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4 17:38:25

서윤복

<colbgcolor=#00001b><colcolor=#ffffff> 서윤복
徐潤福|Seo Yunbok
파일:서윤복옹.jpg
출생 1923년 1월 9일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녹번리[1]
(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녹번동)
사망 2017년 6월 27일 (향년 94세)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3유공자 묘역-17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60cm
학력 화광보통학교 ( 졸업)
경성상업실천학교(現숭문고등학교) ( 졸업)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 상학 48학번[2] / 학사)
직업 육상 선수 ( 마라톤 / 은퇴)
육상 감독은퇴
지암(志巖)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 및 사후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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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육상 선수.

2. 선수 경력

파일:서윤복마라톤.jpg
(보스턴 마라톤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서윤복의 모습[3])

1947년 제51회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해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4] 당시 감독과 코치는 손기정 남승룡[5]이었다. 이는 광복 이후 국제대회에 KOREA라는 이름으로 태극기를 달고서 출전, 수상한 첫 우승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스포츠 역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 귀국 이후에 여운형을 만났고 또 김구를 만나 족패천하(足覇天下, 발로 천하를 제패하다)라는 붓글씨를 선물로 받았다. 이후 1950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는 함기용 선수가 우승했다.

당시 미 군정으로부터 보스턴 마라톤 대회 정보를 듣고 출전 결정 후 미 군정의 도움으로 여비를 마련하고 미군 군용기를 얻어타고 가는 등[6] 대회 출전 전부터 고생을 했다. 불과 대회 개막 일주일 전에 대회 장소에 도착했다. 게다가 그는 풀코스 완주를 겨우 두 번밖에 경험하지 않았다. 우승 후에는 배를 타고 인천항을 통해 입국했다.

1948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으나 페이스 난조로 2시간 59분 36초를 기록해 27위에 그쳤고 1949년 결국 은퇴하였다. 서윤복이 일등으로 들어올 때 그에게 물을 건네주기로 한 사람이 신나서 춤을 추다가 물을 쏟은 일화도 유명하다. '1947 보스톤', 마라톤 승리 뒤엔 십시일반 사람들 있었다…TMI 공개

3. 은퇴 이후 및 사후

1960년까지 숭문중학교 육상 감독을 맡았다. 올림픽 아시안 게임에서도 남자 육상부 감독을 맡았다.

후진 양성에도 힘쓰다가 2017년 6월 27일 서울특별시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2년 만인 2019년 5월 14일에 서울 동작구의 국립서울현충원 제3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선배이자 스승인 손기정 옹이 2002년 타계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것에 이어 육상 선수 출신으로 국립 묘지에 안장되는 사상 두 번째 사례이며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는 체육인으로서는 최초다.

4. 기타

  • 선수 시절 스포츠의 악습인 경기내용 판돈걸기와 사행성 행위의 유혹으로부터 흔들림 없이 의연했으며, 1949년 올림픽에서의 실패에 수긍하고 빠른 은퇴를 결정했을 만큼 기개 높은 인물이다.
  • 그가 백범 김구로부터 우승기념으로 받은 족패천하 휘호 원본은 6.25때 아쉽게도 분실했지만 탁본은 남아 이를 토대로 현재도 모교 숭문고에 기념비로 세워져 있다. 대신 피난 중에도 보스톤 마라톤의 브로치형 메달 2점은 모두 지켜냈으며 사후 현충원 안장을 기념해 유족들이 국가에 기증했다.
  • 노년기의 알츠하이머 발병 후에는 기억이 온전치 못해 육상인들에게 누가 된다며 강연활동도 중지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의연한 태도로 투병 생활을 하여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작고하기 전에도 자신의 모든 기사를 스크랩해 두고, 사소한 것들은 잊었어도 보스턴 마라톤에서의 일화는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강연 중에 실수를 해선 안 된다는 지론으로 강연 제의는 모두 거절했던 것이다.


[1] #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응암리(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2] 당시 마라톤 영웅으로 소급 입학을 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을 적용받아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출처 [3] 실제 경기 당시 서윤복의 경기복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달려 있었는데 당시 한국이 미국의 군정 치하에 있었던 것을 반영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위의 사진은 '광복 후 한국의 첫 국제대회 우승'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태극기만 남기고 성조기는 일부러 지운 사진이다. [4] 이전 세계기록 보유자는 다름 아닌 그의 스승 손기정이었다. 손기정의 기록은 베를린 올림픽 출전 직전인 1935년에 세웠고 서윤복이 경신하기 전까지 12년 동안 지속됐다. 이는 현재까지도 마라톤 역사상 최장기 세계 기록이다. 당시 서윤복은 후반부 코너에서 선두에 섰다가 어떤 관객의 개가 달려드는 바람에 넘어져 무릎과 팔꿈치에 상처를 입는 부상을 당했지만 이후 2km 오르막길까지 질주해 우승을 따냈다. [5] 말이 코치지 무려 12등(2시간 40분 10초)을 기록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선수를 은퇴한지 오래된 무려 36살 무렵이다. 그리고 감독이자 같이 선수생활한 손기정과는 동갑이다(...) 참고로 끈기의 대명사 이봉주선수가 은퇴한 나이가 39살이다. [6] 그것도 미국 보스턴으로 직항한 게 아니라 ,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을 다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