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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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는 트리폴리타니아 지역, C는 키레나이카 지역, F는 페잔 지역, 붉은색은 튀니지 방면 세력(오스만, 영국 제외), 녹색은 이집트 방면 세력(이탈리아 제외) |
1880년경 세누시야 세력의 최대 판도
1. 개요
리비아와 차드 등 19-20세기 북아프리카- 사헬 지대를 주름잡았던 부족이자 수피 조직. 1837년 메카에서 알제리 모스타가넴 출신의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앗-사누시에 의해 창단되었다. 앗-사누시는 13세기 틀렘센의 수피 성인으로, 혈연 관계는 아니었지만 존경의 뜻으로 호칭화되었다. 그는 이슬람 신학과 세속 권력이 모두 쇠퇴하던 현실을 개탄하며 (기존 마드하브와는 별개로) 마그레브에 만연한 수피 사상의 틀을 유지하되, 성인 숭배와 같은 잡다한 미신적인 의식을 배격하고 쿠란과 순나를 엄격히 따르는 수피 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사상 개혁과 함께 그는 민병대를 조직하여 리비아 안팎을 위협하던 외세와 맞서기로 하였다. 1902-13년 세누시야는 차드에서 프랑스, 리비아에서 이탈리아와 싸웠다. 1차 대전기에는 이집트와 수단의 영국과도 싸웠고, 1923년부터는 대중의 지지 및 오마르 무크타르의 활약과 함께 이탈리아에 대한 독립 투쟁을 주도하였다. 2차 대전 당시 세누시야는 북아프리카 전선에 있어 추축군에 맞서 영국 8군과 크게 협조하였다. 전후 1951년 무함마드 앗-사누시의 손자가 이드리스 1세로 리비아의 왕으로 즉위했지만, 1969년 무아마르 카다피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2. 역사
현 베이다 시가지 서쪽 외곽에 남아있는 이맘 무함마드 빈 알리 앗-사누시 모스크
세누시 종단은 전통적으로 유럽 등 외세를 배격하였고, 따라서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상이하다. 그러므로 역대 세누시 지도자들의 연대기를 통해 대강 파악하는 수 밖에 없다. 무함마드 앗 사누시는 베르베르계 왈라드 시디 압달라 부족 출신으로, 이드리스 왕조를 통해 무함마드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혈통을 이어받은 샤리프였다. 1787년 알제리의 모스타가넴 인근 알-와시타에서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 이슬람 신학과 과학, 기마술 (혹은 기사도) 등을 수학한 후 마그레브 지역의 명문 학교인 페스의 알 카라위인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앗 사누시는 사하라 지역을 여행하며 이슬람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개혁 사상을 설파하였고, 튀니지와 트리폴리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다. 뒤이어 1824년 알 아즈하르 대학교에서 유학하며 그는 현지 메흐메트 알리 파샤 정부 및 그에 순응하는 울라마 (학자층)와 종종 대립하였다.
앗 사누시는 (적어도 교육을 받은 순니) 무슬림들이 맹목적으로 4대 법학파를 따르지 말고 각자 스스로 이즈티하드 (이성 판단)에 나설 것을 주장하였고, 사상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도 세속 권력의 권위에 소극적인 자세로 순응하는 이집트 울라마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러자 울라마는 앗 사누시가 이단이라는 파트와 (칙령)를 내렸고, 이에 그는 메카로 향하여 1843년까지 무려 15년간 학생 겸 선생으로 지냈다. 메카에서 앗-사누시는 모로코의 페스 출신이자 알-카라위인 대학의 선배인 카디리야 수피 종단의 지도자인 아흐마드 이븐 이드리스 알-파시[1]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순나의 부흥을 표방하는 그에게 ‘무히 엣순나’ (순나의 부흥자) 호칭을 올렸다. 앗 사누시 본인 역시 당대 최고의 하디스 학자 중 하나로서 명성을 날렸고, 동시에 이 시기인 1825-28년 경에 후일 세누시야 종단의 교리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2.1. 무함마드 앗 사누시
말년의 무함마드 앗 사누시 |
카다피 정권 시절 파괴된 자그붑의 앗 사누시 영묘 |
1856년 완공된 자그붑의 세누시 자위야. 3년 후 앗 사누시가 안장되었다.
알-파시의 사후 카디리야 (혹은 이드리시야) 종파는 둘로 나뉘었고, 앗 사누시는 그중 하나를 이끌며 1835년 메카의 아부 쿠바이스[2]에 첫 자위야 (수도원)을 세웠다. 다만 (함께 순나 회복을 주장했음에도) 수피와 상극인 와하비 세력에 의해 추방된 그는 1843년 리비아로 돌아와 동부 키레나이카 (바르카) 내륙의 고대 키레네 근처에 있는 시디 라파아에 하얀 수도원이란 뜻인 ‘자위야 바이다’를 세웠다. 이 2번째 수도원을 바탕으로 ‘세누시야’ 세력이 형성되며 지명 자체도 시디 라파아에서 자위야 바이다로 바뀌었고, 축약되어 오늘날의 ‘바이다’ (혹은 베이다)가 되었다. 앗 사누시는 수피 사상에 있어 자발적인 빈곤과 지나친 금욕 등 광신적인 요소를 금지하였다. 따라서 세누시 수사들은 이슬람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의식주 생활을 영위하며 (다른 수피들처럼) 자선에 의존하는 대신 (기독교 수도원들처럼) 각자의 노동을 통해 자족하였다.
사상에 있어서도 앗 사누시는 수피 신비주의의 직관적인 사고와 이성 중심 사고 사이에서 절충하였고, 마그레브의 도시권에서 유행하던 전자에 공감하지 못하던 베두인 부족들이 세누시야에 대거 가담하였다. 7세기 이슬람화 당시나 19세기 초엽이나 생활 양식에 있어 별 차이가 없던 베두인들에게 있어 비교적 현실적이면서도 적당히 신비적인 세누시 교리는 상당히 합리적으로 여겨졌다. 10여년 간의 적극적인 활동 끝에 현지 부족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차드 동부를 다스린 사하라 사막 남쪽의 와다이 술탄국 역시 세누시야의 동맹이 되어 후원을 아끼지 않게 되었고, 이로써 세누시야의 영향력은 리비아에서 차드 호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트리폴리의 오스만 총독이 압력을 가하자, 앗 사누시는 당국의 감시와 탄압에서 벗어나고자 이집트와 접경한 내륙의 자그붑 오아시스로 거점을 옮겼다. (1855년)
2.2. 무함마드 알 마흐디
모하메드 알 마흐디 | 세누시 왕가 (후일 키레나이카 토후국)의 깃발 |
이후로도 세력 구축에 힘쓰던 앗-사누시는 1860년, 향년 73세로 사망하였고 동년생인 두 아들들 중 장남인 무함마드 알-마흐디가 계승하였다. 당시 15세였던 알 마흐디는 부친의 동지들인 아므란, 리피 등의 보좌를 받았다. 1863년 알 마흐디는 원로들의 보살핌을 떠나 부친과 마찬가지로 페스의 알 카라위인 대학에서 쿠란과 수피 신학을 배우러 유학을 떠났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친정에 나선 알 마흐디는 온건한 교리에 입각하여 통치하였다. 구세주라는 뜻인 알 마흐디라 명명되었고, 실제로 일부 지지자들이 그렇게 여겼음에도 그는 스스로 마흐디로 칭하지 않았다. 1881년 수단에서 수피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마흐디를 칭하며 거병하였다.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두 차례나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4대 칼리파 (사령관) 중 하나가 되어줄 것을 요구해오자, 알 마흐디는 답장을 보내지 않고 묵살함으로써 마흐디 운동 세력과 선을 그었다.
마흐디 운동이 성공을 거두며 수단 전역을 장악했음에도 여전히 세누시야 교리를 지지하던 와다이 술탄 알리 (재위 1858-74)와 유세프 (1874-98)의 연속적인 비호 하에 알 마흐디 정권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90년 마흐디 측의 안사르 병력이 다르푸르에서 차드로 진격하자 와다이 술탄 유세프가 나서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세누시 자위야는 기존의 리비아-차드와 히자즈를 넘어 페스, 다마스쿠스, 이스탄불, 그리고 심지어 인도에까지 퍼졌다. 이렇듯 세누시야 종단이 국제적인 조직력을 기반으로 명성을 얻고, 특히 리비아 동부와 사하라 오아시스[3]들에서는 종교 뿐만 아니라 리비아의 내부 교역 및 세속 권력까지 확보하자[4] (당시 중앙집권화를 꾀하던) 오스만 당국은 크게 경계하게 되었다.
2.2.1. 쿠프라 천도
1880년 세누시 세력권 | 오스만 당국에 밀려난 1888년의 세력권 |
1889년 벵가지의 파샤가 병력을 이끌고 자그붑의 알 마흐디를 '방문'하는 등 오스만 제국의 압박이 가해지자,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까 우려한 그는 1894년 중심지를 아예 '기습이 불가능한' 사하라 한복판의 오지인 쿠프라 ( 알자우프)로 옮겨버렸다. 다만 오스만 술탄 압뒬하미트 2세와의 사적인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술탄은 부관 아젬자데 사디크 엘무에이드를 2차례 (1886년 자그붑과 1895년 쿠프라) 파견하여 친서를 교환하였다.[5] 한편 세누시야는 마흐디야와 함께 소말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경쟁하였고, 전자는 현재의 소말릴란드 지역인 베르베라 일대의 하브르 유니스 술탄국에서 지지를 확보하였다. 학식 높은 셰이크인 하브르 유니스 술탄 누르 아흐마드는 정기적으로 세누시 사절단을 환대하였고, 그 교리의 영향을 받아 1899년부터 소말리아의 반외세 봉기인 데르비시 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세누시야 역시 1890년대 들어 사헬과 중앙아프리카의 식민화에 나선 프랑스에 맞서게 되었다. 1890년 오늘날의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북부에 해당하는 다르 엘쿠티에서는 세누시야 종단의 회원인 모하메드 세누시가 집권하였다. 세누시야의 영향력 하에서 그는 1891년 프랑스 사절단을 죽이는 등 외세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후 모하메드 세누시는 1893년 보르누를 장악 수단계 노예상 출신의 군웅 라비흐 앗-주바이르와 사돈[6]을 맺었다. 이에 1899년 알 마흐디는 조카 아흐마드 샤리프[7]와 함 쿠프라에서 차드호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따라 자위아트 구루를 거쳐 보르구 산지 (차드 동북부)로 이동하여 프랑스의 위협에 대한 직접 대응에 나섰다. 프랑스는 1900년 차드호 서쪽의 보르누와 아가데즈를 정복하며 세누시야를 압박했다.
2.3. 아흐마드 샤리프
아흐메드 샤리프 초상화 | 1900년경 북아프리카와 사헬 지대의 판도. 사하라 동부를 차지한 세누시야 세력 (갈색)이 보인다 |
1900년 들어 프랑스 군은 낙타 부대를 구성하여 차드호 동쪽의 세누시야 거점들을 공격하였다. 이미 차드호의 서안과 남안을 평정한 프랑스는 세누시야 영향력을 몰아내고 사헬 동부에도 자신들의 괴뢰 정권을 수립하려 하였다. 차드 방면 전선을 맡고 있던 아흐마드는 최전방 카넴에 속한 자위야트 베르 알라이의 지도자 모하메드 엘바라니와 역시 차드에 속한 자위야트 아인 칼크의 지도자 오마르 무크타르와 함께 프랑스에 맞섰다. 그러던 1902년 1월 세누시 이맘 알 마흐디가 43년의 집권 끝에 향년 58세로 사망하였다. 자그붑이나 시와 등 동쪽 사막 지대의 세누시 공동체는 한동안 알 마흐디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그를 마흐디로 섬기기도 하였다. 그의 늦둥이 아들 이드리스는 불과 12세였기에 알 마흐디는 자신의 29세 조카 아흐마드 샤리프를 대신 후계자로 유언하였다. 다만 이때 친아들 이드리스가 장성하면 정권을 넘긴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와다이 술탄국은 1898년 술탄 유세프가 사망한 후 내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세누시야는 동맹 유수프의 아들 다우드 무라 (무함마드 살리흐)를 지지하며 다르푸르 술탄국이 지지하는 유세프의 동생 아흐메드와 맞섰다. 1900년 아흐메드가 집권에 성공했으나 1902년 6월 다우드 무라가 세누시 측의 도움으로 집권함으로써 와다이 술탄국과 세누시야 간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다우드 무라는 세누시 상인들에게 자유로운 무역과 치외법권 행사를 허가하는 등의 특혜를 베풀었다.[8] 하지만 다우드 무라는 1909년 수도 아비셰를 프랑스에 뺏겼고, 와다이 술탄국은 세누시야 대신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북부로 철수한 다우드 무라는 세누시 측의 원군 및 다르푸르 술탄 알리 디나르와 함께 1910년 1월 와디 카드자에서 프랑스 군을 괴멸시키고 옛 속국[9]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군의 반격에 재차 밀려난 그는, 승패를 반복하는 저항 끝에 결국 1911년 10월 항복하였다.
2.3.1. 1차 이탈리아-세누시 전쟁
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1870년 리소르지멘토 (이탈리아 통일) 후 다른 열강들처럼 해외 식민지 건설을 추진하던 이탈리아 왕국은 1878년 베를린 회담 때부터 리비아 식민화를 목표로 다른 열강들에게 외교적으로 접근했다. 마침내 1887년 이탈리아는 영국의 이집트 지배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영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밀약을 체결했다.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의 패배로 한동안 혼란에 빠졌던 이탈리아는 국내 혼란을 잠재우고 팽창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더욱 집요하게 오스만 제국령 리비아를 노리게 된다. 1902년에는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승인하는 대가로 프랑스 역시 이탈리아의 리비아 지배를 지지한다는 밀약을 맺었고, 1909년에는 러시아 제국 도 이탈리아의 리비아 지배권에 지지를 표했다.
이미 1908년 식민 부서를 설치한 이탈리아는 1911년부터 언론을 통해 침공에 대한 여론 조성에 나서며, 리비아는 자원이 풍부하고 현지 여론이 이탈리아에 호의적인데 고작 4천의 오스만 수비대만이 상주하여 침공은 ‘군대 행차’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홍보했다. 독일-오스만 동맹을 고려해 반대하던 지오반니 지올리티 총리 역시 1911년 4월 모로코의 아가디르 위기 때에 독일이 프랑스와 협상하자 리비아 침공을 결심하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설득과 베니토 무솔리니를 포함한 이탈리아 사회당의 반대에도 그해 9월 27일, 이탈리아 정부는 오스만 조정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오스만 조정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재로 (영국령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통치권을 평화 이양하되 명목상의 지배권이라도 지키려는 의사를 타진했지만, 지오반니 총리는 이를 거부하고 29일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미 선전포고 전날 밤부터 트리폴리 근해에 출몰하기 시작한 이탈리아 함대는 10월 3일부터 항구를 포격했고, 다음날부터 1천 5백의 수병이 상륙하기 시작했다. 당시 리비아 주둔 오스만 군대는 전부 예멘의 반란 진압에 투입된 상태였기에 겨우 군사경찰 정도만 있었고, 10월 5일 (혹은 10일)에 트리폴리는 손쉽게 점령되었다. 그후 2만의 이탈리아 군대는 해안 곳곳에 상륙하여 토브룩, 데르나, [[쿰스]0를 점령했고 10월 19일에는 하루 간의 전투 끝에 벵가지를 점령했다. 다만 10월 23일, 트리폴리 인근의 샤르 앗-샤트에서 현지 아랍 기병대의 기습으로 5백여 이탈리아 군이 섬멸되었다. 그중 포로로 잡힌 3백여명은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분노한 이탈리아 군은 바로 다음날, 트리폴리 인근 메흐시야 오아시스 마을을 공격해 4천에 달하는 주민 중 상당수를 학살했다.[10] 키레나이카의 세누시야는 오스만 제국과 연합해 데르나 방면을 시작으로 저항에 나섰다.
벵가지 방면에서도 2만의 세누시-오스만 군대가 밤낮으로 이탈리아군 주둔지를 습격했고, 11월 30일에는 대대적인 습격에 나섰다. 이후 보병과 군함이 증원된 벵가지 주둔 이탈리아 군은 12월 14-15일 오스만 군의 2차 대공세를 함포 사격의 도움으로 격퇴했으나 여러 문의 야포를 상실했다. 데르나 남쪽에서는 3천 5백여 세누시-오스만 군이 반격을 준비했다. 이에 이탈리아 군은 10만으로 증설되었고, 인류 첫 정찰기 및 폭격기까지 동원되었다. 해군 전력이 전무해 제대로 증원군을 보낼 수 없던 오스만 측은 엔베르 베이, 무스타파 케말 베이, 알리 페트히 베이, 누리 베이 등의 장교들을 의사나 기자 등으로 위장시킨 채 파견하여 현지 무자헤딘들을 훈련시켰다. 여기에 10대의 오스만 황자 (무라트 5세의 손자)인 셰자데 오스만 푸아드도 파견되어 황실의 지지를 전달했다. 무스타파 케말 베이는 작전 도중 포탄의 파편에 눈을 다치기도 했다. 이집트와 튀니지 쪽에서 보낸 민간 지원 덕에 세누시-오스만 군대는 저항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에 이탈리아 군은 이집트발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토브룩과 메르사 마트루 사이의 이집트령 도시인 시디 바라니를 점령하고 해안을 봉쇄했다. 12월 4일, 이탈리아 군은 잠깐의 포격 후 토브룩에 상륙해 쉽게 도시를 점령했다. 하지만 12월 22일, 무스타파 케말과 엔베르 베이가 조직한 1천의 세누시 군대가 새벽에 토브룩 인근 나두라 언덕을 습격했다. 무방비 상태이던 이탈리아 군은 기관총 3정과 탄약을 둔 채로 도주했고, 이후 세누시 군은 이탈리아측 지원군마저 격퇴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세누시 지휘관 셰이크 무베라가 전사하긴 했지만, 이로써 이탈리아 군은 한동안 토브룩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다. 승리 이후 무스타파 케말은 데르나 전선으로 재배치되었고, 그가 조직한 1천 5백의 세누시 군대는 1912년 3월 3일에 데르나 인근에서 참호를 파던 이탈리아 군을 습격해 거의 포위에 성공했으나 원군이 다가오자 철수했다. 그해 9월 14일, 이탈리아 군은 엔베르 베이가 지휘하는 데르나 인근 세누시 진영을 공격해 격전 끝에 승리했다.
이후 전선은 고착화되었고, 이탈리아의 지배력은 트리폴리 인근 10-15km 일대 외에는 해안 거점들에 국한되었다. 장기화된 게릴라전에 지친 이탈리아는 발칸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다른 열강들의 압력을 받아 오스만 제국과의 협상에 나섰고, 1912년 10월 18일에 우시 조약 (1차 로잔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서 트리폴리와 벵가지 주민들은 자체적인 나이브와 카디를 선출해 오스만-이탈리아 정부의 상의 하에 임명되는 것을 보장받았으나 이 역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휴전 체결 후인 1912년 가을, 트리폴리타니아 총독 오타비아 라그니는 내륙의 부족들을 협상을 통해 복속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그 결과 12월까지 아지지야, 즐리텐, 가리안 등이 접수되며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면적은 크게 늘어났다. 1912-13년의 겨울에는 시르테 등이 점령되어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그러던 1913년 2월, 베르베르 지도자 술레이만 엘 바루니가 나푸사 산지 등을 기반으로 무장 투쟁에 나섰다.
2.3.1.1. 이탈리아의 내륙 공세 (1913-14년)
이에 이탈리아 군은 협상에 나서길 지시한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13년 3-4월에 걸쳐 베니 울리드, 날루트, 가다메스 등을 점령하며 내륙 깊숙히 진격했다. 키레나이카 전선에서도 비슷한 시기인 4월, 이탈리아군 증원 병력이 톨메이타에 상륙해 마르지와 아브야르 등을 점령했다. 한편 현재 벵가지 국제공항 자리인 베니나의 세누시 군대는 벵가지에 포격을 가하며 공격했으나, 6천여 이탈리아 군의 반격으로 격퇴된 후 남쪽으로 철수했다. 그 무렵 시르테 인근의 부 네즘도 이탈리아 군이 점령하 중부 내륙의 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키레나이카 방면 이탈리아 군의 진격은 5월 15일의 시디 가르바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주춤했다. 다만 6월 18일, 데르나 인근의 세누시 진영은 무혈 점령되었다.서부의 이탈리아 군은 세누시 군에 시달리던 동부와 달리 쾌속 진격하여 6-7월에 미즈다, 수크나 등지를 점령하며 본격적으로 페잔 원정에 착수했다. 그리고 10월에 부임한 신임 키레나이카 총독 지오반니 아메글리오는 세누시 측과 협상에 나섰다가 결렬되자 11월부터 공세에 나서 1913-14년 겨울동안 아즈다비야와 슬론타 등을 점령했다. 이에 세누시 군은 산지로 철수해 방어에 치중했다. 1913년 여름 페잔 총독으로 임명된 안토니오 미아니 역시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그는 시르테의 병력을 수크나에 집결시킨 후 12월부터 페잔에 진입했고, 현지 부족장 모하메드 벤 압달라는 3차례 반격에 나섰으나 결국 전사했다. 이후 이탈리아 군은 사브하에 이어 1914년 8월에는 페잔의 중심 도시인 가트까지 점령했다. 7-9월에 걸쳐 이탈리아 군은 데르나 방면에서 여러 거점들을 점령했으나, 우기가 다가오며 진격을 멈췄다.
1914년 9월에 재차 공세에 나선 이탈리아 군은 카울란의 세누시 군을 격파했다. 이후 세누시야는 한동안 키레나이카 지역에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 다만 곧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며 리비아의 완전 정복에는 실패하고, 주민들이 무장 투쟁에 나서기 시작하며 이탈리아의 내륙 지배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당국도 트리폴리와 벵가지의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여 효과적인 대응에 나서려 했으나, 주둔 병력이 10만에서 7만으로 감소하고 한동안 항공 전력도 철수하는 등의 악조건 속에서 방어에만 일관했다. 이탈리아군은 거점들 외의 해안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등 강경책으로 통제를 시도했고, 이로써 주민들의 불만이 축적되며 저항의 규모만 커졌다.
2.3.1.2. 1차 대전과 대반격 (1914-15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5세는 성전 (지하드)을 선포하고 세누시야에 협조를 구했다. ‘칼리파’의 선언에 고무된 현지인들의 습격이 잦아졌다. 1914년 8월에 가트를 점령한 이탈리아 군도 무장 투쟁이 발생해 결국 철수했다. 이미 유럽 전선에 자원을 보내야 했던 트리폴리와 벵가지의 이탈리아 당국은 내륙 거점들의 주둔군에게 해안으로의 철수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안토니오 미아니는 젤라 오아시스의 세누시 군을 격파하며 퇴로 확보에 나섰다. 하지만 1914년 11월 28일, 저항군은 사브하의 이탈리아 주둔군을 습격해 전멸시켰고 우바리를 포위했다. 12월 11일, 미아니는 기존 집결지이던 비라크 및 마르주크를 포기하고 수크나에 당도했다.하지만 그곳에서 해안까지 행군하며 저항군의 게릴라 전에 시달리며 1천 2백의 병력만이 미수라타에 당도했다. 가다메스, 날루트 등지의 주둔군도 트리폴리로 철수했다. 다만 이후 부임한 트리폴리타니아 총독 체사레 타소니는 일정 수준의 번격에 나서 1915년 1월에 가다메스를 재점령했고, 미즈다 등 남은 내륙 거점들의 유지를 명령했다. 1915년 3월, 키레나이카 총독 역시 기동대를 투입해 세누시 군대를 약화시키려 했다. 슬론타, 마르지 등지에서 이탈리아 군은 세누시 진영들을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밀수한 무기로 전력을 강화한 세누시 군은 아즈다비야에서 방어에 성공했다. 그러던 4월 28일, 6천의 세누시 군은 비슷한 수의 이탈리아 군을 카스르 부 하디 전투에서 5백여명을 전사시키고 격파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세누시 측에 기울었다.
전투 후 세누시야는 독일-오스만측 물자 지원을 상회하는 총탄 610만발, 야포 37문, 기관총 20정, 소총 9천여 정, 포탄 2만 8천여 발, 차량 37대 규모의 물자를 노획하며 더욱 강해졌다. 아도와 전투 후 최악의 패배를 겪은 이탈리아 군은 혼비백산하여 5백여만이 해안으로 도주했고, 세누시 군은 미수라타를 거쳐 트리폴리 남쪽 20km 지점인 벤 가쉬르까지 추격했다. 트리폴리타니아의 상황이 전해진 5월에 키레나이카 내륙의 이탈리아 주둔군에게 해안으로의 철수 지시가 내려졌다. 5월 13일, 저항군에게 포위된 타르후나의 구원을 위해 아지지야에서 출정한 7백의 이탈리아 군은 해발 300m의 아부 아르쿠브에서 마수드 앗 슈와이크가 이끄는 무자헤딘의 습격을 받았다. 이탈리아 군은 2백이 포로가 되고 나머지는 대부분 전사하는 등 전멸되었고, 이로써 타르후나 역시 상실했다. 결국 7월 5일, 트리폴리타니아 총독부 역시 내륙 주둔군에 대한 전면적인 철수를 명령했다.
하지만 이미 도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이탈리아 주둔군의 운명은 참담했다. 비교적 북쪽이던 타르후나의 주둔군의 전멸에 이어 베니 울리드의 1천 주둔군은 항복했다. 미즈다와 카바우 주둔군 역시 항복했고, 예프렌의 주둔군 물자를 대부분 버린 채로 자위야로 철수했다. 날루트 주둔군은 철수 도중 절반을 잃었고, 가리안 주둔군만이 아지지야를 거쳐 트리폴리로 온전히 철수했다. 가다메스의 주둔군은 해안으로 가는 긴 여정을 포기하고 바로 옆 국경을 넘어 프랑스령 튀니지로 철수했다. 미수라타의 4천 5백 주둔군도 항구로 피신했고, 주와라와 즐리텐의 주둔군은 해상으로 대피했다.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군은 3천이 전사하고 2천 4백이 포로로 잡히는 피해를 입었고, 야포 30문과 소총 1만 5천정 및 막대한 탄약과 장비를 상실했다.
8월 들어 이탈리아령 트리폴리타니아는 트리폴리, 훔스, 미수라타 항구, 타주라 정도만이 남았다. 그중 트리폴리의 4만 이탈리아 군은 도시 주변에 방벽을 세우고 기관총 포탑을 구축했다. 10월까지 아브야르, 시디 가르바아, 자위야 등지의 주둔군이 벵가지로 철수했고 트리폴리타니아와 달리 대규모 혼돈이나 연패를 겪지 않았다.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는 벵가지, 마르지, 키레네, 데르나, 토브룩에 국한되었다.
2.3.2. 영국령 이집트 침공
영국령 이집트 (이집트 술탄국)로 진격하는 세누시 군대
191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누시야와 영국령 이집트와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다. 1차 대전이 본격화되던 1915년 기준 세누시 군대는 1만에 이르렀고, 근대적 화기로 무장했으며 매일 1천발의 총탄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다. 한편 1914년 11월에 영국의 선전포고와 함께 이라크 침공에 직면한 오스만 제국은 수에즈 운하를 빼앗기 위한 시나이 침공을 개시하며 세누시 측에게 영국령 이집트의 후방을 교란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15년 2월, (엔베르 파샤의 이복형제) 누리 베이와 자파르 파샤 등의 오스만 사절이 당도하여 영국령 이집트의 전초기지 솔룸을 공격함으로써 세누시-영국 전쟁을 유도하려 했으나 저지되었다. 다만 독일 잠수함 (유보트)들을 통한 오스만 측의 무기 지원과 함께 누리 베이는 세누시 군대의 지휘권 및 신병 훈련을 맡게 되었고, 갈리폴리 및 이라크 전선으로의 전출로 인해 이집트 주둔 영국군의 규모가 축소된 것을 알게 된 아흐마드는 영국령 이집트 침공을 결심하게 되었다. 5월 19일에는 유보트를 통해 오스만, 독일 장교들이 솔룸 인근에 몰래 상륙해 세누시 측에 합류했다.
5천의 세누시-오스만 군대는 시와 오아시스에 집결하여 솔룸, 메르사 마트루, 엘다바의 해안과 바하리야, 파르파라, 카르가, 다클라 오아시스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리비아 해안 전선이 안정되던 1915년 늦여름부터 세누시야와 영국간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미 8월 15일에 영국군 잠수함장이 솔룸 인근에서 거수자들을 조사하려 했다가 총격을 당하는 일이 있었지만, 세누시 측이 이탈리아 군으로 착각했다며 해명하자 영국 당국은 의심하면서도 아흐마드를 참전 쪽으로 기울게 하려는 공작이라 여겨 일단 믿는 척했다. 8월 21일 이탈리아에는 이탈리아가 대오스만 선전포고를 하며 3년 전에 멈춘 오스만 조와의 전쟁 재개를 선언했고, 우시 조약의 오스만측 특권을 폐지했다.
이탈리아의 대오스만 선전포고와 함께 1915년 여름부터 영국은 이탈리아 편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세누시야는 반대로 더욱 독일-오스만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후 리비아 주둔 오스만 군은 미수라타 등지를 통해 독일 잠수함들의 보급을 받아 대이탈리아 항전을 강화했다. 그러자 영국군은 오스만 측의 밀수를 차단하기 위해 키레나이카 해안 및 육상 국경을 봉쇄했다. 영국의 봉쇄로 식량이 부족해진 세누시야는 (이드리스의 반대에도) 더욱 주전파가 득세하게 되었고, 오스만 조정은 아흐마드를 트리폴리타니아 총독에 봉하며 이교도 영국과 그 동맹들에 대한 지하드 선포하게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카스르 부 하디 전투 이후 트리폴리와 키레나키아 내륙의 이탈리아 군이 철수하며 많은 무기와 물자를 얻은 성과가 전해지자 아흐마드는 이집트 침공에 대해 더 많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2.3.2.1. 이집트 서부 점령 (1915년 말)
- 초기 점령지: 솔룸, 부크부크, 시디 바라니
아흐마드는 휘하 병력에게 11월 21일까지 국경을 넘을 것을 명령했고, 알렉산드리아의 민심이 동요했다. 솔룸이 취약하다 여긴 영국 당국은 1백에 달하는 일대의 병력을 해상으로 후방의 메르사 마트루로 철수시켰고, 알렉산드리아와 철도로 연결된 엘다바로 증원 병력을 보냈다. 4만의 영연방-이집트 혼성군은 엘다바, 메르사 마트루, 파이윰, 와디 나트룬 등지에 배치되었다. 11월 22일 밤에는 솔룸과 메르사 마트루 사이 시디 바라니의 수비대가 세누시 군의 야습을 막아낸 후 메르사 마트루로 철수했다. 이틀 후에는 솔룸과 시디 바라니 사이의 부크부크의 수비대가 철수되었는데, 그중 134명의 이집트 군인들이 176마리의 낙타 등의 장비와 함께 세누시 측에 투항했다. 놀란 영국 당국은 메르사 마트루의 이집트 군인들을 델타 지역으로 후송시켰다.
한편 세누시 군의 장악한 솔룸에는 곧바로 유보트의 보급품 전달이 시작되었다. 12월 들어 메르사 마트루에는 1천 4백의 수비대가배치되었다. 12월 11일, 메르사 마트루에서 정찰대가 출격해 서쪽의 두와르 후세인에서 3백의 세누시 군과 교전했다. 화력에 밀린 영국군은 잠깐 후퇴했다가 증원 병력과 함께 돌아와 와디 세나브를 점령했고, 세누시 군은 (독일군 교관 스노우를 포함한) 80명의 전사자 및 16명의 포로를 남긴 채로 철수했다. 이후 영국군은 와디 하셰피아트에서 1천여 세누시 군과 교전했고, 영국과 세누시 군은 각각 70여명과 2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뒤이어 세누시 군은 메르사 마트루에 기습을 가했으나 격퇴되었다. 12월 15-24일이 악천후가 지난 후 5천여 세누시 군은 메르사 마트루 서쪽의 메드와 산과 할라진에 집결해 도시를 봉쇄하려 했다. 이에 영국군은 아침에 기습 공격을 가했고, 비록 당초 계획대로 세누시 군을 포위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시크 부대의 활약으로 일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때 세누시 군은 3백의 전사자와 80마리의 낙타 및 20명의 포로를 남기고 철수했다. 영국군은 60여 사상자를 냈다. 이후 세누시 군은 교전을 피했고, 영국군이 다가올 때마다 진영과 가축을 두고 철수했다. 그동안 영국 당국은 메르사 마르투의 전선 연락망을 재건하고 방비를 강화했다.
2.3.2.2. 영국의 반격 (1916년 초)
한달 이상 숨바꼭질이 이어지던 1916년 1월 22일, 악천후 속에서도 영국군은 메르사 마트루 서남쪽 방면에 세워진 아흐마드의 진영을 공격했다. 세누시 군은 기관총을 동원해 완강히 저항하며 영국군을 포위하려 시도했으나, 시크-뉴질랜드 부대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이후 영국군이 공세로 전환하자 세누시 군은 2백여 전사자를 남긴 채로 철수했다. 땅이 질퍽해져 추격하지 못한 영국군은 31명의 전사자와 3백여 부상자를 냈다. 2월에는 포트사이드에서 발진한 영국의 초기 항공모함이 시디 바라니 인근 아자지야 (아가기아)의 세누시 진영을 포착한 후 영국군은 재차 공세에 나섰다. 세누시 군의 강한 저항으로 역시 철수했던 영국군은 재정비 후 반격했고, 철수하던 세누시 군은 영국측 요먼 기병대의 습격으로 괴멸되었다. 아지지야 전투로 세누시 군은 5백의 전사자와 40여 포로 및 낙타 60 마리의 피해를 봤고, 영국군도 2백여명이 전사했다. 포로 중에는 자파르 파샤를 비롯한 3명의 오스만 장교가 있었고, 이로써 야전 지휘관을 상실한 세누시 군은 크게 위축되었다. 승리 후 영국군은 2월 28일에 시디 바라니를 무혈 점령했고, 재정비를 거쳐 천천히 진군한 끝에 3월 11일에 부크부크에 당도했다.그리고 마침내 3월 14일에 세누시 군이 전날 빠져나간 솔룸을 탈환했다. 이후 영국군은 차량을 동원해 패주하는 세누시 군을 추격했고, 대부분 저항하지 못하며 도주했다. 오스만 부대만이 최후의 저항에 나섰다가 영국군에 전사자도 내지 못한 채로 괴멸되어 30여명이 포로로 잡히고 야포 3문, 기관총 90정, 총알 25만발이 노획되었다. 문서와 포로들의 증언을 통해 영국 잠수함의 포로들이 서쪽 190km 지점의 비르 하킴에 수용되어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영국군은 3월 17일 새벽,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지휘 하에 45대의 차량을 통해 기습에 나섰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란 간수들은 가족과 함께 도주했고, 그간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았던[11] 포로들의 만류에도 그들의 피골이 상접한 모습에 분노한 병사들의 발포로 2명의 아기를 제외한 세누시측 간수 및 민간인 전원이 학살되었다. 이후 영국군은 구출된 92명의 포로들과 솔룸으로 돌아갔다.[12] 해안 전역 이후 전세가 영국 측에 기울며 기근에 시달리던 아울라드 알리 부족이 투항해 왔고, 남아프리카 여단도 후방으로 회군했다. 이로써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우려도 불식되었다.
1916년 2월 11일, 아흐마드는 영국군이 솔룸 탈환에 집중한 틈에 5백의 세누시 군대를 이끌고 바하리야와 파라프라 오아시스를 점령했다. 이에 다음날 영국 공군이 바하리아에 폭격을 가했고, 세누시 군은 곧 철수했다. 며칠 후 세누시 군은 대신에 다클라 오아시스를 점령했고, 이에 미냐의 주둔군이 아시유트로 남하해 전초 기지를 구축했다. 또한 베니수에프에는 통합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한편 세누시 군의 다클라 점령 이후 카르가 주둔군은 철도를 통해 철수했고, 세누시 군이 카르가를 장악했으나 해안에서의 패배 소식이 들리자 사기가 저하되어 3월 말경에 철수했다. 이에 1천 6백의 영국군이 카르가에 재배치되었다. 3월 20일에 영국군은 카이로 서쪽 150km 지점의 모가라 오아시스에도 전초기지를 세웠다. 동시에 영국 당국은 카르가-모가라, 베니마잘-바하리야 간 철도 건설 및 사말루트-바흐리야 도로 간 초소 건설을 지시했다. 호주군의 낙타 및 차량 부대는 서부 사막을 순찰하며 세누시 세력을 내륙 오아시스들에 고립시켰다.[13] 한편 4월에 솔룸에서 파견된 정찰대들은 여러 세누시 거점들을 습격하며 탄환 30만발 등의 물자를 노획 혹은 파괴했다.
2.3.2.3. 사막 전쟁 (1916-17년)
1년 가까이 방어에 치중하던 이탈리아 군 역시 1916년 5월에서야 트리폴리 서쪽의 주와라를 재점령하며 한숨을 돌렸고, 7월에는 이탈리아 군이 국경 인근인 바르디아에 병력을 파견해 솔룸의 영국군과 협동 순찰에 나섰다. 양측은 함께 세누시 낙타 행렬을 습격하는 등 해안 지대의 국경을 평정했다. 8월에 이탈리아군은 내륙 오아시스의 세누시 거점들에 대한 제한적 공세에 나섰다. 9월 20일에는 트리폴리를 위협하던 벤 가쉬르의 세누시 진영을 파괴했고, 시디 빌랄을 재점령했다. 9월부터 강화된 항공 전력은 10월 들어 트리폴리 근교 각지에서 폭격을 가할 정도로 이탈리아 군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동안 인프라 구축에 힘쓰던 영국 당국은 10월 4일에 다클라에 대한 공세에 나섰고, 이 첩보를 접한 아흐마드는 질병과 굶주림으로 약화된 2천여 군대로 맞서는 대신 5일에 걸쳐 시와로 철수했다.영국군은 바하리야 인근에서 세누시 군대의 후미를 타격하려 했으나 험악한 지형으로 인해 실패했다. 한편 카르가에서 출격한 영국군은 10월 17일, 다클라에 당도하여 미처 본대를 따라가지 못한 120여 세누시 잔존 병력을 포로로 잡았다. 낙타 부대는 이틀 후 다클라 서쪽의 비르 셰이크 모하메드에서 40여 포로를 잡았다. 일대를 수색한 끝에 50여 포로를 더 잡은 영국군은 11월에 파라프라 오아시스도 접수, 더 많은 포로를 잡았다. 1917년 1월, 아흐마드가 1천 2백의 병력과 시와를 떠나 자그부브로 향한다는 첩보가 전해지자 영국군은 세누시 병력을 소탕하고 아흐마드를 사로잡기 위해 출정했다. 2월 2일에 메르사 마트루에서 남하한 영국군은 시와 서북쪽의 기르바와 자그부브 사이의 가기브 고개에 매복하고 세누시 군을 기다렸고, 기동대는 곧장 기르바로 향했다. 기르바에 있던 850의 세누시 군은 습격에 놀랐으나 모하메드 살레흐의 지휘 하에 침착히 교전했고, 2월 4일 아침에는 상점들에 불을 지른 후 철수했다. 2월 5일, 영국군은 시와를 점령했고 철수하는 세누시 군을 추격했다.
영국군의 매복을 만난 세누시 군은 저항을 이어가며 영국 차량들이 지형에 막혀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병력을 양분해 아흐마드 등 주력을 모래 언덕이 많은 우회로로 보냈다. 영국군은 결국 추격을 포기한 후 철수했고, 세누시 군은 40여 병력과 40마리의 낙타만을 잃은 채로 무사히 2월 8일에 자그부브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한편 이집트 원정의 실패로 인해 사실상 실각한 아흐마드 대신 실세로 떠오른 이드리스는 영국 및 이탈리아와 휴전 협상에 나섰다. 4월 12일 영국, 4월 14일 이탈리아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1920년 들어 저항군의 공격으로 미수라타와 베니 울리드의 주둔군이 철수하고 시르테이 주둔군 역시 위협을 받자 이탈리아 당국은 재차 트리폴리, 훔스, 주와라, 아지지야에만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나마 아랍 중심적인 트리폴리타니아 공화국에게 축출된 나푸사 산지의 베르베르 부족들이 주와라의 진영에 합류한 것이 이탈리아에게는 희소식이었다. 1921년 이탈리아 당국은 이드리스와 부 마리암 협정을 맺어 이탈리아, 세누시 군의 공동 경비에 합의했다. 이후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 군은 대부분 귀국했다. 하지만 트리폴리타니아 공화국이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무력 투쟁에 나서고, 세누시 군대 역시 이따금씩 공세에 나서는 등 협정은 점차 백지화되었다. 분쟁 끝에 1922년, 이탈리아 군이 미수라타를 점령하자 약화된 트리폴리타니아 공화국은 이드리스에게 트리폴리타니아의 에미르 직위를 헌납하며 자진 흡수되었다. 이로써 리비아 내륙은 세누시야의 지도 하에 통합되었다. 다만 이드리스는 이탈리아의 체포를 우려해 이집트로 망명해 원격으로 지도를 이어갔다.
2.4. 무함마드 이드리스 1세
2.4.1. 대이탈리아 항전
세누시 저항군을 지원하기 위해 온 무스타파 케말 파샤
1920년 10월 라즈마 협정. 쿠프라, 잘루, 아즈다비야, 아우질라, 자그부브에서의 자치 인정.
2.5. 독립 후
자세한 내용은 리비아 왕국 문서 참고하십시오.2.6. 카다피 정권 하에서
파괴된 채로 방치된 자그붑의 이드리스 1세의 궁전 유적
[1]
그의 손자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알 이드리시는 후일 아시르 토후국을 세운다 (1908 ~ 1930)
[2]
마스지드 알 하람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산
[3]
시와, 자그붑, 쿠프라, 보르구 등. 서구에서는 중부 수단으로 불렀다
[4]
실제로 트리폴리와 벵가지 같은 해안에서조차 세누시 종단이 오스만 총독들보다도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5]
아젬자데는 그 여정을 바탕으로 1897년 '아프리카의 대사하라 여정'이란 책으로 출판하였다.
[6]
전자의 딸 카디자와 후자의 아들 파달라가 결혼함
[7]
앗 사누시의 차남 무함마드 앗 샤리프 (1896년 사망)의 아들
[8]
와다이 술탄국 내에서 세누시 상인이 살해되면 술탄이 직접 복수하고, 상인이 현지인을 살해하면 술탄이 배상했을 정도..
[9]
다르 투마, 다르 기므르, 다르 마살리트
[10]
그 과정에서 1백여 주민이 피신한 모스크를 그대로 방화하는 만행도 저질렀고, 이에 다른 유럽 국가들이 비판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피살당한 자국 군인 사진을 게시하며 학살을 정당화하는 추태를 보였다.
[11]
기근으로 4명이 아사한 것 외에는 나름 괜찮은 포로 생활을 했다고
[12]
포로들은 이후 알렉산드리아로 이송된다
[13]
세누시야의 거점인 시와에서 이집트 주요부로 가는 길은 1. 시와 – 군소 오아시스 – 바하리아 – 미냐 2. 시와 – 파르파라 – 다클라 – 카르가 – 나일의 2가지 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