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5 19:31:34

샤킬 오닐/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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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공격
2.1. 인사이드 장악력과 득점력2.2. 그 밖의 장점2.3. 최대 약점인 자유투
3. 수비4.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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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킬 오닐의 플레이 스타일을 서술한 문서.

2. 공격

2.1. 인사이드 장악력과 득점력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로우 포스트에서 전성기 오닐의 장악력은 역대 최고를 다툰다.[1][2] 인사이드의 오닐에게 볼이 투입될 경우 기본적으로 2, 3명의 수비수가 견제를 했다. 올랜도 시절부터 이런 더블팀, 트리플 팀을 기본으로 끌고 다니면서 페인트존을 초토화시켰고, 2000년대 초반 레이커스의 쓰리핏 시절에는 그런 파워를 극대화하기 위해 몸을 더 불리면서, 진정 막을 수 없는 선수가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각 팀마다, 특히 오닐과 자주 만나는 서부 컨퍼런스 팀들은 최소한 몸빵으로라도 오닐의 공격을 버텨줄 센터를 수급하는 게 발등의 불이었다.[3][4] 막말로 오닐과 같은 아주 좁은 로포스트 위주의 단조로운 공격 패턴만으로 NBA에서 이정도로 성공한 센터는 없고[5] 중장거리 슈팅이 센터의 필수항목으로 자리잡게 된 현대에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닐은 늘 그랬듯이 상대팀들의 골밑을 때려부쉈고, 그만큼 집중적인 견제 및 파울, 핵 어 샤크 작전 등을 당해야했다.[6]

이미 LSU 재학중 공식 경기에서 골대를 한 번 부숴먹은 오닐이지만, 루키 시절 올랜도 매직에 있을 때 시합 중 골대를 부순 사건은 우리나라에서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것도 두 번이나...[7] 과거 오닐의 스폰서였던 리복에서 이걸 가지고 오닐의 시그니처 신발인 샤크 어택을 홍보할 때 많이 써먹었다. 오닐이 골대 박살내는 영상. 중간에 연습경기등이 있긴 하지만, 공식 경기에서 오닐이 골대를 박살낸건 LSU시절까지 포함해 3번이고 NBA에선 2건이다.

오닐이 저지른 저 두 건의 사건때문에 NBA에서는 모든 구장에 예비 골대를 상비할 것을 의무화하는 규정을 신설했으며, 골대 자체도 절대 망가지지 않게 하중 규격을 상향했다. 그래서 이때 이후로는 백보드 부서지는 것 외에는 골대 자체가 주저앉는 정도는 잘 나오지 않는 편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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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BACKBOARDS/1
부숴버린 골대/1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오죽하면 중계방송 중에 나오는 선수 스탯에 저 기록이 자랑스럽게 올라와 있었다.(!!!)

NBA팀의 주전 센터라면 당연히 큰 키와 긴 팔을 가졌지만 이는 상대 수비수도 마찬가지인데다가 골밑은 평균적으로 2m 중후반에서 2m 10cm 이상에 110kg~120kg의 무지막지한 떡대의 덩치들이 좁은 공간에 집중되어 부대끼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골밑에서만 공격하면 체력소모가 극심한 데다 부상위험도 높다. 그런데 오닐은 이미 대학교때부터 같은 키의 센터들보다 최소 18kg이상은[9] 더 나가는 몸무게에서 나오는 똥파워로 골밑을 눌러버렸고, 데뷔때부터 NBA에서 상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피지컬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골 밑 싸움에서 매번 상대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괴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덩치와 운동능력, 거대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기술이, 그리고 뛰어난 재치와 시야라는 조합으로 상대 골밑진영을 이리저리 공략하니 수비하는 상대 입장에선 파울 말고는 확실한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오닐의 가장 큰 무기는 물론 포스트업. 거대한 덩치와 강력한 힘, 탁월한 센스로 자신에게 가장 알맞는 위치를 잡는데 능했으며,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절대 밀려나지 않았다. 발이 느린 편이라 재빨리 움직여 자리를 잡진 못했지만, 대신 앞을 가로막는 수비수들을 그냥 힘으로 밀어내며 자리를 잡았다.[10] 또한 시야가 좋아서 별로다 싶으면 바로 킥아웃 패스해주고 다시 자리를 잡고 볼을 요구하는 센스도 있었다. 일단 로우포스트에서 자리를 잡으면 백다운해서 골밑까지 간 다음 훅 슛/골밑 슛/덩크로 마무리하거나 턴어라운드해서 페이더웨이 한손 슛으로 마무리하는 능력도 있었다. 오닐의 경우 포스트업에서 백다운으로 가는 빈도수가 많았으며, 그 위력도 워낙 대단했다.

오닐이 포스트업만 잘했던 것은 아니다. 오닐은 당시 센터기준 상당한 볼핸들링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페이스업 상태에서 돌파해들어가는 능력도 괜찮았다. 일단 돌파를 하면 그는 조지타운 센터들의 특기인 러닝훅으로 마무리하거나[11] 바로 골밑까지 가서 마무리하곤 했다. 안그래도 몇 체급은 위인 오닐이 가속 붙은상태로 달려오면 보통 사람은 공포부터 느낄지도 모른다. 다만 2대 2 공격에서 픽앤팝은 슛거리가 짧아 당연히 불가능, 픽앤롤은 선호도 하지 않고 잘 하지도 못했다.

오닐은 재빠른 스핀무브로 돌파해들어가는 플레이도 위력적이었다. 스피드 자체도 있지만 이게 정말 무서운 이유가 상대 수비수는 오닐의 무게를 버티느라 죽을 힘을 다해 밀고 있는데 반대쪽으로 돌아버리면 금방 뚫리기 때문이다. 오닐 특유의 센스로 붙힌 별칭은 "Black tornado". 스핀무브를 이용한 돌파나 백도어 플레이 등 다양한 연계플레이가 있는데, 2000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7차전 막판에 포틀랜드를 상대로 날린 쐐기 득점이 바로 오닐의 스핀무브에 이은 골밑 컷+코비 브라이언트의 앨리웁 패스로 나온 그림같은 앨리웁 덩크였다. 스핀무브 자체가 시그니처라 해도 좋을 정도로 상당히 능숙해서 백다운+스핀무브 후 펌프페이크+덩크 콤보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기술 자체도 완성도가 높지만 이걸 NBA에서 가장 무겁고 강력한 오닐이 하면 그 파워에 수비수가 나가떨어진다. 역대급 수비수이지만 4대센터 중 가장 가벼웠던 로빈슨이 아주 제대로 당해 굴욕을 당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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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강력한 스핀무브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덩치에 비해, 아니 그냥 운동능력이 대단히 좋았다. 점프력은 레이커스 초창기만 해도 거의 림 근처까지 머리가 갈 정도로 높았으며, 스피드는 느린 편이었지만 순간움직임은 상당히 빨랐다. 300파운드를 훨씬 넘는 선수치고 체력도 좋아서 풀타임으로 뛰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그와 덩치가 비슷한 선수들(야오밍 등)이 체력적 문제에 시달리는 것을 생각하면 저 덩치로 평범한 7푸터만큼 오래 뛰어준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1990년대 센터들은 2020년대의 센터들에 비해 롱2를 회피하고 3점 슛을 거의 쏘지 않는 대신 공격에서 중거리 샷의 비중이 높았다. 이는 1990년대 센터들 뿐 아니라 농구의 여명기 때부터 계속된 것으로[12] 당시 센터들은 슈팅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20피트 밖에서 공격하는 경우가 드물어 골밑~중거리에서 많은 득점을 하곤 했다. 그래서 각 팀의 센터들이 로우포스트 바로 바깥~엘보[13] 부근 지역에서 포스트업 자세를 취하고 패스를 받는 것이 당시 모든 팀의 기본 공격 세팅이었다. 오늘날의 센터들이 확률 높은 골밑 슛 아니면 기대 득점이 높은 3점 슛을 선호하고 향상된 슈팅 능력을 바탕으로 간간이 롱2도 던지는 대신, 미드레인지는 버리다시피 하는 것과는 양상이 많이 달랐던 것.

오닐은 평균 30득점에 육박하는 득점원치고는 특이하게 공격범위가 매우 좁았는데,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범위가 끽해야 10피트(3미터) 정도까지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덩크, 레이업, 뱅크샷 범위에서 벗어난 거리에서 슛 시도 자체는 적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 거리에서는 손목 스냅을 제대로 쓰지 못해 다른 센터들처럼 점퍼를 쏘지 못했기에 베이비훅이나 특유의 '어깨로 밀어 던지는' 점퍼를 던졌고 성공률도 40%대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샷메커니즘으로는 자유투 라인 거리(약 4.2m) 정도에 이르게 되면 적중률이 급락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동시대 정상급 센터들인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알론조 모닝 등에 비해 3m를 넘어가는 미드레인지 샷의 비율이 현저히 낮았다. 그러다보니 종종 3점 슛을 시도해서 성공한 저들과 다르게 오닐은 3점 슛이 아예 없는 수준이었고 커리어 동안 딱 1개를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시간에 쫒겨 던지긴 했어도 무려 롱쓰리 버저비터였다. #[14]

2.2. 그 밖의 장점

본인이 마무리하는 빈도수가 많았지만 패스능력이 좋아 자기에게 수비가 몰릴 때 킥아웃해주는 데도 능했다. 이로 인해 슬래셔 선수와도 슈터 선수와도 조합이 좋았는데, 코비 브라이언트와 뛸 때에는 코비가 돌파해서 수비를 끌어온 다음에 오닐에게 빼주거나, 오닐이 수비를 끌어온 다음 생겨난 공간을 코비가 돌파해오는 조합을 보였다. 물론 코트 밖에서 문제였지만.

슈터의 경우 올랜도/레이커스에서 모두 호흡을 맞춘 베테랑 가드 브라이언 쇼가 찰떡궁합이었는데, 쇼는 받아먹기 외에도 오닐의 입맛에 딱 맞는 엔트리패스를 넣어주는 가드이기도 했다. 엔트리 패스의 경우는 앤퍼니 하더웨이도 오닐이 좋았다고 방송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 올랜도에서 호흡을 맞춘 '3D' 데니스 스콧도 궁합이 잘 맞는 선수였고, 이 세 선수는 오닐과 사이도 원만한지라 은퇴 후 방송에서 자주 언급하는 편이다.[15]

주요 공격옵션까진 아니었지만 가끔 페이스업으로 드리블 돌파를 할 때도 있었다. 오닐의 드리블과 볼핸들링은 1990년대에 데뷔한 센터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며, 한쪽 골대에서 반대쪽 골대까지 단독 드리블을 하다가 깨끗한 스핀무브로 수비수를 제치고 덩크를 꽂아넣기도 했다. 다만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페이스업을 자주하진 않았다. 워낙에 포스트업 옵션이 강력하기도 하고.

2.3. 최대 약점인 자유투

공격에서 유일한 단점은 자유투. 통산 자유투 성공률이 52.5%로,[16] 빅맨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좋은 편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 약점을 고치기 위해서 자유투 연습을 엄청나게 시켰는데도 끝내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 오닐은 손이 매우 큰 편으로 농구공에 나뉘어진 칸을 기준으로 3칸을 잡을 수준인데 큰 손이 자유투에 불리하고, 자연스럽게 스냅을 줄 수가 없어서 공을 손가락 위에 얹어서 밀어 던지는 수준이었는데, 당연히 슛 메커니즘 상 매우 불리할 수 밖에 없다.

똑같이 손이 큰 것으로 유명한 마이클 조던, 카와이 레너드의 통산 자유투 성공률이 8할 중반대인 걸 보면 그냥 못던지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저들은 역대 최고수준의 미드레인지를 자랑할 정도로 중거리 구간에서의 슈팅을 극한까지 단련한 선수들이라 태생이 골밑 득점원인 오닐의 비교대상으로 적절치 않다. 기계와도 같은 극도의 반복 연습으로 유명한 레너드조차 본인 스스로 손이 너무 큰 나머지 슛감이 일정하지 않다고 말할 정도이니, 너무나 큰 손이 슈팅과 자유투에 불리하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더군다나 어린 시절 손목을 다쳐 스냅이 자연스럽지 못한 점도 한 몫했다. 물론 아무리 그럼에도 50퍼 초반대의 성공률은 너무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오닐의 자유투 성공률은 거의 늘 자신의 야투 성공률보다 낮았기 때문에[17]오닐이 공을 잡으면 슛을 하기도 전에 먼저 파울로 끊어버리곤 했다. 심지어 팀파울에 걸린 상황에서는 공을 잡지도 않은 오닐에게 고의로 파울을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며 이런 작전을 가리키는 핵어샤크(Hack-a-Shaq)라는 신규용어까지 생겨났다. 디안드레 조던 등과 같이 자유투가 좋지 않은 선수에게 고의로 파울을 해서 자유투를 강제시키는 소위 '핵어' 작전의 시초였던 것.[18][19][20]

여담으로 손목스냅이 안 좋은 오닐에게 NBA 레전드 릭 배리가 했던 것처럼 언더핸드로 던져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커리어 내내 있었지만, 오닐은 끝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bvj_EuiKQY 그는 은퇴 후 인터뷰에서 그 이유에 대해 "지루하다(It's boring)"라며 "난 그런 것을 하기에는 너무 쿨하다.(I'm too cool for that)"라며 "난 릭에게 그렇게 쏘느니 차라리 0%를 쏘고 말겠다고 얘기했다"고 전했다. 언더핸드가 더 효과적이라고 입증되었단 말에 대해선 "두어명이 잘했다고 입증된 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21] 오닐은 이에 대해 "신이 날 겸손하게 하려고 이렇게 만든 것 같다"면서 자기가 재능으로 따지면 조던이나 체임벌린보다 더 뛰어나기에 이런 약점으로 겸손하게 만든 것 같다고.[22]

3. 수비

수비도 맨투맨 수비는 굉장히 뛰어났다. 높이/파워/운동능력을 겸비한 수비수인지라 그 누구도 오닐 위로 쉽게 득점을 하지 못했으며, 기동성과 장거리 슛을 모두 특급으로 갖춘 디르크 노비츠키에게 외곽에서 붙어 괴롭힐 정도로 뛰어났다.[23] 키와 점프력, 키에 비해서도 굉장히 긴 팔 덕분에 블록도 뛰어났으며 이 덕분에 커리어 내내 인유어페이스를 거의 당하지 않았다.

다만 인유어페이스를 거의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꼭 자랑할 것만은 아닌 게, 오닐은 굴욕을 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그런 일을 당할 것 같으면 그냥 피해버리거나 파울로 끊어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2004-05 시즌 당시 결별한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첫 맞대결에서 코비가 돌파를 해 덩크를 하려고 하자 파울로 끊어버린 게 대표적.

그는 기본적으로 능력에 비해 비교적 수비에 들이는 노력이 현저히 적은 선수였으며, 그가 수비수로서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데는 이것도 한 몫했다. 아이러니하게 오닐이 수비수로 가장 뛰어났던 시절은 기동성 측면에서 최전성기였던 루키 시즌이었다. 루키 시즌의 오닐은 138kg의 거구임에도 어지간한 당대 파워 포워드 수준의 스피드와 민첩함을 자랑했지만[24], 레이커스에선 안그래도 강한 파워를 더욱 늘리기 위해 공식 147kg, 비공식 153kg까지 체중을 불리며 스피드는 유의미하게 떨어졌기 때문.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세 차례 오를 정도로 수준급 수비수긴 했지만, 이건 사실 2000년대 초반에 1990년대를 주름잡은 센터들의 공백를 메울 신예들이 많이 없어서 엘리트 센터들이 일시적으로 씨가 말랐던게 크다. 2000-01 시즌에는 벤 월러스가 성장하기 전이었고 2002-03 시즌에는 디켐베 무톰보가 노화와 부상으로 30경기도 못 뛰었다. 1990년대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센터 부문은 정말 빡셌는데,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디켐베 무톰보가 모두 1990년대에 수비왕을 차지하고 그 밑에 패트릭 유잉도 다른 시대였다면 수비왕도 노려볼 정도라 수비의 달인인 알론조 모닝이 이들이 거의 전부 노쇠하고 난 1998-99 시즌에서야 데뷔 7년만에 처음으로 올-디펜시브 팀에 올랐다. 실제로 무톰보가 수비왕을 차지하고도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으로 밀린 시즌이 있을 정도였다. 즉, 1990년대에 센터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이라도 오르려면 사실상 수비왕급 수비력이 필요했다. 다만 1999-00 시즌에는 수비왕 투표에서 2위를 할 정도로 정말 잘했다. 레이커스 이적 이후 몇년간 플레이오프에서 허무하게 탈락하며 다소 매너리즘에 빠졌던 오닐은 이때 부임한 감독 필 잭슨의 체제 하에 살도 빼고, 수비에서도 온 힘을 다하며 생애 최고의 활약을 했다.[25]

축복받은 체격을 앞세운 맨투맨 수비에는 능했지만 가드와 콤비를 이루는 픽앤롤 등의 다양한 2대 2 전술을 쓰는 팀 상대로는 느린 발과 설렁설렁한 리커버리때문에 약점을 보였고[26], 레이커스 이적후 1997년, 1998년 2년 연속으로 픽앤롤 달인들인 존 스탁턴, 칼 말론의 유타 재즈에게 탈탈 털렸다. 필 잭슨이 들어온 이후에 팀 수비 전술을 다시 만들고 나서야 우승을 거둘 정도. 물론 이것도 그나마 나아졌다는 거지 오닐은 평생 좋은 2대 2 수비수가 되진 못했다. 느린 발 때문에 외곽에서 거의 쓸모가 없어 가드에게 붙기 힘들어했기 때문에 픽 이후 매번 골밑으로 뒷걸음치곤 했는데, 스탁턴과 말론처럼 두 선수 모두 슈팅력과 돌파력을 겸비한 공격수를 상대할 경우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오픈 찬스가 생긴다.[27]

"오닐이 현대농구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와 관련해 그를 로우포스트에서 막을 수 있는 빅맨이 현대농구에 없다는 것은 명확하지만, 반대로 현대농구 수비 트렌드에 가장 안 맞는 수비수가 오닐이기도 하다. 오닐은 수비력이 뛰어났지만 기본적으로 수비범위가 좁았으며 스위치 수비나 헤지, 리커버리에서 굉장히 약했다. 그러나 그가 전성기를 보내던 시점에는 빅맨들이 로우포스트 공격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이 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28] 예를 들어 공격범위가 넓고 공격기술이 다양한 하킴 올라주원의 경우에도 픽앤롤이나 픽앤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로우포스트에서 볼을 잡고 공격하는 경우가 주옵션이었다. 칼 말론의 공격을 오닐이 유독 못 막았던 이유가 그는 1대 1보다 2대 2 공격을 주로 하는 선수였기 때문.

이처럼 만약 오닐이 2020년대에 뛴다면 저 점은 큰 문제가 된다. 현대농구에서는 로우포스트에서 정직하게 몸으로 부딫히며 밀고 들어가는 빅맨이 오히려 소수이기 때문이다.[29] 즉 오닐의 수비 스타일 자체가 말론같이 기동력+슈팅력을 겸비해서 2대 2 농구를 하는 빅맨들에게 약했는데, 현대농구엔 말론같은 선수들이 넘쳐난다. 최근 몇년간 올-NBA 팀 센터 포지션에 오른 니콜라 요키치, 조엘 엠비드, 루디 고베어, 앤서니 데이비스, 칼앤서니 타운스 중 어차피 팀에서 주요 공격옵션이 아닌 고베어를 제외하곤 전부 2대 2농구가 가능하고 공격범위가 매우 넓은 선수들이다. 저들은 슈팅력만 보면 롱2까지였던 말론보다도 더욱 길다.

물론 모든 레전드들이 그렇듯이 이들의 플레이 스타일은 각 시대에 맞게 진화한 결과이다. 오닐이 농구를 배우던 시절에 빅맨은 로우포스트에서 붙는 것이 당연시되었기에 오닐은 로우포스트 공략에 맞게 플레이 스타일을 만든 것이다. 요즘 선수였다면 벌크를 다소 줄이더라도 기동력을 살리고, 2대 2 수비력을 키웠을 확률이 높다. 또한 기본적으로 오닐은 시대를 불문하고 같은 빅맨들조차 1대1 매치업이 어려울 정도의 로우포스트 존재감을 자랑하던 선수였기에, 그를 기용하는 팀에선 수비에서 핸디캡을 감안하고 이를 보완할 인사이드 파트너를 붙혀주는 식의 기용을 할 수 있다. 설령 트렌드에 안 맞는다고 해도 워낙 막강한 위력을 지녔기에 전성기 아이버슨처럼 다소 변칙적인 로스터 운영으로 기용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선수였다.

4. 종합

2000년대 초반 NBA를 지배한 정통파 센터였다. 압도적인 스탯과 성적뿐만 아니라 세 번의 파이널 MVP는 오닐이 리그를 지배해 왔음을 증명한다.[30]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한 뒤에는 올랜도 시절보다도 몸을 키워 파워를 증량하고 원래 가지고 있던 스피드와[31][32] 유연함에 여러 기술들까지 탑재해, 원숙해진 개인공격력은 물론이고 골밑에서 3점 라인까지 커버하는 시야와 패스능력으로 리그의 지배자가 된다. 올스타전을 앞두고 가진 연습에서 마이클 조던과 1:1로 농구 하는 장면에서는 가드같은 스피드로 드리블을 하고 가볍게 스핀무브를 해서 조던을 농락하기도 했다.

키가 216에 체중은 140kg을 상회[33]하는 파워로 상대 빅맨이 인사이드로 파고드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에다, 점프력은 버티컬 70에 손은 솥뚜껑만한 소도둑이 그 축복받은 신체를 완벽하게 컨트롤하니, 수비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했다. 다만 안그래도 거대한 몸을 레이커스 이적 후 더 불리면서 무릎과 발가락이 성하지 못했는데, 이는 레이커스 전성기 이후 오닐의 커리어를 계속 괴롭혔다.[34][35]

나이가 들면서는 체력적인 문제로 출장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전성기 때는 체력 또한 괴물급으로 경기당 출장시간이 35~40분이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나쁘냐? 오닐은 NBA 역사에 손꼽힐만큼 BQ(농구 지능)가 높은 빅맨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장점인 힘과 높이를 지능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막아도 막아도 대책이 안서는 오닐을 위해 핵어샤크(Hack-a-Shaq)라는 전술이 등장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공잡으면 무조건 파울해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어차피 못 막는 거 오닐의 유일한 약점이자 심각한 약점인 자유투를 물고 늘어지자는 작전이다.[36] 이로 인해 통산 자유투 시도 개수가 11252개로 통산 NBA 4위를 기록하고 있다.[37] 자유투를 뺀다면 빅맨으로서는 그야말로 완전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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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장 기동형 빅맨들이 유행하는 현시대에도 오닐이 통할 거라는 견해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기동력이고 뭐고 초월적인 오닐의 골밑 존재감에 상대팀도 어쩔 수 없이 맞대응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2] 더구나 오닐은 저 체구와 힘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 체구에 나오는 운동신경과 기동력은 대단했으며 더구나 빅맨으로서 드리블 능력도 뛰어났으며 또한 BQ도 뛰어나 시야가 넓어 빈 공간에 동료에게도 잘 찔러 넣어줬다. [3] 대표적으로 시애틀 슈퍼소닉스에서 이미 전성기가 끝난 패트릭 유잉을 영입한 것을 꼽을 수 있다. [4] 샤킬 오닐의 거구가 당시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에 대해 Open Court에서 아이재아 토마스가 밝힌 일화로, 오닐이 올랜도에서 뛰던 당시 토마스 본인은 페니 하더웨이를 막고 있고 오닐은 '(빌 레임비어나 제임스 에드워즈가 아닌) 존 샐리같은 좀 작은 친구(somebody small)'가 막고 있었다고 한다. (샐리는 211cm의 장신이지만 호리호리한 편이라 빅맨치고 체구가 큰 편은 아니었다) 토마스는 샤크에게 볼이 투입되면 더블팀을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문득 뒤를 돌아보고 "아무도 샤크를 안 막고 있잖아!"라고 경악했다고 한다. 수비수가 샤크의 어마어마한 덩치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 [5] 자주 비교되는 고대 센터 윌트 체임벌린도 페이드어웨이와 긴 윙스팬을 필두로 한 특유의 플릭샷이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로우 포스트에서만 활동하면서 리그 최상급 선수급의 기량을 유지했던 선수는 아무리 좋게 쳐도 드와이트 하워드뿐인데, 그가 오닐에 못 미치는 선수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하워드는 리그 탑을 다투는 운동능력에 의존한 플레이를 펼치면서 센터로서 기본기가 부족했는데 이런 선수들이 전성기에는 리그에서 빛나던 선수였다가 전성기에서 내려오거나 부상을 당해서 운동능력이 하락하게 되면 빛을 잃게 된다. 샤크는 운동능력과 피지컬이 뛰어났음에도 BQ라든지 센터로서의 기본기가 아주 뛰어난 선수였다. 운동능력이 하락한 이후에도 NBA를 주름잡았던 건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6] 그 와중에 2001-02 시즌 시카고 불스전에선 분노가 폭발해 상대 센터 브래드 밀러에게 주먹을 휘둘러 출장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7] 더 충격적인 건 저 두 사건은 각각 1993년 2월 7일, 4월 13일 두 달만에 두 개의 골대를 박살냈다! [8] 정확히 말하면 덩크 슛 항목에 설명되어 있듯이 오닐의 백보드 파괴 사건은 그의 루키 시즌 두 번 일어났다. 첫번째로는 뉴져지 네츠와의 경기에서 구식 백보드를 아예 박살냈으며, 두번째는 피닉스 선즈와 경기에서 92-93시즌 개장한 아메리카 웨스트 아레나의 신식 충격흡수형 골대(breakaway rim)가 흡수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충격을 줘서 주저앉힌 것이다. 이후 93 오프시즌에 NBA 전체적으로 골대보강 작업을 했기 때문에 이후론 오닐 본인도 백보드를 파괴하진 못했다. [9] 이것도 상당히 보수적인 수치. 18kg이면 파운드로 40파운드 정도 됐는데, 오닐은 데뷔 당시 이미 300파운드 언저리의 무게였고, 당시 NBA센터들은 대부분 250파운드 언저리였다. 즉, NBA센터들과 비교해도 대략 22.5kg 이상 더 무거웠는데, 전반적으로 더 가벼운 대학 센터들은 비교도 안 되었다. [10] 이것때문에 90년대 말 ~ 2000년대 초중반까지 각 팀에는 샤크한테 힘으로 버텨낼 수 있는 덩어리 센터들이 한명씩은 있었다. 물론 후술하듯 샤크는 단순히 힘만 쎈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11] 그의 우상인 유잉의 주특기 중 하나가 바로 돌파에 이은 러닝점프훅이었다. [12] 카림 압둘자바, 빌 월튼, 모제스 말론, 로버트 패리시, 랄프 샘슨 등 1970년대 ~ 1980년대 센터부터 패트릭 유잉,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블라디 디박, 알론조 모닝, 릭 스미츠 등 득점 좀 한다는 센터들은 모두 중거리 슛에 능했다. 중거리 슛 옵션이 거의 없는 스타급 센터는 오닐같은 예외적인 제한다면 디켐베 무톰보 벤 월러스처럼 공격가담률 자체가 낮은 수비형 선수들이었다. 가장 샤크와 비슷한 타입인 윌트 체임벌린의 경우 자유투 성공률이 샤크와 맞먹을정도로 순수 슈팅능력 자체는 굉장히 구린 편이었지만, 나름 주무기였던 페이드어웨이에서 보여지듯 적어도 샤크보단 슈팅 레인지가 길었다. [13] 페인트존의 자유투 던지는 쪽 모서리 [14] 물론 일반인들도 쏠 수 있는 3점 슛을 NBA선수인 오닐이 못 쏘는 건 아니고, 쏘는 것 자체는 충분히 가능했다. 스튜디오에서 준비하고 쏘면 괜찮게 들어갈 정도. https://www.youtube.com/watch?v=le2D7dqeV5A 그러나 보다시피 슛폼과 릴리스가 투박해서 "적당히 잘하는 일반인 수준"에 불과해 NBA에서 통할만한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실제로 1995 올스타전 당시 장난삼아 3점 슛을 던져 에어볼이 나왔는데, 재밌는건 바로 다음 공격권에서 마치 응수하듯 하킴 올라주원이 3점 슛을 던져 적중시켰다. 어쩌다 찬스가 난 것도 아니고 올라주원이 대놓고 3점 라인 밖에서 기다리다 패스받아 쏜 것을 보면 확실히 의도를 갖고 한 것. 마브 앨버트 해설자가 "넌 할 수 없지만 난 할 수 있지롱~(You can't do it, but I can from downtown)"이라고 표현한게 정확하다. [15] 브라이언 쇼는 오닐이 인간적으로 가장 신뢰하는 동료 중 하나였고, 아웃사이더였던 코비와도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코비-샤크 갈등이 극에 달한 2003년에 둘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2003-04시즌 초반에 코비는 ESPN의 짐 그레이와 인터뷰를 통해 샤크를 강도 높게 디스했는데, 직후에 코비를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오닐과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당시 막 은퇴하고 스카우트로 일하던 쇼가 투입되기도 했다. 이때 같이 투입된 것이 호레이스 그랜트 칼 말론이었는데, 오닐이 이성을 잃고 사고를 칠까봐 나머지 팀원 중 가장 힘이 센 둘이 동원된 것. 당시 코비가 주장한 것은 오닐의 컨디션 관리를 못한다는 것은 물론 팀이 지면 다른 동료들 탓만 한다, 오닐이 몸상태가 엉망인게 들통날까봐 부상이 심한 척한다 등 상당히 민감한 내용이었는데, 심지어 그레이는 인터뷰가 그대로 나가면 자신과 샤크간 관계가 박살날 것을 우려해 일부 내용을 덜어냈다고 한다. [16] 가장 자유투 성공률이 높았던 시즌은 2002-03 시즌의 62.2%. [17] NBA 통산 야투 성공률 58.3%, 자유투 성공률 52.7% / 대학(LSU) 시절 통산 야투성공률 61%, 자유투 성공률 57.5% [18] 다만 오닐에게 가해진 핵어 작전은 그 가공할 득점력과 위력을 어떻게든 반감시켜보려는 의도가 강했던 반면 이후의 핵어 작전은 자유투가 좋지 않은 선수들을 벤치로 내보내려는 의도가 더 강하다. 오닐 외에 핵어 작전을 당할 정도로 자유투가 좋지 않은 선수들은 거의 대부분 공격력이 약한 대신 수비력이 좋기 때문이다. 벤 월러스, 드와이트 하워드, 디안드레 조던, 벤 시몬스 등. 이런 선수들을 코트 위에서 내려보냄으로써 상대의 수비를 약화시키는 것이 주목적이 되는 것이다. [19] 사실 오닐처럼 자유투가 좋지 않은데 공격력이 좋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NBA 역사 전체를 따져보아도 윌트 체임벌린 정도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 오닐이나 체임벌린처럼 타고난 신체조건이 엄청난 경우에는 슛이 없거나 약해도 탁월한 공격력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슛이 없다면 수비를 뚫어내지 못해서 받아먹기만 하는 선수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하킴 올라주원 등 공격력이 뛰어난 센터들은 아무리 못해도 70%는 넣어주고, 현역 센터 최고봉인 니콜라 요키치 조엘 엠비드는 넉넉히 80%를 넘는 자유투 슈터이다. [20] 결국 핵어 작전이 경기의 재미를 떨어뜨린다고 하여 현재는 쿼터 종료 2분 이내인 상황에서 공이 없는 선수에게 파울을 하면 자유투와 공격권을 같이 내주도록 규칙이 개정되었다. [21] 그런데 사실 언더핸드가 더 효과적인 슈팅법인 것은 맞다. 정상적인 폼으로 쏘면 스핀이 두 번 정도 들어가는데, 언더핸드의 경우 양손으로 스핀을 먹이기 때문에 3, 4번 정도 들어가는데, 스핀이 많이 들어가면 조금 빗나가더라도 림을 맞고 들어갈 확률이 높아진다. 또한 림이 10피트에 있기 때문에 포물선을 그리며 들어가야 하는데 아래에서 던지기 때문에 더 자연스럽게 높은 포물선을 그리게 된다. 실제로 윌트 체임벌린 역시 한 시즌동안 언더핸드로 던져 자유투 성공률이 10.9%나 올라갔는데, 체임벌린 역시 폼이 안 난다는 이유로 한 시즌만에 버렸다. [22] 오닐 본인은 조던이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항상 인정한다. [23] 물론 노비츠키는 오닐을 압도하는 스피드가 있었지만, 빅맨이라 제쳐내는데 한계가 있었으며 파워 자체가 너무 차이나서 힘들어했다. [24] '당대'로 한정짓는 이유는 4번 포지션의 트렌드 변화로 인해 현대농구의 파워 포워드는 오닐 시대의 파워 포워드보다 작고 빠르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파워 포워드들이 센터화를 겪었다면 현대의 파워 포워드들은 스몰 포워드화가 되고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25] 필 잭슨이나 코비 등이 오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오닐의 이때 활약은 뭔가 크게 실력이 늘은 것도 아니었다. 성실하게 몸관리하며 뛰어줬다는 것만으로 역대급 시즌을 보낸 것이다. 이렇게 몇년씩 할 수 있는 선수가 안 하니 동료나 감독 입장에선 아쉬운 것. [26] 해당 영상은 말년인 캐브스 시절이라 기동력이 더욱 떨어진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오닐의 수비는 페인트존 부근을 벗어나지 않는다. [27] 1998년 플레이오프에서 유타에게 힘 한 번 못 써보고 스윕당한 것도 같은 이유다. 당시 레이커스는 골밑의 오닐 외에도 올스타 가드 듀오 에디 존스 닉 반 엑셀, 벤치의 코비 브라이언트가 버티는 공격팀이었기 때문에 절대 스윕당할 전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주전 파워 포워드가 수비가 그리 뛰어나지 못하고 파워가 약한 로버트 오리. 오리는 말론의 파워를 당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오닐이 말론에게 붙을 때도 많았는데(유타는 반대로 센터의 공격력이 약했다) 운동능력이 뛰어난 오닐은 말론의 피지컬은 감당가능했지만 2대 2 플레이는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1997년 주전이었고 이 시즌에 벤치로 내려온 엘든 켐벨은 발이 너무 느렸다. [28] 물론 당시에도 케빈 가넷처럼 기동력이 있는 빅맨들은 있었지만, 당연히 오닐은 저런 선수들을 외곽까지 따라다니지 않았다. [29] 물론 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오닐이 말론을 못 막은 것처럼 말론 역시 (파워는 대등해도) 키가 크고 로우포스트에서 최강자였던 오닐을 효과적으로 틀어막진 못해서 서로 못 막는 구도였지 오닐이 말론에게 호구잡힌 것은 아니었다.(말론에게 진짜 호구잡힌 것은 파워가 현격히 딸렸던 샌안토니오 트윈타워였다) 그러나 오닐의 경우 체력 소모가 심한 1대 1 공격을 하면서 점수를 쥐어짜는 것이고, 말론은 재즈의 모션 오펜스가 부드럽게 돌아가면서 하는 공격이기에 개인득점은 비슷해도 전반적인 팀공격이 더 부드럽게 흘러간 것이다. 실제로 98서부 파이널 스탯을 보면 득점 자체는 오닐 31점, 말론 30점이지만, 재즈는 팀야투율이 51.4%에 달하는 반면, 레이커스는 39.9%에 불과했다. 오닐에게 줄 점수는 주더라도 지나치게 어그로가 끌리지 않게 함으로서 팀공격을 뻑뻑하게 한 것. [30] 단, 그 몸을 유지하느라 정규 시즌에는 결장이 잦아서, MVP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1번밖에 없다. 그럼에도 단기전에서 3번의 파이널 MVP라는 것은 오닐이 우승팀의 진짜 에이스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파이널 MVP도 1번 받는 것도 어렵지만 정규 시즌 MVP도 1번 받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닐이 정규 시즌도 매우 잘했던 선수로 볼 수 있다. [31]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운동능력이 NBA 평균수치는 가볍게 상회한다고 한다. [32] NBA는 프로필 업데이트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오닐이나 찰스 바클리처럼 체중 변화가 잦은 선수들은 정확한 체중이 반영되지 않는다. 오닐은 드래프트 당시 293파운드(133kg), 95년쯤 올랜도에서 303파운드, 레이커스 이적 당시 312파운드(141.5kg), 이후 첫 우승 직전 325파운드(147kg)으로 업데이트되어 커리어 내내 이 정도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오닐 본인이 밝힌 그의 몸무게는 루키 시즌 당시 285파운드, 레이커스에서 첫 우승 당시 345파운드, 두번째 우승 당시 385파운드, 세번째 우승 당시엔 415파운드이다. 이 수치가 맞다면 그는 NBA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400파운드를 넘긴 선수가 된다. 다만 다른 영상에선 본인이 두번째 우승 당시 365파운드, 세번째 우승 당시엔 395파운드였다고 밝혔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불명이다. 오닐은 본인에 대해 다소 과장해 얘기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 확실한 것은 히트 이적 당시에 대해선 일관적으로 고강도 훈련을 통해 325파운드로 감량했다고 밝히고 있다. [33] 그럼에도 체지방률은 10%를 밑돈다. 그야말로 근육덩어리. [34] 엄지 발가락의 경우 어마어마한 스피드의 퍼스트 스텝 → 스핀무브 등으로 이어지는 피벗 플레이에 의해 망가졌다는 설이 있다. [35] 그나마 레이커스 이후 마이애미 시절은 본인이 조연으로서의 역할도 수용하면서 주전으로서 팀의 사상 첫번째 우승에 기여하긴 했다. 하지만 결국 부상과 노쇠화가 심해지고 이후 피닉스 선즈 시절에는 그나마 부상 치료 등을 하면서 올스타에 선정되고 3rd 팀에도 선정되었지만 그 이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시절과 보스턴 셀틱스 시절에는 노쇠화와 부상이 더욱 심해져 소속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36] 기대와는 달리 오닐에게는 그렇게 큰 효과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다. [37] 성공 개수는 5935개로 통산 22위이다. 13818개를 시도한 칼 말론이 통산 1위(말론은 또한 성공 개수도 9787개로 통산 1위이다).