식으로 소극적이었고, 효종은 거기에 대해 "그건 경이 날 시험하는 말이오" 라며 송시열을 압박하고 있다. 즉 효종은 북벌이라는 무기로 송시열을 제압하는데 성공한 꼴이다. 비록 얼마 못 가 효종이 승하하는 바람에 그 과실은 못 보았지만 재위 초중반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일은 역시 예송논쟁이다. 예송은 효종이 적장자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서자[2]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를 놓고 벌어진 논쟁인데, 이 때 "효종은 체이부정(아들이기는 하나 적장자가 아님)"이라며 포문을 연 사람이 송시열이다. 물론 예송논쟁의 열기를 더욱 지핀 건 윤선도였지만[3] 송시열이야말로 처음으로 문젯거리가 될 말을 꺼냈다.

결론적으로 송시열은 마지막까지 효종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남긴 유언만 봐도 알 수 있다.

3. 숙종과의 관계

본격 조선의 장거정. 마치 장거정이 만력제에게 그런 것처럼 송시열 역시 숙종에게 임금으로서의 엄격함과 근엄함, 그리고 검소와 부지런함을 강요했다. 이는 두 가지 극단적인 측면으로 갈리는데 하나는 송시열이 숙종에게 임금으로서의 청렴결백함을 강조했지만 그 수준이 지나쳤다는 점, 다른 하나는 숙종을 바지삼아 실권은 자신이 쥐려 했다는 점이다. 어떤 의도이든 간에 송시열의 행동은 장거정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하지만 송시열이 간과한 게 있었으니, 숙종은 만력제와는 여러 가지 의미로 달랐다는 게 문제였다. 만력제는 순진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저 장거정이 죽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렸다가 장거정이 죽자 뭐든지 장거정과는 정반대로 행동했지만, 숙종은 그 성품이 타고난 제왕이자 권모술수의 화신이기 때문에 되려 자기가 직접 송시열을 제거하기 위해 머리를 쓰게 되었고 그래서 희빈 장씨를 이용해 송시열에게 트집을 잡아 실각시켰다. 송시열이 검소함에 목숨거는 위인이라는 것을 간파한 숙종은 자신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장남이 태어나자 그 아들의 돌잔치를 과도할 정도로 호화롭게 하도록 조치했는데, 이에 송시열이 검소함을 강조하며 숙종을 지적하자 숙종은 종묘사직에 대한 불경죄[4]로 송시열을 실각시켜버렸다. 두 대신의 사망 후 두 임금의 행동도 상반되어 있는데 만력제가 출근을 아예 안 하는 등 놀고 먹기만 한 반면, 숙종은 되려 송시열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욱 제대로 일을 했다.[5][6][7]

4. 정명공주를 평가하다

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에 걸맞게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해 오복을 향유했다.

정명공주와 동시대를 살아간 송시열의 평가.

5. 단종의 복위를 주장하다

육신사기를 엮어 사육신 및 생육신은 물론이고 당시 사육신·생육신만큼 드러나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도 예우와 추증을 공평하게 할 것,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김시습과 남효온 등의 절의는 백세에 교화해 기릴 만하니 사당에 모셔다가 향사할 것, 육신들 외에 권자신과 송석동 등을 향사해 공주의 동학사에서 행하듯이 향사할 것, 노산군의 사당 옆에 육신사우를 세우고 영령을 위로하는 것, 엄흥도 또한 여기에 함께 배향되어야 한다고 언급 하였다. 송시열의 육신사기는 이후 정조의 재위 시절에 단종 복위를 하다 사사됐음에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시호와 은전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똑같이 베풀 것을 임금에게 아뢸 때 다시 언급했다(정조실록 정조 15년 2월 21일 1번째 기사).

현종 때에는 김수항과 함께 ' 세조의 단종 살해는 측근들의 오도에 휘둘린 것이며 본심은 단종 살해에 있지 않았다.'며 단종과 그의 비인 정순왕후의 복위를 건의하였다.

다만 이건 특별하진 않았는데 단종이 워낙 억울하게 폐위되어 목숨을 잃었기에 그에 대한 평가는 수백 년 전부터 우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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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리 그래도 예의에 어긋나다 보니 송시열도 사죄했다고 한다. [2] 흔히 말하는 서얼이 아니라 적장자 외의 자식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3] 송시열이 체이부정이란 말을 꺼냈긴 했지만 그 말이 불러올 파장을 짐작한 정태화가 그 논리 대신 "국조오례의 이래 아버지가 아들 상에는 1년복을 입었으니 어머니의 경우에도 그렇게 하자"는 논리를 펼쳤고 송시열 또한 대명률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 그렇게 하자며 동조했다. [4]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숙종의 논지는 "과인(숙종 본인)의 아바마마(현종)께서도 고명아들이시고 과인도 고명아들이다. 이렇게 요즘 임금의 대를 잇기가 무진장 어려운데 이 상황에서 과인의 아들이 태어났다. 이건 종묘사직에 있어서 기뻐할 수 있는 최대한 기뻐해야 한다. 근데 경(송시열)은 어찌하여 과인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문제삼는 것인가?"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네가 뭔데 내 가문(즉 왕실)의 축하의 찬물을 뿌려서 대를 끊으려 하느냐?"라는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5] 송시열은 숙종이 청의 강희제와 비슷하게 스스로 절제하며 사대부 중에 첫째가는 성리학적인 군왕이 되길 요구했으나, 숙종은 스스로가 자국의 선조인 태종처럼 신하들 위에 군림하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군주가 되길 바랐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이렇게 생각이 달랐으니 그 다음은 뭐... [6] 그리고 전제군주제 하에서 왕은 모든 결정에 대해 무조건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일을 안 하고 싶어도 안 할 수가 없었다. 연산군이 본격적으로 나라를 말아먹고 폭군모드로 돌입한 게 고작 2년인데 그 2년 간 조선이 어떻게 무너졌나 생각하면, 왕의 책임감이 있다면 처리해야 할 서류가 쌓여있는데 피곤하다고 잠을 자는 것조차 허락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연산군 일로 단단히 데인 조선에서 다시는 연산군 같은 폭군을 용인하지 않으려고 했고 이런 점에서 보면 숙종이 만력제처럼 농땡이를 부리거나 연산군처럼 절대권력에 탐닉했다면 노론, 소론, 남인 가리지 않고 위아더월드로 '연산군이 되려 하십니까?'라는 상소부터 냈을 것이다. [7] 그래도 숙종은 업무에 평생 치여산 걸 생각하면 그나마 장수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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