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천일(天一), 치삼(致參) |
호 | 규당(葵堂) |
본관 | 경주 손씨[2] |
출생 | 1866년 9월 13일 |
경상도
신녕현 치산면 갑현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남리 갑현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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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8년 2월 16일 |
만주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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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손진구는 1866년 9월 13일 경상도 신녕현 치산면 갑현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남리 갑현마을)에서 아버지 손수근(孫秀根, 1835 ~ 1908. 3. 8)과 어머니 경주 최씨(? ~ 1898. 1. 6) 최영문(崔永文)의 딸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간 것에 분노해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폐기할 것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후 1906년 3월 정환직의 종용에 따라 그의 아들 정용기와 함께 산남의진을 구성하고 훈련장(訓練將)이 되어 의병을 훈련시켰다. 정용기가 경주군 진위대에 체포되면서 의병이 해산되었을 때 귀향했지만 1907년 정용기가 다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참여하여 친족들을 각지로 파견해 각 문중에서 모두 군수품을 각출하여 협력할 것을 종용했다.
1907년 9월 1일 입암 전투에서 정용기가 전사하자, 그는 정환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수(總帥)가 되어 의진을 재정비하고 북동대산(北東大山) 속으로 의진을 옮겨 항쟁을 지속했다. 이때 유격장이 되어 의병 100명을 거느리고 일제에게 맞섰지만 중과부적으로 체포되어 징역 10년에 처해졌다.
1910년 한일병합 후 대사령으로 석방되었고, 1913년 임병찬이 조직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담하여 경상도 소모관의 직을 맡았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일본군 헌병대에게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28년 2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손진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